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회: 격돌. -->
봉명공의 존재는 제갈 사혁으로 하여금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봉명공이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그러다보니 밤잠을 설치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네가 왜 거기에 있는 거냐?)
봉명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하물며 지난생애에서 조차 봉명공에 대한 기억은 처음 만났던 사천에서가 전부였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했다.
그의 출생. 그의 신분, 그가 하려는 그 무언가까지 무엇 하나 범상치 않은 것이 없지만 그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제갈 사혁은 신경질을 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자고 있는 이신을 보고 있자니 고민이 없어 보여서 부러웠다.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한잔 마시려는 그때 야심한 시각에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누구냐?”
보통 때라면 적어도 ‘누구세요.’라는 말 정도는 하겠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인지 조그마한 배려조차도 베풀 수 없었다.
“갈사 소협. 나에요. 들어가도 돼요?”
설마하니 이 시간에 청하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제갈 사혁은 얇은 상의 위에 비단 도포를 걸치고 문을 열어주었다.
“무슨 일이에요?”
청하도 제갈 사혁처럼 잘 때 입는 천옷을 입고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있었다.
“신이는요?”
“자고 있어요.”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이 밤중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겠냐만, 무언가(?) 묘하게 기대되는 심리가 작용해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마냥 청하를 따라갔다.
무림맹 수련장 옆에 있는 육각 정자에 앉은 두 사람은 촛불 하나를 두고 달구경을 했다.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내가 무슨 일이 있어요?”
“신이가 요즘 잠을 통 못 잔다고 해서요.”
무엇이든 혼자 해결하려는 제갈 사혁이기 때문에 좀처럼 타인에게 속내를 드러내는 경우는 없었다.
“그냥 생활순서가 엉망이 돼서 그래요.”
그렇게 시치미를 떼면서 제갈 사혁은 어깨에 덮고 있는 도포를 청하에게 덮어주었다.
“고민 있는 거 맞잖아요.”
“아니래도요.”
실없이 웃는 제갈 사혁을 보며 청하는 미간을 구기며 입을 쭉 내밀었다.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요.”
“얼굴만 보면 알 수 있다는 소리까지는 못해도 누가 옆에서 찔러주면 낌새 정도는 눈치 챌 수 있거든요.”
누가 옆에서 찔러주면 알 수 있다는 말에 제갈 사혁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 옆에서 찔러준 사람이 이신이에요?”
“확실한 정보원이잖아요.”
“둘이서 아주 못 당하겠네.”
그러면서 제갈 사혁은 허튼 소리를 늘어놓았다.
“남궁 미려가 이신을 좋아하는데 어쩌죠?”
“그건 알고 있었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그런데 내 여동생도 이신을 좋아한데요.”
“앗~ 그건 좀 위험한데..... 갈사 소협하고 남궁 미려 소저는 남이라고 쳐도 되지만 스승의 누이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두 사람의 대화는 전혀 진지함이라고는 없었다. 청하도 그건 좀 위험하다고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말장난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죠? 위험하죠?”
제갈 사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청하는 제갈 사혁의 코를 잡아당겼다.
“그만하고 이제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해봐요.”
진지하게 이야기 해보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청하를 쳐다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사천에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용화장에서 청하와 헤어지고 사천에서 봉명공을 만나고 이신을 제자로 두고 무림맹에 가는 길에 청하를 만난 것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현재 무엇이 그를 이토록 잠 못 들게 하는지도.
“남자 때문에 못자는 거예요? 그거 좀......”
그러면서 청하는 제갈 사혁을 수상쩍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라고 했던 게 누구죠?”
“그러니까. 봉명공이 문제라는 거네요. 그럼 고민할 필요 없잖아요.”
“네?”
“답은 간단해요. 파계승 봉명공이 무언가를 하려한다면 하겠죠. 그리고 그건 그때 가서 대처하면 되요.”
그때 가서 대처하면 너무 늦을 수도 있었다. 봉명공이 뭘 할 줄 알고 ‘그때’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친구잖아요.”
“...........”
친구? 그래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뭐니 해도 결국에는 늘 함께 다녔으니까.
“친구가 친구에게 해가되는 일을 할 리 없어요. 만약 그 사람이 갈사 소협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려 한다면 답은 간단해요. 당신은 제갈 사혁이잖아요. 자신만만하고 무서울 것 없고 생각도 없고.”
“생각 없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글쎄요.”
그녀의 말대로 고민할 필요 없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결국에 늘 그랬던 것처럼 해오면 된다.
“고민해결~”
제멋대로 고민해결이라고 외치며 청하는 그대로 제갈 사혁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어디 사는 한심한 남자의 고민을 들어주려니까. 피곤하네요.”
그러면서 청하는 제갈 사혁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난 검은 머리가 좋은데.... 머리카락 염색하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요?”
“괜찮아요. 검은 머리가 조금씩 나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환골탈태를 해서 그런지 피부가 완전 아기 피부네요.”
청하는 은근히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아~ 이 도포 촉감도 너무 좋다. 어디서 샀어요?”
“하나 사줘요?”
“아니요. 이거 말고.....”
“이거 말고?”
“신강 어디 약방에서 파는 바르는 약이 피부에 그렇게 좋다는데.”
신강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제갈 사혁은 웃으면 청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마교 교주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사다줄게요.”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가 어느새 청하가 자신의 무릎에 누워 잠을 자자 제갈 사혁은 청하를 안고서 성제 진인의 처소로 향했다.
청하의 방으로 갈 수도 있지만 잠이든 여인을 안고서 방으로 들어갔다간 알게 모르게 뒷말이 나올 수도 있고 또 때가 때인 만큼 그러한 소문이 나면 자칫 무림맹 내부의 기강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뭐야?”
“뭐긴요.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런 상황이죠.”
윗옷을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제갈 사혁과 청하를 안으로 들인 성제 진인은 무당파 도복을 대충 걸치고 제갈 사혁에게 청하를 받아 침대에 눕혔다.
“남자가 말이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떻게 다된 밥인데 떠먹지를 못하냐.”
“.............”
성제 진인의 성격상 그런 농담을 꼭 하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자신의 제자를 두고 그런 농담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제자면 딸이나 마찬가지인데 정말 그런 농담하고 싶으세요? 그러다가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요?”
“너 죽여 버릴 거야.”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여 버린다고 말하자 정말로 웃으며 칼 들고 쫓아 올 것 같아서 등골이 오싹했다.
“배고프지? 사혁군.”
“에? 음.....”
조금 허기가 지긴 하지만 이 시간에 식당이 열었을 리 만무했다.
성제 진인은 제갈 사혁에게 떡을 내줬는데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떡이 딱딱했다. 처음에는 무슨 장난이라도 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제갈 민. 그 양반이 이거 주더라고.”
“백부님이요?”
“생전 말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악수를 하더니 자기가 먹고 있는 떡을 주는 거야. 어지간히 내가 반가웠나봐. 아니면 딴 꿍꿍이가 있던가.”
그러면서 성제 진인은 자고 있는 청하를 쳐다봤다.
“흑도섬이 만났다며?”
아저씨들 특유의 말투로 ‘흑도섬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성제 진인도 흑도섬과 꽤 인연이 있어보였다.
“네. 뭐.... 만났죠.”
“멍청한 놈. 검현군 사제나 흑도섬이나 다 멍청한 놈들이야.”
그러고 보니 나이는 검현군보다 어리지만 성제 진인은 검현군의 사형이었다.
“그게 그 인간이 노리는 건데 말이야.”
“누굴 말하는 거죠?”
“천중기.”
“...........”
마교 교주. 대적할 수 없는 자. 신화천(神話川) 천중기.
“천중기라는 인물에 빠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법이지.”
“그렇게 강합니까?”
“그렇게 강하지는 않지.”
이건 또 무슨 말장난인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안 돼. 검현군에 흑도섬은 천중기를 못 이겨.”
천중기가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검현군과 흑도섬 이 두 사람과 싸워서 유일하게 서있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그 이름만으로 오늘날까지 이 강호무림을 지배해왔다.
“새로운 강자가 필요한 법이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미 한번 패배한 녀석들로는 꺾을 수 없다는 뜻이야. 한쪽 팔을 잃고 한쪽 눈을 잃고.... 그렇게 비참하게 패배한 놈들이 제대로 싸워서 이길 리가 없지.”
성제 진인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 작품 후기 ============================
교정본으로 현재 교체 중입니다.
2권 분량 뿐이라 전체 내용수정은 불가능하지만....
아~ 그리고 출판본에서는 그 뭐냐 청해 길목에서 칠망검 만난 이야기 빼버렸습니다.
3권 준비 할 때도 실제로 몇개의 에피소드가 빠질 것 같습니다.
강철의혼님: 그 플레이 타임이 죽일 놈이죠. 살 빼야 하는데.....
앙투안님: 수정했습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앞으로도 이런 오타와 오기 지적 부탁드리겠습니다. 되도록 그러지 않도록 제가 주의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