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회: 천하제일인 -->
“봉명공.”
그 사이에서 봉명공을 발견한 제갈 사혁이 나지막하게 봉명공의 이름을 부르자 제갈 사혁을 본 봉명공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긴 어떻게?”
봉명공은 설마 제갈 사혁이 여기까지 찾아올 줄 몰랐다는 눈치였고 그때 화연이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왔더구나. 차를 내어줄테니 이야기 나누거라.”
“네. 숙모님.”
방 안으로 들어와 차를 마시며 봉명공을 마주본 제갈 사혁은 그를 위 아래로 훑어봤다.
“좌호법의 부하냐?”
“아니. 틀렸다. 나는 십야성주 망지성의 호위대장이다.”
“역시 그 말투 거짓이었구나.”
제갈 사혁이 아는 봉명공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는 좀 더 여유로웠다.
“아니 봉명공과 주인공이 서로 다를 뿐이다.”
“외숙 되는 사람은 어디에 있냐?”
제갈 사혁은 외숙이라 칭하며 봉명공의 숙부에게 존대하지 않았고 이 이유를 잘 알고 있는 봉명공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럼 여기서 네가 해야 할 일은 없는 것 아니냐?”
“아니.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
“나는 마교를 무너트릴 것이다. 사혁.”
처음으로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었지만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과연 자신이 알던 봉명공인 것인가?
“나는 마교와 소림의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부모를 잃었다. 그래서 나는 사문을 버렸다.”
“파계는 거짓이지 않았나?”
“파계는 거짓이지만 나는 계속 파계승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사문의 법전에 발걸음하지 못하겠지.......”
“마교를 무너트린다고 했는데. 지금은 정사대전 중이다. 그러니 그 일에 나도 협력하겠다.”
“아니. 이건 정파인도 사파인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마교에서 태어난 우리만이 할 수 있다.”
봉명공은 사숙을 죽이고 기사멸조(欺師滅祖)의 죄를 지었다. 이것은 소림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이었고 소림을 이 거짓을 진짜처럼 숨김으로서 봉명공을 흑사련으로 보냈다. 거짓을 보다 완벽하게 사실처럼 보이도록.
“흑사련이 나에게 가진 불신은 상당했고 결국 내 뒷조사가 이뤄졌다. 그리고 거짓으로 꾸민 기사멸조의 죄는 진짜로 여겨졌고 나의 출신성분 또한 드러났다.”
“그래서 얻은 게 무엇이냐?”
“나와 같은 자들......”
“?”
봉명공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고 그 죄가 드러나자 흑사련 내부에서는 봉명공을 중임(重任)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출신이 드러나자 봉명공에게 무리가 생겨났다.
마화천으로 대변되는 마교출신의 사파인들이었다.
“그들과 대업(大業)을 이룰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해서 얻는 게 뭐지?”
“마교 밖의 세상. 마교가 아닌 삶의 소중함. 그리고 절대적 충성 그 부조리함.”
봉명공은 마교출신의 사파인들을 규합해 마교 내부의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얄궂지만 네게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정사대전이 일어난 덕에 사파인들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졌으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제갈 사혁은 숙부가 병으로 죽어 부모의 복수를 할 수 없게 된 봉명공에게서 광기를 느꼈다.
“배교는 마교를 노리고 있다. 무림맹도 흑사련도 서로 반목하고 있지만 마교를 적대시하는 건 동일하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지만 마교를 무너트리기 위한 뜻은 같다. 시대의 칼날은 마교로 향하고 있다.”
흑사련 내부의 마교출신들과 마교에 반감을 가진 마교인들.
“봉명공. 봉명공.”
이름을 되뇌며 그의 또 다른 이름을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주인공. 주인공.’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생애에서 그의 발자취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실패할 것이다.”
“해봐야 아는 법이다.”
제갈 사혁은 이제야 깨달았다. 다시 태어나고 다시 봉명공을 만났지만 그의 미래를 알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결국 쓸려 내려가기 때문이다.
‘너의 실패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고 너의 죽음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 거다.’
미래를 알고 있는 제갈 사혁에게 이 일은 예정된 실패였다. 이렇게 큰일을 도모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 아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마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마교출신인 우리가 이 일을 해야 한다.”
봉명공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마음이었다. 물론 천중기를 꺾어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의 마교인들에게 마교 이외의 것을 보여주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내야 했다.
“곧 배교가 움직일 거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일 벌린 것 치고는 의외로 조용하니까.”
“사천에 배교의 성지가 있다고 공표한 게 너라고 들었다.”
“그 덕에 지금도 사천에 있는 성역을 찾아 놈들이 들러붙긴 하지.”
제갈 사혁은 흑운 공주와 손잡고 배교의 성역을 미끼로 배교를 쓸어버리려 했지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교를 향한 마교의 적대심도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좌호법 우사 이외에 마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설마 마교 내부에서 봉명공이 흑사련과 함께 이런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바깥바람이 동쪽에서 또는 서쪽에서 사정없이 불어대니 배교고 마교고 바깥에 나갈지 말지 창문 너머로 간만 보고 있었다.
“정사대전이 끝나면 어느 한쪽은 무너져야 한다. 그것은 배교가 되어야 하고 내게는 배교가 우선이다. 무림맹이라고 하지 않겠다. 내게로 힘을 모아라. 배교를 친 뒤 생각해보자.”
제갈 사혁은 배교척결이 우선이었다. 자신의 죽음과 관련해서도 배교가 개입을 했고 이번 정사대전 역시 배교로 인해 일어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봉명공의 마교 붕괴 계획이 성공할 리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실수를 했다. ‘배교를 친 뒤 생각해보자.’ 그 말은 봉명공에게 지켜지지 않을 약속처럼 들렸다.
“마교와 배교를 동시에 친다면 생각해보겠다.”
마교와 배교를 동시에 치는 건 힘들었다. 사력을 다해 하나의 단체를 없애도 모자를 판국에 둘을 동시에 치다니 가능할 리 없었다.
“가능할 리 없다.”
“아니..... 배교는 마교에 의해 멸문한 전력이 있고 그 둘은 공멸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그 둘을 함께 친다면 뜻을 모아 무림맹이 아닌 너를 돕겠다.”
어떻게 보면 봉명공의 논리는 가장 확실한 답이었다.
마교와 배교는 물과 기름처럼 양립할 수 없는 단체이고 무림맹과 흑사련은 그들보다는 좀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에 마화천과 일전을 치루지 않았다면 제갈 사혁은 봉명공의 제의를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화천에 의해 깨달았다.
무림맹만 남는 무림도 흑사련만 남는 무림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둘만 남게 되면 결국 둘 하나는 사라지고 그것은 더 이상 무림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마화천은 어쩌면 그걸 위해 자신이 먼저 사혁과의 대결을 제의했던 걸지도 모른다. 승패와 상관없이 제갈 사혁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너는 예전부터 말이 안 통했지만 서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됐구나.”
“실수한 거다. 사혁.”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라. 그렇게 부르라 허락한 적 없다. 인공.”
제갈 사혁은 홀로 문 밖을 나섰고 봉명공의 숙모가 있는 방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차는 잘 마셨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사내아이들은 제 고집을 꺾지 않아. 귀찮구나.”
“안녕히 계십시오.”
마당에서는 봉명공의 부하이자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자들이 제갈 사혁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나이는 대부분 스물 안팎의 젊은 마교인들이었고 제갈 사혁은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건방 떨지 마라. 너희 앞에 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 하느냐?”
그 말과 동시에 땅바닥에 널린 모래나 조약돌이 흔들리며 괴이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나는 제갈 사혁이다. 나는 절대 용서를 모르고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많이 고민했습니다.
봉명공과 제갈 사혁이 만나서 손을 잡고 으싸으싸 힘을 낼지 아니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될 지.
왜 둘이 손을 잡지 않는 거야?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죠.
제갈 사혁은 미래를 알기 때문에 봉명공이 계획하는 일이 하찮게 끝날 것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봉명공은 원수이자 자신의 울분을 토해낼 외숙부가 이미 세상을 떠나고 그로인해 그것을 마교에 퍼부으려 합니다.
봉명공의 말투를 바꾸고 제갈 사혁을 부르는 호칭을 바꾼 건 그런 의도였습니다.
제갈 사혁을 늘 기득권자라고 말씀드렸는데 이 부분에서도 드러납니다.
기득세력은 보통 보수적입니다. 현상유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 세상을 휘어잡는 영웅이 되서 싹 흔들어버리겠다. 이게 아니라 그냥 지금이 좋다. 이거죠. 이 상태(이 시대)에서는 자신이 가장 이득을 많이 보는 위치니까.
그래서 흑사련과 손을 잡고 마교와 배교를 물리쳐 강호가 2강 체제가 되는 것보다 족보도 없는 배교(자신을 죽이기도 한)를 제물로 삼가 무림맹 흑사련 마교 현 3강 체제를 유지하려 하죠.
만약 봉명공의 계획이 성공하면 마교는 종교적 상징성을 잃고 망하는데 그렇게 되면 강호는 무림맹 흑사련 배교가 됩니다.
제갈 사혁 입장에서 배교는 반드시 없애야 하는 단체입니다. 결국 사혁은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그럼 천중기에 대한 적대감은 무엇이냐?
무림인의 습성이죠. 그게 제일 강하니까. 그를 꺾고 싶은 거죠.
천중기 자체를 마교로 대변할 수 있지만 천중기가 없다고 해서 마교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 그것과는 별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