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회: 여정의 끝. -->
그래. 녀석의 말대로 사실은 알고 있었다. 천중기가 자신의 목숨을 거두지 않은 것은 유희를 끝내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애송이는 한 가지 잊고 있는 게 있다.
“너 역시 나와 다르지 않다!”
세차게 검을 휘두르자 제갈 사혁은 왼쪽 팔로 머리를 감싸 흑도섬의 일격을 막아냈다.
왼팔에서 피가 흘러내리지만 제갈 사혁은 반보를 펼쳐 흑도섬의 품으로 파고든 뒤 아래에서 위로 흑도섬의 턱을 장타로 쳐냈다.
‘천공(天功).’
목이 뒤로 꺾이자 왼손을 뻗어 흑도섬을 밀어냈다.
구석으로 그를 밀어낸 제갈 사혁은 일권복호(一拳伏虎)를 펼쳐 흑도섬의 복부를 강타했다.
“하아아!”
기합소리와 함께 또 다시 일권복호를 날리며 그렇게 총 스물다섯 번 같은 초식을 반복해 때림으로서 복호백열격(伏虎百閱拳)이라 부를 수 있었다.
흑도섬이 무릎을 꿇자 제갈 사혁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역사의 주인은 네가 아니다! 그만 무대 위에서 사라져라!”
떠돌이 낭인으로 시작해 검에 목숨을 걸고 검으로 명성과 명예를 얻었다. 수많은 싸움 속에서 언제나 살아남았다. 그런데 고작 이따위 애송이에게 질 수 없었다.
“건방 떨지 마라. 애송이!”
흑도섬은 몸을 일으키면서 머리로 제갈 사혁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나는 흑사련 최고이며 칠웅(七雄)! 일절(一絶)! 흑도섬이다!”
흑도섬이 검을 휘두른 순간 제갈 사혁은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저항도 하지 못하고 벽을 뚫고 나가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실로 엄청난 힘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일이냐?!”
벽을 뚫고 나간 곳은 다름 아닌 계림지부장으로 예정된 소공의 집무실이었다.
소공은 갑자기 젊은 무사 한명이 벽을 뚫고 나오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서 이곳을 나가시오. 지부장!”
“흑도섬 대협?”
“어서 나가시오!”
“알겠소!”
무슨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흑도섬이 저리 말한다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백사대! 백사대를 불러라!”
소공은 밖으로 나가면서 백사대를 불렀고 제갈 사혁은 입안에 들어간 돌을 뱉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칠웅 일절? 네가 말하는 칠웅이 칠객이라면 이미 한참 전에 그 잘난 놈들을 둘이나 은퇴시킨 게 바로 나다!”
흑도섬이 거세게 몰아치자 제갈 사혁은 시각에 모든 기운을 집중해 흑도섬이 휘두르는 검의 궤도를 읽은 뒤 손가락으로 튕기듯 그의 검 끝을 쳐내고 그 사이에 생긴 빈틈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어림없다!”
흑도섬이 퇴보를 밟아 뒤로 빠지려 하자 제갈 사혁은 두 손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붙잡고 무릎으로 복부를 때린 뒤 빠르고 좌우로 주먹을 휘둘렀다.
“컥!”
“너를 죽이고 천중기에게 다가서겠다. 나는 무림(武林)에 존재하는 모든 대호(大虎)의 왕이자 무극지적(無極地敵)! 이 땅 아래 유일한 하늘의 적이다!”
제갈 사혁의 오만한 일갈(一喝)에 흑도섬은 이를 갈았다. 이 애송이가 천중기의 유일한 적이 되겠다고 말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둔탁한 주먹이 코뼈를 으스러트렸지만 흑도섬은 절대 지지 않았다. 아픔도 잊은 채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흑도섬의 검은.......
“이게 너의 한계다.”
“!”
...... 제갈 사혁을 베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제갈 사혁을 베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너만 상대의 내공을 봉쇄할 수 있다 착각하지 마라. 나는 이미 오래전.”
그러면서 사혁은 흑도섬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고 천천히 펼치며 다시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너를 내 손바닥 아래에 두었다.”
중요한 것은 흑도섬의 몸에 내공이 한줌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시각 밖에서는 백사대와 흑도섬을 보기 위해 몰려온 사파인들과 낭인들로 북적거렸다.
“뭣들 하느냐!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
소공은 계림지부에 대기 중이었던 백사대가 거처에 도착하자 그들에게 안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지만 백사대 단주는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하오나..... 침입자가 제갈 사혁이라면 본디 흑도섬 대협께서는 비무 중이실 겁니다.”
흑도섬의 비무를 방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공은 달랐다. 소공은 계림의 지부장이고 흑도섬 개인의 명예보다 조직의 전력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상관없다! 어서 들어가서 대협을 도와라!”
“하지만 흑도섬 대협이십니다!”
그 말 한마디는 흑사련의 자존심이며 흑사련 최고의 고수인 흑도섬을 따르는 수십만 사파인들의 마음이었다.
“대협께서 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맞는 말이다. 허나.....”
“믿으십시오.”
언젠가 노력하면 나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다. 흑도섬을 우러러보는 이들의 마음은 동경 그 이상의 것이었다. 흑도섬은 그들이 꿈꾸는 자신들의 가장 이상적인 미래였다.
그로부터 몇시진이 흐르자 내부에서 굉장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이를 지켜보던 이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거대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모두의 시선이 오직 한 곳에 닿아 있을 때 천천히 문이 열리고 흑도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흑도섬의 얼굴을 본 흑사련 소속 무사들과 사파의 무림인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분명 문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흑도섬이지만 누군가 정신을 잃은 흑도섬을 질질 끌고 와 문 앞에 데려다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뒤에서 흑도섬의 목을 움켜쥐고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자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분노가 계림을 집어삼켰다.
“이건 꿈이야..... 이건 말도 안 돼!”
“절대 살려 보내지 않겠다!”
“으아아아!”
저주가 섞인 말은 제각각이었지만 마지막엔 하나가 되어 외쳤다. 그 증오스러운 이름을.
“제갈 사혁! 너를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흑도섬의 목뼈가 부러지는 그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곳에 남아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흐하하하하!”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제갈 사혁은 광소를 터트렸다. 마치 이렇게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제갈 사혁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자 분노로 가득 찬 사파의 무림인들이 사방에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이 만들어낸 그물 속에 갇힌 제갈 사혁은 사방으로 내공을 발산해 절대다수를 압도했다.
상대의 눈을 빼앗아 그에게 세상을 빼앗고 상대의 팔을 잘라 그의 꿈을 꺾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공세는 멈출 줄 몰랐다. 마치 산불처럼 번져만 갔다.
그들 중에는 검기도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그들은 검을 휘둘렀다. 도검불침이건 금강지체이건 그런 건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싸움은 하루를 넘기며 장기전으로 이어졌고 분노의 불길이 사그라진 것은 태양이 뜨기 전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로 아침을 알리는 매미의 소곡(小曲)을 대신하며 제갈 사혁은 곰방대에 불을 지폈다. 곰방대의 재를 털어내고 길을 나서려하자 누군가 제갈 사혁의 발목을 무언가로 때렸다.
“..........”
그게 무언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무언가로 때린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른 것이었다.
때릴 힘도 없으면서 제갈 사혁을 향한 그 증오를 삭히지 못해 손가락으로라도 그를 찔러 어떻게 해보려했던 것이다.
제갈 사혁은 입술을 삐뚤빼뚤 움직이더니 그자의 머리를 발로 차 기절 시켰다.
그들은 분명 약자다. 자신을 보면 겁을 먹고 도망치지 급급한 겁쟁이들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자신과 싸우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야.”
길을 떠나는 제갈 사혁의 등 뒤로 태양이 떠오르고 마침내 아침이 밝아왔다. 그리고 그날 이 사건으로 전 무림의 판도는 뒤바뀌게 된다.
검현군. 흑도섬. 마화천으로 이뤄진 무림 3인 체제가 무너지고 제갈 사혁과 마화천으로 좁혀지게 된다. 마화천은 검현군을 꺾었지만 제갈 사혁에게 패했기 때문에 사실상 천중기를 제외한 현존 무림 최고수는 제갈 사혁이 되었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 둘이었다.
이번 일로 흑도섬을 잃고 거기에 백사대와 계림지부가 전멸한 흑사련은 엄청난 타격을 입은 듯 했으나 오히려 흑사련에 가입하려는 낭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흑도섬은 비록 죽었지만 낭인의 몸으로 이름을 날린 흑도섬에게 감화된 자들이 제 2의 흑도섬을 꿈꾸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이걸로 흑도섬 편은 끝입니다.
사실 3권 1차 수정이 월요일 오후에 끝나서 어제 연재를 하려 했는데 흑도섬을 어떻게 처리해야 인상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일단 연재를 하기전 계속 고민을 하다 '꿈'을 키워드로 삼았습니다.
흑도섬은 지지세력도 없이 무림 최고수가 되었죠.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수많은 연고없는 낭인들 그리고 내세울 것 없는 사파인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결국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흑도섬은 제갈 사혁의 손에 죽지만 흑도섬을 꿈꾸는 이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라는 90년대스러운 느낌을 가미했고
제갈 사혁은 늘 그렇듯 '너희의 의지도 용기도 알겠지만 그래도 나의 힘 앞에는 무의미하다' 라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다음편은 떡밥을 뿌린 만큼 다시 배교로 이야기의 포커스를 집중 시켜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