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195화 (195/262)

<-- 195 회: 반야신공 -->

어둡고 습한 기운이 감도는 절벽 아래를 바라보며 군장(軍裝)을 장비한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산시(散弑)는 언제와도 음습하단 말이야.”

“쓸 때 없는 소리하지 말고 이리 와서 이놈이나 옮겨.”

“이놈은 왜 사지(四肢)가 멀쩡한 겁니까? 보통 산시에 버릴 때는 팔 한쪽을 잘라내잖아요.”

산시라 불리는 절벽 아래에 죄인을 가둘 때는 보통 팔 하나를 잘라내고 버리는 게 보통이었지만 지금 이 두 사람이 버리려 하는 사람은 멀쩡하게 양팔이 붙어있었다.

“얼굴 퍼런 거 안보여?”

죄인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때서야 죄인의 얼굴이 일반적인 사람의 얼굴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왜 이래요?”

“금선사(金線蛇) 독이란다.”

금선사 독이면 결국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뱀독이었다.

“무형독은 포기한데요?”

대화 내용 중 무형독 이야기가 나오는 걸로 봐선 두 사람은 배교 이전인 살막 때부터 조직의 말단인 듯 했다.

“내가 알기로 그거 만들긴 했는데 실패했다고 알고 있을 걸. 제갈 사혁인가?”

“아! 그 유명한 화산망종 말이죠.”

“그놈하고 흑사련의 마화천 때문에 제조 실패했다고 들었어. 그 뒤로 제조과정이 힘들어서 포기했다지. 아마?”

그러면서 두 사람은 죄인의 양팔 양다리를 붙잡고 산시쪽으로 데려가 절벽 아래로 던져버렸다.

“근데 저 놈은 뭐하던 놈이에요?”

“여기는 그놈들 버리는 곳이잖아요.”

“몰라. 젊은 놈 같은데 어디 한가닥하던 문주나 방주 쯤 되겠지.”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보며 두 사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편 산시 절벽 아래로 떨어진 죄인은 떨어지면서 험한 절벽에 세 번이나 부딪혀 몸 여기저기가 엉망이었다.

시신처럼 꼼짝을 하지 않는 몸뚱이가 절벽으로 떨어지자 여기저기서 사람이 나타났다.

“이 놈은 뭔데 두 팔이 멀쩡하지?”

“시체 아니야?”

“움직이진 않지만 숨은 쉬어.”

“피 색깔이 이상한 거보니까. 독에 완전 중독됐어.”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몰려온 사람들은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면서도 공통된 것이 있었는데 팔이 하나가 잘려나갔다는 점이었다.

“곧 염라대왕 신이나 핥겠고만 쯧쯧쯧.....”

“살아도 산 게 아니겠네. 요봐~ 요봐~ 단전이 박살이 났네. 아주 그냥.”

독에 중독됐다는 말에 외부에서 오랜만에 온 신입에게 준 그들의 관심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밤이 되자 누군가 나타나 절벽 아래로 떨어진 신입을 질질 끌고 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어둠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윤곽만으로 봤을 때는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처소로 그를 데려온 뒤 천으로 상처 부위를 감쌌다.

“잘 못 본 게 아니었어. 그분이다. 그분이 확실해.”

노인이 데려온 사람은 배교와 결전을 치루고 행방불명된 제갈 사혁이었다.

의식이 없기 때문인지 절벽 아래로 떨어질 때 생긴 상처는 자율회복 되지 않았다. 그 대신 노인은 할 수 있는 한 제갈 사혁의 치료에 온 신경을 쏟았다.

뱀독에 중독된 제갈 사혁의 몸은 점점 심각해졌다. 숨만 붙어있을 뿐 피부색이 완전 파랗게 변해 겉모습만으로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안 돼! 이분을 이대로 보낼 순 없다.”

노인은 서둘러 제갈 사혁에게 내가요상술을 펼쳤다. 독에 중독된 사람에게 내가요상술은 별 효과가 없지만 해독제는커녕 제대로 된 치료도 할 수 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치료행위였다. 하지만 그 선택은 절묘했다.

제갈 사혁은 흡정마공으로 인해 내공에 민감했고 타인의 내공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들어오자 의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제갈 사혁의 오장육부에 스며든 당가의 내공이 반응했다.

묘효 대사의 음공과 일주천으로 인해 부서져 오장육부에 스며든 당가의 내공은 다시 원래의 구슬형태를 이루더니 금선사 독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몸에 독을 주입하면서 독성과 싸워온 당가의 내공이 부모에서 자식으로 또 그 자식으로 전해지면서 우연히 제갈 사혁의 몸에 자리를 잡게 되고 그 과정에서 금선사 독이 몸에 침입하자 해독작용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제갈 사혁이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었다면 당가의 내공에 저항하려 했겠지만 정신을 잃은 그의 몸은 당가의 내공에 순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완전한 해독을 이루었다.

“으음....”

“정신이 드십니까?”

해독이 되자 정신이든 제갈 사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컥!”

의식을 되찾자마자 몸에 자리한 당가의 내공은 또 다시 말썽을 일으켰고 그 순간 제갈 사혁은 검붉은 피를 뱉었다.

“소협!”

노인은 서둘러 제갈 사혁을 자리에 눕혔다.

“아직 몸을 움직이시면 아니 되십니다. 단전을 잃으셔서 몸이 많이.......”

“당신은 누구?”

“소협께서는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흑운 공주님을 모시던 강하(降下)라는 하오문의 소몰이꾼입니다.”

흑운 공주라면 하오문의 문주이고 소몰이꾼은 보통 하인들의 취업을 관리하는 자로 하오문 내에서는 제법 간부라 할 수 있었다.

“흑운 공주는 지금 어디에 있지?”

노인. 강하가 자신보다 아랫사람이란 인식이 들자 제갈 사혁의 말투가 변했다.

“소인은 이렇게 잡혀서 이 꼴이 됐지만 잘 도망치셨을 겁니다.”

“그보다 내 단전이 어쨌다고?”

단전 이야기가 나오자 강하는 말하기를 망설였다.

“괜찮으니 말해라.”

“소협께서는 단전을 잃으셨습니다. 아마도 배교 놈들이 소협의 단전을.....”

배교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그날 밤 적어도 70명 정도는 죽인 것 같았는데 어떻게 잡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으으.....”

“심신(心身)이 많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소협.”

“그런데 그 팔은 어찌된 것이냐?”

“어이~ 노인장!”

강하의 잃어버린 왼팔에 대해 물어보려는 순간 천막 안으로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저자는!)

제갈 사혁은 중년 남자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지만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뭐야? 독에 중독됐다고 하더니 살아있네? 그보다 노인장 생각은 해보셨수?”

중년 남자가 강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자 강하는 호통을 쳤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건 내줄 수 없다!”

“그럴 줄 알았수.”

중년 남자는 늘 있었던 일처럼 강하의 의견만 듣고 나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제갈 사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한번은 봐준다면 다음부터 이 어르신을 보면 꼭 인사해라. 꼬마야.”

“저.... 저...... 저놈이!”

중년 남자가 천막에서 나가자 제갈 사혁은 강하를 쳐다봤다.

“소협. 죄송합니다.”

“그런데 방금 그 놈은 신의협(新義協) 소속의....”

“아십니까?”

안다기보다는 지난생애에 만난 적이 있었다. 별로 대단할 게 없던 사람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신의협이라는 도장연합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무림맹이나 흑사련을 배신한 자들입니다.”

“배신해?”

“여기 있는 모두가 한때는 단체를 이끌던 자들이었죠.”

무림맹이나 흑사련을 배신했다면 배교의 협력자가 됐다는 뜻인데 그런 자들이 왜 이곳에 있는 걸까? 뭔가 이상했다.

“그럼 중용되어야 하지 않나? 보통은 그렇잖아.”

단체라는 게 다 똑같을 수는 없지만 어느 한쪽을 배신하고 넘어가면 적어도 이전 단체보다는 더 좋은 자리에 앉기 마련이다.

“소협도 잘 아실 겁니다. 무림맹과 흑사련을 탈단한 자들 중 원래 배교에서 떨어져나간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랬다. 분명 멸문한 배교에서 파생된 문파가 있었고 무림 맹주인 판가량의 문파인 비검파도 그중 하나였다.

“저들은 배교 출신이 아닙니다.”

“.......”

그제야 어떤 상황인지 대충 감이 왔다. 저들은 배교의 정통성이 없어서 현재 배교라 주장하는 살막에 버려진 인물들. 동아줄 찾아 왔는데 이미 끈떨어진 신세였다.

“우두머리가 잘려나갔으니 밑에 있는 부하들은 꼼짝 없이 배교의 꼭두각시가 되겠군.”

“바로 그겁니다.”

“그럼 그자의 한쪽 팔이 없는 것과 자네의 팔이 없는 것은 왜지?”

“이곳은 산시라 불리는 절벽입니다. 배교에서는 자신들에게 필요 없는 자의 팔을 잘라서 여기에 버려두죠. 소협도 아마 같은 취급을 받으셨을 겁니다. 다만 단전을 폐하셨으니 수고스럽게 팔을 벨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단전을 폐해서 팔다리를 자르지 않았다고?”

그 말은 즉.

“네. 이곳에 있는 자들은 전부 무공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왜 도망치지 않는 건가?”

이곳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한 단체를 이끌던 방주나 관장들이다. 실력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일반인보다 강한 신체를 지니고 있을 터인데 절벽을 타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됐다.

“산시 절벽을 올라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위로 올라가면 허허벌판입니다. 낮에는 훤히 보여서 도망치자마자 배교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밤에는 이 산시를 이루는 벽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설사 밤에 올라갔다 해도 목숨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중년 남자는 강하에게 무언가를 얻어내려 했지만 제갈 사혁은 그것이 무엇인지까지는 묻지 않았다.

새벽이 되자 제갈 사혁은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당가의 내공이 다시 구슬모양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런 미친!”

“소협.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강하는 제갈 사혁이 단전을 잃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소리를 지른 거라 생각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전이 아니더라도 내공은 사용할 수 있으니 별 문제는 없고 역시 문제는 다시 처음부터 당가의 내공인가.)

단순히 호흡을 통해 일정량의 내공을 모우고 부족하면 흡정마공으로 보충하는 식이기 때문에 단전은 제갈 사혁에게 정말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당가의 내공은 달랐다. 다시 구슬 모양으로 뭉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냥 이유 없이 따끔거렸다.

다음날이 되자 갑자기 수십 명의 사내들이 강하의 천막으로 쳐들어와 제갈 사혁과 강하를 끌고 나갔다.

천막을 나가본 건 처음이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끌려가는 내내 절벽 아래의 생활을 유심히 관찰했다. 배교에 버림받은 이들은 전부 무림인이었고 남자였다. 게다가 모두 팔 한쪽이 똑같이 잘려 있었다.

“무영공공보(無影空空步)를 내놓아라.”

이곳에 있는 무림인들의 수는 총 20여 명.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강하를 끌고 와서 하는 말이 대뜸 무영공공보를 내놓으라는 말이었다.

무영공공보는 제갈 사혁이 알기로 종남파의 보법이었다. 그런데 그걸 강하가 알고 있다니 별 일이었다. 문파의 비전은 아니더라도 무영공공보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무공이기 때문이다.

“절대 줄 수 없다. 이놈아!”

강하의 뜻은 완강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음흉했다.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그 말과 동시에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제갈 사혁을 발로 찼다.

“소협!”

“지난밤 네가 이놈을 치료했다들었다. 자기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이곳에서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답이 나오더구나.”

“무슨 소리냐!”

“네가 저놈을 지키려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두머리는 허리에 찬 검을 빼들어 제갈 사혁의 오른팔에 댔다.

“이놈의 팔을 자르겠다.”

배교에 의해 팔이 잘려나간 20명의 아저씨들 그리고 그 아저씨들의 대표가 대뜸 팔을 자르겠다고 협박하자 제갈 사혁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웃겼다.

“푸하하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웃겼다.

목을 자르겠다도 아니고 팔을 자르겠다니 정신이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이 우두머리란 자도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판걸이.”

“!”

제갈 사혁의 입에서 어떤 이름이 나오자 판걸이라 불린 사내는 얼굴이 빨개졌다.

“니놈이 어떻게 내 이름을!”

진짜 이름이 판걸은 아니지만 진짜 이름에 거의 근접하게 말했다는 것은 달리 생각하면 자신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남해검문(南海劍門) 문주 판상걸(辦上杰). 바로 무림맹을 배신한 정파 중 한 곳이었다.

제갈 사혁은 자신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판걸의 머리를 붙잡았다.

“마침 잘됐네. 여기 배신자들이 다 모였으니까. 한꺼번에 계산하자고.”

“끄아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갈 사혁은 흡정마공으로 판상걸의 내공을 모조리 흡수해버렸다.

“단전을 폐했다 들었는데 어찌?!”

사람이 얼마 없기 때문에 신입이 들어왔다는 것도 그리고 그 신입의 단전이 부서졌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 판상걸을 아무렇지 않게 저세상으로 보낸 건 누가 봐도 무공을 사용한 것이라 봐야했다.

“무영공공보? 원한다면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도 가르쳐주겠다. 단! 내게서 살아남았을 때 이야기지.”

“매.... 매화? 오행매화보!”

“네놈 정체가 뭐냐!”

“제갈 사혁이라고 한다.”

내공에 목말랐던 흡정마공은 판상걸의 내공을 흡수하자마자 평소보다 더 날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화산의협 내내 나오는 말이지만 제갈 사혁은 혈액순환으로 내공을 제어합니다.

단전은 그냥 달려 있으니까 쓰고 있을 뿐 실제로 혈관을 이용한 내공운용을 합니다.

제갈 사혁에게 단전은 그냥 맹장이나 똑같아요.

달려 있으니까. 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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