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회: 허상. -->
무림맹의 승리. 그것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내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무림맹은 배교를 멸문 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거셌다. 서장 지역을 놓고 마교와 싸우던 배교가 서장 지역을 집어삼킨 것이다.
절대 마교가 지지 않을 거라는 가정 하에 마교와 배교의 싸움을 틈타 배교를 멸문 시키려 했던 무림맹에게는 상당한 타격이었다.
배교 멸문에 실패한 무림맹. 무림맹에 의해 반파됐지만 서장 지역을 제패한 배교 그리고 서장을 빼앗긴 마교.
결과적으로 이번 일에 이익을 얻은 쪽은 광서 지역을 놓고 무림맹과 거래를 했던 흑사련이었다. 무림맹 수뇌부는 차후 대책 마련에 들어갔고 무림맹 내부에서는 정사대전 종식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배교멸문을 위해 운남으로 향했던 제갈 사혁은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숙소에 있는 물건을 집어던지며 분풀이를 했다.
“이런 미친 어떻게 마교가 배교한테 밀릴 수 있는 거야!”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연곡진을 도망치도록 유도한 놈들은 분명 마교인이었다. 그런데 마교가 배교에게 밀리다니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젠장!”
“그거 던지지 말아요. 내가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거였죠. 예전엔.....”
옆에서 제갈 사혁의 분풀이를 지켜보고 있던 청하는 사혁이 예쁜 청자를 집어 던지자 미간을 찡그렸다.
“하아.... 하아... 하아......”
있는 대로 성질이란 성질은 다 낸 뒤 자리에 앉은 제갈 사혁은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고 대충 진정이 됐다고 판단한 청하는 제갈 사혁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손을 마주잡아주었다.
“자. 다시 말해 봐요.”
화를 가라앉힌 제갈 사혁은 전후 사정을 청하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마교인이 배교인인 것처럼 변장을 하고 배교 교주를 구했단 말이죠?”
“맞아요. 그리고 그 직후 마교가 배교에게 밀려서 서장을 내어줬다는데 이게 말이나 돼요?”
만약 그곳에서 제갈 사혁이 연곡진의 목을 쳤다면 배교가 서장을 제패했건 말건 교주인 연곡진의 부재로 인해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돼버린다. 그런데 마교가 배교 교주인 연곡진을 돕고 배교와의 전쟁에서 지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좋아요. 좋아요. 그럼 차근차근 생각해봐요.”
청하는 일부러 ‘좋아요. 좋아요.’라고 말을 반복하면서 제갈 사혁이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연곡진을 살려서 이득을 보는 건 누구죠?”
“아무도 없죠. 있다면 배교 자신들.”
“좋아요. 그러면 조금 다르게 물어보죠. 무림맹이 배교 스~ 아니 이것도 아니야. 어떻게 질문을 해야 답이 나오지?”
청하는 혀를 차며 제갈 사혁에게 무언가 이끌어낼 수 있는 질문을 생각해냈다.
“아 그래! 무림맹이 아니라 갈사 소협 개인이 연곡진을 처리하지 못했을 때 이득을 얻는 건 누구죠?”
무림맹이 아닌 제갈 사혁 개인이 연곡진을 처리하지 못했을 때 이득을 얻는 사람.
청하의 그런 질문에 제갈 사혁은 머릿속에 낀 잡념이라는 안개가 하나하나 걷히는 기분을 느꼈다.
무림맹이 배교 멸문에 실패했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없다. 무림은 배교의 멸문을 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제갈 사혁 개인의 실패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있었다.
명실상부 마교를 목표로 하고 있는 배교와 그 뜻이 같으며 제갈 사혁의 다음 행동을 가장 뻔하게 읽을 수 있는 사람.
“봉명공.......”
마교로 침입했을 때 봉명공은 분명 자신의 계획을 밝혔고 그것을 들은 제갈 사혁은 자신의 출신과 명성 그리고 배교의 납치전력까지 이용해 무림맹을 움직여 배교를 멸문 시키려 했다. 그런 그의 생각을 봉명공이 모를 리 없었다.
만약에 정말 이 무림에 연곡진의 생존으로 인해 이득을 얻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마교의 적이 한명이라도 더 있기를 바라는 봉명공일 것이다.
“봉명공이면 그 친구 말하는 거죠?”
“..........”
“그럼 그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에요?”
“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지위나 뭐 그런 거를 통해 마교가 배교에게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수 있나요?”
그건 불가능했다. 봉명공은 그저 망지성의 호위대장일 뿐이니까. 만약 그런 게 가능한 자라면 십야성주인 망지성 나아가 그와 같은 힘을 지닌 좌호법 우사뿐이다.
‘망지성도 같은 편인가?’
망지성이 같은 편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니었다. 백호대주 혜성과의 인연으로 알게 된 망지성은 원래 강호와 인연이 없는 자.
다만 십야성주로서 마교의 호법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할 뿐 실상은 마교가 망하든 말든 그와는 상관없을 것이다. 동기가 없으니 봉명공과 같은 편이 될 가능성은 채 3할도 되지 않았다.
제갈 사혁은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봉명공 정도의 지위라면 그런 건 불가능하죠. 녀석이 하려는 일이 일인 만큼 소림사가 아니고서야 내부에 다른 누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힘들고.”
“그럼 답은 나와 있네요.”
“네?”
“마교가 이상한 거예요.”
마교가 이상하다? 말 자체가 조금 웃기게 들릴 수도 있지만 맞는 말이었다.
마교가 배교에게 패배한 것은 분명 마교가 이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갈 사혁이 처음 참전했을 때 마교의 전력은 결코 배교 따위에게 밀릴 수준이 아니었다.
제갈 사혁이 일궁 성주 번천을 물리치고 그 기세가 올라 신강까지 치고 올라갔지만 마교는 곧바로 정파세력을 몰아냈다. 그 정도로 마교의 힘은 견고했다. 그런데 무림맹과 비교하면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애송이들로 구성된 배교 따위에게 밀려서 서장을 내줬다는 게 어딘가 이상했다.
“일부러 져줘도 될 만한 여유가 없을 텐데....”
그건 또 그랬다. 마교가 배교를 하루아침에 멸문 시킬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서장을 그렇게 쉽게 내줬을 리 없었다. 무림맹만 하더라도 마교와 배교가 싸운다니까. 그 틈을 노려 배교를 공격했을 정도로 배교라는 이름 아래 모인 자들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튼 현재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동의하죠?”
인정하기 싫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제갈 사혁이 나아가 무림맹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럼. 오랜만에 저자거리 어때요?”
“이런 때에요? 무림맹 내부에서는 휴전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이런 때니까 하는 거죠. 휴전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배교멸문이 실패했을 때 다들 예상했잖아요?”
“그렇지만......”
“어차피 이 강호는 아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무림 4단체 체재를 반기지 않아요. 그러니 휴전은 절대 없을 거예요.”
“!”
순간 제갈 사혁은 자신의 속마음을 청하에게 들킨 것 같았다. 3단체 유지. 그것이 제갈 사혁이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청하 소저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네요.”
“령령이 아닌 청하도 이럴 때는 어쩔 수 없는 명문정파의 일원이니까요.”
‘명문정파’ 이 말 역시 평소의 청하라면 하지 않을 말이었지만 청하는 이런 식으로 제갈 사혁의 마음을 풀어주고 있었다. ‘나도 당신과 같은 입장이에요. 그러니 마음 편하게 먹어요.’ 라면서 그에게 휴식을 요구했다.
“그럼 나가죠. 기분이나 풀고 다음을 대비하는 게 좋겠어요. 청하 소저 말대로 휴전은 없을 테니까.”
“잘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령령이라는 이름 말이에요. 가끔 불러도 되죠. 귀여운데.”
“부르면 이거 뽑을 거예요.”
청하는 웃으면서 자신의 무기인 백해를 가리켰다.
한편 배교는 서장 지역을 새로운 근거지로 삼았다.
자칫 무림맹에 의해 본단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졌지만 결과적으로 교주인 연곡진은 그 싸움에서 생존했고 마교와의 전쟁을 위해 전 병력을 투입했던 배교는 별다른 피해 없이 서장을 제패함으로서 다시 강호를 향해 검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막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하지만 마혼십형기의 부작용이 설마 그런 것일 줄은 몰랐구나.”
이 무공을 복원한 주공 역시 연곡진이 같은 내공심법을 익힌 배교 무사들의 내공을 흡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꼭 그 부작용을 해결해내겠습니다.”
사실 주공은 복원 과정에서 자신의 풀이가 틀렸다고만 생각할 뿐 이 무공이 대대로 배교 교주의 혈통을 타고 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물러가거라. 혼자 있고 싶구나.”
“네.”
교주전을 나서던 주공은 교주의 침전을 지키는 경비병을 보더니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경비병과 눈을 마주쳤다.
“처음 보는 자구나.”
자신을 처음 본다는 말에 경비병은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무림맹 산하에 있던 청절문(靑竊門) 출신입니다.”
“그래?”
배교가 몸집을 불리는 과정에서 무림맹과 흑사련의 하부조직에 해당하는 방파를 흡수했기 때문에 실제 배교 내에서 살막 출신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그 방파의 우두머리들을 전부 숙청했기 때문에 반란의 여지는 없지만 그래도 외부인사가 많은 건 사실이었다.
“수고하도록.”
이 상황이 어색하지 않도록 경비병의 어깨를 두들긴 주공은 자신의 침소로 향했다.
“........”
그런데 오늘따라 낯선 자들을 많이 보는 것 같았다. 여기도 저기도 만나는 사람마다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하물며 자신의 침소를 지키는 경비병들조차 처음 보는 자들이었다.
‘도대체 뭐지?’
이상하다고는 느끼지만 막상 나설 수 없었다.
“천주님. 안녕하십니까.”
“박상(剝喪).”
낯선 사람들 속에 있는 것 같았던 주공은 아는 얼굴을 만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더 아름다우십니다.”
“박상도 좋아 보여.”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제 막 교대임무가 끝나서 한잔 하러가거든요.”
“저기 박상.”
“네?”
“아니야. 아무것도......”
주공은 박상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려했지만 주위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
주공과 헤어진 박상은 배교 내부에 자리한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에 들어온 박상은 사람들이 모인 아무 자리에나 앉아 아무에게나 말을 걸었다.
“아이고~ 오늘 교대임무도 이걸로 끝이구나~”
“수고하셨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후배가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주자 박상은 기분 좋게 입안에 털어 넣었다.
“젊은 사람이 주도(酒道)를 아는군.”
“한잔 더 받으시죠.”
젊은 후배가 술을 한잔 더 따라주자 그자의 손목이 드러나며 붉은 문신이 박상의 눈에 들어왔다.
“잠깐 자네. 이게 뭔가?”
그자의 손목을 붙잡아 붉은 문신의 무늬를 확인한 박상은 이내 인상을 구겼다.
“성화(成火)!”
그것은 마교를 상징하는 성화였고 그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가 손으로 박상의 입을 막았다.
“!”
박상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술집 안에 있는 모든 배교의 무사들은 그와 같은 성화를 새기고 있었다. 술집의 주인은 물론이고 청소를 하고 있는 시종조차도.......
박상은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어둠속으로 끌려갔고 박상이 사라지자 술집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 작품 후기 ============================
어제 휴재는 정말 죄송합니다.
원래 연곡진이 도망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려 했는데
지난 번 후기에도 말씀 드렸듯 쓰다보니 연곡진이라는 인물이 도망칠만한 성격이 아니게 되버려서 봉명공을 투입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후에 이야기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휴재를 해야했습니다.
연곡진의 성격 때문에 결국 이야기를 바꾸게 된 건 저의 부족한점이 드러났다고 봐야겠죠.
설마 내가 만든 캐릭터에 끌려가다니.....
어제 한참을 생각하다가 마지막 내용을 생각해냈습니다.
배교는 오합지졸입니다. 살막 출신들은 제대로 된 인물일지 모르나 배교 그 자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정파와 사파의 하부 조직에 해당하는 방파죠.
배교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마교의 무사들과 상대가 될 리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마교가 배교에게 졌다. 라는 이야기를 쓰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만약 배교와 마교의 전쟁과정에서 배교의 무사들이 마교인들로 바꿔치기 당하면?
마교가 전쟁에서 져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