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회: 격돌. -->
“사천에 배교의 본부가 있었는데 정파인들은 왜 그 사실을 몰랐죠? 그리고 이 정도 시설이면 무림맹에서 분명 수상한 움직임을 눈치 챌 텐데.”
청하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제갈 사혁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하오문이 개입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흑운 공주를 쳐다보았다.
제갈 사혁은 이곳을 짓는데 하오문의 협조가 있었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중원이 땅덩어리가 크다지만 이렇게 엄청난 시설을 비밀리에 만들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네. 맞아요. 마교가 배교를 멸문 시키려 할 때 할아버지께서 마교를 돕는 조건으로 이곳을 택하신 이유도 이 성지(聖地) 자체에 관심이 있으셨기 때문이에요.”
전대 하오문 문주였던 소연자는 배교의 성지를 짓는데 일조했고 이곳이 완성되었을 때 그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이곳에 하오문을 위한 마을을 건설하려 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할아버지와 달라요. 저는 이곳을 배교에게 내어줄 생각입니다.”
배교에게 이곳을 내어주겠다고 하자 제갈 사혁은 인상을 구겼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호의를 가지고 내어주는 건 아니니까. 제갈 소협.....”
“?”
“제갈 소협 때문에 정사대전이 일어난 건 아시죠?”
갑자기 정사대전의 원인을 따지자 제갈 사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배교를 이루고 있는 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정통 후계자가 아닙니다.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건 배교의 정통성을 지닌 바로 이곳이에요. 그러니 제갈 소협의 이름으로 이곳을 발견했다고 공표해주세요.”
“!”
“제 목적은 배교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겁니다.”
배교가 움직이면 배교를 없애기 위해 마교가 움직이고 마교가 움직이면 꼬리를 물기 위해 흑사련이 움직인다. 그리고 이곳은 사천의 끝자락.
“무림맹까지 오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겠군.”
흑운공주는 이곳을 최후의 결전지로 만들 생각이었다.
“좋아. 내 이름으로 이곳의 존재를 전 무림에 공표하겠다.”
흑운 공주의 의도를 알아챈 제갈 사혁은 흑운 공주의 계획에 동참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배교가 괴멸하는 것이고 제갈 사혁 아니 전 무림이 원하는 건 확실한 결착(決着)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제갈 사혁이 공식적으로 배교의 성지를 발견했다고 공표하자 사천. 특히 귀곡산맥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귀곡산맥과 마주하고 있는 서장으로 마교인들이 치고 들어왔으며 운남에서 배교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특히 마교는 그 어느 세력보다 강하게 사천을 침입하려 했고 그 중심에 좌호법 우사가 있었다.
전대 하오문 문주 소연자와 그 후계자인 망월 공자를 죽인 우사에게 흑운 공주는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아는 하오문이 마교를 지원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지만 하오문의 장로인 흉조가 뒤에서 몰래 좌호법 우사를 지원하면서 하오문은 문주인 흑운 공주 세력과 장로인 흉조의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이게 다냐?”
뺨에 검상을 입은 채 상대의 목을 꺾어버린 노인은 힘없이 축 늘어진 시체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요즘에는 제대로 된 놈이 하나도 없군. 20년 전에는 잔챙이들도 제법 싸워 볼만 했는데 말이야.”
노인이라 생각할 수 없는 다부진 근육의 거한은 시체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아편을 피우기 시작했다.
“좌호법님.”
좌호법. 강호에서 그 직함을 가진 자는 오직 마교의 좌호법인 우사(右仕) 뿐이었다.
“애송이 놈 부하군. 무슨 일이냐?”
좌호법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우호법 십야성주 망지성의 호위를 맡고 있는 호위대장이었다.
“우호법께서 후퇴하라 전하셨습니다.”
후퇴. 언뜻 명령조 같으나 망지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우사는 아편 곰방대의 끝을 이빨로 물어뜯고 뱉어냈다.
“그 애송이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 이유가 뭐냐?”
“연곡진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게 누구냐?”
우사는 연곡진이라는 듣고 보도 못한 이름이 나오자 인상을 구겼다.
“살막의 막주 그리고 배교의 교주라 칭하는 자입니다.”
배교 그리고 살막의 막주인 연곡진(煙曲溱)이 움직였다는 말에 우사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우사의 웃음소리에 숲을 이루는 나무가 흔들리며 사방에서 나뭇잎이 떨어졌다.
“고작 배교의 망령이 두려워 도망칠 우사가 아니다.”
우사가 허공을 향해 손짓하자 우사의 주위로 수십 명의 무사들이 모여들었다.
“지금부터 너구리 사냥을 시작한다.”
우사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그 앞을 망지성의 호위대장이 막아섰다.
“좌호법. 이러시면 안 됩니다.”
“비켜라. 꼬마. 연곡진과 본인이 만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깟 애송이 목을 비틀어버리면 그만이다.”
“교주님께서 원치 않으십니다.”
“..........”
교주 천중기의 이름이 나오자 우사는 발걸음을 멈췄다.
“말해라. 후퇴 명령을 내린 게 십야성주 애송이가 아니라 교주시냐?”
“우호법께서 명령하셨지만 사실상 교주께서 명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마교의 절대 권력자라지만 그것은 교주를 제외했을 때 이야기였다.
“돌아간다.”
우사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우사를 향해 수십 갈래로 뻗어 나온 검기가 날아왔다.
그 기운을 가장 먼저 느낀 망지성의 호위대장은 우사의 앞을 막아서서 날아오는 검기를 전부 막아냈다.
보통 때였다면 그 정체부터 알아봤을 테지만 좌호법 우사에게 이런 검기를 날릴 수 있는 자는 전 무림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들뿐이다. 그러니 그게 누구든 우사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랜만이군. 아편은 아직도 못 끊었나?”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중년의 사내는 마치 관우를 연상케 하는 수염을 만지며 천천히 걸어왔다.
“너.... 이놈. 흑도섬”
흑도섬(黑道閃). 사파 무림의 전설적인 고수이자 오직 검 하나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
사천 땅에서 흑도섬을 만나자 우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봉사 주제에 잘도 기어 다니는 구나.”
“사지가 멀쩡하다면 나의 검은 꺾이지 않는다.”
마교 교주 천중기에게 한쪽 눈을 빼앗긴 후로 흑도섬은 남은 한쪽 눈마저 천으로 가리고 심안(心眼)을 수련했다.
“애송이. 나와라.”
“좌호법.”
“네가 나설 곳이 아니다.”
우사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내공이 쏟아져 나오자 망지성의 호위대장은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흑도섬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자 우사도 흑도섬의 속도에 맞춰 경공을 펼쳤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우사의 부하들이 우사를 쫓아 이동하자 망지성의 호위대장도 서둘러 그들을 뒤쫓았다.
“쥐새끼 같은 놈!”
경공을 펼쳐 뒤따라온 우사가 주먹을 휘두르자 검으로 방어해냈지만 엄청난 힘에 의해 그만 중심을 잃었다.
흑도섬이 중심을 잃자 우사는 쫓아가서 흑도섬의 귀를 붙잡았다.
“두상치열(頭上齒列)!”
우사는 머리로 흑도섬의 입을 들이 받았다.
정확히 인중을 노린 공격이었다.
흑도섬이 몸을 비틀거리자 우사는 양손을 땅에 파묻었다.
“토성토귀(土星土鬼).”
흙을 암기처럼 날리자 흑도섬은 호신강기(護身罡氣) 토성토귀를 막아냈다.
“호신강기를 익혔군. 제법인데.”
흑사련의 전설적인 검객이라 불리는 흑도섬이지만 생각보다 요령 없는 사람이라서 여태까지 호신강기를 사용할 줄도 몰랐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내공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수라혈천(修羅血天).”
수라혈천을 펼치자 흑도섬은 강력한 찌르기로 장법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의 힘인 기격을 무력화 시켰다.
“수라혈천은 대단한 장법이지만 직접타격이 아닌 장풍처럼 쓰려고 하면 이렇게 위력이 반감돼지.”
우사는 흑도섬이 여유를 부리며 수라혈천의 약점을 읊어대는 꼴이 같잖았다.
“그럼 내 차례군. 십선망겸(十線罔鉗).”
흑도섬이 허공에 대고 검을 휘두르자 우사는 재빨리 흑도섬에게 다가가 주먹을 내질렀고 그 순간 흑도섬의 검 끝에 걸린 기운이 사라졌다.
“십선망겸의 약점은 준비동작이 필요하다는 점이지.”
수라혈천의 약점이 뚫린 것에 대해 되갚아주려는 듯 우사는 십선망겸의 약점을 늘어놓았다.
“잘 아는군.”
그렇게 말하면서 흑도섬은 왼손으로 장타를 때렸다.
“퉤!”
입에서 피를 뱉으며 내공을 끌어올린 우사는 흑도섬을 향해 짙은 살기를 내뿜었다.
“무림제일검 흑도섬의 전설도 오늘로 끝이다.”
“무림제일검은 검현군이 아니었나? 별일이군. 네가 나를 칭찬하다니.”
“죽을 놈한테 그 정도는 해줘야지.”
그 순간 흑도섬은 눈에 씌운 천을 벗기고 외눈을 떴다.
“심안으로 세상만물을 보는 거 아니었나?”
우사가 비아냥거리자 흑도섬은 허세를 부리며 코웃음을 쳤다.
“심안까지 써버리면 아편쟁이한테 너무 미안해서 말이야.”
하지만 흑도섬의 눈앞에 펼쳐진 건 거대한 진기의 소용돌이였다.
“수라파천황(修羅破天荒)!”
내공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회오리.
실로 오랜만이었다. 흑도섬이 검을 두 손으로 쥔 건.
============================ 작품 후기 ============================
이번편은 아저씨들이 나와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아저씨들로 봐주세요.
아저씨들도! 아저씨들도 활약하고 싶은 겁니다! 는 뻥이고요.
마교의 존재감을 어필하려고 하는데 적당한 사람 찾다가 우사가 떠올랐고
이번 기회에 흑도섬도 출연시키자 마음 먹어서 충동적으로 썼습니다.
마교 수뇌부 중에 권법사가 꽤 많이 나오는 건 제갈 사혁에게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솔직히 말해서 그편이 더 폭력적일 것 같아서입니다.
솔직히 검기라는 설정이 필요해서 쓰는 거지만 검기는 반드시 피해야 하잖아요.
(검기에 맞으면 동사무소에 가서 복지카드 발급 받아야 하니까.)
권법사는 때려도 그냥 이 악물고 몇대 쳐 맞으면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