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 회: 여정의 끝. -->
“건방진 놈.”
턱을 맞고 무릎을 꿇은 흑도섬이 검을 뽑으려 하자 제갈 사혁은 그보다 먼저 발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흑도섬. 강호무림의 전설적인 무림인. 하지만 그 전설도 오늘로 끝이다!”
제갈 사혁은 호황을 뽑은 순간 가로로 검을 휘두르며 흑도섬의 눈을 노렸지만 살기를 감지한 흑도섬은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공격범위에서 벗어났다.
섬혼참(嬐魂斬).
검을 거꾸로 뒤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자 그 순간 제갈 사혁의 검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내려치기에 대한 기본적인 막기 자세는 검을 가로로 들고 막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흑도섬은 검과 검. 칼날의 끝.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간격으로 내려치기를 막아냈다.
한쪽 눈에 안대를 쓰고서도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다니 정말 엄청난 집중력이 아닐 수 없었다.
마화천도 대단하지만 역시 흑도섬이었다.
“!”
흑도섬이 그대로 검을 살짝 옆으로 틀자 정교하게 마주본 검끝은 틀어졌고 그대로 흑도섬의 칼날은 제갈 사혁의 왼쪽 가슴을 노렸다.
도검불침의 몸이지만 어째서인지 그 공격은 반드시 피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고 제갈 사혁은 재빨리 바닥을 구르며 공격을 피했다.
“아차차~ 도검불침이랬지. 그런데 왜 피하는 거야? 맞아도 안 아프잖아.”
그러면서 흑도섬은 칼날에 미세한 검기를 씌웠다. 일반적인 검기보다 내공의 밀도가 적지만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닿으면 죽는다.’
흑도섬은 기세가 남달랐다. 제갈 사혁이 정신적인 압박을 느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검을 휘두를 때마다 위압감 같은 게 느껴졌다.
‘뭐지?’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흑도섬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 잔상 같은 게 보였다. 그렇게 잔상 같은 게 하나 둘 늘어나더니 방안을 꽉 채웠다.
“아이쿠~ 한 눈 팔면 안 되지.”
과장된 말투와 행동을 보이며 흑도섬이 검을 휘두르자 제갈 사혁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그의 공격을 피하고 그의 왼쪽 팔을 벴다. 하지만 흑도섬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최근에 이 경지에 오르게 됐지. 외공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편하더라고 도검불침(刀劍不沈).”
“...........”
설마하니 흑도섬이 도검불침의 경지에 올랐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제갈 사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검불침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다.”
제갈 사혁은 호황의 손잡이를 세게 쥐고 검기를 발산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검기가 발산되지 않았다.
“!”
“지금 네 표정 볼만하군. 왜? 검기가 나오지 않나보지?”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당하자 제갈 사혁은 동요했고 마음의 빈틈은 곧 적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온 흑도섬은 제갈 사혁의 멱살을 잡은 뒤 그의 복부에 검기가 서린 칼날을 찔러 넣었다.
“컥!”
제갈 사혁이 각혈을 뱉자 그 피가 흑도섬의 옷에 튀었다.
“도검불침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다..... 였던가? 그 말 그대로 돌려주마. 꼬마야.”
“이 새끼가!”
흑도섬의 비아냥거림에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제갈 사혁은 이를 악물고 흑도섬의 턱을 후려 쳤다.
흑도섬의 무자비한 일격에 부상을 입고도 상대를 공격하려는 그 의지는 이미 육신의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턱을 맞은 흑도섬이 쓰러지자 제갈 사혁은 복부에 박힌 검을 뽑아내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젠장....’
제갈 사혁의 몸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내공을 움직여 자율회복에 들어갔지만 내장이 상한 터라 쉽지 않았다.
‘출혈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제대로 바람구멍을 뚫었군. 이 망할 자식!’
제갈 사혁은 호황에 다시 한 번 내공을 불어넣었지만 역시나 검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검상을 입은 것 외에는 그다지 뚜렷한 문제점이 없었다.
‘검기는 사용할 수 없지만 내공권도 가능하고 기의 흐름도 문제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저게 뭔가를 하고 있겠군.’
방안을 감싸고 있는 아지랑이 혹은 잔상처럼 보이는 것.
제갈 사혁이 생각하고 있는 게 맞으면 저것은 아마도 흑도섬이 일부러 만들어낸 것이 분명했다.
“너 이 자식.... 무슨 짓을 한 거냐?”
“별 거 아니다. 그저 검기를 흩날렸다고나 할까? 쉽게 말해 검기를 얇게 입혀서 검을 휘두른다. 그리고 그 얇은 검기를 허공에 뿌려 남긴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려나?”
천천히 몸을 일으킨 흑도섬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실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검기를 허공에 남긴다?’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방안을 감싸고 있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 검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창의력 하나는 끝내주는군.”
“사실은 검현군과 싸울 때 쓰려고 만든 건데 검현군과는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어서 말이다.”
싸울 수 없어서가 아니라 싸울 필요가 없다? 말하려는 뜻은 알겠는데 뭔가 말의 어감이 달랐다.
제갈 사혁은 부상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무슨 뜻이지? 정확히 알고 싶군.”
“천중기에게 지고 나서 더 이상 우리 둘 간의 싸움은 의미 없어졌다는 말이다.”
“........”
“천중기를 죽이는데 힘을 합쳐야 했으니까.”
그 말은 꼭 검현군과 흑도섬이 내통을 하고 있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제갈 사혁의 감출 수 없는 표정에서 그의 생각을 읽어낸 흑도섬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서로 합의한 것은 없다. 다만.... 놈은 팔을 잃고 나는 눈을 잃었기 때문에 서로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두 사람은 천중기에게 패배하고 난 후 오직 천중기를 죽이기 위해 수련을 거듭했다. 뭐 말만 들어보면 그럴 듯 했다. 하지만......
“뭔가 했더니 그런 뜻이었나? 역시 패배자들의 넋두리는 못 들어주겠군.”
“........”
“천중기를 죽이기 위해 수련을 해? 천중기가 뭐 때문에 너희를 살려줬다고 생각 하는 거냐?”
제갈 사혁은 흑도섬을 비웃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뭐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 그러라고 살려준 거다.”
“무슨 뜻이냐?”
“정사대전이 끝나고 20년.... 20년 동안 너희는 천중기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다고 말하는 거다. 화과산 원숭이들아.”
“무슨 뜻이냐니까!”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던 흑도섬이 처음으로 동요를 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천중기는 흑도섬에게 증오의 대상이며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천중기를 이길 수 없으니 검현군과 힘을 합치자. 천중기를 이길 수 없으니 흑도섬과 힘을 합치자. 너희 둘 다 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
침묵은 긍정의 뜻이었고 흑도섬의 속내를 떠본 제갈 사혁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흐하하하하! 그게 천중기가 그토록 원하는 거란 걸 왜 모르는 거냐?”
“뭐야?”
“천중기는 간을 본거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는 천중기 만큼이나 오만하기 때문이다.
“한 놈씩 싸우면 시시하지만 너희 둘이서 덤비면 싸울만 하겠다고 생각한 거다. 그래서 천중기는 네놈들에게 ‘구실점’을 만들어줬다. 이렇게 말하면 머리 나쁜 네놈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잘 알텐데?”
“뭐냐? 그럼 천중기가 일부러 우리를 살려뒀다는 거냐? 둘이 힘을 합치게 만들기 위해?”
잃어버린 눈과 잃어버린 팔은 흑도섬과 검현군이 힘을 합치도록 만들기 위한 구실점이었다? 흑도섬은 인정할 수 없었다.
“......”
제갈 사혁은 복부출혈이 멈추자 슬슬 행동을 개시했다.
“그럼 질문을 하나 하겠다. 내가 이곳에서 네게 지면 너는 어떻게 할 거냐? 나를 죽이지 않고 대신 내 팔을 벨 거냐? 아니면 내 눈을 찌를 거냐? 그것만 생각해봐도 답은 나와있다.”
“닥쳐........”
흑도섬의 이성이 흔들리자 제갈 사혁은 조소를 머금었다.
“죽이면 될 것을 왜 그렇게까지 해서 살려뒀을까? 왜 살려둬야만 했을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거냐?”
“닥치라고 했다.....”
“아니면 사실은 알면서 모른 척 했던 거냐?”
“!”
그 순간 흑도섬의 얼굴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정답을 말해줄까? 거지인 척하고 행인을 놀리는 부자는 천중기. 거지를 비웃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거지에게 조롱거리가 된 행인은 너 그리고 천중기를 제외한 모든 무림인.”
============================ 작품 후기 ============================
솔직히 이번편 쓰기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사실상 이제 마지막 네임드라고 할 수 있는 흑도섬이기 때문에 육체적 손상보다는 정신적 손상을 주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대사도 뭔가 있어보여야 하고 아무튼 좀 그렇습니다.
너무 길어지면 축 늘어질만한 에피소드라 가능하면 다음편 혹은 그 다음편으로 이 쳅터를 끝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