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 회: 여정의 끝. -->
“그래서 지금 어찌됐다고?”
“그게 말입니다.....”
흑사련 련주인 사지성은 이른 아침부터 올라온 보고를 듣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화천이 검현군을 죽이는 전공(戰功)을 세운지 불과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광서성 경계지역이 단 한명에게 무너진 것이다.
“경계지역 뚫고 온 놈이 누구야?”
경계지역을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이 누구냐는 말에 보좌관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생존자가 단 한명도 없어서 확인이 불가능했습니다.......”
“60명 전부 다?”
“정확한 수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부 몰살 당했습니다.”
“젠장!”
의자를 있는 힘껏 발로 차면서 화풀이를 한 사지성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머리를 굴렸다.
비록 경계지역의 흑사련 무사들이 고수라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60명 정도가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아무리 말단이라지만 명색이 경계지역 근무자들이다. 어지간한 실력으로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수준은 분명 아니다.
그들을 하룻밤 사이에 몰살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라면 문파의 장로나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그런 자들이 움직이려면 그게 정치적이든 혹은 개인적이든 어떠한 상황이나 명분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
“무당파 지도부의 움직임은?”
“사건이 일어난 당일부터 감시를 했지만 무당파의 움직임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 사정과 전혀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 그리고 검현군이 죽고 나서 약 이틀 만에 행동을 계시한 점.
“제갈 사혁.”
“네?”
모든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떠오르는 이름은 제갈 사혁뿐이었다.
“제갈 사혁 아니 무당파와 화산파의 관계는 어떠하냐?”
“들리는 소문으로는 혼담이 오고가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백사대 전부 보내.”
“전부 말입니까? 그러다 전부 몰살당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갈 사혁이 노리는 것은 오직 흑도섬 밖에 없었다. 흑사련 련주로서 흑사련 최고의 고수인 흑도섬을 믿는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아니다. 흑도섬이 제갈 사혁을 죽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검현군과 제갈 사혁을 잃은 무림맹이 어떠한 행동을 할지 모른다. 그리고 만에 하나 흑도섬이 제갈 사혁에게 잡아먹힌다면 수 십 년간 흑도섬이라는 거대한 이름으로 만들어놓은 구실점이 무너지게 된다.
검현군을 쓰러트린 시점에서 마화천의 명성이 중원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마화천은 절대 흑도섬을 대신할 수 없다. 낭인의 몸으로 의지하는 세력 하나 없이 수많은 강자들과 싸워 이겨낸 전설과도 같은 존재.
그가 쌓아올린 것은 무림인으로서의 명성이 아니다.
삼류 낭인에게 있어서 그는 희망 그리고 미래이며 현재다. 그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흑사련이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사대 희생해서 그 새끼 한 놈 막을 수 있으면 그게 더 나은 거 아냐.”
“네.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뒤 광서 계림지부가 그 모습을 갖추게 되자 흑도섬은 예정대로 계림지부를 방문했다. 제갈 사혁이 흑도섬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할 몸을 사릴 흑도섬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제갈 사혁은 광서는 물론이고 중원무림 그 어디에도 잡히지 않았다. 광서는 물론이고 무림맹에서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흐.... 흑도섬 대협이시다!”
완공식에 흑도섬이 도착하자 그를 보기위해 몰린 수많은 흑사련의 무림인들과 연고 없는 낭인들은 그에게 환호를 하며 맞이해주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많은 이들의 환호를 받고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완공식이 끝나고 흑도섬은 계림지부를 맡게 될 소공(紹工)과 만났다.
“무혈입성(無血入城)이라.... 저는 솔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흑도섬이 계림에 들어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렇습니까? 저는 마음에 듭니다만.”
“그거야 소공 지부장께서는 한 자리 꿰차고 계시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흑도섬 대협의 말씀대로 이번 일의 최대 수혜자는 저로군요.”
두 사람은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술 한 잔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번은 태원(太原)에 있는 연못에서 낚시를 했는데 팔뚝만한 잉어가 잡히지 뭡니까.”
“하하하! 그거 참 대단하군요.”
그렇게 술을 마시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진담 반 농담 반 남자의 허풍이 섞인 무용담이 점점 대담해졌고 수위가 올라가는 만큼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대낮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길어지자 끝에 가서 두 사람은 격식을 따지지 않고 술을 물처럼 마시기 시작했다.
새벽 쯤 됐을 때 소공이 먼저 자리를 떴고 흑도섬은 조용히 홀로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너도 이리 와서 한 잔 마시는 게 어떠냐?”
흑도섬이 호위를 서고 있는 자에게 술을 권하자 호위무사는 맞은편에 앉아 그가 따라주는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역시 마화천의 말대로 종잡을 수가 없군.”
“내가 좀 복잡한 남자라서 말이야.”
그러면서 호위무사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방립을 벗었다.
“좌호법 우사 때 한번 만났으니 우린 제법 구면이지? 제갈 사혁.”
몇 시진 전부터 이 방 안에서 흑도섬을 경호하고 있던 호위무사는 다름 아닌 제갈 사혁이었다.
“그 난리를 치고 행방이 묘연하다기에 어디 있는가? 했더니 여기에 있었나?”
“계림지부를 완공해야 흑도섬 나리께서 행차하신다고 하기에 완공할 때까지 일손 좀 도왔지.”
자신과 만나려고 광서 지역경계를 서던 흑사련 무사들을 전부 죽였으면서 또 자신을 만나기 위해 계림지부를 짓는데 거들었다니 괴짜도 이런 괴짜가 없었다.
“대단하더라고. 건축기술에 무공을 도입하니까. 기초 공사부터 마무리 작업까지 금방이던데. 흙에 내공 주입을 잘 하지 못해서 십장 어른에게 얼마나 많이 욕을 얻어먹었는지 아마 10년 동안 먹을 욕은 요 며칠 다 먹었을 거야.....”
제갈 사혁은 무슨 무용담을 늘어놓듯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고 가만히 제갈 사혁을 지켜보던 흑도섬은 이야기가 끝나자 대뜸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 너는 발가벗은 상태로 저자거리를 걷고 있다.”
“뭐?”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네가 발가벗었다며 너에게 창피를 주려한다. 그럼 넌 어떻게 행동 할 것이냐?”
어떤 의도로 이런 걸 물어보는 건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나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이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타인의 시선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제법 대인(大人)처럼 말을 하는군.”
“사실이다. 나는 거지처럼 구걸도 할 수 있고 천한 노비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내가 하는 일이 천하다 하여 자존심 상해하지 않는다.”
그 말과 함께 제갈 사혁이 들고 있는 술잔의 술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손에 닿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술잔의 술이 끓다니 실로 엄청난 내공이었다.
“어떠한 상황을 겪든 내게 모든 건 유희에 불과하다.”
“유희?”
“그래. 유희다. 나는 원한다면 내가 가진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힘으로 굴복시킬 수도 죽일 수도 있다. 그것과 똑같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나는 벌거벗은 원숭이가 되어도 상관없다. 계림지부를 짓는데 일손을 거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힘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무림인다운 대답이었다.
보통 이런 질문을 누군가에게 한다면 열에 다섯은 창피를 준 자를 죽인다고 말하고 나머지는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 옷을 입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갈 사혁은 달랐다.
“이건 너희가 기방에 가서 계집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그 계집의 웃음을 돈으로 사는 것과 같다. 내게는 이것이 하나의 풍류(風流)다.”
“.............”
“고작 하찮은 질문 따위로 내 인격을 시험해보기라도 하려는 것이냐?”
제갈 사혁은 흑도섬의 의도를 정확히 눈치 채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이 질문은 흑도섬이 누군가를 만날 때면 어김없이 상대에게 묻는 것 중 하나다. 이 질문으로 흑도섬은 상대의 인격을 파악한다.
“그럼 나도 질문을 하나 하지.”
“저자에 거지가 하나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지나가던 행인이 그가 거지인 점을 이용해 그를 놀린다면 놀림을 당하고 있는 거지는 어떤 마음일 것 같으냐?”
“놀림거리가 됐다는 사실에 몹시 자존심이 상하겠군.”
그래 아무리 거지라도 그러한 상황에 처하면 분명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만약 이 거지가 사실은 마을 제일의 부자였다. 라면 어떨 것 같으냐?”
거지가 마을 제일의 부자라? 부자가 거지인 척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럼 놀림 당하고 있는 건 그 거지가 아니라 그를 놀리고 있는 행인이겠군.”
“정답. 그럼 마지막 질문.....”
그 순간 탁자 밑에 가려 보이지 않던 제갈 사혁의 다리가 탁자를 부수고 흑도섬의 턱을 가격했다.
“너와 나 둘 중에 누가 거지고 누가 행인일까?”
============================ 작품 후기 ============================
쳅터를 넘어갈 때마다 휴재를 해서 죄송합니다.
스토리는 막힘이 없는데 점점 쳅터 넘기기가 힘들어서요.
이번편은 뭐 짚고 넘어갈 건 없습니다. 그냥 두 사람의 신경전이죠.
브리키오님의 댓글에 답변해드리자면 일단 나이를 먹을 수록 강해지는 건 같습니다.
나이들면 육신이 약해지는 것도 당연하고요. 다만 추백성이나 천중기처럼 계속 몸을 단련하면 노화에 의한 것은 내공으로 해결됩니다.
내공은 이제 한번 축적하면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 소유 개념이라서 쪼그라들진 않습니다. (게임에서 스킬 안쓰면 마나 만땅인 것처럼)
심득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다만 심득 자체를 부각 시키지 않고 깨달음이라는 일종의 경험치 형태로 싹 묶어서 사람마다 얻는 게 다릅니다.
마화천의 무형지기가 제갈 사혁이나 천중기가 쓰는 것과 다르 듯.
그리고 또 한가지 화산의협에는 경지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습니다.
제갈 사혁이 쓰는 어검술을 심검이라 칭하고 마화천이 쓰는 걸 무형검이라고 칭했을 때
두 사람의 경지는 신무협 기준으로 대충 화경이나 현경에 도달했습니다.
아무리 작가 설정이라고 해도 제갈 사혁의 나이가 스물 하나인데 회귀했다고 해도 화경이나 현경이 말이 됩니까?
그렇기 때문에 화산의협은 경지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주인공이라서 그냥 무형지기를 쓴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그 경지를 없애니까
1:1로 싸울 때 제갈 사혁이 상대에게 애먹는 것도 1: 다수에서 압도적으로 이기는 것도 글 쓰는데 정도 자유로웠습니다.
환골탈태에 대한 설정도 이 덕분에 쉬웠습니다.
실제로 천중기가 환골탈태를 안했다고 언급하는 것도 화산의협에 '경지'가 없다는 걸 어필한 것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