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의협-242화 (242/262)

<-- 242 회: 거부 -->

“격체전공이 제법 잘 됐다만 결국 너도.....”

‘격체전공?!’

제갈 사혁은 천중기가 격체전공에 대해 언급하자 미간을 찡그렸다.

“최근에 이상한 점은 없었느냐? 귀에서 환청이 들린다거나 아니면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거나?”

“!”

천중기가 다가오자 이신은 다짜고짜 천중기의 가슴에 주먹을 날렸지만 강단있게 뻗은 주먹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나름 신경써주고 있는 것도 모르다니...... 버르장머리가 없군. 뭐 됐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제갈 사혁은 천중기가 굳이 이 상황에서 이신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점. 그리고 격체전공을 언급한 점을 기억해두었다.

‘확실히 격체전공의 문제점은 나도 인식하고 있으니까.’

제갈 사혁이 딴 생각을 하든 말든 천중기는 천천히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을 쳐다봤다.

“지금으로서는 네놈과 네놈뿐이군.”

천중기가 지명한 사람은 제갈 사혁과 마화천이었다.

“주씨네 꼬마 놈이 뭔가 해주길 바라지만 결국 이게 놈의 한계군.”

그 말은 꼭 봉명공의 계획이 성공해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해주었으면 한다는 식으로 들렸다. 누군가 자신을 위협해주었으면 한다니 오만함의 극치였다.

‘이 기분은 뭐지?’

하지만 뭔가 대단히 익숙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이다. 왜 한 놈도 나에게 덤비지 않는 것이냐?”

“!”

천중기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제갈 사혁은 이 익숙한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객잔에서 혹은 길에서 자신보다 약한 자가 시비나 싸움을 걸었을 때의 느낌.

강자로서 느끼는 일종의 우월감 혹은 여유였다.

지금 천중기에게 자신 혹은 자신들은 고작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놀고 있네!”

제갈 사혁은 그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려는 듯 주먹을 휘둘렀고 천중기는 제갈 사혁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았다.

천중기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는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그래! 이 정도면 재미있겠구나! 하하하하!”

“뭐?”

“재미있겠어.”

그리고는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온몸으로 기를 내뿜었다. 천중기의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던 마교와 흑사련의 무사들은 얼굴이 빨게 지더니 눈과 귀에서 피를 흘리며 괴로워했다.

그 힘은 정말 감히 대적할 자가 없는 천하제일인의 기운이었다.

‘젠장....’

제갈 사혁이라고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 긴장을 풀어도 머리에 피가 쏠리고 온몸의 피가 역류할 것만 같았다.

“이 정도다.”

“?”

그 말과 동시에 천중기는 기운을 거둬들이고 뒷짐을 졌다.

“가늠할 수 있겠느냐? 네놈과 나의 차이를....”

‘차이!’

자신과의 차이를 알겠냐며 훈수 두듯 말하자 제갈 사혁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 없다. 내게 도전할 생각이라면 나를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천중기는 지면을 발로 찬 뒤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져버렸다.

“여전하네.”

제갈 사혁과 같이 겨우 몸 하나 건사한 마화천은 침을 뱉으며 제갈 사혁에게로 다가왔다.

“너. 그 부탁 말이다.”

“.........”

갑자기 이미 이야기도 끝난 약속을 다시 들먹이자 제갈 사혁은 마화천이 무슨 의도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자다.”

“좋아.”

제갈 사혁은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마화천과 약속이 어떻고 봉명공이 어떻고 정사대전이 어떻고 하는 것은 전부 부질없어 보였다. 천하제일인 신화천 천중기로 통하지 않는 모든 의논과 계획은 하찮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조차도 자존심에 금이 갔다.

‘반드시 이 굴욕은 네놈의 목숨으로 받아내겠어!’

움켜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자신도 그 사실을 알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마교를 빠져나가는 동안 별다른 제지는 없었다. 오히려 마교의 무사들은 일부러 길을 열어주기까지 했는데 마치 그 모습은 손님대접을 하는 것 같아서 그것마저도 굉장히 기분이 나빴지만 제갈 사혁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무림인들은 천중기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주변상황은 신경 쓸 수조차 없었다.

“그럼 이쯤에서 헤어지지.”

청해 부근에서 흑도섬은 봉명공의 계획에 참가했던 흑사련 무사들을 데리고 떠나려 했고 제갈 사혁은 그런 그를 무시한 채 말없이 어디론가 가버렸다.

“죄송합니다. 사부님을 대신해 제가 이번 일에 대한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제갈 사혁이 가버리자 이신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마화천에게 예의를 표하며 대신 그 마음을 전했다.

“녀석은 자신의 그릇에 비해 분에 넘치는 제자를 두었나. 나는 마화천이다.”

“딱히 도호는 없지만 화산파 제 2대 제자 이신입니다.”

마화천은 이신이 마음에 들었는지 악수를 권했고 이신은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래. 아! 그리고 너희는 우리와 함께 가는 게 어떻겠느냐?”

마화천은 봉명공의 부하들에게 함께 흑사련으로 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들은 봉명공을 따르는 듯 했고 마화천은 그 모습을 보며 봉명공에게 소리쳤다.

“네가 어떤 기분인지 안다고는 못한다. 위로해주고 싶지만 나는 그 방법을 모른다. 빨리 기운 차려라. 계속 그렇게 있어봤자 세상은 너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다.”

복수의 대상을 잃어버린 봉명공은 어쩌면 스스로 구원자 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다만 돕고자 했을 뿐인데 그들에게 외면당하고 부정당했다.

이번 일로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림인을 떠나 봉명공을 옆에서 지켜본 한 사람으로서 마화천은 그저 그가 털고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봉명공 아저씨. 이제 우리도 가요.”

“충? 아니 이신이었나?”

“기억하고 계시네요.”

오랜만에 본 이신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보였다.

“많이 변했구나.”

“사람은 빠르던 늦던 변하잖아요.”

봉명공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봉명공은 소림사로 떠났고 스스로 소림사 회계동에서 자신의 죄를 씻고자 노력했다.

소림사 내부의 일이기 때문에 무림맹은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고 봉명공을 따르던 마교의 무사들은 별 문제없이 소림사의 마당을 쓸며 지냈다.

제갈 사혁은 나름대로 이 상황을 정리해주었고 그렇게 파계승 봉명공의 긴 여정도 끝이 났다.

이번 임무에 대한 보고와 뒤처리를 끝낸 제갈 사혁은 대야에 발을 담그고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매미의 울음소리를 들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요.”

청하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제갈 사혁은 청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서 와요.”

“한잔 어때요?”

“좋아요.”

청하는 의자 하나를 가져오더니 제갈 사혁의 맞은편에 앉아 가죽신을 벗고 제갈 사혁이 발을 담군 대야에 자신의 발을 넣었다.

“좁아요.”

“아~ 시원하다.”

두 사람이 발을 담그기에는 대야가 한 없이 좁았지만 청하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마셔요.”

술을 병째로 한 모금 마신 청하는 그걸 그대로 제갈 사혁에게 주었고 제갈 사혁은 한숨을 내쉬며 병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또 한숨 쉰다. 한숨 쉬는 남자는 딱 질색인데.”

“그럼 오늘만 봐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안 해줄 거예요. 그거 들으러 왔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달라니 제갈 사혁은 또 한숨을 쉬고 싶었다.

마교에 갔다가 마화천을 만나고 봉명공도 만나고 덤으로 천중기를 만났다가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온 이야기를 해달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게 말이죠.......”

“역시 이겼죠?”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려 하자 청하는 대뜸 앞뒤 자르고 이겼냐는 말을 꺼냈고 제갈 사혁은 한동안 그런 청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미소 지었다.

“당연히 이겼죠! 내가 누굽니까!”

서로가 거짓인지 알고 또 알면서 말해주고 있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술을 나눠 마시며 한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날이 저물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 작품 후기 ============================

천중기에게 완전히 기가 눌린 제갈 사혁을 한번 쯤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천중기의 태도는 약한 사람을 가지고 노는 그런 식인데요.

쉽게 말해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어디 한번 해봐.' 뭐 이런 식입니다.

그 동안 제갈 사혁이 보여왔던 행동이기도 하죠.

마지막에 봉명공의 이야기를 짧게 쓴 건 이번 편의 마무리라서이지 봉명공의 하차는 아닙니다.

그리고 청하와의 만남은 제갈 사혁에게 왜 청하가 필요한지에 대한 일종의 해답 같은 것입니다.

청하도 비교적 오랜시간 제갈 사혁을 지켜봤기 때문에 제갈 사혁의 표정만 봐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는 걸 알죠. 보통의 여자였다면 아마 '힘내요.' 라는 말로 끝냈을 테지만 청하는 무림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겼죠?'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청하의 의도를 안 제갈 사혁은 양치기 소년처럼 거짓말을 하고 청하는 거짓말인지 알면서 들어주죠.

청하를 제갈 사혁의 연인보다 무림인으로서 어필을 더 많이 한 이유도 이런 점을 쓰기 위해서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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