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회: 마도천하(魔道天下) -->
동굴 안에는 두 명의 사내가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일이 다 끝나니까. 피곤하더라.”
한쪽은 자신의 무용담을 쉬지 않고 떠들어댔고 한쪽은 묵묵히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할 생각이냐?”
그 물음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봉명공이었고 그 물음 받은 사람은 제갈 사혁이었다.
잠시 봉명공을 멍하니 쳐다보던 제갈 사혁은 뒤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해야지. 그러는 너는 언제까지 거기에 있을 거냐?”
“..........”
대답은 없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했다.
대답이 없다는 건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에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봉명공은 소림의 어두운 동굴 안을 나올 것이다. 그게 언제가 되었든.....
“가는 것이냐?”
봉명공의 숙모인 화연은 빗자루를 들고 봉명공이 있는 회계동 주변을 쓸고 있었다. 화연은 마교에서 빠져나온 뒤 소림사 근처에 집을 구하고 이렇게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봉명공이 있는 회계동 주변을 쓸고 있었다.
“절밥이 입에 맞지 않아 당분간 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다음에 왔을 땐 속세의 밥을 먹고 싶습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안녕히 계십시오.”
“살아서 보자구나. 꼬마야.”
숭산을 내려오면서 나뭇잎이 머리에 떨어지자 그것을 떼어낸 제갈 사혁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제갈 사혁이 흑도섬을 쓰러트리고 그로부터 상당히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새 나뭇잎이 물드는 계절이 찾아왔다.
그동안 강호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무림맹의 백사단은 제갈 사혁이 흑사련의 백사대를 전멸시켜 그 이름을 백사단에서 백사대로 바꾸었고 흑사련에서는 과거 칠객(七客)의 남은 4명이 마화천에게 도전하다 4명 모두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로서 마화천은 상징적 의미에서 흑사련 최고의 검사가 되었다. 배교는 놀랍게도 마교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며 그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마교는 의외로 잠잠했다. 배교와의 싸움에서 연전연패(連戰連敗)를 거두고 있지만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강호인들은 알고 있었다. 정사대전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남에서 섬서로 돌아온 제갈 사혁은 흑도섬과의 일전 이후 제갈 사혁은 줄곧 화산파에 기거하고 있었다.
무림맹에 있으면서 정파인들의 사기를 불어넣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일환의 하나로 제갈 사혁은 스승인 도호진인과 바둑을 두었다. 바둑을 생전 처음두기 때문에 늘 지기만 하지만 그것이 무공수련 이외에 스승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였다.
“많이 늘었구나.”
“스승님의 가르침 덕입니다.”
“예전부터 너는 한번만 가르쳐주면 뭐든 척척 해내서 가르치는 재미가 없었는데 어찌된 것이 무공보다 바둑을 가르치는 게 더 재미있구나.”
제갈 사혁은 바둑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돌을 둘 때마다 도호진인에게 질문을 하는 등 무공을 익힐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때문에 도호진인은 제갈 사혁에게 바둑을 가르치는 행위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감사합니다.”
말은 많이 늘었다고 하지만 제갈 사혁은 바둑돌을 쥐는 법조차 제대로 따라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스승과의 바둑을 마무리한 뒤 제갈 사혁은 이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신은 요즘 제갈 사혁의 사숙들에게 둘러싸여 검사를 받는다. 아무래도 일전에 천중기가 격체전공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검사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무의식중에 제갈 사혁과 같은 행동을 보인다는 것 정도였다.
예를 들어 기수식을 잡지 않고 검술을 구사한다던가? 제갈 사혁과 식성이 비슷해졌다던가? 하는 것들이었다. 아직까지 격체전공이 시전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밝혀진 게 이 정도 밖에 없지만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발견이었다.
“사숙. 사백.”
“온 김에 글을 좀 써 보거라.”
“네? 무슨 글을.....”
도유진인과 도청진인은 대뜸 제갈 사혁에게 붓을 들게 했고 사혁은 별 생각 없이 입신출세(立身出世)라는 글을 썼다.
“너답다면 너답지만 써도 꼭 이런 걸 써야겠느냐?”
도유진인은 제갈 사혁이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고 제갈 사혁은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후 이신에게도 똑같이 입신출세라는 글을 쓰게 하게 두 글을 비교했다.
“필체의 차이는 없는 것 같군.”
“뭐 이만하면 되었다. 오늘은 쉬거라.”
“네. 사백조. 사숙조 어르신.”
모든 검사가 끝나자 이신은 제갈 사혁과 함께 화산파 밑에 자리한 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겼다.
“사부. 왜 여기로 온 거에요?”
이신은 화산파를 내려와서 굳이 목욕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냐는 식으로 따졌다.
“온천이잖아.”
“무종 사숙이 그러는데 여기 온천 아니래요. 그냥 뜨거운 물이라던데요. 화산(華山)에서는 온천수가 나올 수 없데요.”
그 말을 들은 제갈 사혁은 웃으면서 이신의 등을 세게 때렸다.
단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자리가 필요해서 온 건데 정작 이 녀석은 한다는 소리가 가짜 온천이니 뭐니 따지고 있는 게 우스웠다.
“일일이 그런 거 따지지 마. 그런데 너 괜찮냐?”
“격체전공 말씀이세요? 그거라면 괜찮아요. 문제없잖아요. 단지 사백조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부의 영향을 받는 거라면 전 좋아요. 나쁘지 않잖아요.”
“이신이라는 한 사람의 인격이 변화하는데도?”
“사람은 언젠가 변해요. 남궁세가를 떠나면서 다짐했어요.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물론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 건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의 제가 좋아요.”
제갈 사혁 입장에서는 이신이 첫 살인을 했을 때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격체전공의 영향이었다.
살인을 처음 한 열 여섯 살짜리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부는 어떠세요?”
“뭐가?”
“이제 남은 건 마교 교주뿐이잖아요. 이렇게 여유부리고 계셔도 되요?”
이신이 그런 걸 다 걱정해주자 제갈 사혁은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 지금 이 상황은.”
“네?”
제갈 사혁은 천중기가 움직여주기를 기다렸다.
‘그 아저씨가 먼저 뭘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너 아직 술 할 줄 모르지?”
그러고 보니 제갈 사혁은 아직 이신에게 주도(酒道)를 가르치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나이도 어느 정도 됐으니 슬슬 술 마시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네.”
“씻고 나면 주루나 가자. 아니 기루가 좋겠네. 예쁜 누나들 끼고 마시는 술이 제일이지!”
“청하 누나한테 말할 거예요.”
“아! 사천으로 가서 청하 소저와 함께 주루에서 마실까?”
“기루에는 안가요?”
기루에는 안가냐는 말에 제갈 사혁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뭐야~ 우리 이신 공자는 예쁜 누나들이랑 술이 마시고 싶었던 거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평화로운 하루가 또 지나갔다.
같은 시각 서장에서는 배교 교주인 연곡진이 각 천주들을 소집하고 향후 전략에 대해 회의를 했다.
“천주도 몇 명 남지 않았군.”
배교의 중책을 맡고 있는 천주들의 수는 이미 상당히 줄어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제갈 사혁에 의해 살해당했고 가장 중요한 사람인 흑호는 천중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배교는 무림의 신흥세력으로서 출세를 빌미로 그간 무림맹과 흑사련에 불만이 많았던 방소방파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연곡진 중심의 명령체계 잡기위해 중소방파의 각 우두머리들을 죽이거나 유배지로 보내 가뒀다.
중소방파의 엄청난 세력을 단번에 취하게 됐지만 지휘체계가 잡히지 않아 그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아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식으로 여태까지 버텨왔다. 그런데 최근 전투에서 천주들이 잇달아 사망하자 배교를 통솔하는데 어려움이 생겼다.
마교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고는 하나 전투를 치룰 때마다 천주가 죽는 일이 생겼다. 때문에 병력 통솔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병력을 통솔해야 하는데 누가 해보겠느냐?”
“제가 해보겠습니다.”
병력을 통솔하겠다며 대뜸 나선 이는 다름 아닌 가울이었다.
가울은 서장을 지배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자였다. 또한 무공실력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젊은 고수로서 배교 내에서는 가장 입지가 탄탄한 인물이었다.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좋다. 가울에게 전권을 주겠다. 나를 대신해 마교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라.”
회의가 끝나자 가울은 기세등등하게 회의장을 나섰다.
“드디어 실력 발휘할 때가 왔군!”
“가울.”
“뭐냐?”
애초에 주공이 흑호의 제자라서 천주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가울이기 때문에 주공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원수를 대하는 듯 했다.
“잘해라.”
“네년이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다. 건방지게 훈수 두려 하지 마라.”
“.........”
자신을 무시하는 가울의 태도에 주공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편 배교 내에 자리 잡은 주루에서는 배교의 무사들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번 전투에서 서른 명 가까이 침투시켰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다른 배교의 무사들보다 볼품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년의 남자는 마치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처럼 행동하며 그들에게 보고를 받았다.
“현재 어느 정도 장악했느냐?”
“원래 살막의 출신이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6할 정도 장악했습니다.”
6할이면 실로 엄청난 수였다.
“7할로 늘려라.”
“그건 불가능합니다. 7할 정도로 장악력을 높이려면 당하령(唐瑕怜). 그 계집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계집이 천주 주공의 심복이라 처리하기 힘듭니다.”
“대장님. 가울입니다!”
가울이 온다는 말에 그들은 흩어져서 술을 마시는 척 연기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가울이 자신의 부하를 대동한 채 나타나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천주님을 뵙습니다!”
“천주님을 뵙습니다!”
일제히 자신을 향해 예를 갖추자 가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 내가 배교의 전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각 부대의 대장들은 내 집무실로 오도록.”
가울이 자신의 할 말만 하고 나가버리자 그들은 또 다시 중년의 남자 곁으로 모였다.
“흥! 저런 멍청한 놈이 전 병력을 지휘한다니 배교도 인재가 없군요.”
자신의 부하가 가울을 멍청이라며 비웃자 중년의 남자는 그를 제지했다.
“말이 심하군. 우리의 계획에 가장 크게 협력한 자가 아닌가.”
계획에 가장 크게 협력한 자라는 말에 그 주루에 있는 모든 배교의 무사들이 박장대소를 하여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하하하하! 내 맞습니다. 그자 덕에 이 작전이 별 무리 없이 성공했습죠.”
마치 자신들은 배교의 무사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 자들의 몸에는 저마다 성화(聖火)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부하를 끌어 모았으니 부하의 얼굴을 모르는 건 당연하지.....”
“그렇습니다. 대장님.”
그들은 모두 마교의 무사들이었고 그들의 말대로 이미 배교의 상당수는 마교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실 서장을 두고 배교와 벌인 전투는 싱겁기 짝이 없었다. 배교는 중소방파에서 긁어모아 병력을 만들었고 충성심 없는 중소방파의 무림인들의 실력이 뛰어날리 없었다. 그러다보니 초반에는 마교의 압승이었다. 그런데 상부에서 어떤 명령이 내려오자 배교와 마교의 전쟁은 달라졌다.
그 명령이 내려온 날부터 마교는 배교에 연전연패(連戰連敗)를 거듭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패배였다.
전쟁터에서 하나둘 중소방파의 무림인들을 죽인 뒤 그들의 신분패와 복장을 손에 넣어 신분을 위장하고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은밀하게 처리한 뒤 그 빈자리를 또 다른 마교인으로 채웠다.
배교에 종속된 중소방파는 총 10곳이 넘었지만 중소방파 간에도 정파와 사파로 나뉘고 또 같은 정파나 사파 내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몰랐다. 게다가 그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해야 하는 배교에서도 정작 자신들의 수족이 될 중소방파에 관심을 두지 않아 거짓으로 신분을 위장해 침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투를 치룰 때마다 중소방파 한곳을 전멸 시켜 그 수만큼 인원을 채우고 전투에서 패한 것처럼 꾸며 마교가 물러나면 중소방파의 무림인으로 변장한 마교의 무사들은 아무 의심 없이 배교로 돌아갔다.
“모든 건 신교를 위해!”
“마도천하(魔道天下)!”
그들의 몸에 새겨진 성화는 더욱 붉게 타올랐다.
============================ 작품 후기 ============================
글 쓰다가 중간에 1초간 정전이 되서 컴퓨터가 다운됐습니다.
쿨러가 맛이 가서 자동저장도 10초 설정 해놓은 거 40초 늘렸더니 반페이지가 날아가서
한동안 뻥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막페이지였는데.....
컴퓨터 말고 딱히 전력낭비 하는 것도 아닌데 1초 정전이라니....
이런 젠장! 막페이지에 정전이라니! 막쪽에 정전이라니!
쿨러도 맛이 갔고 사양의 한계도 느끼고 슬슬 컴퓨터를 바꿀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떡밥 회수 거의 한 것 같습니다. 애초에 봉명공 설정 빼고 무리하게 벌려놓은 게 없어서 회수할 때 편하네요.
어제 7k였기 때문에 오늘은 분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