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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의협-193화 (193/262)

<-- 193 회: 반야신공 -->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서희가 정략결혼을 할 이유는 역시 제갈 사혁과 마찬가지로 없었다.

“여자들은 보통 뭐 좋아하냐?”

뜬금없이 여자들이 좋아하는 걸 묻자 서희는 제갈 사혁에게 안겨와 뺨을 비볐다.

“나 사주려고? 우와~ 우리 사형 최고!”

“까분다.”

제갈 사혁이 정색하며 부정하자 서희는 이마로 제갈 사혁의 코를 들이받았다.

“몰라.”

제갈 사혁은 서희의 귀를 잡아당겼다.

“모른다고! 이거 안 놔?”

“왜 몰라? 넌 여자 아니야.”

“무당파 그 언니 줄 거잖아. 그 언니가 보통 여자냐고!”

유일하게 화산파에서 청하의 실물을 본 서희기 때문에 청하가 보통 여자냐는 말에 공감이 가지만 청하의 선물이라면 벽장 한 가득을 채울 정도로 썩어났다.

“아니야. 다른 사람 줄 거야.”

“뭐야? 어떤 계집이야! 난 다른 사람 언니로 인정 못해!”

“정략결혼을 슬기롭게 해결해야지.”

“슬기롭게?”

“음~ 맞다. 너 아니어도 되겠구나.”

제갈 사혁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서희를 먼지 털어내듯 털어버리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이신이 따라 나서려 하자 이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신. 따라올 필요는 없어. 여기부터는 개인 활동.”

숙소에서 나온 제갈 사혁은 청하의 숙소로 가기 전 부관과 함께 이야기 나누는 성제 진인을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야.”

부관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인지 성제는 평소보다 진지하게 제갈 사혁을 대했다. 성제 진인의 부관되는 자의 표정을 보니 제갈 사혁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령령은 어디에 있습니까?”

“방에 친구들하고 있을 거야. 가봐.”

때문에 제갈 사혁은 일부러 청하의 아명을 거론하며 장난을 쳤고 성제 진인은 체면이 상하지 않는 한도에서 웃으며 넘어갔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성제 진인은 윗사람답게 인사에 답해주지 않은 채 받아넘겼고 제갈 사혁정도 되는 자가 깍듯이 인사를 하자 성제 진인을 보는 부관의 표정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청하의 방에 가자 청하는 숙소 문도 닫지 않은 채 웬 모르는 여협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얼마나 바둑을 열심히 두는지 제갈 사혁이 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기운은 팽팽했고 지금은 흰돌을 쥔 청하의 차례였는지 청하는 바둑통에 손을 넣을랑 말랑하며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갈 사혁은 멋대로 바둑알을 놨고 그 순간 상대 여협은 재빨리 제갈 사혁이 둔 악수를 파악하고 이 대국의 종지부를 찍었다.

“뭐예요!”

청하는 제갈 사혁에게 화를 냈다. 그러자 제갈 사혁은 대국을 둔 여협에게 양해를 구하고 청하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오늘은 저분을 이길 수 있었는데 바둑에 바자도 모르면서!”

“거기에 두면 이기기 힘들었잖아요. 알고 있었어요.”

청하는 제갈 사혁이 바둑을 둘지 않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우리 사문은 바둑을 수업처럼 일정한 시간을 두고 가르치거든요. 이기는 바둑은 둘 수 없지만 어떻게 하면 지는가? 왜 지는가? 정도는 알고 있어요.”

왜 지는지 알기 때문에 제갈 사혁에게 현실의 패배는 없다.

“여자들은 뭐 좋아해요? 선물 좀 골라줘요.”

“누구 선물해주려고요?”

말하는 걸로 봐선 자기에게 사줄 선물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사천당가 딸내미요.”

“사천당가?”

“내가 구해줬더니 사천당가에서 우리 집에 혼담을 넣었어요. 물론 집안에서는 거절했겠죠. 그런데 그건 집안끼리 이야기고 당사자는 다르죠. 당사자가 만나면 이래야겠죠. ‘안타깝게 됐습니다.’라고 말이에요. 마치 집안의 허락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왜 그래야 하는데요?”

“이래야죠. ‘나도 이 결혼 싫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렇지 않아도 이번 추적충과 관련된 일로 당가가 받은 불이익이 엄청난데 내가 여기서 잘못 행동하면 자존심 상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향후 무림맹에서 당가가 소극적으로 행동할 테고 그 소극적인 태도는 고스란히 전력하락이죠.”

이럴 땐 정말이지 딴 사람 같았다.

“갈사 소협.”

“왜요?”

여유 있는 척하는 표정으로 뒤돌아본 순간 제갈 사혁은 더 이상 여유 있는 척하는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약간 힘이 들어간 입맞춤은 달라붙은 입술을 떼는 순간 끈적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제갈 사혁은 멍청한 표정으로 청하를 쳐다봤고 입맞춤의 아쉬움을 되새기고 싶었는지 엄지손가락으로 제갈 사혁의 아랫입술을 만지며 그대로 제갈 사혁의 뺨을 만졌다.

“내가 아는 제갈 사혁이 맞나 확인해봤어요. 그런 멍청한 표정 보이는 것 보니까. 맞네요.”

순수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는 하지만 그의 ‘입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인연을 계산하고 이용하는 그의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수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런 면은 사랑해줄 수 없었다. 이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해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전부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청하’를 지킬 수 있었다. 다른 여인들처럼 나를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

청하는 제갈 사혁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고급 도자기 한 점을 보여주었다.

“이럴 땐 여자가 좋아하는 건 절대 사면 안돼요. 빗도 안 돼. 옷도 안 돼. 비싸면서도 쓰고 버릴 수 있는 거.”

“여자가 좋아하는 건 왜 안 되는데요?”

“그 물건을 쓸 때마다 나를 차버린 멍청한 남자 얼굴이 떠오르는 것만큼 여자에게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으니까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내 선물은요?”

정인(情人)이 정략결혼 상대의 선물을 사려고하는 이 상황에 노골적으로 자신의 선물을 찾는 청하를 보며 제갈 사혁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청하 소저의 선물은 내 벽장에 있어요. 원하면 벽장이라도 뜯어가던가요.”

그렇게 제갈 사혁은 청하의 추천으로 도자기 한 점을 구입했고 다음날이 되자 예상한대로 당하란 본인이 직접 무림맹을 찾아왔다.

무림맹의 화산파 장로인 도오 진인과 사천당가 측 무림맹 장로인 당정치의 합석 아래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눴고 제갈 사혁은 집안의 반대를 그리고 도오 진인은 화산파의 후계자로서 췌서가 불가능함을 설명하며 혼담을 물렀다. 가식적인 언행과 영혼 없는 태도로 마무리한 자리는 제갈 사혁이 고급 도자기를 당하란이 아닌 당정치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끝을 맺었다. 일이 끝난 후 제갈 사혁은 조용히 도오 진인의 서재에서 차를 마셨다.

“넷째 사형이 그러더라. 너 무당파 제자랑 요래요래 한다며?”

도오 진인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조금 가벼웠다. 아무래도 이 자리는 사질인 제갈 사혁을 놀리기 위해 잡은 자리인게 분명했다.

“서희.”

제갈 사혁은 서희의 이름을 말하며 이를 갈았다. 도상에게 넷째 사형이면 서희의 스승인 도상 진인 즉 서희의 스승이었다.

“당가에서 온 혼담을 막은 것도 넷째 사형이었는데 아마 뒤에서 서희가 뭐라고 했겠지. 그래서 청하냐?”

“그건 어떻게 하셨습니까?”

“무림맹에 있는 화산파 제자가 너 뿐이고 무당파의 제자는........ 청하 말고 또 누가 있느냐.”

“!”

그건 그랬다.

“왜 하필 무당파냐~ 그래도 청하면...... 청하면 엄청 좋지. 좋은 여자 골랐네. 너하곤 안 맞지만.”

무당파를 정말로 싫어해서 하는 말이 아니란 것은 알지만 화산파와 무당파의 전통적인 대립은 어쩔 수 없었다.

차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가자 있어야 할 벽장이 보이지 않았다.

“야! 여기 있는 벽장 어디 갔냐?”

“그 언니가 가져갔는데.”

“누구? 청하 소저? 청하 소저가 사람 써서 가져간 거야?”

“그 언니가 가져갔는데.”

“아! 그러니까. 같은 말하지 말고 청하 소저가 사람 써서 가지고 갔냐고?”

서희와 제갈 사혁의 말싸움이 길어질 것 같아서 이신은 조용히 제갈 사혁의 귀에 속삭였다.

“진짜?”

“네.”

“허~ 이 여자. 장군감이네.”

그 무거운 벽장을 직접 뜯어갔다는 말에 제갈 사혁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에 들어 하려나?”

“좋아할 걸. 그렇게 자기 주려고 선물을 쌓아놨는데 누가 싫어하겠어.”

“넌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

무림맹에서 준비한 방에서 지내고 있지만 서희는 잘 때 빼고는 제갈 사혁의 방에 와 있었다.

“몰라. 놀다 갈 거야. 사문에서 날 너무 부려먹어.”

“내 앞에서 부려먹는다는 말을 하다니 우리 서희 다 컸네.”

부려먹기로는 무림맹이 더했다.

“제갈 소협. 실례하겠습니다.”

숙소 관리자인 팔이 방문하자 제갈 사혁은 직접 문을 열어 팔을 맞이해주었다.

“팔 대협. 어쩐 일이십니까?”

“제갈 소협께 이걸 전해 달라 하십니까?”

“누가 말입니까?”

“무림맹 사병 중 하나였는데 급한 물건 같았습니다.”

팔을 통해 제갈 사혁에게 전해진 물건을 서찰이었다. 서찰에는 임무 내용이 적혀 있었고 운남 곤명으로 떠나라는 지시가 있었다. 무림맹 군사 여망상의 인장(印章)과 함께.

“보통 아무리 급해도 이런 식으로 임무를 내리지 않는데....”

하지만 분명 무림맹 군사 여망상의 인장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짐을 챙겼다.

“사형. 어디가?”

“상부에서 임무가 내려졌다.”

임무라는 말에 이신은 의자에 앉아 있다 말고 재빨리 일어났다.

“어디에요?”

“운남. 곤명.”

“운남이면 배교가 있는 곳이잖아요.”

불과 며칠 전까지 정파의 영역이었지만 지금은 배교의 지배 아래 있는 지역이었다.

“넌 따라오지 마. 이번 임무는 혼자가 편할 것 같다.”

보통 이런 건 직접 불러서 설명을 해주는 게 관례인데 서찰이 따로 올 정도면 보통 임무는 아니었다.

제갈 사혁은 그날 오후 운남으로 떠났고 제갈 사혁이 떠나고 몇 시진 후 무림맹 군사 여망상의 인장이 사라지는 소동이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당가의 혼담파기 당하란과 이야기하는 내용은 담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이 참석하고 당사자들끼리 이래이래했다. 정도만 나오는 게 정략결혼 이라는 내용에 맞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뭐 당하란이 제갈 사혁에게 반했네 이 애드립 치는 것도 우습고.

이제 다음편에서 본격적으로 무협 특유의 전개를 펼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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