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회: 천하제일인 -->
“거기 있는 애송이는 화산파구나. 화산파의 도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그런데 거기 그 꼬마.”
“!”
이신은 천중기가 자신을 가리키자 마치 꽁꽁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신기하구나. 단전이 활동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끊임없이 일주천을 행하고 있다니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구경 좀 해보고 싶구나.”
천중기가 손을 뻗자 이신의 몸이 공중으로 떴다.
무덕은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공격을 해야 하나? 도대체 누구를?
“뭐하는 거야?”
항상 어떤 일이든 별거 아니라는 듯 상대를 무시하는 말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짜증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목소리가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를 지경이었다.
“사형!”
입구에서 이신이 쓰러트린 흑호의 부하들을 보며 제갈 사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 대단한 놈이라도 쳐들어왔냐?”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무슨 거물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그의 태도는 분명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이형환위(移形換位)에 거의 가까운 수준의 경공을 펼쳐 천중기가 서있는 지붕 위에 안착한 제갈 사혁은 천중기를 한번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주먹을 날렸다.
“어이~ 노인네. 깽판 칠 곳 잘못 찾아왔어.”
제갈 사혁의 주먹에 맞은 상대는 소용돌이에 쓸려간 먼지처럼 날아......... 갔어야 했다.
“오호! 너도 신기하구나.”
“!”
분명 평소의 그림대로라면 자신의 주먹 한방에 나가 떨어져야 하는데 지금 눈앞에 마주보고 있는 노인네는 ‘그냥 주먹에 맞았다.’ 힘에 의해 밀려나거나 쓰러지거나 기절하지도 않은 채 그냥 주먹에 맞았다.
“너도 신기하다만 예의가 없구나. 꼬마야.”
“뭐?”
그 말과 함께 천중기는 제갈 사혁의 복부에 장타를 때려 넣었다.
제갈 사혁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대포처럼 튕겨져 나가 밑에 있는 집 한 채를 무너트리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건물 잔해 아래 깔린 제갈 사혁은 전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
한동안 멍하니 있던 제갈 사혁은 무너진 천장 위에서 건물 잔해가 머리 위로 떨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런 미친!”
사자후(獅子吼)와 같이 내공을 실어 외치자 제갈 사혁의 주위에 있던 건물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제갈 사혁이 서있는 곳에 먼지 하나 남지 않았다.
“야 무덕!”
제갈 사혁이 신경질을 내며 무덕을 부르자 멍하니 이를 지켜보고 있던 무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에..... 네! 사형!”
“저 양반 뭐냐?”
“저도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처음 들어본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데?”
“천중기요.”
“......................”
내심 제갈 사혁은 뭐 얼마나 유명한 놈인가 싶었다. 그런데 무덕을 통해 그 정체를 알게 된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평소의 제갈 사혁이라면 ‘뭐? 저 양반이 천중기였어?’라고 허세를 떨었을지도 모르지만 상대는 하늘이며 동시에 모든 이들을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천하제일인이었다.
“천중기가 혼자 다닌다고?”
“네.”
“여기에 와서 혼자 깽판 친다고?”
“네.”
“..........”
제갈 사혁도 솔직히 화산파의 후계자라는 감투를 뒤집어 쓴 것치고는 아무런 수행원 없이 제자인 이신만 데리고 다닌다. 하지만 설마 마교의 교주씩이나 되는 천중기가 혼자 이곳에 나타나 이 난리를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아.....”
무덕과 이신이 공경에 빠졌을 때 짠~ 하고 나타나 일격에 상대를 쓰러트리려 했던 제갈 사혁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자와 사제 앞에서 멋진 척 좀 해보려 했는데 하필 얻어 걸린 상대가 천중기일 줄이야.
‘이놈의 팔자 더럽게 사납네......’
되는 일도 없고 우연히 얻어 걸리는 것도 다 이런 식이었다.
“하아!”
기합소리와 함께 재빨리 천중기가 있는 지붕 위로 올라온 제갈 사혁은 천중기를 향해 ‘진짜로’ 주먹을 날렸다.
“이번 건 조금 힘들군.”
제갈 사혁의 주먹을 맞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버텼다.
“설마 당신이 여기에 나타날 줄은 몰랐어.”
“꼬마. 이름이 뭐냐?”
“제갈 사혁.”
“......... 우호법을 은퇴시킨 게 너냐?”
우호법이면 십야성주 망지성이지만 여기서 그가 말하는 우호법은 전 십야성주인 추백성이었다.
“니놈한테 져서 은퇴한다고 하던데 정말이냐?”
패배의 쓴잔을 마신 건 오히려 제갈 사혁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추백성은 제갈 사혁에게 지고 은퇴를 한다는 식으로 보고를 올렸고 천중기는 당사자인 제갈 사혁에게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신기한 놈이구나. 단전을 사용하지 않고 무공을 펼치다니.... 게다가 일주천을 밥 먹듯이 하고 말이야. 꼬마야. 전력을 다해라.”
“?”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긴 천중기는 그대로 석벽을 향해 제갈 사혁을 던졌고 제갈 사혁은 석벽에 새겨진 일월신교(日月神敎)의 달 월(月)자의 한 가운데 처박혔다.
“!”
추백성 이후로 이렇게 압도적인 완력을 정면으로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자하신공을 펼쳐라. 꼬마야.”
대놓고 자하신공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는 제갈 사혁으로 하여금 분노를 느끼게 했지만 상대는 중원무림의 절대자였다.
‘자하신공이라.....’
자하신공을 펼치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잠시 고민했고 잠시 후 몸에서 자색 기운이 감돌자 천중기는 지붕에 있는 기와를 발로 찼다.
수십 장의 기와가 날아오자 제갈 사혁은 주먹으로 기와를 전부 쳐냈다.
제갈 사혁이 땅으로 내려오자 천중기는 궁신탄영(弓身彈影)을 펼쳐 순식간에 제갈 사혁과 마주섰다.
“나를 즐겁게 해줘봐라.”
천중기가 주먹을 휘두르자 반보(半步)를 활용해 오른쪽으로 피한 뒤 주먹으로 그의 턱을 올려쳤다. 고개가 뒤로 꺾이자 왼손 주먹을 시작으로 연타공격을 가했다.
“오호~ 제법 주먹이 매섭구나. 흐하하하!”
맞으면서 웃는 그 기괴한 모습은 옆에서 보는 이신과 무덕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르 떨게 만들었다.
‘꼭 한번 당신한테 써보고 싶었어.’
예전부터 제갈 사혁은 천중기를 만나면 꼭 한번 흡정마공의 묘리를 담은 일격을 날리고 싶었다.
주먹으로 단전을 때려 몸속에 있는 내공을 전부 털어 내려하자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
천중기의 단전이 위치한 복부에 흡정마공의 묘리를 접목한 일격을 날리자 단전 밖으로 빠져나갈 것 같았던 천중기의 내공이 전부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딱 반만 빠져나왔다.
천중기의 내공은 제갈 사혁이 일격에 방출해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상대의 내공을 친다. 그것까지 할 줄 아는 구나.”
“!”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하게 꿰뚫어보자 당사자인 제갈 사혁은 깜짝 놀랐다. 반면 천중기는 제갈 사혁이 자신에게 하려 했던 공격 방식이 낯설지 않았다.
제갈 사혁은 흡정마공이라는 무공을 익히면서 흡수하는 방식이 아닌 방출하는 방식을 생각해내 응용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건 남의 머릿속에 똑같이 있기 마련이다.
제갈 사혁처럼 흡정마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천중기 역시 과거에는 제갈 사혁과 같은 생각으로 이러한 공격방식을 연구한 적이 있었다. 우연히 첫 타격을 허용해서 내공의 절반가량이 날아갔지만 다음 타격에서는 방어해낼 자신이 있었다.
“산매지효(山魅地嚆)!”
손뼉으로 밀어내듯 제갈 사혁의 가슴을 때리자 제갈 사혁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푸!”
제갈 사혁이 피를 쏟자 천중기는 깍지를 끼고 그대로 머리를 내려쳤다. 고개가 그대로 숙여졌지만 제갈 사혁의 공격본능은 상상을 초월했다.
깍지를 끼고 머리를 내려쳤음에도 불구하고 천중기의 손목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손아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천중기 팔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런 건 자하신공 이전에 문제였다. 자신이 당하는 순간 방어보다는 공격을 생각하는 다른 걸 떠나서 천중기가 본 제갈 사혁은 진짜배기였다.
“너 정말 대단한 놈이구나.”
천중기는 손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지만 두 팔을 들어 올려 그 힘으로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제갈 사혁을 일으켜 세웠다.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한데.”
“허허~ 요놈 보게.”
천중기의 손목을 놓은 제갈 사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최대한 팔을 넓게 휘둘러 있는 힘껏 천중기의 얼굴을 후려쳤다. 천중기가 뒤에 있는 건물 속에 처박히자 제갈 사혁은 자신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렸다.
천중기의 공격은 정신을 잃게 만들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했다.
“하아아~”
제갈 사혁은 허리에 양손을 대고 자하신공의 내공을 한곳으로 모았다.
“설마 장풍을 쓰시려는 건가?”
제갈 사혁이 장풍을 쓰려하자 무덕은 미간을 찡그렸다.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장풍 계열을 말하라면 단연 빙백신장(氷白神掌)이다.
장풍은 위력은 대단하지만 효율 면에서 그다지 좋다고 볼 수는 없었다. 장풍을 쓸 바에는 지공(指功)을 쓸 정도로 제갈 사혁은 검기를 쏘아대는 것 다음으로 장풍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제갈 사혁이 장풍을 쓴다는 건 그만큼 무언가를 확실히 날려버리고 싶을 때였다.
“자하(紫霞)..........”
준비시간이 길었던 만큼 양손에 쥐어진 자색의 기운이 점점 커지자 천중기가 있는 곳으로 향해 양손을 밀었다.
“대력신장(大力神杖)!”
강대한 기공이 자색의 꼬리를 물고 뻗어나가 폭발하자 제갈 사혁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자하신공을 펼친 순간 장풍의 효율성 따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사형!”
무덕의 외침과 함께 자하대력신장으로 인해 생긴 먼지를 뚫고 천중기가 제갈 사혁의 눈앞에 당도했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근육을 유지하고 있는 천중기는 이마에 피를 흘리며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제갈 사혁을 쳐다봤다.
“정말 대단하구나.”
“...........”
“그리고 아주 마음에 들어.”
천중기는 제갈 사혁이 마음에 들었다. 제갈 사혁은 절대.......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다른 놈들과는 달랐다. 눈앞에 있는 이 꼬마는 자신을 향해 끝없이 살기를 내뿜었다.
“그럼 이제 죽어라.”
천중기가 주먹을 내지르자 제갈 사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머리에서는 천중기와 같이 피가 흘러내렸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은 주먹이고 제갈 사혁 역시 그것을 버텨냈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자하신공을 쓰라고 했으니까.”
자하신공은 신체능력과 무공의 효능을 높이는 대신 내공을 한줌도 남기지 않는 약점이 있다.
처음에 천중기가 제갈 사혁에게 자하신공을 쓰라고 했을 때 제갈 사혁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가 자하신공의 약점을 모를 리 없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그의 의도대로 자하신공을 사용했다.
“제법 똑똑하구나.”
“똑똑하단 말 태어나서 처음 듣는데. 사람 보는 눈이 없나봐?”
눈앞에 있는 상대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 사혁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자하신공을 쓰라고 했던 건 내 능력을 가늠해보기 위해서겠지? 그러니 나를 죽일 리 없지. 당신의 목적은 나를 죽이는 게 아니니까.”
“그래. 내 목적은 너를 죽이는 것도 거기 있는 쓰레기를 없애는 것도 아니지.”
쓰레기라는 말에 제갈 사혁은 쓰러져 있는 흑호를 처음 발견했다.
‘흑호.....’
제갈 사혁을 지나친 천중기는 일월신교라고 쓰인 석벽을 쳐다봤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이곳이 너무 거슬리기 때문이다. 주인의 이름을 탐한 노비 놈들에게 이곳은 너무 과하지.”
천중기가 주먹을 뻗자 무형의 기운이 뻗어나가 일월신교라 쓰인 석벽에 금이 갔다.
‘무형지기!’
무형지기.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신보다 더 능숙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꼬마야. 환골탈태라는 건 어떤 기분이냐?”
천중기는 제갈 사혁이 환골탈태를 거쳤다는 사실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난 한 번도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서 말이다.”
천중기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을지 모르지만 제갈 사혁의 귀에는 ‘나는 그런 것 따윈 필요 없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 작품 후기 ============================
어제 후기를 건너뛰어서 죄송합니다.
이번편은 제갈 사혁과 천중기의 만남 그리고 서로 간보기가 주된 내용입니다.
중간에 천중기도 피를 흘리고 그러는데요.
원래 이제 뭐 상처하나 안생겼다. 이렇게 쓰려다가 그러면 너무 그럴 것 같아서 어느 정도 타협을 했습니다.
천중기의 컨셉은 초기의 제갈 사혁과 비슷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조무래기와 싸웠을 때 한껏 여유부리는 제갈 사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강함의 표현 정도는 사실 추백성보다는 현저히 떨어집니다.
저는 너무 말도 안되는 강함보다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강함이 더 좋더라구요.
쉽게 말해 무형지기 같은 걸로 상대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보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상대의 목숨을 끊는 게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장의 한수보다는 사력을 다한 최후의 일격 같은 느낌이 들어서랄까요....
강철의혼님: 저도 쓰는 내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정리하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끊어냈습니다. 제가 글 쓰는 내공이 부족해 자연스럽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넘어가는 부분에서 제갈 사혁이 탈출을 하고 무림맹에 와서 회의를 하고 무림맹을 주도하고 이런 장면을 넣으면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편 3줄 요약
제갈사혁: 야 얘 누구냐?
무덕: 천중기요.
제갈사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