<-- 180 회: 시대의 변화. -->
당소진의 안내로 봉황대와 함께 문주전에 들자 문주전의 양쪽에 앉아 있는 당가의 장로들이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냈다.
(불청객이라 이건가?)
문주전 가운데에는 현 사천당가의 가주인 당월찬(唐月竄)은 반드시 고개를 들어서 봐야 할 정도로 긴 의자에 앉아 봉황대를 내려다보며 굴속에 있는 호랑이처럼 굴었다.
“무림맹에서 왔더냐?”
“!”
아무리 사천당가의 가주라지만 아랫사람 취급하는 게 여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로 왔느냐?”
“배교의 준동과 함께 무림맹은 강호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배교에 대해 여러 가지를 조사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쓰는 추적충이 사천당가에서 나왔다는 증거가 포착되어 사천당가의 공식적인 입장을 들어보러 왔습니다.”
제갈 사혁의 심기가 좋지 못하다는 걸 눈치 챈 초영은 대주를 대신해 가주에게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추적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당월찬은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그래 그건 사천당가에서 만든 것이다.”
인정하는 것치고는 조사의 필요성도 못 느낄 정도로 너무 빨랐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인정했다는 것은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벌레를 만들고 키운 사람은 사천당가에서 파문한지 오래다.”
(파문(破門)? 의절(義絶)이 아니라 파문이라 했나?)
이상했다. 사천당가는 무림세가기 때문에 혈연으로만 가문을 일군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를 거둬들일 필요가 없다. 밑에 있는 사병들이야 파문이라는 말을 쓸 정도도 아니고.
“파문이라 하셨습니까? 대체 누구의 누구를 파문했다는 말입니까?”
“나의 제자다.”
사천당가의 가주가 제자를 들였다는 말에 제갈 사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왜 무림세가는 제자가 없을 것 같았느냐?”
제자를 거둬들일 필요가 없는 무림세가에서 제자를 뒀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럼 그 파문한 제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모른다. 쫓아낸 놈을 어찌 알겠느냐?”
사천당가의 가주는 이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며 정확하게 끊었다. 하지만 사천당가를 둘러싼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제갈 사혁이 잘 못 느꼈을 리 없었다. 타인의 감정을 느낀 것은 단순한 감이 아니다. 깨달음에 의해 발달한 감각과도 같은 것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의례적인 조사라도 하고 가겠습니다.”
“불허한다.”
태도는 당당할지 몰라도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와 반대였다.
“어찌.......”
“그보다 너는 누구냐? 누군데 너의 상관되는 자의 입이 되어 대신 말하느냐? 너의 상관은 벙어리냐?”
“들키면 안 되는 것이라도 감추고 있는 것입니까?”
제갈 사혁이 침묵을 깨고 내뱉은 말은 도발이었다.
“무례한 놈!”
들키면 안 되는 거라도 감추고 있냐며 도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로석에서 젊은 사내가 다가왔다. 제갈 사혁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고 위치상으로는 집안일을 맡고 있는 방계인 듯 했다.
“경홍(瓊洪). 자리에 앉아라. 네가 나설 곳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백부님.”
경홍이라는 자가 제갈 사혁을 노려보며 어쩔 수 없이 물러나자 가주인 당월찬은 조건을 내걸고 조사를 허락했다.
“좋다. 그렇다면 내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조사를 허락한다.”
“가주!”
“아니 될 말이오. 우리 당가는 이 일과 아무 연관도 없지 않소!”
사실 이 문제는 협조적이든 비협조적이든 어느 것 하나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림맹은 그렇다 쳐도 사천당가는 이번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배교와 줄이 닿았다는 출처도 알 수 없는 괴소문이 돌 것이고 또한 무림맹에서 조사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가문의 위신이 떨어졌다. 체면이나 남들의 시선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무림세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무림세가는 눈칫밥 장사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갈 사혁은 제갈세가의 일원으로서 이런 일에 정통했다. 이번 일을 제갈 사혁에게 맡긴 것은 사건을 가지고 온 당사자라서가 아니라 제갈세가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조용히 하시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본인 입으로 본인 제자가 한 일이라 밝혔으니 조사를 받더라도 떳떳하게 받아야 하오.”
하지만 당월찬은 자신의 제자가 저지른 일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며 오히려 당가 청렴함을 위해 정면 돌파를 택했다.
“3일 주겠다. 3일이 지나면 썩 꺼져라.”
무림맹을 배신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데 3일 안에 조사를 끝내라니 정말 기가 막혔다.
(뭐 이쯤 해둘까.)
당월찬의 허락 하에 봉황대는 사천당가를 조사하기 시작했지만 조사 자체가 쉽지 않았다. 뭘 조사를 하려고 해도 전문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 이런 것들에 대해 뭐 좀 아냐?”
조사 대상인 사천당가의 독과 암기 그리고 그것들을 이루는 재료의 쓰임새를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단한 것밖에 모릅니다.”
초영이 간단한 것밖에 모른다고 하자 동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니네하고 나하고 아는 게 거기서 거기네. 그럼 그런 우리가 조사한다고 뭐 나올 것 같냐?”
“그럼 도대체 여길 왜 온 겁니까?”
“조사에 협조하라고 했을 때 조사를 거부하면 뭐가 있는 거고 아무 문제없다는 듯 협조하면 또 뭐가 있는 거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협조하면서 움직임에 제약을 두는 건 뭡니까?”
“그것도 뭐가 있는 거지.”
무조건 뭐가 있다는 두루뭉술한 대답에 동경은 초영을 보며 손가락을 귀에 다 대고 원을 그리며 돌렸다.
“너희는 이래서 안 돼.”
“네?”
“사천당가가 협조를 하던 안하던 조사는 당연한 거다. 왜? 모든 증거가 사천당가를 가리키니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자 초영은 인상을 구겼다.
“사람 조사하라고 이런 안 쓰는 물건 모아다가 전시해 놓은 창고 조사하지 말고 이런 건 우리 집에도 많아. 집안 구석구석 응! 몰라?”
“!”
“!”
초영과 동경은 그제야 진짜 무엇을 조사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이 몇 명이야? 우리가 떡하니 사천당가를 조사한답시고 나타났으니 남의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냐? 입이 근질근질하겠지. 빨리 못가!”
다른 봉황대 대원도 서둘러 두 사람을 따라갔다. 이신과 사공신 두 사람만 제외하고.
“어이 두 신이 이리 와봐?”
“두...... 두 신?”
“사부. 그건 또 뭐에요?”
제갈 사혁은 사천당문의 암기를 하나하나 사공신에게 보여주었다. 사공신의 특기가 바로 암기기 때문이다.
“어떠냐?”
“역시 사천당가입니다. 기회만 되면 한번 써보고 싶을 정도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냐고 묻잖아.”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지는 모르지만 사공신이 아는 한 이렇게 정교한 물건은 대량생산이 불가능했다.
“대충 만들면 가능하겠지만 그래서야 어디 암기라 하겠습니다. 짱돌이나 쇠구슬 던지고 말지.”
“불가능하다?”
“제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제갈 사혁은 사천당가가 배교에 협력하고 있다면 과연 배교가 사천당가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부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천당가의 특기는 독과 암기다. 배교는 독 중의 독이라는 무형독의 제조할 정도다. 게다가 그들도 기본적으로는 암기를 쓰고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사천당가와 가고 있는 길이 비슷했다. 그런데 사천당가에서 키운 추적충을 배교에서 쓰고 있으니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태다.
“사부는 사천당가가 배신했다고 생각해요?”
“뭐?”
“그냥 사부 행동이나 말투가 그렇게 느껴져서요.”
솔직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머릿속으로는 별에 별 생각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정이 어떻고 상황이 어떻고를 수 십 번 가정해도 그 중 대부분은 사천당가의 배신이었다. 그렇게 첫날 조사가 끝이 나고 봉황대는 하인들이나 자는 형편없는 방에서 묵게 됐다.
“문 밖에서 감시도 하네.”
조사구역을 정해놓은 데다가 한술 더 떠 봉황대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밤이면 사병들을 이용해 감시까지 하고 있었다.
일단 제갈 사혁은 방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집안 구석구석 털어낸 거 말해봐.”
집안을 조사하는 척하면서 하인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은 봉황대는 하나하나 꼬이고 꼬인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백씨네가 요즘 쌀값을 빼돌리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씨댁하고 집사가 밤마다 몰래 만나는 것 같다는 말도 있습니다.”
“돌쇠하고 꽃님이하고 눈이 맞았다고 합니다.”
“아가씨가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 별 쓸 때 없는 이야기들뿐이지만 그 중에서도 아가씨라는 호칭에 주목했다.
“아가씨? 어떤 아가씨?”
“그건 모르겠습니다.”
사천당가는 제갈세가와 달리 일가친척이 본가에 모여살기 때문에 가계도가 간단하지 않았다.
“그 아가씨가 누군지 알아와.”
“가능할까요?”
“그게 안 되면 공식 절차인척하고 혼인하지 않은 자식들이 몇인지 알아와.”
일단 지시를 내린 뒤 제갈 사혁은 사천당가로부터 받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이번 일의 주모자거나 용의자라 할 수 있는 가주의 제자 당하령(唐瑕怜)에 대해서 적힌 것이었다.
“제자라면서 당씨네. 멀고 먼 방계인가?”
두루마리를 자세히 읽어본 결과 방계조차 아니었다. 아기였을 때 사천당가 대문에 버려진 것을 길러다가 가주가 성씨와 함께 이름도 함께 지어주었고 한다.
“생판 남이고만.”
============================ 작품 후기 ============================
절제할 수 없는 저도 쓰면서 훌훌 썼던 내용이죠.
확실히 그래프로 따지면 확 올라가는 부분이니까요.
그렇지만 봉명공이 있을 때 정말 이야기 막나갔으니까요.
무림맹도 아니었고 정치적 이해관계도 맞출 필요 없었고.
캐릭터가 자유로웠죠. 지금도 물론 자유롭지만(봉황대라는 직책을 맡은 것치고)
12시에 올리려 했는데 글이 또 제멋대로 막나가서 지우고 다시 쓰느라 시간이 거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