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회: 정사대전 -->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그날은 매우 어두웠다. 단상 위에서 바라본 광경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 햇볕이 구름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강하는 말했다. 하오문을 공격한 게 정파와 사파의 무림인들이 아닌 배교에 충성을 바친 배신자들이라고 하오문 출신인 강하가 이 자리에서 많은 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무림맹 내부에 팽배하던 불신의 기운이 조금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음은 화산파의 출사. 제갈 사혁의 연설이 있겠소.”
제갈 사혁은 배교에 붙잡혔다가 돌아온 만큼 이번 일을 지원했다. 정사대전은 사기 싸움이었고 지난생애에서도 마찬가지로 대의명분이 무림맹에 있었던 만큼 초반 공세는 무림맹이 압도적이었다.
사천에 모인 약 6천 명 가량의 무림인들을 내려다 본 제갈 사혁은 그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배교에 잡혔을 때 저는 단전을 잃었습니다.”
훗날 누군가는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일을 평가할 때 선도자라고 말할 수도 있고 광대 짓이라 폄하할 수도 있다. 어떠한 평가가 이뤄지든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다.
“하지만 저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저의 한계와 싸워 이겨냈습니다.”
그와 함께 제갈 사혁은 자하신공을 발휘했다.
자색의 기운이 온몸을 감싸며 압도적인 무위를 상징했다.
“무공은 되찾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빼앗긴 나의 자존심과 명예는 아직도 그곳에 있습니다. 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운남이 누구의 땅입니까? 강호 무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일세지웅(一世之雄)의 영웅들이여!”
정의는 누구에게 있는가? 묻는다면 당연 정도무림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천하 4대 조직 모두 정의. 제패. 자유. 부르는 명칭은 다르지만 공통적인 욕망이 있다.
제갈 사혁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무림맹을 선동하며 그들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 순간 구름에 가려진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제갈 사혁은 주먹을 뻗어 떠오르는 태양을 가리켰다.
“절대정의(絶對正義)!”
그리고 6천 명의 무림인이 하나가 되어 외치는 것은
“절대정의!”
“절대정의!”
“절대정의!”
무림맹의 신념이며 광기였다.
연설을 끝내고 내려오는 제갈 사혁은 광기에 휩쓸린 무림인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신념 따위 어찌 되어도 좋았다. 하지만 신념을 가져야만 승리할 수 있다면 가지면 그만이었다.
정사대전이 발발한 이상 무림의 경계는 이 순간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제는 강호무림 그 어디는 전쟁터였다.
“제법이군.”
단상 위에서 내려온 제갈 사혁에게 그가 건네는 첫마디였다.
(검현군.)
“내 제자가 일전에 실례를 저질렀다들었다. 그것에 관해선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검현군은 제갈 사혁의 어깨에 손을 슬쩍 올리고는 단상 위로 올라갔다. 제갈 사혁은 검현군의 뒷모습을 보면서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내 상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껄이는군.”
패배의 상징인 옷소매를 펄럭이며 여전히 정파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검현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당파이고 청하의 사숙이라는 건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시대는 더 이상 당신의 손을 들지 않아. 아니 들어줄 손 따윈 처음부터 없었지만.”
정파 무림의 지배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하지만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4인.
신화천. 검현군. 흑도섬. 마화천의 오랜 체제를 용납할 수 없었다.
마화천과는 한번 싸워 비겼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살의를 가지고 싸워보면 모르는 법이다. 그리고 신화천을 제외하면 정말로 그 행보가 전설적인 흑도섬.
사실 제갈 사혁이 어린나이에 여러 강자들을 꺾는 것을 보고 흔히들 흑도섬과 비교하곤 했다.
제갈 사혁은 지난생애 정사대전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물론 일어난 시기도 다르고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다르지만 적어도 마교와 흑사련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귀주에서 흑사련이 사천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전령의 외침에 판가량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예상대로군.”
흑사련의 사천침입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제갈 사혁이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분명 지난생애와 정사대전이 일어난 시기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흑사련은 상대적으로 명분이 없는 만큼 선제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았다.
지난생애에서의 정사대전은 누가 뭐라 해도 무림맹과 마교 간의 싸움이었다. 그러니 흑사련은 끼어들 명분이 없었고 선제공격을 감행해 두 단체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마교에서 배교로 무림맹의 목표가 바뀌었지만 흑사련은 여전히 명분이 없었다. 배교의 목적이 마교라는 건 강호의 명숙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과거사 같은 거기 때문에 마교의 참전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갈사 소협!”
“청하 소저.”
“아래로 내려갈 생각인가요?”
아래라면 흑사련 쪽을 말하는 거였고 제갈 사혁은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은 오직 그들을 없애기 위해 세워진 연합이죠.”
무림맹의 목적. 지금에 와서는 그다지 언급하는 자가 없지만 무림맹의 목적은 마교척살이었다.
“청해로 갑니다.”
“나도 같이 가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죠.”
정사대전은 무림의 경계가 허물어졌음을 의미하고 군사적 수 싸움도 중요하지만 각 단체가 데리고 있는 고수들의 기세 싸움에서 크게 판가름이 난다.
제 1차 정사대전만 해도 마교 교주 천중기 한 사람에게 흑도섬은 눈을 잃고 검현군은 왼팔을 잃었다. 군사전에서 제갈세가 나아가 무림맹은 총사인 제갈 주원을 잃었다.
그 과정에서 호남이 흑사련의 땅이 되는 것을 막았고 곤륜파의 멸문을 막았지만 인재 손실은 무림맹이 세 조직 중 가장 컸다.
제갈 사혁과 청하 그리고 이신은 곤륜파로 향했다. 물론......
“너도 따라왔냐?”
“내가 왜?”
남궁 미려도 함께.
이렇게 네 사람은 곤륜파가 있는 청해로 향했다. 마교는 선제공격 따윈 하지 않을 테고 곤륜파는 항상 마교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문파의 기세가 흔들려도 선제공격을 할 것이다. 제갈 사혁은 거기에 힘을 실어줄 생각이었다.
“정사대전인데 별거 없네.”
남궁 미려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청하도 동의했다.
정사대전이 일어났지만 사람들의 삶은 변한 게 없었다. 하지만 그도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지금이 무슨 춘추전국시대도 아니고 무림인들이 그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싸우는 것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이 바뀔 리 없었다.
실제 제갈 사혁이 겪은 정사대전도 이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제 청해로 가면 사정은 다르다. 마교는 진짜 군대를 이끌고 청해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신.”
“네. 사부.”
“백부님하고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거야?”
제갈 사혁은 이신과 제갈 민이 자리를 떠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두가지였어요.”
“응?”
“어르신께서 사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양자로 들어오지 않겠냐는 말을 하셨어요.”
“양자? 무슨 양자? 백부의?”
“아니요. 사부의.”
사부라는 호칭은 제갈 사혁 그리고 이신에게 정말 농담이 아니라 그 호칭 그대로 아버지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신과 제갈 사혁의 나이 차이를 떠나 이신에게 제갈 사혁은 단순한 보호자 그 이상이었다.
“일단 그거는 사부가 돌아왔으니 없던 이야기가 됐는데.....”
“됐는데?”
“혼담이 들어왔어요.”
“뭐?”
혼담이 들어왔다는 말에 제일 크게 반응한 건 남궁 미려였다.
“누구의?”
“저요.”
이신이 혼담이 들어왔다는 말에 제갈 사혁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신의 혼담이라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만약에 제갈 사혁이 장문인이라면 이제 이신의 신분은 화산파 1대 제자가 된다. 그렇게 되면 혼담이 와도 별로 이상할 게 없지만 이신은 지금 2대 제자 신분이다.
“어디서?”
“작은 마님이요.”
작은 마님? 제갈 사혁의 백부인 제갈 민이 결혼을 한번 더하지 않는 이상 이신이 그렇게 불러야 할 사람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게 누구야?”
“사부 어머니요.”
제갈 사혁의 어머니라면 그 대상은 안 봐도 뻔했다.
“거지같은 소리 하지 말라. 그래.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그.......”
“잠깐. 그 말은 뭐야 소화랑 이신이랑 결혼 시키겠다는 거 아니야.”
그때 갑자기 남궁 미려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갈사 소협. 어머니도 있었어요? 그리고 소화는 누구에요?”
두 여자가 한꺼번에 질문을 늘어놓자 제갈 사혁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다 필요 없고. 내가 있는 한 그렇게는 안 되니까.”
“갈사 소협! 어머니가 계셨으면 인사를 드리러 가야죠!”
“아~ 나한테 어머니 없으니까. 인사 갈 필요 없어요.”
“야! 너 고모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청하는 제갈 사혁에게 그리고 남궁 미려도 제갈 사혁에게 하지만 제갈 사혁은 이신에게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어서 도저히 이 대화의 끝이 나지 않았다.
제갈 사혁은 일단 두 여자를 진정 시킨 뒤 일의 순서를 가렸다.
“좋아. 그럼 일단 정리를 합시다. 지금 제일 중요한 게 뭐에요?”
“갈사 소협에게 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과 소화라는 여자의 존재.”
“네가 고모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것과 이신의 혼담.”
돌아버릴 것 같았다. 특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청하는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잘 들어요. 두 사람. 우리는 지금 곤륜파로 가는 길이고 정사대전 선언한지 한시진도 안됐어요.”
단순히 그냥 이신과 백부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정도만 알아보려 했는데 지금 일의 우선순위가 엉망이 되어버리자 제갈 사혁은 골머리가 아팠다.
“.........”
“............”
그 후 두 여자는 묵묵히 제갈 사혁의 뒤를 쫓았다.
============================ 작품 후기 ============================
제갈 사혁의 주 목적은 무림지존(지배자란 의미에서)이 되는 게 아니라.
무림지존(천하제일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훗날 그 이름 값으로 부와 명성을 이어가려 하는 거죠.
검현군에 대한 제갈 사혁의 반감을 표현한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검현군이 바로 그 이름값으로 명성을 유지하는 자이기 때문이죠.
제가 자주 언급하지만 제갈 사혁은 기득권 세력이고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하지 더 높은 곳을 가려고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르죠.
제갈 사혁은 힘이 있어야 명성을 유지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갈 사혁에게 검현군은 마교 교주 천중기에게 패배한 패배자이고 자격이 없는 자(패자)가 특권을 누리는 걸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 기준에 청하의 사숙이고 무당파고 이런 건 의미가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