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회: 시대의 변화. -->
생판 남인데 성씨까지 만들어주고 꽤나 귀여움을 받은 것 같지만 그 결과 파문.
“업둥이가 그렇지 뭐..... 핏줄 중심의 집안에서는 특히나.”
“사부. 업둥이가 무슨 뜻이에요?”
“남의 집 앞에 버려진 남의 자식.”
세가라는 곳은 기본적으로 핏줄로 잇고 엮고를 반복하면서 부와 명예를 얻기 때문에 피가 이어지지 않은 사람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당시 나이는 스물이고 지금은 스물여섯 정도도 성별은 사내? 이름은 여자 이름인데 사내놈이었네.)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더 보자면 당가의 암기 제조 비법과 독을 다루는 능력을 이어받지 못한 대신 벌레나 짐승을 잘 다뤄서 그것을 당가의 기술과 융합했다고 한다. 무공실력에 대한 언급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그쪽으로 재능이 없는 듯 했다.
“파문한 이유는 가주와의 갈등이라는데 이게 뭘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파문 된 이유 따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좋지 않은 일이 있었으니 파문되었을 테고 제갈 사혁 입장에서도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수준만 알면 그만이었다. 그래봐야 당사자는 배교에 있고 봉황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추적충 제조에 사천당가가 어느 정도 개입했냐는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대주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초영의 질문에 제갈 사혁은 초영을 빤히 쳐다봤다.
“왜 절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너는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
“지금 봉황대가 처한 상황입니까?”
“그래.”
“저라면 무림맹으로 돌아가 사실 그대로 말할 것입니다.”
사천당가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당사자의 파문. 그래 그것도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해결되는 건 없습니다.”
해결 되는 건 없다.
“사천당가와 무림맹 사이에 염증이 생겨날 뿐이죠. 저라면 파문 제자를 추적할 겁니다.”
“그건 좀 무리지 않나?”
“할 땐 해야죠.”
“!”
파문 제자를 추적한다는 게 사실 현실성은 전혀 없지만 할 땐 해야 한다는 초영의 말에 제갈 사혁은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초영의 의견 잘 들었고 나는 일단 가정사를 파헤쳐 볼까나.)
같은 세가라는 혈족세력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집안 분위기가 그리 썩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알 수 없는 느낌이 추적충과 관련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꼭 알아야 할 것만 같았다.
제갈 사혁은 이런 면에서는 정석을 택했다. 주어진 상황과 논리적 측면에서 풀어내지 못하면 결국 의존하는 건 감이었다.
다음날 사천당가의 가계도를 얻게 된 제갈 사혁은 그 사라진 아가씨라는 여인이 현 가주의 외동딸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내자마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전부 가주와 연관되어있네. 가주의 제자. 가주의 딸.)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바로 이 가주의 딸이라는 대목이다.
가주의 제자. 가주의 딸. 그 제자는 남자고 이쪽은 여자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고만~”
갑자기 동경이 끼어들자 제갈 사혁은 동경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내 추리에 숟가락 올리지 마.”
“대주님. 그런 건 추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현재 가주의 딸이 보이지 않고 있음에도 사천당가는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제갈 사혁은 방에서 나와 천천히 사천당가를 구경했다.
(나한테만 다섯 명이 붙었네. 이래서 인기 있는 남자는 피곤하단 말이야.)
밖으로 나오자마자 움직이는 곳마다 따라 붙는 귀찮은 놈들이 있었다. 집에서도 이렇게 사랑과 관심을 받아 본적 없는데 남의 집에서 이런 사랑과 관심을 받다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소진.”
“그렇지 않아도 만나러 가려했어.”
당소진을 만나자 감시하는 자들의 수가 더욱 더 늘어나 버렸다. 그 중에는 살기도 섞여 있어서 귀엽게 봐줄 수만은 없었다.
“너희 개는 무섭네. 이래서 어디 집에 친구나 초대하겠어.”
“미안해.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당소진은 가주의 조카가 된다. 가주승계가 장자 위주였다면 그의 아버지가 가주가 됐을 테니 이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가 줘야 했다.
“난 개를 정말 싫어하거든. 특히 남의 집 개는 아무한테나 막 짖어서 짜증나.”
“삐딱한 말투는 여전하구나. 도진은 요새 어때?”
“도진? 그게 누구야?”
“네 사촌 말이야.”
사촌이라는 말에 순간 제갈 사혁은 봉명공을 떠올렸다. 사천에서 함께 동행 하던 중 타인의 눈을 의식해 제갈 사혁의 사촌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야. 뭐 어디서든 잘 지내겠지.”
당소진은 봉명공에게 마음이 있었지만 전하지 못했다.
“너는 그 후로 많이 유명해졌더라. 솔직히 놀랐어.”
“내가 그렇지 뭐..... 그런데 이거 예쁘다.”
“응?”
“연인에게 선물해주고 싶을 정도야.”
당소진의 손목에 차고 있는 장신구에 관심이 있는 척 하면서 제갈 사혁은 은근슬쩍 그녀의 맥을 짚었다. 그리고 동시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가주의 외동딸은 어떤 사람이야.”
그리고 말을 꺼냄과 동시 당소진의 눈과 맥박에 집중했다.
“언니는 잠시 휴양 중이야. 워낙 몸이 약해서.”
동문서답(東問西答). 자신은 어떤 사람이냐며 물었지 어디 있냐고 묻진 않았다. 게다가 그것조차 거짓말이다. 맥이 흐트러지고 눈동자가 경직됐다. 그녀의 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왜?”
“오늘 아침에 가계도를 받았는데 명색이 가주의 외동딸인데 한 번도 보지 못해서...... 사천당가의 외동딸은 굉장한 미인이라던데 궁금하잖아.”
그러면서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경박하게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 녀석 안부나 묻자고 찾아 온 거야?”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봉황대의 체류 기간이 궁금한 게 아니라?”
“넌 너무 직설적이야.”
“당가 측에서 비협조적이니 우리도 털어갈 게 없잖아. 그러니 이제 가볼 생각이야.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그러면서 제갈 사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소진과 작별을 고했다. 대충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온 제갈 사혁은 사천당가의 하인들에게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첫날에는 그럭저럭 가주의 딸에 대해서만 알 수 있었을 뿐이지만 이틀째 되는 날 저녁은 무언가 달랐다.
“당하령이 파문 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파문된 이유는 뭐래?”
“모르겠습니다. 그날 밤에 가주전을 뛰쳐나왔는데 하란(蕸蘭)이 붙잡으러 왔다고 합니다.”
“하란이 누구야?”
“가주의 딸입니다.”
역시 남녀문제인가 싶었다.
“그럼 제자는 왜 키운 거야. 이 양반아.”
사실 제갈 사혁은 남녀관계로 초점을 맞춘 순간 당하령이 당하란의 남편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업둥이에게 당씨 성을 주고 제자로 키워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야 뭐 당하령이 따라서 당하란이 가출했다. 이런 식으로 납득하면 되지만 이걸 무림맹에 보고 할 수는 없단 말이지.)
이게 정말 문제는 문제였다.
“초영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검파 멸문 문제도 그렇고 이번 배교 추적충 문제도 그렇고 힘들고 까다로운 문제는 전부 자기가 맡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영 좋지 않았던 제갈 사혁은 방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산책을 했다. 여전히 사천당가의 눈이 따라 붙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당가 밖으로 나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사천당가의 대문을 나서자 당가의 눈도 더 이상 제갈 사혁을 쫓지 않았다.
“?”
그런데 대문을 나서자마자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건 또?)
너무 작위적인 소리였기 때문에 소리의 근원지로 향하자 그곳에는 초영과 봉황대 대원들이 있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냐?”
“사천당가를 출입하는 자들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명령은 내린 적 없는데?”
“때론 시킨 것 그 이상을 해내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초영은 부관으로서 뛰어났다.
“그래서 뭐 찾는 건 있고?”
“아니요. 없습니다. 오늘은 첫날이니 그냥 기본적인 조사만 할 뿐입니다. 다음 날 아니면 그 다음 날에 뭔가 나오겠죠.”
“그럼 수고해.”
이곳은 초영이 알아서 해내니 문제없었다.
화려한 사천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제갈 사혁은 당과를 사서 입에 물었다.
“맛있네.”
“총각. 한개 더 사면 하나는 공짜로 주겠소.”
“하나 더 주세요.”
당과를 산 뒤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지붕 위를 날아다녔다. 제갈 사혁이 경공을 펼치자 그 순간 지붕 위로 또 다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둠을 틈타 당과 꼬치를 던지자 그림자는 작고 얇은 당과 꼬치를 정확하게 검으로 베어냈다.
(제법이네.)
검을 들고 쫓아오자 제갈 사혁은 가던 길을 멈추고 호황을 뽑아 그대로 던졌다. 이번에도 검을 쉽게 쳐낸 그림자는 순식간에 제갈 사혁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혼자만 왔을까?”
제갈 사혁의 기분 나쁜 미소를 본 순간 서늘한 예기가 등 뒤에서 느껴졌고 서둘러 방향을 틀자 등 뒤에서 검이 날아왔다. 아니 정확히는 주인의 손을 떠난 검이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림자는 공중에 떠다니는 검을 상대하면서 다른 손으로 암기를 꺼내 제갈 사혁을 향해 던지려하자 순간 왼팔이 잘려나갔다.
“그러니까. 조심해야지.”
이기어검의 무서운 점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검법을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무엇보다 대단한 건 방어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팔이 베인 순간 참을 수 없는 통증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고 그 순간 오른손 팔목을 기다란 무언가가 꿰뚫었다. 바늘? 아니 그것은 나무로 된 꼬치였다.
“하나 더 사길 정말 잘했어.”
============================ 작품 후기 ============================
무협을 쓰는 게 처음이보다니 제가 쓰는 글이지만 어쩔 때는
글쓴이인 저의 손아귀에 전부 쥐어지지 않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제 연재를 못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이따금씩 캐릭터의 성격이 기억나지 않을 때도 있고 글이 저의 의도와 달라질 때도 있습니다.
무협과 판타지 배경이나 기타 그런 거만 빼면 글이라는 본질은 다를 게 없는데 발상의 전환이 힘드네요.
늘 화산의협에서는 제갈 사혁의 입으로 발상의 전환을 해라 라고 말하면서 정작 제 자신은 그것을 못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