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185화 (185/262)

<-- 185 회: 강호분란. -->

“왔느냐?”

폐허가 돼버린 곳에 홀로 촛불을 켜놓고 생각에 잠긴 중년의 사내는 조용히 눈을 뜨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향해 외쳤다.

“막주님. 오경(五更)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손이 튀어나와 보따리 하나를 놓고 사라지자 막주라 불린 중년의 사내는 부하가 가지고 온 책자에 손을 올렸다.

“배교. 이게 사령대(死靈隊)의 오경인가. 무림맹이 가지고 있었다고?”

“임무에 투입된 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해 확신한 건 알 수 없지만 제갈 사혁이 무언가 눈치를 채고 오경을 챙긴 것 같습니다.”

제갈 사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는 인상을 구겼다.

“무형독의 제조실패도 그렇고 사령도(死靈刀) 분실도 그렇고 요즘 그 이름이 너무 자주 들리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곧 제거하겠습니다.”

“그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하리라 믿겠다. 그럼 어서 빨리 배극구검을 익힌 자들에게 오경의 정수를 전해주거라. 드디어 배극구검이 온전한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니.”

명을 받은 자는 어둠 속으로 팔만 내밀어 무공서가 담긴 보따리를 가지고 떠났다.

“보고 있소. 사부? 사부는 감히 탐해선 안 되는 것이라 했지만 더 이상 배교를 이어나갈 교주는 없소. 그러니 우리야 말로 배교의 정통 후계자가 아니오? 아직도 내가 과분한 것을 탐한다고 생각 하시오?”

순간 그 질문에 호응이라도 하듯 바람이 불면서 촛불이 꺼졌지만 꺼진 촛불은 이내 누군가가 불을 피운 것처럼 살아났다.

“배교의 모든 것을 복원하는 날. 천중기(擅仲耆). 네놈의 천하도 끝이다.”

바람이 불자 촛불은 더욱 더 맹렬하게 타올랐고 그 사이로 안대를 두른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천당가 급습 당일날 일어난 칠객의 사망은 제갈 사혁 때와는 그 의미가 달랐다.

물론 구마준이 노골적으로 제갈 사혁을 노렸다는 속사정이 있었지만 당시 고작 후기지수 수준이라 평가 받던 제갈 사혁이 구마준을 쓰러트린 것이 세간에 너무 화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는 칠객 전체와 제갈 사혁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 흑사련이나 무림맹은 사사로운 자존심 싸움이라 판단해 개입하지 않았지만 이번 일은 다르다. 배교는 이처럼 민감한 시기에 초지강을 노골적으로 노림으로서 흑사련을 도발했다. 그리고 그 일이 흑사련의 련주인 사지성(士志醒)의 귀에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피곤한 새끼들. 내 남은 임기까지 앞으로 235일 남았고 이제 겨우 새해가 온지 이틀 지났는데 이 지랄이야.”

“임기 핑계를 대신 것 치고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입니다. 련주님.”

“아~ 화천이!”

자신을 무슨 동네 아는 동생처럼 부르자 마화천은 짜증난다는 티를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좀 부르지 마십시오. 본명도 아닌데 왜 자꾸 그렇게 부르는 겁니까. 막말로 내 선배도 아니면서.”

마화천이 집무실로 들어오자 사지성은 자리를 옮겨 마화천과 차를 나눴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은 어때?”

비밀리에 마교를 방문한 마화천은 고향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지금 마시고 있는 유자차가 어쩐지 쓰다고 느꼈다.

“이번에 추백성의 은퇴로 사실상 마교의 우호법이 된 십야성주 망지성은 이번 일을 두고 보자는 식입니다.”

“그 양반. 서생출신이라서 그런지 말 진짜 어렵게 해. 같은 지성인데 나하고는 왜 이렇게 차이 나는 거야. 그래서 그 두고 보자는 게 무슨 의미야? 한번 해보자고? 아니면 뭐 구경하고 있다가 상황 봐서 꿀 빤다고?”

“마교도 좌호법. 그 사람만 안 나서면 일 어렵게 할 거 없잖습니까. 십야성주도 나름 평화주의자이고.”

평화주의자라는 말에 사지성은 마시고 있던 차를 뱉었다.

“마교가 평화주의자면 나는 다음 세상을 구원할 미륵이다~ 어디서 장난질이야.”

마교는 늘 이런 식이었다. 말은 무림맹보다 그럴 듯하게 하면서 하는 행동은 어린아이의 변덕만큼이나 충동적이었다.

“곧 무림맹도 그자를 부를 겁니다.”

그자라는 말에 사지성은 코웃음을 쳤다.

“지랄한다. 걔네는 아직도 그 양반 밀어주네? 요즘 제갈 사혁 제일 잘 나가잖아. 걔를 밀어줘야지. 그 녀석 봐봐. 꼭 젊었을 때 나를 보는 것 같다니까. 왜 무당파에서 화산파 잘난 꼴은 못 보겠데?”

젊었을 때 사지성을 보는 것 같다는 말에 동의는 할 수 없지만 아무튼 상황은 심각했다. 그는 누가 뭐라 해도.

“구관이 명관이라고 검현군이잖습니까? 정파 제일검.”

정파 제일검이라는 말에 사지성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검현군이 나선다는 건 흑사련도 흑도섬을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사대전 때 팔모가지. 날아간 양반이 현역 흉내 내면. 안 되지.”

정사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사지성의 목소리에서는 경박함이 사라졌다.

아직도 그때 일이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흑사련에서 제법 뛰어난 젊은 고수로 인정받으며 정사대전을 누비던 사지성 앞에 펼쳐진 그 지옥도를 말이다.

“그땐 진짜 무슨 용기 똥배짱이었는지 몰라.”

곰방대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뿜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당시 검현군은 왼팔을 잃었고 흑도섬은 죽어가고 있었다. 단 한 사람에게 말이다.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트릴 기세로 명성을 쌓았지만 그의 앞에서는 감히 얼굴을 들고 서 있는 것조차 용서 받을 수 없었다. 고작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부상당한 흑도섬을 데리고 도망치는 게 전부였다.

신화천(神禍川).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 마교 교주 천중기(擅仲耆).

“천중기. 그 양반 얼마나 강해졌지?”

“그 사람이 더 강해질 게 있습니까? 여전하죠.”

여전하다는 말에 사지성은 곰방대 끝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었다.

“그때 끝냈어야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흑도섬과 검현군 두 사람을 상대로 교주도 겨우 서 있었어. 두 사람을 죽여서 이긴 게 아니라..... 세 놈 중에 한 놈만 지놈 다리로 일어날 수 있어서 이긴 거라 한 거야. 내가 그때 조금만 더 용감하거나 조금만 더 무모했었어야 했어.”

그에게는 그게 아직도 한으로 남아 있었다.

“세 사람의 명예를 건 결투였습니다. 누구라도 끼어들 수 없었죠.”

“아니 끼어들었어야 했어. 내가 개새끼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모가지를 비틀어야 했어!”

검현군과 흑도섬은 그 대결로 치유할 수 없는 부상을 입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신화천 그는 멀쩡하게 권좌에 앉아 잘난 듯이 천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련주님. 우리도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됐든 날뛰고 있는 쪽은 배교의 사생아. 배교의 자식이고 배교를 멸문 시킨 건 누가 뭐래도 마교입니다.”

그 말 그대로 지금은 배교가 문파를 일구고 힘을 과시하기 위해 무림맹과 흑사련을 상대로 간을 보고 있지만 전 무림이 기억한다. 배교를 멸문 시킨 곳이 마교라는 사실을 그리고 배교가 언젠가는 마교를 상대로 이빨을 드러낼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가능하면 이래저래 핑계를 대서라도 막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정사대전을........

제갈 사혁은 봉황 대주 사의를 표했고 무림 맹주 판가량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봉황대 대주로는 초영을 추천입니다.”

“그래도 되겠는가?”

초영이 인재라는 건 잘 알지만 지도자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갈 사혁도 잘 알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초영 밖에 없었다.

“저의 빈자리는 내부에서 채워야 합니다.”

지금의 봉황대는 제갈 사혁의 색이 너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 인물을 대주로 내세울 수는 없었다.

“자네의 의견을 따르겠네.”

아무리 제갈 사혁의 부탁이라지만 오대주와 관련된 일을 이렇게 빨리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이 촉박하다는 의미였다.

“자네는 앞으로 무얼 할 건가?”

“뻔하지 않습니까? 전초전을 치룰 생각입니다.”

제갈 사혁은 이미 공표만 나지 않았을 뿐 현 무림의 상황이 정사대전이나 다름없다고 판단했다. 일단 정사대전이 발발하면 출사의 경우 더 이상 자율적으로 임무를 맡지 못한다. 그때부터는 무림맹의 정예로서 상부의 명령에만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출사를 그만둔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땐 봉황 대주가 아닌 제갈 사혁 개인으로서 뵙겠습니다.”

“알겠네.”

무림 맹주 판가량과의 독대를 끝낸 제갈 사혁은 대기하고 있던 초영과 함께 봉황대로 귀환했다. 이미 제갈 사혁이 봉황 대주를 그만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대주님. 우리를 버리시는 겁니까.”

“아직 대주님 밑에서 지도를 받은 지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대주님. 대주님. 하고 매달리니까 나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사내놈들이 매달려봐야. 기분만 나쁘다. 지금 무림의 상황은 생각 그 이상으로 나쁘다. 언제 정사대전이 터질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나나 너희들이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

갑자기 정사대전 이야기를 꺼내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멈추지 않았다. 이 싸늘한 기운을 활활 타오르게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정사대전. 이름만 들어도 정말 가슴이 뛴다. 두렵고 무섭겠지. 하지만 떠올려봐라. 처음 강호인이 되었을 때 너희의 꿈은 무엇이었나? 고작 지역에서 알아주는 무림인이 되고 싶었나? 아니다! 마화천. 검현군. 흑도섬. 십야성주. 그들처럼 이름을 날리는 게 너희의 꿈 아니었다! 정사대전은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다. 드디어 너희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제갈 사혁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야망을 불태웠다.

“적어도 나는 그러기 위해 떠난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해도 좋고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하지만 떠올려라.”

제갈 사혁은 손가락으로 일일이 앞에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무림인이 되기로 마음먹은 꼬마 동경이. 꼬마 초영이. 꼬마 구함마가 사공신이 손조현이 꿈꾸던 미래의 모습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봐라? 그리고 그 꼬마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그게 현재 너희의 위치다. 다음에 만날 때 대등한 관계의 무림인으로서 만나기를 바란다.”

조용히 단상 위에서 내려온 제갈 사혁은 숙소 입구에서 짐을 싸고 기다리는 이신에게로 향했다.

“며칠 안 본 사이에 제법이다. 너.”

이신은 그 동안 봉황대에서 훈련을 하고 청하를 따라 임무를 맡았다. 그래서 그런지 더 이상 1년 전의 아이 같았던 느낌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사부.”

“왜?”

“사부의 그러니까........ 어렸을 때 사부는 지금의 사부한테 뭐라고 했어요?”

제갈 사혁이 봉황대에게 전한 말을 멀리서 다 듣고 있었던 이신은 정말 진지하게 물었다.

“뭘 진지하게 생각하냐? 그냥 생각나는 대로 그럴 뜻하게 내뱉은 말이야. 아무 뜻도 없어.”

“정말요?”

자신의 제자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제갈 사혁은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봤다.

“뭐 그래도 나름 진지하게 생각하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어렸을 때의 자신이라면 지금 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을 거다.

“아저씨는 커서 고작 그거 밖에 안됐어요. 라고 했겠지.”

============================ 작품 후기 ============================

요새는 팍팍 달립니다.

멈출 여유가 없다고 할까요. 지금 쓰지 많으면 이 느낌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무섭습니다.

마지막 대사 사실은 케이블 TV에서 봤습니다.

외국 스포츠 스타의 인터뷰인데.

아마도 자신의 꿈은 아직 멀었다는 의미로 한 말이겠지만 왠지 듣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심하게 쑤셨습니다.

첫 장래 희망을 가졌던 8살의 나에게 한마디 하자면

니가 원하던 경찰은 못됐지만 그래도 이 아저씨는 열심히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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