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 회: 패배자들. -->
다음날부터 제갈 사혁은 평소처럼 체력을 키우며 초식을 연마하는 기본적인 수련에 들어갔다. 무형지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천중기의 모습은 제갈 사혁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제갈 사혁 또한 무형지기만이 그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 잘못된 판단을 했다. 하지만......
“맞아서 안 아픈 놈 없다!”
이제는 자기 자신만을 믿기로 했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제갈 사혁이 수련 중인 훈련장을 방문한 사람은 다름 아닌 괄귀였다.
“다른 사람들은?”
“선배들은 곧 올 겁니다. 저는 조금 서둘렀죠.”
괄귀의 말대로 얼마 후 훈련장에 다섯 명의 사내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제갈 세가의 호위부대인 무영대의 대장들이었다.
“가후는?”
1번대 대장인 가후가 보이지 않자 제갈 사혁은 인상을 구겼고 괄귀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1번대 대장 괄귀입니다.”
“언제부터?”
“며칠 됐습니다. 가후 대장님은 현종 도련님의 교육을 담당하고 계시죠.”
현종은 제갈 세가의 후계자가 될 몸이니 가후가 붙었다면 안심이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너희들 날 죽일 수 있나?”
“?”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에 무영대 대장들은 당황했고 이를 본 괄귀는 입맛을 다셨다.
“도련님을 죽이면 상은 뭡니까?”
“뭘 원하냐?”
“동화 같은 거 보면 호랑이가 이러잖아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라고.”
그러면서 괄귀는 손가락으로 제갈 사혁이 허리에 차고 있는 호황(虎皇)을 가리켰다. 그러자 제갈 사혁은 미친 듯이 웃었다.
“푸하하하! 그게 지금 이 상황에 맞는 농담이냐? 네 녀석의 농담은 하여간.....”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단지 눈 한번 깜빡였을 뿐인데 열 발자국 이상 떨어져 있던 제갈 사혁은 환환미종보(幻環迷踪步)를 밟고 어느새 괄귀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호랑이가 떡을 왜 먹어 병신아.”
“!”
그 순간 제갈 사혁의 주먹이 괄귀의 턱뼈를 으스러트리며 뻗어나갔고 나무의 뿌리가 뽑혀 나가듯 날아가 훈련장 담장 위로 나가떨어졌다.
“무영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덤벼라.”
같은 시각 이신은 제갈 사혁의 부탁을 받고 나갈 준비를 했다.
“이거 좀 화려하지 않나?”
제갈 사혁이 꼭 입고 나가라고 준 옷은 너무 화려했다.
이런 옷은 이신의 취향이 아니지만 하늘같은 사부가 신신당부를 했으니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옷을 한껏 차려입고 밖으로 나간 이신은 뭇 여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머~ 저기 저 사람 좀 봐!”
“차나 한잔 하자고 할까?”
“얘는!”
“뭐 어때?”
이제 겨우 열여섯이지만 신장은 이미 제갈 사혁과 거의 비슷해졌기 때문에 아무도 이신을 열여섯 살 소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평소 잘 입지 않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신을 본 여인들은 저마다 이신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런 관심이 여간 부담스러웠던 이신은 뒤통수를 긁으며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신은 무림맹 입구 근처에서 누군가를 기다렸고 그때 마침 어떤 여인이 이신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다렸지?”
“아닙니다. 사고(師姑).”
이신은 그 사람을 보자마자 허리를 거의 반으로 접으며 예의를 갖췄다.
“못 본 사이에 듬직해졌구나.”
“감사합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제갈 사혁의 사매이자 이신의 사고에 해당하는 무윤 서희였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화려하네?”
평소에 잘 입지 않는 화산파 도복을 입은 서희와 달리 이신의 모습은 굉장히 화려했다.
“사부님이 꼭 이렇게 입고 나가라고 하셔서요.”
“우리 신이는 장가가면 여자 여럿 울리겠어.”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지만 사질과 사고, 조카와 고모나 다름없는 관계기 때문인지 서희의 말투는 중년의 여인 같았다.
“오랜만에 도복을 입었더니 벌써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사고께서는 원래 잘 입지 않으시잖아요.”
“스승님이 도사 옷 같은 걸 입으면 시집 못 간다잖아. 그래서 평소엔 안 입고 다니지.”
그러고 보니 제갈 사혁도 가끔씩 도복 냄새 때문에 여자가 안 꼬인다는 이해하지 못할 말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나저나 아미파에 감사인사를 하라니 도대체 사형은 무슨 생각인 거야?”
“아미파에 가는 게 아니에요.”
“응? 뭐라고?”
“아니에요. 아무것도.”
이신은 뭔가를 아는 눈치였지만 이 이상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런 이신과 달리 서희가 오늘 화산파를 나온 이유는 순전히 어제 아침 제갈 사혁이 보낸 서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사형도 참 남의 사정이라고는 전혀 생각해주지 않는다니까. 갑자기 아미파로 인사하러 가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몰라? 그런데 아마파에 가져다 줄 선물은 흑임자면 되는 걸까?”
흑임자가 제법 비싼 물건이긴 하지만 화산파는 선식을 즐기기 때문에 흑임자가 널리고 널렸다. 그러다보니 서희에게 흑임자는 단순한 식재료에 불과했다.
“저기!”
서희와 아미파로 향하려는 그때 누군가 이신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설마 목덜미를 잡힐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신은 뒤로 넘어졌고 넘어진 상태에서 상대를 올려다봤다.
“미려 아가씨?”
“신이가 맞았구나.”
얼굴에 피가 잔뜩 묻었지만 그녀는 분명 남궁 미려가 확실했다. 모습을 보아하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쪽은?”
“저번에 만난 적이 있죠. 무윤 서희라고 합니다.”
“아! 나..... 남궁 미려라고 해요.”
겨우 서희를 알아본 남궁 미려는 서둘러 인사를 했다.
“그런데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러신 거예요? 그냥 부르셔도 되는데 왜 굳이 목덜미를....”
“아니.... 그냥.....”
남궁 미려는 차마 한껏 차려 입은 이신이 이름 모를 여인과 웃으면서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당황해서 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어디 가나봐?”
남궁 미려는 서둘러 대화 주제를 바꿨다.
“네. 사부가 사고와 함께 아미파에 다녀오라고 해서요.”
“그.... 그래?”
이신과 함께 걷던 여인이 이신의 사고이고 함께 아미파로 간다는 말에 남궁 미려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서희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아미파에 가면 예쁜 소저들이 많겠지? 거기가면 우리 신이와 어울릴만한 아가씨들이 있으려나 몰라?”
“사고. 그게 무슨 소리에요?”
“잘 생각해봐. 열여섯이면 남자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뜻을 두고 집을 떠나며 여인은 혼기가 찬다잖아. 그러니까. 아미파에 혼처를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전 남잔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야.”
서희는 과장된 몸짓으로 이신의 등을 두 차례 세게 때렸고 이 모습을 본 남궁 미려는.....
“나...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그만 서희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네? 뭐 안 될 건 없는데....”
“남궁 소저가 같이 가준다면 굳이 난 갈 필요가 없지 않나?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사형은 어디에 있으려나?”
서희는 기다렸다는 듯 흑임자가 든 보자기를 남궁 미려에게 건네주고 무림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저기 잠깐만 기다려줘 준비 좀 하고 올게!”
그리고 서희가 사라지자 남궁 미려도 준비를 한다며 무림맹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신은 도대체 여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다렸지?”
잠시 후 한껏 차려입은 남궁 미려가 모습을 드러냈고 이신은 그대로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가요. 아가씨.”
여전히 남궁 미려를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지만 이신의 태도는 남궁세가의 하인이었던 충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예전과는 달랐다.
물론 남궁 미려도 이신에게 아가씨 취급을 받고 싶다던가 하는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입고 나오면 옷에 대해 한마디 해줄 줄 알았는데 아무 얘기도 없어 약간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아미파에는 왜 가는 거야?”
“아미파에 볼 일이 있어서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게 무슨 말이야?”
“가보시면 알아요.”
순간 남궁 미려는 이신이 굉장히 낯설었다. 단순히 좋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의 이신은 마치 제갈 사혁 같았다.
“.........”
============================ 작품 후기 ============================
후기는 뭐랄까요.
이번편은 폭풍전야라고 해두죠.
이신의 성격이 갑자기 변한 감이 있지만 격체전공 떡밥을 약간 서둘러서 드러냈습니다.
솔직히 이 떡밥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라서 천천히 하려 했는데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서 약간 서둘렀습니다.
이신은 솔직히 제갈 사혁과 달리 전통적 주인공 속성이라서 따로 이야기를 구성하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이런 내용을 쓰는 건 그만큼 제갈 사혁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죠.
다음편에서는 왜 이번 쳅터의 제목이 패배자들인지 나오는 대목입니다.
마지막으로 소중한 시간 내서 쪽지 보내주신 브리키오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