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회: 거부 -->
적들이 등 뒤에서 쏘는 화살은 뒤통수가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최대한 청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 궁현이 당겨졌을 때 몸을 돌려 검으로 화살을 쳐냈다. 하지만 경공을 멈추고 날아오는 화살에 대응을 하면 그만큼 간격이 좁혀져 불리해지는 쪽은 제갈 사혁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군.”
다시 경공을 펼쳐 도망을 친 제갈 사혁은 마화천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어떻게 할 거야? 앙!”
성질을 내며 소리치자 마화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하하.....”
“웃지 마. 새꺄. 정들어!”
쫓아오는 이들의 경공실력은 제갈 사혁이나 마화천보다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그들을 쉽게 떼어놓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일단 멈춰서 놈들을 상대하는 게 낫겠다. 활잡이 놈들한테 거리를 주지 않으면 그만이잖아.”
“그건 힘들어. 그들은 퇴축(退逐)이 엄청나게 빠르거든. 아마 우리가 방향을 틀고 그들에게 다가가면 순식간에 원을 그리며 진을 펼칠 거야. 그럼 꼼짝 없이 온몸에 가시가 돋을 걸.”
저들은 활을 주력으로 삼기 때문에 앞으로 돌진하는 경공(輕功)보다 뒤로 빠져서 거리를 만드는 퇴보(退步)가 더 빨랐다.
도망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역으로 공격하기도 힘들다니 어지간히 짜증......
“아! 그러면 잡히면 어떻게 되냐?”
“?”
“속도를 늦추고 우리가 놈들에게 따라잡히는 척을 하면 어떻게 되냐고?”
“!”
말뜻을 이해한 마화천은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적이 눈치 채지 않도록.... 그리고 마침내 적과 가까워지자 선두를 달리던 추적대원이 제갈 사혁과 마화천의 옷깃을 붙잡았다.
경공을 펼치던 중 붙잡힌 두 사람은 그대로 굴러서 먼지를 뒤집어썼다.
제갈 사혁과 마화천을 붙잡았다고 생각한 금강은 기세등등하게 두 사람을 마주보고 외쳤다.
“어디까지 도망칠 생각이었어?”
하지만 그런 그녀를 보며 제갈 사혁은 어쩐지 귀엽다고 생각했다. 마화천의 말대로 그녀는 마화천에게 잊을 수 없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그리 생각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녀가 생각하는 그는 마교에서 도망친 애송이이고 그녀를 생각하는 이 남자는 흑사련 최고의 검사이며 무림 3대 고수로 알려진 마화천이기 때문이다.
“멍청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제갈 사혁이 자신을 비웃자 금강은 미간을 찡그렸다.
“계집. 네 눈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하냐?”
“뭐?”
“잘 봐. 아직도 이 자식이 마교에서 도망친 애송이인가? 어이 ‘마화천’ 이 정도 거리면 할 수 있지?”
그 말과 동시에 마화천은 대력검을 움켜쥐었고 제갈 사혁은 금강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넘어트렸다.
단 한순간이었다. 대력검에서 뿜어져 나온 날카로운 검격은 순식간에 원을 그리며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을 베어버렸다.
금강을 위에서 누른 제갈 사혁은 세상물정 모르는 금강을 비웃었다.
“잘 봐. 저 녀석은 더 이상 마교의 애송이가 아니야. 마화천이라고.”
그 순간 제갈 사혁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예기(銳氣)가 서린 대력검이 제갈 사혁을 겨눴다.
“떨어져.”
아무래도 자신의 처음을 준 여자다보니 제갈 사혁이 위에서 깔고 있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이거 실례.”
대수롭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 사혁은 금강에게서 활을 빼앗은 뒤 멀리 던져버렸다.
“만나서 반가웠어. 금강. 하지만 이제 헤어져야겠네.”
그녀의 동료를 전부 도륙하고 난 후 이런 말하긴 참 뭐하지만 무림인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
그러자 그 순간 금강은 머리에 찬 비녀를 빼 마화천의 왼팔을 찔렀다.
그래 무림인이란 이렇다. 한때의 정 때문에 살려 보낼 수도 또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제갈 사혁!”
제갈 사혁의 검지손가락이 금강의 목을 겨누자 마화천은 그의 손목을 붙잡아 그를 제지했다.
“네가 죽으면 내가 곤란하다만?”
“걱정하지 마. 약속은 꼭 지킬 테니까. 금강이 나를 죽이려 했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났을 거야.”
왼팔에 박힌 비녀를 빼낸 마화천은 금강에게 미소를 보인 뒤 뒤돌아섰고 그 순간.
“나 임신했었어!”
“이.... 임신?”
그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제갈 사혁이었다. 뜬금없이 임신이라니 게다가 했었다는 말은 즉.
“스물 둘이야.”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마화천은 잠시 금강을 쳐다보더니 침착하게 물었다.
“이름은?”
“송하유(松遐有).”
“딸인가 보네. 그런데 왜 송씨야? 내 딸이면 백씨 아닌가?”
“혼자 낳았는데 엄마 성을 따르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가......”
정사대전 중에 흑사련의 마화천에게 마교에 가족이 있다니 꽤나 고급정보였다.
마화천은 마교를 배신한 배신자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금강은 물론이고 마화천의 딸도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정사대전이 끝나면 그때..... 그때.....”
마화천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제갈 사혁.”
“뭐냐?”
“이번 일은....”
“아무리 정사지간이라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다. 게다가 말했지. 네놈과는....”
“그 약속이라면 반드시 지킨다.”
제갈 사혁 입장에서는 마화천이 그 약속만 지켜준다면 문제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네 딸이 스물 두 살이냐? 열두 살도 말이 안 되는데 네 나이는......”
“난 올해 마흔 둘이다.”
“.......”
그러고 보니 마화천이 무림에서 처음 활동한 건 20년 전이었다. 서로의 입장상 적이기 때문에 존대할 필요도 없었고 워낙 마화천이 어려 보이다보니 잊고 있었다. 게다가 실제 나이는 본인이 직접 마흔 둘이라고 했지만.......
‘무림맹 추정 나이는 40대 후반이었지.’
“그럼..... 가....”
“이제와서 존댓말하지 마라. 가증스럽다.”
“나도 안 해. 이 새꺄!”
단순하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이신과 합류하기 위해 걸음을 서두른 제갈 사혁은 새벽쯤이 돼서야 이신과 합류 할 수 있었다.
봉명공과 그의 부하들은 마치 전장에서 지고 돌아온 패잔병과 같은 상태였다.
“명공 아저씨. 상태가 특히 그래요.”
“........”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 또한 어떻게 보면 마교의 피해자로서 마교를 바꿔보려 했지만 현실은 자신들과 같았던 혹은 자신들의 지지 세력이 되어줄 줄 알았던 교도들에게 돌멩이를 맞고 쫓겨났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등신 같은 놈.”
제갈 사혁이 봉명공의 뒤통수를 한 대 쳐주려고 다가가는 순간 제갈 사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마화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의 집에 찾아왔으면 집 주인에게 인사 정도는 하고 가야지. 이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아.”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제갈 사혁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천중기......”
“화산파 꼬마는 못 본 사이에 제법 실력이 늘었구나.”
“!”
딱 두 번 만났을 뿐이지만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상대를 깔보는 저 태도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하는 거냐? 주씨네 꼬마 놈. 내가 눈앞에 있는데 언제까지 생각이냐?”
천중기는 제갈 사혁을 보다 말고 갑자기 봉명공을 도발했다.
“뭔가 하려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았더군. 어떠냐?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만난 기념으로 한번 덤벼 볼 테냐?”
만난 기념으로 덤벼 볼 거냐고? 정말 구역질나는 태도였다.
“천중기....”
그 순간 봉명공은 무언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모습을 본 천중기는 윗옷을 벗어 재끼고 온몸의 근육을 일깨웠다.
“그래. 나다. 어서 덤벼봐라!”
“천중기!”
“봉명공. 멈춰!”
제갈 사혁이 서둘러 하지만 선문청운보(禪門靑雲步)를 펼치는 봉명공을 붙잡을 수 없었다.
비룡승천봉(飛龍昇天棒)을 꺼낸 뒤 항마타청봉(降魔打靑峯)을 펼쳐 일격에 천중기를 노렸지만 천중기는 고개를 움직여 가볍게 공격을 피한 뒤 봉명공의 명치를 발로 찼다.
“천근으로 만들어진 무기로 나를 해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천중기가 손을 뻗자 그 순간....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산파 꼬마. 제법이구나.”
천중기의 무형지기를 무력화 시킨 이는 다름 아닌 제갈 사혁이었다.
“타인의 무형지기에 간섭을 하다니 가진 바 재능에 비해 너무 재주를 부렸구나.”
“가진 바 재능 좋..... 컥!”
말을 하다 말고 제갈 사혁은 입에서 피를 쏟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했지만 천중기가 뿜어낸 무형지기의 반발력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인 피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그래. 자존심이 꽤나 강한 놈인 것은 인정한다. 그리고 그때와 다르게 놀랍도록 강해졌구나. 그리고 저쪽은 더욱 짙어졌고.”
짙어졌다는 말과 함께 바라본 이는 다름 아닌 이신이었다.
============================ 작품 후기 ============================
이번편에 뜬금 없이 마화천의 가족 드립이 있었습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냥 넣어봤습니다.
마화천의 나이도 재인식할 겸해서......
나이는 처음부터 40대로 잡아놓고 동안이라는 설정을 이용했는데
캐릭터의 성격이 그냥 20대 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제갈 사혁과 라이벌 포커스로 맞추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사실 이번편은 천중기의 오만함을 극대화 시키려 했는데 쓸 때 없이 마화천 에피소드가 되어버렸네요.
다음편부터는 봉명공 이야기 끝 이제 다시 정사대전 이야기 시작입니다.
잘 안돌아가는 머리 쉴 틈 없이 돌려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