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 회: 미혼지인(迷魂之人) -->
방어선이 뚫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배교는 발칵 뒤집어졌다. 방어선이 뚫렸다는 사실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소식이 천중기의 당도와 함께 전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연곡진은 의자의 팔걸이를 으스러트리며 이를 갈았다. 여태까지 마교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배교였다. 그런데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지다니 믿을 수 없었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천중기라 하더라도 방어선에 투입된 병력의 수를 생각했을 때 이 정도로 빨리 본단에 당도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전령과 거의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막주님. 이렇게 된 거 언젠가 한번은 부딪혀야 할 상대입니다.”
주공은 연곡진을 진정시킨 뒤 언젠가 맞서야 할 상대라는 것을 인지시키며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군.”
그녀의 말대로 배교의 대업을 이루려면 빠르건 늦건 언젠가는 천중기를 쓰러트려야한다.
“막주. 제게 맡겨주십시오. 천중기의 목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가울은 좌우로 목운동을 하며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마교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그였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연곡진은 본단에 있는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나가 천중기와 결판을 낼 생각이었다.
먼지바람을 맞으며 문을 열고 당당히 마교의 세력과 마주본 연곡진은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외쳤다.
“천중기 직접 올 줄은 몰랐군.”
두 병력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치중이었는데 갑자기 마교 쪽에서 천중기가 걸어 나오더니 배교의 공격권에 들어와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자기 집 안방 마냥 행동했다.
“살수집단의 애송이가 배교의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꼴이 참으로 우습군.”
“닥쳐라!”
살막 출신의 배교 무사가 천중기에게 일갈을 터트리자 천중기는 허공에 팔을 휘저어 누군가를 불렀다.
마교 쪽에서 누군가 다가오자 배교의 무사들은 검을 뽑았고 천중기가 부른 자는 머리에 쓰고 있는 방립을 벗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자신의 부하에게 이름이 무엇이냐 묻자 그는 잠시 후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장원공(壯元珙)입니다. 교주님.”
장원공. 그렇게 특이한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평범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럼 네 외조부의 이름이 무엇이냐?”
“배교 제 17대 교주이신 조(朝)자 성(成)자 되십니다.”
그의 입에서 배교 교주의 이름이 나오고 스스로 배교 교주의 핏줄임을 밝히자 연곡진을 중심으로 한 배교의 무리들은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무얼 하느냐? 살막의 애송아. 주인에게 머리를 조아려라.”
진정한 배교의 주인이 나타났다 말하자 연곡인은 잇몸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닥쳐라! 그가 배교의 혈통이라는 사실을 어찌 입증할 것이냐?”
연곡진은 그가 정말로 배교의 혈통인지 증명해보라고 했고 천중기가 고개를 까닥거리자 장원공이라는 자의 몸에서 어떠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본 연곡진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배교 교주만이 익힌다는 마혼십형기(魔魂拾形氣)이기 때문이다.
“............”
연곡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의 부하들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배교의 무사 대부분이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수백 명에 이르는 부하들이 무릎을 꿇자 연곡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중에 십여 명 정도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살막출신의 배교 무사들이었다.
“뭐하는 거야! 어서 안 일어나!”
배교의 전 병력을 통솔하는 가울은 부하들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습을 본 천중기는 연곡진을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무엇하느냐? 부하들이 주군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네. 교주님.”
장원공은 천중기의 명령대로 배교의 무사들에게 명을 내렸고 그것은 다름 아닌.....
“역도(逆徒)들을 처단하라.”
명령이 떨어진 순간 배교의 무사들 사이에 멀뚱멀뚱하게 서있던 살막출신들의 목에 칼을 꽂히며 제압했다.
연곡진을 제외한 가울과 주공 그리고 살막출신의 무사들. 열 명 남짓한 병력만 남은 채 순식간에 적진 한 가운데 있는 상황에 빠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배교의 본단에서 불길이 일어나며 본단 안에 대기 중인 다른 천주들의 생존도 확인할 수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孤立無援).
“흐하하하하~ 어떠냐? 이것이 네가 말하는 배교인 것이냐?”
천중기가 ‘연곡진의 배교’를 비웃자 연곡진은 심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천중기!”
연곡진이 마혼십형기를 펼치자 등 뒤에 있는 배교의 무사들이 연곡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놈들 변절자가 된 것도 모자라 감히 주군께 검을 휘두르다니 미친 것이냐!”
살막출신의 배교 무사가 연곡진을 보호하기 위해 배극구검을 펼치자 연곡진에게 검을 휘두른 배교의 무사들은 마선십강검(魔璇十强劒)을 펼쳐 그자의 몸을 도륙했다.
“마교?”
마선십강검을 알아본 주공은 배교의 무사들이 마교의 무공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검법은 분명 마교의 것이었다. 게다가 마교 내에서도 높게 쳐주는 상승 무공.
“정체를 밝혀라!”
주공의 외침과 함께 배교의 무사들은 저마다 소매며 바지며 제각각 옷을 찢기 시작했다. 옷이 찢어져 맨살이 드러나자 그곳엔 마교인임을 뜻하는 붉은 성화가 새겨져 있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배교의 전체에 가까운 병력이 전부 마교인이었다는 사실에 주공을 포함한 그들 모두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너희가 우리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때 마교의 무리사이에서 좌호법 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좌호법 우사는 실제로 배교에 대항해 마교를 지휘한 자였다. 달리 말하면 마교에 연전연패(連戰連敗)를 가져다 준 패장(敗將)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우사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던 가울은 특히 우사의 말에 민감했다.
“거기 꼬마. 부하의 얼굴은 기억하느냐?”
“뭐?”
뜬금없이 부하의 얼굴을 기억하냐고 묻자 가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희 배교는 배교라는 이름을 앞세워 정파와 사파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그들을 제어하기 위해 그들의 주군을 죽이고 그 세력을 집어삼켰다.”
여기까지는 사실이었다. 실재로 그리했으니까.
“그래서 교주님께서는 생각하셨다. 만약 전쟁을 이용해서 병사를 바꿔치기 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
전쟁을 이용해서 병력을 바꿔치기하다니 중소방파의 문주들을 죽이자고 건의했던 주공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처음에는 10명을 투입시켰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출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전투가 일어날 때마다 병력을 침투시켰다. 하나 둘 그리고 결국에 배교 전체를 집어삼켰다.”
“말도 안 돼!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주공이 거세게 부정했지만 우사는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너는 병사들의 이름을 아느냐? 병사들의 얼굴을 아느냐? 살막출신이 아닌 이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
주공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중소방파의 문주들을 죽이고 그 병력을 취했을 때 그들을 힘으로 억누르고 가족을 빌미로 협박하며 충성을 이끌어내는 것만이 최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적어도 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평생을 봐온 사이다.”
우사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연곡진은 미친 사람처럼 광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흐하하하하! 과연 마교군.”
마혼십형기(魔魂拾形氣)를 펼친 연곡진을 싸울 준비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천중기와 1:1로 싸울 생각이었다. 오만한 성격의 천중기라면 절대 이 제안을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천중기 나와 비.......”
“사실대로 말하면 여기 있는 장원공은 배교의 핏줄이 아니다.”
천중기와의 일전을 불사하려는 순간 갑자기 천중기는 장원공이 배교 교주의 핏줄이 아님을 밝혔다.
“.......”
너무 뜬금없는 고백에 연곡진은 또 다시 말문이 막혔다.
“배교 교주의 핏줄 따위 살려둘 리 없지 않느냐. 그냥 네놈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줘볼까 해서 자그마한 연극을 했다.”
그러면서 천중기는 장원공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장원공은 마혼십형기를 거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혼십형기는 주공이 옛 배교의 하부조직이었던 중소방파를 공격한 뒤 그 정수를 모아 복원한 무공이다. 현재로서는 연곡진 이외에는 이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네놈의 마혼십형기는 아직 완성이 덜 됐군. 이걸 주겠다.”
천중기는 품에서 서책을 한권 꺼내 연곡진이 있는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그 책의 제목을 본 연곡진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 책의 제목이 다름 아닌 마혼십형기였기 때문이다.
장원공이 사용한 무공은 필시 마혼십형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천중기가 준 저 책은 진본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사람을 우롱하는 것도 적당히 해라!”
연곡진이 내공을 사방으로 퍼트리자 그의 주위를 둘러 싼 마교의 무사들이 코피를 흘리거나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같은 배교의 내공심법이 아니었다면 천주인 가울과 주공은 물론이고 그의 부하들까지 같은 꼴을 당할 수 있었다.
연곡진이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 정도로 화를 내자 상체를 일으킨 천중기는 조소를 머금었다.
“네놈은 개미를 가지고 노는 행위에 우롱이라는 단어를 쓰나?”
“!”
“말해봐라. 네놈을 가지고 노는데 이 천중기가 우롱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나?”
“천중기!!!!”
참다 못한 연곡진이 천중기의 이마에 주먹을 날리자 천중기의 머리에서 출혈이 일어났다. 제아무리 천중기라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작 출혈 정도가 한계였다.
연곡진의 팔목을 붙잡은 천중기는 서서히 힘을 줘 그의 팔목을 압박했고 결국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기며 연곡진의 오른손 손목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연곡진은 비명은 물론이고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배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주제’에 본교를 적으로 삼다니 우습군.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고 자신의 업이 아닌 것을 이루려 하다니 가치 없는 삶이구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에 연곡진은 크나큰 열등감을 느꼈다.
“뭐가...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냐! 우리는 배교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거면 되지 않느냐! 그 누가 우리보다 배교의 정통성에 합당하단 말이냐!”
살막은 미천한 살수집단이었다. 업(業)으로 이룰 수 있는 부도 명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살막의 막주가 배교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배교라는 이름은 살막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되었다.
“아주 조금 그것을 삶의 지표(指標)로 삼으려 한 것이 그리도 잘못된 일이냐! 정통성이! 핏줄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 너도 결국 다를 바 없지 않느냐? 마교에서 태어나 마교인으로 자라 마교의 교주자리에 올랐다. 너도 결국 마교라는 지표가 있었기 때문 아닌가? 그런데 너와 내가 뭐가 그렇게 다르다는 것이냐?”
“멍청한 놈. 살막에서 자라 살막인으로서의 긍지는 없는 것이냐?”
“뭐?”
살막인으로서의 긍지라니 연곡진은 천중기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봐라. 저들이 너를 무어라 부르느냐? 막주다. 교주가 아니라 막주라 부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네놈은 배교의 망령에 사로잡혀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느냐?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쫓아 올라간 주제에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른다 할 것이냐? 그래서 강호가 네놈을 인정하지 않는 거다.”
나는 누구인가? 편을 나누기 좋아하는 강호무림에서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연곡진은 살막인도 배교인도 아니었다.
“멍청한 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천중기는 손가락으로 연곡진의 이마를 가리켰다.
“죽어라. 버러지 같은 놈.”
연곡진의 이마를 꿰뚫으려는 그 순간 거대한 무언가가 천중기의 손가락을 때렸다.
“이런.... 불충한 놈을 봤나?”
그것을 본 순간 천중기의 얼굴에는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속하. 주군을 뵈러 달려왔습니다.”
“아직도 내가 네놈의 주군이더냐?”
“도리를 다해 주군께 안식(安息)을 선사해드리겠습니다.”
“흐하하하! 충신이로다. 너는 고금을 통틀어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충신이로다. 백교영(伯鮫令).”
그 이름은 처음 소년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교주로부터 받은 이름이었다.
마교의 교주는 신교를 위해 희생하는 자들에게 이름을 붙여줄 의무가 있다.
물론 수많은 자들의 이름을 교주 한 사람이 지어야 하기 때문에 대충 짓는 경우가 많아 동명을 지닌 마교 무사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만은 마교 내에서 유일했다. 달리 그가 특별해서 하나의 온전한 이름을 부여해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천중기 본인이 그 이름을 만들고 나서 잊어버렸기 때문에 동명이인이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이름은 천중기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이 되었다.
백교영. 그는 신교를 배반하고 신교의 무공으로 중원무림에 그 명성을 떨쳤다.
소년은 시간이 지나 청년이 되고 어느새 중년이 된 지금 세상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백교영 아니 마화천(魔華穿). 무형검은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됐느냐?”
단 한명이었다. 어쩌면 정사대전을 종식시킬지 모르는 이 전투에 나타난 흑사련 소속 무림인은 오직 마화천 단 한 사람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완결을 코앞에 둔 놈팽이가 놀아왔습니다.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새하얗게 불태울 생각입니다.
이번편의 포인트는 천중기의 연곡진 능욕입니다.
사실 연곡진이 모든 일의 배후 세력인데 천중기에게 영혼까지 털리는 건 아니지 않나? 하실 텐데요.
배후 세력이라는 게 주인공 빼고 제일 잘난 놈이나 놈들인데 주인공이 아닌 사람에게 영혼까지 털리는 걸 써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제갈 사혁으로 연곡진을 털어보고 싶었는데 천중기로 터는 게 더 잘 털릴 것 같아서 천중기로 노선을 바꿨습니다.
제갈 사혁이 그냥 커피라면 천중기는 원빈(응????)
PS.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는 말의 유래가 뭐죠?
제 여동생이 철권 캐릭터 커스텀 마이징에 빠져서 철권을 하는데 컴퓨터에게 지고 나서 영혼까지 탈탈 털렸어! 라는 말을 씁니다.
그 영향을 받아서 저도 쓰기 시작했는데요. 영혼까지 털린다. 이 말의 유래는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