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회: 시대의 변화. -->
손에 묻은 꿀을 핥으면서 천천히 상대에게 다가간 제갈 사혁은 하단 발차기로 상대를 무릎 꿀린 후 무릎으로 얼굴을 후려쳐 기절 시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고 사천당가를 감시 중인 대원들에게 데리고 갔다.
“대주님!”
제갈 사혁이 사람을 질질 끌고 오자 봉황대 대원들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누굽니까?”
“몰라.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자고 있는 애들 빼고 깨어 있는 애들 다 불러와. 너희는 계속 대문 감시하고.”
제갈 사혁은 봉황대를 시켜 낡은 창고 하나를 구한 뒤 자신을 공격했던 자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깨워.”
깨우라는 말에 동경은 머뭇거리더니 그자의 뺨을 툭툭 때렸고 그 모습을 본 구함마(舊艦魔)는 동경의 뒤통수를 때렸다.
“나와.”
구함마와는 동기지만 나이는 다섯 살 이상차이 나기 때문에 동경은 제갈 사혁의 눈치만 본 뒤 물러났다.
“대주님.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깨우는 방법은 참으로 간단했다. 제갈 사혁이 잘라낸 왼팔 상처 부위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놈은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품속을 뒤져보니 그동안 배교의 암살자들에게서 빼앗았던 명패와는 다른 생김새를 지녔지만 똑같은 추적충의 냄새가 났다. 파문된 당하령의 집 근처에서 발견 된 배교의 무사.
당소진에게 그랬던 것처럼 맥을 짚고 그 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그러자 맥박이 요통치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반응을 보이자 제갈 사혁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두렵나?”
금방이라도 맥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고문할 필요도 없겠어.”
공포. 그것은 제갈 사혁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감정이었다. 공포분위기를 잘 이용해 배교의 무사를 흔들자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감시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했지? 그럼 정확히 어떤 걸 감시하는 거지?”
“그런........ 거 없다.”
뻔히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하자 제갈 사혁은 머리 위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지만 놈에게는 이러한 행동 하나하나가 정신적인 압박을 줄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무얼 감시하는 거냐?”
“........”
그 질문에 대답은 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사천당가와 관련된 것인 듯 했다.
“다시 묻겠다.”
그 말과 동시에 머리 위로 올린 손에 힘을 주자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당하란! 당하란이다.”
당하란을 감시하고 있다는 말에 당하란이 당하령을 따라 집을 나갔을 거라 생각했던 제갈 사혁에게는 머리를 둔기로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대주님. 당가의 하인들은 아가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가씨가 보이지 않는다? 제갈 사혁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세가에서 보통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어떠한 상황인가? 같은 오대세가로서 가정하고 생각하자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동경. 구함마.”
“네. 대주님.”
“초영에게 가서 오늘밤 사천당가를 방문한 이가 누구인지 알아가지고 와.”
만약 이 짐작이 틀림없다면 분명 모든 일은 밤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동경과 구함마가 떠나자 제갈 사혁은 배교의 무사를 묶고 있는 끈을 풀어주었다.
“!”
“가도 좋다. 단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라.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도 좋다.”
“..........”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그는 단지 제갈 사혁이 이기어검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겁을 먹었을 뿐 신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제갈 사혁을 공격한 이유도 일정한 수의 병력을 이끌고 사천당가를 찾아왔고 그 병력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너는 배교의 무사가 아니다. 너의 검술은 그들의 방식이 아니다. 내 말이 맞나?”
배교의 무사가 아니라고 말하자 그 순간 호흡이 멈췄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가라. 살려주겠다.”
살려주겠다고 하자 도둑 고양이처럼 경계하던 그는 끝까지 제갈 사혁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창고를 나섰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절대 동정심이나 도덕적 양심에 의해 누구를 살려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손조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자 숨어 있던 자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공신 등과 같이 사파 출신이었던 손조현이었다.
“가라.”
명령이 떨어지자 손조현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동경과 구함마에게 보고를 받은 제갈 사혁은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화가 나거나 기분이 좋지 않아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들의 신분은?”
“청채소(淸採所)의 약사들입니다.”
청채소는 왕약문처럼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희귀한 병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한 밤 중에 그런 보기 드문 자들이 사천당가를 방문한다는 건 제갈 사혁의 짐작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가의 일원이 어느 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대부분 건강문제를 들 수 있지. 게다가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면 십중팔구 병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야.)
제갈 사혁은 곧바로 은밀하게 움직였다. 사천당가의 사병들이 집안 곳곳을 감시하고 있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록 잠행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못하지만 제갈 사혁에게는 잠행보다 뛰어난 것이 있었다. 바로 제압이었다. 반대편 건물에서 사천당가의 별채 지붕까지 경공을 펼쳤다. 그리고 착지한 순간 미세한 소음이 들리자 곧바로 부근에 있던 사천당가의 사병이 알아챘고 그 순간 제갈 사혁은 그 사병이 다가오자 손가락으로 목 정중앙을 찔러 기절시켰다.
어떤 곳에 침입하든 상대를 제압하면 그만이다. 잠행이야 그런 취미가 있는 사람이나 하면 된다. 제갈 사혁은 당하란을 찾기 시작했다. 당하란을 찾으려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하령과 당하란의 관계 때문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
제갈 사혁은 당소진을 보자 급히 기둥 옆으로 몸을 숨겼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당소진은 대야에 뜨거운 물을 담아 들고 다녔다.
대야를 들고 주변을 살피더니 허름한 방안으로 들어갔다. 제갈 사혁은 조용히 다가가 문틈이 생기도록 조용히 문을 열었고 당소진이 다락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다락방?)
당소진이 다락방에 들어간 후 반각이 되어도 나오지 않자 제갈 사혁은 뒤따라 다락방으로 들어갔고 다락방이 절대 다락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밀장소가 있었군.)
“?”
물소리가 들리자 조심스레 소리의 진원지로 향하자 천장 위가 유리로 되어 달빛이 비추는 침소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발가벗은 여인과 당소진이 있었다.
“언니 늦어서 미안해요. 오늘은 저녁에 오기 힘들었어요.”
당소진은 여인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제갈 사혁은 그녀가 당하란이고 현재 의식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주위에는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제갈 사혁은 조용히 기둥을 손으로 두들겼다.
“누구냐!”
누군가의 기척을 느낀 당소진은 서둘러 이불로 당하란의 몸을 가려주었다.
“사혁!”
제갈 사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당소진은 검을 빼들었다. 그 눈동자가 바라보는 것은 절대 친구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넣어둬. 소진. 이기지 못한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소리 지를 거야.”
“그만둬.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나쁜 사람 같잖아.”
그러면서 머리를 긁적인 제갈 사혁은 순간 빈틈이 보이자 재빨리 당소진에게 다가가 검을 빼앗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사천당가가 숨기고 있는 게 뭐야? 파문된 당하령이랑 당하란의 일이 관계가 있으니까 숨기는 거 아니야. 내 말 틀려?”
입을 틀어막았지만 세게 틀어막진 않았기 때문에 당소진은 제갈 사혁의 손바닥을 물었다.
“지금 무림맹은 터지기 일보직전이야. 벌써 정파 내부에서 배신자 색출에 들어갔고 보이지 않는 척출도 많아. 이번 추적충 일로 다음은 사천당가가 될지도 몰라. 가능하면 네가 설명해주었으면 해. 그래야 나도 도울 수 있어.”
제갈 사혁이 조용히 손을 떼자 그 순간 당소진이 제갈 사혁의 다리 사이를 발로 찼다.
“으~ 아오~ 아아~ 야이씨! 하필 거길......”
금강불괴의 몸을 가진다고 해도 절대 수련이 불가능한 그곳을 맞은 제갈 사혁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언니는 알몸이야. 뒤돌아서. 그렇게 아프면 엄마아빠 생각이라도 하면서 울던가.”
정리가 끝난 뒤 당소진은 제갈 사혁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달리 설명할 것은 없었다. 당하령은 가주의 제자였고 당하란은 가주의 외동딸이었다. 하지만 제갈 사혁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하령은 여자야.”
“남자라고 하던데?”
“원래는 여자야. 그래서 이름도 그렇게 지었지만 나중에 사내아이로 키웠어.”
제갈 사혁이 생각했던 당하령과 당하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은 빗나갔지만 여전히 이 문제는 사랑문제였다.
“숙부님은 하령을 제자로 삼았지만 딱 스승과 제자 관계였어. 오히려 숙부님은 하령을 대하는데 냉정하셨어. 늘 하령을 차가운 눈으로 보셨거든. 하지만 하령은 숙부님께 아버지의 사랑을 원했어.”
스승은 사부(師父)라고 한다. 그래서 제갈 사혁도 종종 이신에게 우리아이라며 장난을 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령은 숙부에게 사랑받는 언니를 질투했어. 자신이 친딸이 아니란 걸 알지만 언니를 향한 마음을 접을 수 없었고 끝내는 독을 썼어.”
“독?”
“그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어떤 약초를 써도 해독할 수 없는 독이야. 어쩌면 독이 아닌 다른 거 일 수도 있지만......”
(독이 아니야?)
“잠시 실례.”
독이 아니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이불을 거둬내고 죽은 사람처럼 잠들어 있는 하란의 윗배에 손을 올렸다.
“무슨 짓이야!”
“쉿!”
윗배. 손끝이 가슴에 닿았지만 절대 딴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독이 아니라면 정말 독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갈 사혁은 이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내공을 흘려보내 몸 안을 살폈다. 평소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정신을 잃은 상대에게는 반발력이 생기지 않아 어느 정도 선에서는 가능했다.
“무슨 짓이냐니까!”
[말시키지 마. 집중해야 하니까. 좀 조용히 해.]
시간을 두고 집중하자 금방 이상한 점을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내공이었다.
(내공이 간을 감싸고 있다.)
“이상해.”
이상하다는 말에 당소진은 서둘러 당하란에게 손을 올렸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안 느껴져? 나한테는 되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 내공이 간을 둘러싸고 있잖아.”
“그게 왜?”
그게 왜냐는 말에 제갈 사혁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
“간을 내공으로 감싸서 보호하는 건 우리 사천당가의 비전이야. 내공으로 장기를 보호하고 몸속에 있는 독을 밖으로 배출하는 게 아니라 몸속에 지닌 채 시간을 들여 중화시킴으로서 내성을 가지게 되니까.”
사천당가에게 이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천당가가 아닌 사람에게는 정말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자신의 몸 하나 하나를 세밀하게 조종할 수 있는 제갈 사혁에게는 말이다.
“사천당가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당연히 치료를 못하지.”
“뭐?”
밤마다 의원을 불러도 치료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의원이 환자를 살핀 뒤 이것을 지적해도 사천당가에게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건드리지 않는다.
“정말 이 여자의 몸에 흐르는 내공이 이 여자의 것이라 생각하는 거야?”
“?”
“이 여자의 몸에 흐르는 내공은 이 여자의 것이 아니야. 아마도 당하령의 내공이겠지. 애초부터 독 같은 게 아니었어. 내공이지.”
“하지만 어떻게 그걸 우리가 모를 수 있는데?”
“같은 내공심법을 배울 거 아니야. 같은 뿌리인데 섞여봐야 같은 것밖에 더 나오겠어.”
“그건 불가능해. 같은 내공심법을 배웠다고 해도 사람마다 내공의 성질은.”
“완전히 똑같다면?”
“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장의 유리가 부서지며 사천당가의 사병이 제갈 사혁을 향해 검을 빼들었다.
“미안해. 저 창문은 이 방을 감시하기 위해 있다는 걸 깜빡했어.”
당소진은 크게 당황했지만 제갈 사혁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풀 수 있는 건 전부 풀어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건 대화였다.
============================ 작품 후기 ============================
voiceman : 뭔가 흡인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잘붙잡아주시길~
네. 감사합니다.
봉황대 이야기에 들어와서 여행자 제갈 사혁과 봉황대를 이끄는 제갈 사혁이 확실히 다르다는 건 어제 voiceman님의 댓글을 보고 멀리 갈 필요없이 그 스승편을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성혜의 구세주가 되어주고 결국 성혜는 제갈 사혁에게 반했지만 그 마음만 받으며 떠나죠. 여기엔 사나이의 로망이 있는데 봉황대 편은 제갈 사혁의 로망만 있다는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권력과 야망....
화산의협은 할렘도 없고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주인공의 성공(그냥 처음부터 출세한 놈이라)도 없지만 이 소설의 강점은 절제할 수 없는 편에서도 나왔지만 폭력에 대한 제갈 사혁의 광적인 행동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절제할 수 없는 편이 가장 반응도 좋았고요.
저도 충고를 가슴에 담아 잘 붙잡겠습니다.
PS. 지금 다음편도 쓰고 있습니다. 일단 11시 이전에는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