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237화 (237/262)

<-- 237 회: 허상. -->

제갈 사혁은 이신이 싸우는 것을 묵묵히 지켜봤다. 마교의 무사들 중 이신에게 크게 위협이 되는 인물은 없었기 때문에 걱정이 된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기분이 나빴다.

마교로 떠나기 전 도오진인을 만난 제갈 사혁은 도오진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이신에게 버릇이 있다고. 그리고 그 버릇은.

‘내.... 버릇인가.’

일전에도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신이 검법을 구사할 때 기수식을 전혀 잡지 않는다던가 하는.

처음에는 제갈 사혁 본인이 기수식을 잡지 않으니 제자인 이신도 똑같이 따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신은 육체적인 면을 떠나 정신적인 면도 제갈 사혁과 점점 닮아가기 시작했다.

제갈 사혁과 이신은 다른 스승이나 제자와는 다르다. 대게 스승이 직접 싸우는 것을 보는 제자들은 없다. 제자를 들일 때 스승이 되는 자들은 대부분 현역에서 물러나 있기 때문에 비무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젊고 제자의 앞에서 수많은 강자들과 싸우고 이겨나갔다.

그런 스승을 보며 성장하는 제자가 스승의 버릇 또한 닮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마교의 무사들과 싸우고 있는 이신을 보고 있으면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자신에게....

‘하나하나 직접 가르쳐야 했어!’

무엇이 문제가 됐는지는 잘 알고 있다.

조금 더 잘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행한 격체전공(隔體傳功) 이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무공에서의 버릇이란 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스스로 개선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신은 격체전공으로 무의식중에 각인된 무공을 사용했고 제갈 사혁의 버릇도 그대로 답습했다. 물론 나쁘지는 않다. 그 ‘버릇’이란 것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로인해 이신의 성장가능성을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이미 개선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조금 더’를 원하지 않는다. 스스로 개선하지 않으려 한다면 발전할 수도 없었다.

‘돌아가면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겠어. 하나하나 직접.’

그런 점만 제외한다면 무림인으로서 이신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고작 한명의 적이 두려워 뒷걸음질 치는 것이냐!”

대장격인 자의 말이 이신을 막기 위해 제일 먼저 달려갔던 마교의 무사가 그 자의 발아래 쓰러졌다.

“뒤에서 말만 하지 말고 같이 싸워야지. 안 그래?”

어느새 이신은 주위에 있는 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그와 마주보고 서있었다.

“이신.”

제갈 사혁의 말 한 마디에 이신은 그자의 왼쪽 가슴에 내공권을 넣어 그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이제 겨우 열여섯. 무림인으로서는 흠잡을 때가 없지만 처음부터 다시 다듬어야 할 곳이 생겼다.

“가자.”

타인의 피로 물든 제자를 보며 제갈 사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있지만 항상 그에게는 결과가 우선이었다.

제갈 사혁과 이신이 머무는 곳에는 마교출신의 흑사련 무사들이 있는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그나저나 사부.”

“왜?”

“마화천에게 왜 그런 부탁을 하셨어요.”

마화천과 은밀하게 밀약을 주고받은 것을 지켜본 이신은 여전히 제갈 사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니까.”

“그건 알지만 청하 누나가.....”

물론 청하가 걸리기 때문에 가장 껄끄럽지만 분명 이 문제만큼은 해결해야 했다. 직접 해결하지 못한다면 간접적으로라도 해결해야만 했다.

“내가 그토록 긍지를 가지고 있는 정파인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썩기 시작한 환부는 도려내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죠?”

누구를 위해서라니 이 꼬마 녀석은 가끔 자신을 향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곤 했다.

“정파를 위해서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를 위해.”

“그 정도로 가치가 있는 건가요?”

“무림인으로 살면서 이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어.”

그래. 무림인으로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이 거래를 꼭 필요했다.

아마도 이 거래를 통해 표면적으로 가장 이득을 보는 쪽은 흑사련일 테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제갈 사혁에게 보다 더 큰 이득이었다.

“그래. 그것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겠지.”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마화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들 무리에 섞일 수 있도록 뒤를 봐주는 대신 내 목숨을 맡겼는데 거기에 조건을 더 붙이다니.”

“내가 절대 손해 보는 거래는 안 하거든.”

방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앉은 마화천은 서찰을 꺼내 제갈 사혁에게 보여주었다.

“봉명공에게서 내려온 지시다.”

“지시? 아주 거물이 다 되셨네.”

“망지성의 호위대장은 바쁘신 몸이니까.”

실제로 제갈 사혁이 이신과 함께 몰래 붙였던 벽보 같은 건 전부 봉명공의 지시에 의해 마교로 온 흑사련 무리가 하는 일이었다.

“우리들의 뜻에 동조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사흘 뒤 계획을 실행할 생각이다.”

마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마교에 대한 불만을 터트려 그것으로 거대한 봉기(蜂起)를 일으켜 마교를 무너트리려는 게 봉명공과 그를 따르는 이들의 목적이다. 겨우 이 정도로 무너질 마교가 아니지만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적어도 무림 단체가 아닌 종교 단체로서의 마교는 무너지게 된다.

“이 방법....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제갈 사혁은 무림인들의 싸움에 일반인들을 이용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교인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순전히 종교로서 마교를 의지하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봉명공이 계획을 실행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한 개인이 통제하기엔 너무나도 거대해져버렸다.”

“다수의 광기만큼 무서운 것도 없지.”

정사대전이 일어났을 때 무림맹의 무림인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그들의 순수한 투쟁심을 광기로 바꾼 제갈 사혁이기 때문에 다수의 광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갈 사혁은 조용히 자신이 방금 전까지 저자거리에 몰래 붙었던 벽보를 쳐다봤다.

“고작 이런 것으로 몸과 마음이 흔들린다는 게 참 간사하지 않아?”

“...............”

“아무튼 난 지켜보기만 할 거다. 네가 망지성과 단판을 지으면 그것이 설사 네 녀석의 시체라 하더라도 반드시 마교 밖으로 가지고 나가 주겠다.”

시체라도 가지고 나가주겠다는 말에 마화천은 인상을 구겼다.

“내가 죽으면 네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데 그래도 괜찮나?”

“사파의 거두인 마화천의 죽음에 만족해야지.”

망지성의 성격은 지난생애에서 직접적이진 않지만 풍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겪어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망지성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살인을 해본 적이 없다. 곤륜파인 혜성의 부모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런 비사(秘事)를 제외하면 무림인으로서는 정말 드물게 살인을 하지 않았다.

“아무튼 네가 성공하기를 기원하지. 네 말대로 네가 죽으면 내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고 봉명공의 실패 또한 이 두 눈으로 지켜보겠다.’

제갈 사혁은 봉명공이 실패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볼 생각이었다.

거사(巨事)를 앞둔 날 밤 봉명공은 정갈하게 차려입고 외숙모의 침실을 찾았다.

“소자. 인공입니다.”

“들어 오거라.”

외숙모인 화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봉명공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상복을 차려입은 화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앉거라.”

방립을 벗은 봉명공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준비가 끝나자 화연은 손수 봉명공의 머리를 잘라주었다. 파계승의 이름으로 소림을 나온 뒤 단 한 번도 머리를 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교인들이 개종을 하고 그 과정에서 불가의 몸인 아버지와 마교인인 어머니가 만나 자신이 태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숙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다 되었구나. 이제 그만 눈을 뜨거라.”

오랜만에 삭발을 해서인지 굉장히 마음이 복잡했다.

낯설기까지 했다. 어째서일까? 일곱 살까지 마교에서 어머니의 성을 따라 주인공으로 알아왔고 그 후 줄곧 소림 제 1대 제자 무진이며 봉명공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다시 주인공이 되었고 다시 불가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불가의 제자가 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차라리 그게 더 나았을 것이다.”

“...........”

화연은 사파출신이지만 남편을 만나 마교인이 되었고 부모를 잃은 봉명공을 일곱 살까지 키웠고 자신의 피붙이를 죽인 남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평생 지켜보았다.

복수를 꿈꾸고 돌아온 조카는 목적을 잃었고 필사적으로 목적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의미 없는 일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자신의 복수를 대업(大業)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했다.

차라리 ‘저 포기할래요.’라고 말한다면 말없이 안아주고 위로해줄 텐데 이 아이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숙모님.”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은 조카가 자신을 부르자 화연은 두 눈을 감았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복수를 하지 않으면 부모님을 버리는 것 같았고 외숙을 용서하지 않으면 저의.... 저의 어린 시절이 거짓투성이가 되어 버릴 것 같았습니다.”

차라리 이 아이에게 잘해주지나 말걸. 화연은 이 아이에게 정을 준 남편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용서할 수 없었다. 차라리 모질게 대했더라면 이 아이는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왜 그렇게 다정했을까? 왜 그렇게 사랑했을까?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앉아서 고민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요.”

너무 많이 와버렸다.

“그래서 마음 단단히 먹으려고요.”

============================ 작품 후기 ============================

이번편은 제갈 사혁과 마화천 간의 약조라는 떡밥과 봉명공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후기보다는 댓글에 답해드리는 내용이 되겠네요.

답변은 이제 질문성이 강한 댓글에만...

다른 분들도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주세요. 스포가 아닌 한도 내에서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브리키오 님: 너 이새끼.... 이 대사는 제갈 사혁의 캐릭터성을 확실하게 잡은 대사였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봉명공은 주인공입니다. 말 그대로 기존 소설의 주인공이죠. 여자들이 보면 한눈에 반하고 우유부단하고 쓸 때 없이 정에 약해 분위기에 휩쓸립니다.

제갈 사혁이 봉명공에게 늘 이 말을 함으로서 캐릭터성이 확실하게 잡혔죠.

왕뽀지 님: 시간을 늘 정확하게 지켜야 하는데 그러기 힘드네요... 하하하...

강철의혼 님: 저도 야한 것 좋죠. 그래서 조회수 오르고 노블레스 원고료 오르면 좋죠. 솔직히 고전 무협은 대부분 성인코드가 굉장히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할렘도 아니고 오직 제갈 사혁의 무림을 향한 야망만을 이 소설의 줄기로 삼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점은 배제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성인 노블이 맞습니다. 화산의협은.... 하지만 수위는 아니죠.

마지막으로 쉬라야 님의 댓글에 답해드리는 건 이번 편 그 자체입니다.

제갈 사혁이 마화천에게 끌려다니는 건 사실이지만 그 댓가로 내건 약속은 가장 치사하고 더러운 뒷거래입니다. 그리고 제갈 사혁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거래이기도 합니다.

제갈 사혁은 똑똑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설정했고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똑똑하지 않을지언정 절대 손해는 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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