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회: 허상. -->
신강에 들어온 이상 목적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이대로 봉명공의 집으로 가느냐 아니면 흑사련의 무림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행방을 쫓느냐만 남은 셈이었다.
‘감시원으로 붙은 놈을 잡아서 족쳐볼까?’
어차피 신강에 들어온 것으로 1차적인 목적은 달성했으니 여차하면 감시원으로 붙은 마교의 무사를 잡아서 정보를 캐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자중할 필요가 있었다.
객잔에서 하루를 묵은 두 사람은 대외적으로 형제행세를 하며 객잔에 머물었고 감시원으로 붙은 자는 더 이상 제갈 사혁과 이신에게서 수상한 점을 찾지 못했는지 이틀째 되던 날 조용히 사라졌다.
“갔네요.”
“갔구나.”
감시원이 사라지자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객잔 손님을 가장해 움직여 정보를 수집했다.
“요즘 교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구만.”
“자네도 그렇게 느꼈는가?”
“젊은 애들은 이것저것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는가?”
마교 내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자들은 특별히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이지 않았는데 단순한 마교도인 듯 했다.
“주씨 가문에 조카라고 있잖아?”
주씨 가문의 조카. 이는 분명 봉명공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아! 그 우호법님 호위대장말인가?”
“그 사람이 인물이라 하더라고 젊은 애들이 지지하고 있는 세력기반도 만만치 않다는데.”
“주씨 집안이면 대대로 신교 장로를 배출해낸 가문 아닌가?”
봉명공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뒤로 줄곧 나오는 말들은 무슨 무림의 호사가들처럼 누가 누구하고 싸우면 이긴다. 진다. 하는 평범한 이야기였다. 뭘 더 얻어내고 싶어도 이야기의 흐름이 이미 그런 쪽으로 넘어가버려 이 이상 정보를 얻는 힘들었다.
‘봉명공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 기반이라는 게 유일하게 얻어낸 정보인가?’
일전에 봉명공을 만나러 갔을 때 자신에게 살기를 풀풀 날렸던 애송이들을 떠올린 제갈 사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그런 놈들 모아서 일을 도모할 리 없다. 녀석이 하려는 건 마교의 근간을 흔들어놓는 일.’
마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로서의 본질을 없애고 그 정체성을 흔들어 마교를 몰락시키는 게 봉명공의 계획이었고 그런 일은 고작 젊은 놈들 몇 명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마교 출신의 흑사련 놈들을 이용하려는 거냐? 봉명공.’
어쩌면 그들이라면 이번 일을 꾸미기 가장 적합한 상대일지도 모른다. 살아오면서 겪은 마교에 대한 불만과 울분을 표현할 수 있는 자들은 현 무림에서 오직 그들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가장 정당한 투덜거림’ 일지도 모른다.
이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계속 뭔가를 캐내려고 해도 마교 내부에서 젊은 마교인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는 이야기 밖에 들을 수 없었다.
제갈 사혁은 별 영양가 없는 정보 몇 개 얻기 위해 객잔에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봉명공의 저택으로 가서 직접 정보를 얻고자 마음먹었다.
달리 사는 곳을 바꾸지 않았다면 지난 날 숙부의 집이라는 그 저택에 아직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날 밤 제갈 사혁은 어둠을 틈타 은밀하게 움직이고 이신은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으로 가장해 동행했다. 정사대전 이후 강호무림을 휘젓고 다니는 터라 만약 마교로 넘어온 흑사련 측 무림인을 만나면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이신이라면 안전하니까.’
하지만 이신이라면 안전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얼마 가지 못했다. 봉명공의 저택이 위치한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저자거리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이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이신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제갈 사혁은 서둘러 이신을 뒤쫓아 들어갔고 그곳에는.......
“오랜만이네.”
다름 아닌 마화천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들켰네?”
여유 있는 척을 하고 있지만 제갈 사혁은 속이 쓰라렸다.
“전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제갈 사혁. 그리고 그 제갈 사혁이 스물 안쪽에 들인 제자 이신. 설마 이 아이가 무명일 거라 생각하고 저자에 내놓은 거라면....... 판단력 결핍이다.”
별 조건 없이 이신을 놓아준 마화천은 턱을 까닥거리며 제갈 사혁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줬고 마화천을 따라 근처 주루에 들어간 제갈 사혁은 양 옆에 기녀를 끼고 편하지 못한 술자리를 가졌다.
“뭐해? 마셔.”
“무슨 의도냐?”
“그런 거 물어볼 처지가 아닐 텐데? 지금은 내가 조금 더 나은 위치 같은데 아니야?”
조금 더 라면서 손가락으로 그 ‘조금 더’를 표현하는 모습이 보고만 있어도 한 대 치고 싶을 정도로 짜증났지만 그의 말대로 지금은 그가 조금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내가 네 녀석 기분 맞춰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물론 봉명공의 일도 중요하지만 어차피 이왕 이렇게 된 거 한판 거하게 하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쳐버리면 그만이었다.
“아서라. 네가 내 기분을 맞춰주는 게 아니라 내가 네 기분을 맞춰주고 있는 거니까.”
“뭐?”
“나 술 별로 안 좋아해.”
그의 말대로 마화천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기녀들을 물린 뒤 남은 음식을 시원찮게 먹어대는 그를 보며 제갈 사혁은 미간을 찡그렸다.
“거물인 척 여유부리기는.”
“강호 3대 고수 흑도섬 검현군 마화천 모르냐? 내가 아니면 누가 거물이냐?”
“너 이 새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제갈 사혁의 그 말과 동시에 이신은 소지하고 있던 호황을 뽑아 마화천의 목전에 겨눴다.
“제자라는 게 정말 좋구나. 스승과 일심동체(一心同體)야. 나도 제자나 만들어볼까?”
“쓸 때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런 자리를 만든 이유나 말해봐라.”
목에 칼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화천은 젓가락으로 육전을 집어먹는 대범함을 보이며 제갈 사혁을 쳐다봤다.
“그거 아냐? 네 행동이 눈에 뻔히 보인다는 거.”
“.......”
“배교와 결판을 내지 못하면 바로 이곳으로 올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어. 암~ 그 정도는 제갈 사혁을 아는 누군가라면 전부 예상 가능한 범주겠지.”
하려는 말이 있는데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 같아서 듣기 뭐했지만 상대는 마화천이었다. 쓸 때 없는 말을 늘어놓을 녀석이 아니었다.
“무림 3대 세력을 유지하려는 게 네 목적이 듯 나도 무림 3대 세력을 유지하는 게 목적이다.”
마화천은 제갈 사혁과 일전을 치루기 전 이런 말을 했다.
이 무림에 무림맹만 남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거기에 제갈 사혁은 말했다. 싸울 상대가 없으면 농사나 짓겠다고.
그건 정말 농담이 아니다. 검을 들고 귀신과도 같은 경공을 펼치며 중원을 떠돌아다니는 것. 그것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이 강호에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이 시대를 유지할 무림 3대 세력이 존재해야만 했다.
뜻은 같았다. 다만 제갈 사혁은 배교를 없애려 했고 마화천은 마교를 없애려 했을 뿐이었다.
“내가 마교에 있을 때 내게는 자유의지가 없었다. 개인의 생각따윈 중요하지 않았고 개인은 항상 전체를 위해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세상을 알게 되고 자유의지라는 걸 가지게 되었다.”
마화천이 마교를 배신한 이유는 지난번 무형독 사건 때 지겹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마교는 잘못 되었다. 세상을 알게 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을 알고 나서 다시 마교로 들어왔을 때 나는 깨달았다.”
“뭐를?”
“인공은 실패한다.”
봉명공의 계획이 실패한다는 건 제갈 사혁도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마화천과 다른 점이라면 제갈 사혁은 지난생애를 겪어본 토대로 예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고 마화천은 확실한 근거를 통해 예상해냈다는 점이 달랐다.
“봉명공이 실패한다고 생각하면서 너는 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냐? 말해봐라. 마화천.”
“마교멸문 계획을 실행하면 나는 마교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위치한 자를 처리할 생각이다.”
“누구? 천중기?”
천중기는 천하제일인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마화천이라고 해도 혼자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아니. 망지성.”
마화천이 노리고 있는 자가 망지성이라니 상당히 의외였다. 굳이 마교의 두 호법을 비교하자면 좌호법 우사가 조금 더 나쁜 놈 같은 분위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망지성이 얼마나 위험한 자인지 알고 있나? 응. 제갈 사혁.”
망지성의 위험성? 무림인으로서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말하는 것일까? 제갈 사혁은 마화천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오랜 휴재를 어떻게 사죄드려야 할지....
사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스토리는 이미 잡혀있었죠.
다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사실 봉명공과 관계된 이야기인만큼 생각할 게 많았습니다.
봉명공은 애초에 그냥 기존의 장르 소설의 주인공을 비꼬기 위해 만든 캐릭터에 불과 했는데 거기에 복수를 넣고 대의명분을 포함 시켜놓으니 꽤나 다루기 힘든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지금은 오랜 고민 끝에 결정을 했고요.
PS. 진짜 휴재의 원인은 브리키오님의 댓글 때문입니다. 글을 올리려 하는데 댓글을 읽고 뭔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이내 새로운 고민을 몰고왔죠.
이럴 때면 진짜 소설이란 건 혼자만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인터넷 연재는 이래서 좋은 것 같아요.
앞으로도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귀담아 듣고 고민하면서 좋은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