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회: 강호분란. -->
세 사람은 광동에 도착할 때까지 한숨도 편히 쉬지 못했다. 밤이 되면 세 사람 중 한사람이 보초를 서고 혹시나 해서 보초를 서면 역시나 흑사련 무사들의 습격을 받았다.
운기조식을 하면 머리가 맑아져 잠을 자지 않아도 되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연이은 극한의 싸움은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들었다.
“으악!”
하단 발차기로 상대의 다리를 부러트린 이신은 상대가 쓰러지자 동시에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아~ 하아~”
“수고했어. 신아.”
청하가 어깨를 두들겨주자 이신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괜찮은 척했지만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쉬지 않고 계속되는 싸움은 역시 무리였다. 하지만 그런 싸움 속에서 더 빠른 속도와 강한 힘 그리고 정교한 기술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싸움이 일어나면 이신을 절대 보호해주지 않았다.
이신을 감싸고도는 제갈 사혁에게 이신을 혹독하게 가르칠 기회이기도 했다.
“봐봐. 아까도 주먹 잘 못 쥐었어. 그러니까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가지.”
그리고 지금 이런 힘든 과정이 전부 자신의 밑바탕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신도 묵묵히 따라주었다.
“나 하나 죽이자고 엄청 몰려오네.”
칠객 송수겸 때도 이런 일이 있었지만 그때는 오합지졸들이었고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한명 한명이 검을 쥐는 법 정도는 알고 있는 무림인들이었다.
“광동에만 가면 이런 일 없겠죠?”
“그걸 어떻게 보장해요.”
“사부.”
“............”
모두들 소리만 안 지르고 있지 제갈 사혁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상당히 지친 세 사람은 겨우 다음날 새벽 총 두 번의 습격과 한 번의 매복을 돌파하며 겨우 광동성 흙을 밟을 수 있었다.
“돌아갈 땐 그냥 호남으로 해서 가야지 원.”
광동에 들어온 제갈 사혁은 마차를 타고 함진에게 소개 받은 장원소(匠源所)라는 이름의 가게를 찾았다. 묘효 대사를 찾아가려면 장원소라는 가게를 먼저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계십니까?”
“누구요?”
“여기 오면 묘효 대사님이 계신 곳을 알 수 있다고 해서 소개 받고 왔습니다.”
묘효 대사라는 말에 노인은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나와 제갈 사혁에게 약도를 그려주었다.
“약도를 따라 미곡산 태천사(怠天寺)에 가보시게.”
광동성은 봄 날씨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따듯했지만 미곡산이라는 곳은 같은 광동 하늘 아래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내가 느끼는 이것은 추위인가?”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아요. 사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어머~ 귀신 무서워해요?”
귀신을 무서워 하냐는 청하의 질문에 제갈 사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귀신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귀신이 없다는 건 내가 잘 알아요.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하지만 내 마음 속에 있는 어린 시절 나는 귀신의 존재를 믿으니까. 왜 다들 마음속에 있잖아요. 어렸을 때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말하는 제갈 사혁을 보며 이신과 청하는 같은 생각을 했다.
(말이나 못하면!)
미곡산을 오르고 올라 태천사에 도착하자 세 사람은 때 아닌 진풍경을 보게 됐다. 단체로 낮잠 자는 사람들이었다.
“여기 절 맞죠?”
“분명 절일 텐데.”
절이란 곳은 나태함을 가장 첫 번째로 경계하기 때문에 수행을 해야 할 시간에 낮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너희는 누구냐?”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청하와 이신은 그대로 놀라서 주저앉아 버렸고 제갈 사혁은 미끄러지듯 거리를 떨어져나가며 호황을 칼집에서 반쯤 뽑았다.
“살기가 짙어도 너무 짙도다.”
“............”
“니놈이 함진이 놈이 말한 제갈이냐?”
“묘효 대사님이십니까?”
“그렇다. 그러니 오른손에 쥔 물건에서 손을 떼라. 이놈아. 어디 절에서 칼질이냐? 도호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스승의 이름이 나오자 제갈 사혁은 인상을 구기며 검을 집어넣었다.
분위기가 묘하자 청하는 재빨리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무당 제 1대 제자 청하. 묘효 대사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당 아이가 도를 쥔 걸 보니 망나니 성제 놈 제자로고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청하를 보는 묘효 대사의 눈에는 따스함이 녹아 있었다.
“화산 제 1대 제자 무진. 제갈 사혁입니다.”
“화산 제 2대 제자 이신입니다.”
“인사는 그쯤하면 되었다. 들어와라.”
묘효 대사에게 방을 배정 받은 후 묘효 대사는 본격적으로 제갈 사혁의 상태를 살폈다.
“으음....”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진찰을 받는 제갈 사혁은 불안한 생각이 엄습했다.
“사천당가의 내공이 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여 어떤 형태인가 했는데 좋지 않구나. 좋지 않아. 이런 일이 흔하지도 않거늘.”
“치료는 가능하시겠습니까?”
사실 당가의 내공으로 인해 외공을 잃어버렸지만 그것 말고도 당가의 내공이 다른 성질의 내공과 충돌할 경우 통증으로 인한 불편함이 가장 컸다.
“니놈 몸에 있는 내공은 아주 깨끗하구나. 내공에 성질이 없으니 당가의 내공에 물들게 되면 큰일이다.”
정순한 내공이 장점이었던 제갈 사혁은 묘효 대사의 말을 듣고 술병으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당가의 내공이 자신의 내공을 물들일 거라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빼내지 못하면 깨트려야 하는 법.”
묘효 대사는 목탁을 두들기며 염불을 외웠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음공형태를 띠었다.
“윽!”
몸속을 타고 흐르는 피가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마교 십궁을 돌파할 때 만났던 음공의 고수가 펼쳤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대... 대사....”
[말하지 말거라. 이겨내야 한다.]
제갈 사혁은 묘효 대사를 만나면 당가의 내공을 없앨 수 있는 심법이나 뭐 그런 무공과 관련된 것을 배울 줄 알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치료 방법은 음공의 의한 일종의 공격이었다.
살색이 짙지 않아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음공은 공격 그 자체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완전무결한 것이기 때문에 재아무리 날고 기는 제갈 사혁이라고 정면으로 맞서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없었다.
“커억!”
제갈 사혁이 입에서 피를 쏟아내자 묘효 대사는 하던 일을 멈추고 제갈 사혁을 들어서 방으로 옮겼다.
“사부!”
“갈사 소협!”
이신과 청하는 치료를 받으러 간 제갈 사혁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자 깜짝 놀랐다.
“부엌에 가서 장어를 구워 먹여라.”
“네? 여긴 절인데 어찌.”
“속세를 버린 몸으로서 육식을 하지 않을 뿐 환자들에게까지 육신을 금하진 않는다.”
그 말 그대로 태천사의 부엌은 다른 절의 부엌과 달리 육류는 물론 온갖 재료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장어를 구워서 먹인 후에는 제갈 사혁도 다른 환자들처럼 낮잠을 잤다.
“응!”
낮잠을 자던 제갈 사혁은 갑자기 온 몸에 기가 날뛰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이런 반응은 예전에 지곤이 준 술을 마셨을 때와 비슷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내공이 몸 밖으로 줄줄 샜지만 지금은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몸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사.”
미세한 진동이 온몸을 관통하자 제갈 사혁은 마당 한 가운데에 앉아 염불을 외우고 있는 묘효 대사를 쳐다봤다.
대사의 염불소리에 제갈 사혁처럼 낮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제갈 사혁처럼 기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염불을 다 외운 묘효 대사는 제갈 사혁을 보며 혀를 찼다.
“무슨 놈이 잠귀가 그렇게 밝은 것이냐?”
제갈 사혁은 남들과 달리 단전이 아닌 혈관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 진동의 폭이 커서 깼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대사.”
“일어난 김에 나오거라. 이놈아.”
묘효 대사를 따라 일어나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명상이었다. 명상이야 화산파에서도 늘 하루를 시작할 때 그리고 잠들기 전 하던 것이기 때문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몸 상태가 다른 이들과 다르구나.”
명상 중이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순 없지만 묘효 대사는 명상 중인 제갈 사혁을 보며 그 마음을 꿰뚫어봤다.
“몸 상태로만 보면 환골탈태한 몸과 차이는 없다. 하지만 비슷하게 만들었을 뿐 진정으로 환골탈태한 몸은 아니다.”
“............”
“환골탈태가 꼭 중요한 건 아니지만 할 수 있으면 하는 게 좋지.”
솔직히 말해 현존하는 무림 고수들 중 환골탈태를 한 사람보다 안한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말 그대로 할 수 있으면 하는 게 좋았다.
“한 가지 당부를 하겠다. 환골탈태를 비슷하게 흉내 낸 몸이 되었으니 니놈은 환골탈태를 이루기 힘들 것이다. 그 너머는 더더욱 힘들 것이다.”
제갈 사혁은 더 이상 명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흐트러져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힘들더라도 그것을 이뤄낸다면 일출(日出)보다 밝게 빛이 날 것이다.”
“..........”
“자신을 뛰어넘고 무엇을 얻었느냐?”
최근 얻은 깨달음에 대해 묻자 제갈 사혁은 묘효 대사가 내려놓은 염주를 자신의 의지로 움직였다. 그것을 본 묘효 대사는 제갈 사혁의 능력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깝도다. 아까워. 속세에 찌들지 않았다면 그 재능이 하늘에 닿을 인재인 것을......”
묘효 대사는 아깝다고 말했지만 제갈 사혁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힘과 재능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손에 쥐어 보이기 위해 펼쳐야 한다.
“어찌 되었건 네 놈에게 반야신공(般若神功)을 가르쳐주겠다. 사문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반야신공은 비전이 아니다.”
말 그대로였다. 반야신공은 머리를 영민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무림인들에게 잘 알려진 것이었다. 그 효과를 당사자는 체감할 수 없기 때문에 무공을 익힌 자들 중에서도 이 반야신공의 능력을 아는 자는 드물었다. 그것이 소림사의 비전이 되지 못하고 공개가 된 이유이기도 했다.
가르침은 단순한 암기에서 시작해 그 뜻을 풀이하는 식이었다. 이 방식은 이신을 가르치는 방식과 흡사해서 상당히 재미있었다.
“반야는 열반에 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반야라는 뜻이 무엇이냐면 불교의 발상지인 천축의.........”
밤이 되자 낮잠에서 깬 환자들의 방문도 있었다. 모두들 나이도 직업도 달라서 순수하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있어 큰 즐거움이었다. 특히 세상을 보는 시각이 살아온 생애를 전부 남궁세가에서 보냈던 이신에게는 큰 도움이 돼 스승으로서는 자신이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을 제자가 배울 수 있어 기뻤다.
“그러니까 기술을 걸려면 새끼손가락을 잘 써야 해. 듣고 있지 총각.”
“아~ 어쩐지 장난 좀 치면 무조건 걸리더라.”
“손은 눈보다 빨라야 해. 안 그러면 장난질 치다가 손모가지 날아가.”
특히 제갈 사혁은 개인적으로 아주 유용한 것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갈사 소협은 도박장에서 속임수 쓰려면 얼마든지 쓰면서 왜 배우는 거야?”
일전에 제갈 사혁이 일부러 도박장에서 돈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청하는 지금 저렇게 열정적으로 도박 기술을 배우는 제갈 사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게 사부가 사람을 사귀는 방법이에요.”
하지만 옆에서 늘 봐온 이신은 그 속내가 훤히 보였다. 어수룩한 척하며 사람들과 섞이는 제갈 사혁의 방식을 말이다.
“같은 무림인들한테는 어수룩하게 보이면 목에 칼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 앞에서는 일부러 저렇게 행동하거든요. 사부도 사람인 이상 늘 날만 세울 순 없으니까.”
그건 또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 기루의 시동에게 잘해주었던 모습에서 청하도 제갈 사혁이라는 사람에게 호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늦은 밤 제갈 사혁은 홀로 검을 들고 수련에 임했다. 환골탈태 그리고 그 너머는 더욱 더 힘들 거라는 묘효 대사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물론 대단히 높은 경지임은 틀림없지만 마교 십야성주 추백성에 비하면 한참 멀었다.
“앞으로 더 강한 놈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때가 오면 자신의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잠이 안와요?”
“청하 소저야 말로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낮잠 잤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검을 사납게 휘두르면 귀가 찢어질 것 같아서 잘 수가 있어야죠.”
그렇게 말하면서 청하는 리(唎) 겸도(鉗刀) 101번작. 백해(百解)를 꺼내들었다.
“78번작. 호황과 백해 중 어느 게 더 명검일까요?”
“무리수 둔다. 우리의 실력차이는 이미 드러나지 않았나요?”
“나도 한 사람의 무림인. 언제고 자신이 정점을 찍을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요.”
무림맹의 전통적인 호적수 흑사련. 그리고 그 저력을 알 수 없는 배교. 그리고 무림의 정점이라는 마교.
청하의 말이 맞았다. 언제고 머리 꼭대기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은 강해지겠지만 강해지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마화천. 검현군. 흑도섬. 마교 교주. 배교. 기다려라! 언젠간 그 자리에서 엉덩이를 걷어 차줄 테니까.)
그렇게 달빛을 받으며 두 자루의 검이 맞닿으며 고혼들의 밤을 일깨웠다.
============================ 작품 후기 ============================
생각해봤는데 그냥 일반 노블레스를 유지하겠습니다.
저도 어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제 기준 노블레스 순위를 보니
일반 노블레스는 저와 그리고 되찾은 새벽이라는 작품 두개 뿐이었습니다.
성인 노블레스와 일반 노블레스의 차이가 이렇게 심하다니 저는 그동안 뭣도 모르고 패기를 부렸군요. 하지만 처음 노블레스를 바꿨을 때 일반으로 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에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성인 노블레스에 대한 의견은 잘 기억해두었다가 다음 작품을 쓸 때 그 의견을 받들어(라고 쓰고 저의 사리사욕을 위해!) 성인 노블레스로 쓰겠습니다.
수입과 관련해서는 E북 출판으로 돈 버는 게 목적이지 노블레스로 돈 버는 게 목적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