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 회: 미혼지인(迷魂之人) -->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도 무림의 판도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강적을 쓰러트리는 것 그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이 자리는 정파와 사파 그리고 마교로 이뤄진 무림의 축소판이었지만 정작 이 자리를 만든 장본인은 오히려 소외감을 느꼈다.
“나를 무시하지 마라!”
그리고 그 소외감은 연곡진이 현실감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연곡진은 천중기를 달려갔지만 그의 어깨를 붙잡은 제갈 사혁이 등 쪽에 있는 근축혈(筋縮穴)을 가격해 그의 제압했다.
“주제 파악을 해라. 버러지 이곳에 너를 위한 자리는 없다!”
힘없이 무너지며 먼지를 뒤집어 쓴 연곡진은 멀어져가는 제갈 사혁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스스로 저 자리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천중기에게 시선을 고정한 제갈 사혁은 그 순간 그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마교의 대군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천중기!”
“흥!”
제갈 사혁의 주먹이 천중기의 이마에 닿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무거워지고 주변사람들은 일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법이구나.”
제갈 사혁의 일격을 이마로 받아낸 천중기는 코피를 흘렸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즐거워보였다.
그는 제갈 사혁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 애송이는 다른 무림의 약자들처럼 쓸 때 없는 소리를 늘어놓지 않았다.
그 검현군처럼! 그 흑도섬처럼! 그 패배자들처럼!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 이를 악물고 덤비는 추악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모습은 마치 동수의 적을 대하는 사내의 모습이었다.
“!”
제갈 사혁과 천중기가 마주한 순간 대력검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 막았다.
대력검을 천중기에게 휘두르자 그 순간 무형지기에 의해 대력검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쳇!”
그리고 그 순간 제갈 사혁이 마화천의 왼쪽 팔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본 청하는 이를 악물었다.
“뭐하는 거예요! 갈사 소협. 같이 싸우라고요!”
천중기가 무형지기를 펼쳐 대력검을 막았을 때 이는 완벽한 빈틈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제갈 사혁은 천중기가 아닌 마화천을 공격했다.
“청하 소저야 말로 쓸 때 없는 하지 마요. 내 목적은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애초에 마화천과 함께 천중기를 쓰러트리고자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으며 마화천 역시 제갈 사혁이 쓰러트려야 할 대상이었다. 천중기가 강하다하여 적이 만들어낸 빈틈을 기회로 여기고 싶진 않았다.
“저 바보.”
청하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이 이상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마화천이 휘두른 검이 정확하게 제갈 사혁의 가슴에 검상을 입혔다. 그리고.....
“재미있구나. 그럼 나도 더 이상 쓸 때 없는 소리 하지 않겠다!”
천중기가 그 틈을 이용해 천극일성권(天極一星拳)을 펼쳤다. 이는 명백히 마화천이 만들어낸 틈을 이용한 공격이었다.
“교주.....”
이 모습을 지켜본 좌호법 우사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천중기의 대결을 지켜봤다.
20여 년 전 검현군과 흑도섬을 상대로 마치 2대 1로 싸우듯 두 사람을 상대하던 천중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두 사람을 한명의 무림인으로서 동등하게 대우해주고 있었다.
제갈 사혁이 나가떨어지자 마화천은 대력검에서 손을 떼고 손끝에서 무형검을 만들어내 반대편에 있는 천중기에게 휘둘렀다.
무형검의 날카로운 칼날이 천중기의 뺨에 스쳤지만 천중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범하게 파고들어가 두 손을 펼쳐 마화천의 복부에 쌍장타를 날렸다.
“컥!”
바닥에 붉은 피를 내뱉으며 마화천은 무릎을 꿇었고 그런 그의 머리를 밝으려 한 순간 제갈 사혁이 마화천의 등을 밟고 뛰어올라 천중기의 미간을 무릎으로 찍었다.
“하아!”
그 충격에 천중기가 주춤 거리자 제갈 사혁은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하단 발차기로 정강이를 걷어찬 뒤 짧고 간결한 움직임을 보이며 힘이 실리지 않은 손등으로 상대를 수십 번 가격했다. 그런 뒤 팔뚝으로 천중기의 목을 치려는 순간 등 뒤에서 마화천이 제갈 사혁의 목을 졸랐다.
제갈 사혁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마화천의 복부를 팔꿈치로 사정없이 때렸다.
피를 뱉으면서도 마화천은 목을 감은 팔을 절대 풀려하지 않았고 그때 정신을 차린 천중기가 제갈 사혁과 함께 마화천을 격산타우(隔山打牛)의 묘리로 동시에 공격했다.
동시에 쓰러진 두 사람은 정신이 날아갈 정도로 엄청난 통증을 느꼈지만 마화천은 이를 악물고 버티며 일어나 바닥에 쓰러진 제갈 사혁의 얼굴을 발로 찼다.
일시적 동맹 같은 건 없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한 난전의 연속.
“한번 받아 보아라. 꼬마들아!”
천중기가 내공을 끌어 모으자 바닥에 있는 돌멩이가 조금씩 천중기를 향해 굴러가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마교 출신인 마화천은 그 모습을 보며 기분이 나쁜 듯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쓰러진 제갈 사혁의 머리를 붙잡고 일으킨 뒤 천중기를 향해 제갈 사혁을 던졌다.
“!”
마화천이 제갈 사혁을 던지자 천중기는 손을 뻗어 막아냈다.
“쳇!”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마화천은 인상을 구겼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땐 단순히 손으로 막아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형지기를 이용해 천천히 속도를 늦춘 것이다. 속도가 늦춰지면 힘도 저절로 약해진다.
“뭐야 이거!?”
짐짝처럼 던져진 제갈 사혁은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만석체경(萬石體莖)이라고 한다. 나는 이것으로 교주 자리에 올랐다.”
“놀고 있네!”
제갈 사혁은 천중기를 향해 주먹을 날렸지만 진즉에 그의 턱주가리를 날렸어야 할 주먹은 그의 턱은 물론이고 수염도 스치지 못했다.
제갈 사혁의 손목을 낚아챈 천중기는 금나수를 펼쳐 팔을 꺾은 뒤 복부를 가격했다.
제갈 사혁이 힘없이 휘청거리자 천중기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발등을 밟아 상대를 무릎 꿇렸다. 그리고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와 같이 마화천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마화천은 도망쳤다.......
단순히 상황만 놓고 본다면 도망치는 행동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만 마화천은 만석체경이 어떤 무공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석체경은 최소 다섯 걸음 안에 들어가면 천중기가 뿜어내는 기운이 몸에 달라붙어 몸을 무겁게 만든다.
마화천은 빠르게 뒤로 물러난 뒤 일락기공(日落氣攻)을 펼쳐 사거리 공격을 했지만 만석체경의 기운에 눌려 기공이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본 마화천은 봉황대 대원 몇 명이 활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동경을 중심으로 한 궁수들은 마화천이 접근하자 당황했지만 달리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한 채 활을 빼앗겼다.
궁현을 당겨 화살을 쏜 순간 화살은 천중기를 한참 빗겨나가 지면에 박혔다.
“멍청한 놈! 그것도 제대로 못 쏘냐?”
만석체경의 효과범위에서 떨어진 제갈 사혁은 바닥에 있는 돌을 던져 천중기를 공격했다. 그러자 천중기는 돌멩이를 피함과 동시에 만석체공을 풀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제갈 사혁과 마화천을 상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
한편 제갈 사혁의 몸을 감싸던 자색의 기운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법을 펼쳐 순식간에 상대의 코앞에 도착한 천중기는 이문정주를 펼쳐 팔꿈치로 제갈 사혁의 명치를 제대로 가격했다. 그러자 제갈 사혁은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자하신공은 완벽한 무공이다. 하지만 무공자체가 완벽하다해서 약점이 없는 건 아니지. 절대적인 내공소모.... 그건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맞는 말이야!”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던 제갈 사혁은 천중기의 옷깃을 붙잡은 뒤 되갚아 주려는 듯 파강권을 날렸다.
“!”
파강권에 맞은 순간 천중기는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나는 내가 사용하던 게 자하신공이라고 한 적이 없는데.”
그 말과 동시에 제갈 사혁의 몸이 자색의 기운으로 물들었다.
“자하신공의 약점은 굉장히 유명하지. 하지만 화산파도 마냥 방치하지만은 않는다.”
사실 제갈 사혁이 여태까지 자하신공이라고 써왔던 것은 다름 아닌 폭류신공이었다.
다만 폭류신공 특유의 붉은빛이 아닌 자줏빛이 나왔던 건 자하신공을 기초로 만든 이 무공을 진짜 자하신공을 익힌 제갈 사혁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푸우~”
하지만 폭류신공의 약점은 내공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대신 필요불가결한 내상이었다.
정신력으로 간신히 제갈 사혁은 결국 각혈을 하고 말았다.
‘내상정도 예상했잖아. 어차피 싸우다보면 언젠가 내상을 입기 마련이야. 이런 걸로 마음 약해지지 말자고!’
자기 자신을 타이르며 오기로 버텨낸 제갈 사혁은 있는 힘껏 천중기를 발로 찼다.
자신의 약점이 드러났을 때 적의 약점은 보다 크게 드러나는 법. 천중기도 사람인 이상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어이!”
“?”
제갈 사혁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그 순간 마화천의 오른쪽 허벅지에 무언가가 박혔다.
“!”
그것은 천중기를 맞추지 못하고 빗나간 화살이었다.
“한눈팔지 마.”
제갈 사혁이 천중기에게 결정타를 날리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확실히 그의 말대로 이 싸움의 승자는 오직 한 사람 단 한명의 무림인뿐이다.
화살을 뽑고 소매를 찍어 지혈을 한 마화천은 양손에 다시 한 번 무형검을 만들어냈다.
“제갈 사혁!”
“마화천!”
작은 구슬 모양의 내공이 제갈 사혁의 손목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칠객 송수겸을 쓰러트린 연환이었다.
제갈 사혁의 주먹이 무형의 기운에 닿은 순간 두 사람의 내공이 얽히며 기이한 기운이 구름을 불러 모아 천둥번개를 일으켰다.
“이걸로 끝이다!”
제갈 사혁은 다른 한손으로 부상당한 오른쪽 허벅지를 때렸고 그 순간 정신력이 흐트러진 마화천은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제갈 사혁은 눈을 파르르 떨며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으아!”
기합소리와 함께 제갈 사혁은 몸을 돌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등 뒤에서 급습을 하려던 천중기는 두 팔로 상체를 감싸 제갈 사혁의 주먹을 막았다.
“나를 여기까지 몰아붙이다! 정말 대단하구나!”
“퇴물주제에 거물인척 하지 마라!”
제갈 사혁은 온 신경을 집중해 천중기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하나하나 상대를 죽이기 위한 살초.
“!”
하지만 바로 그때 제갈 사혁의 전광석화와 같은 주먹을 낚아챈 천중기는 제갈 사혁을 하늘로 높이 던졌다.
“천뢰만방(天籟萬方).”
그리고 거뭇거뭇한 먹구름에서 천둥이 치듯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속도로 연격을 가했다.
제아무리 천하제일인이라고 하지만 제갈 사혁과 마화천은 흑도섬과 검현군. 각각 전대 고수를 물리쳤다. 그런 두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체력적으로 전성기를 지난 천중기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중기가 끝까지 집중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천하제일인.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
천뢰만방을 맞은 제갈 사혁은 죽을 것 같았다. 천뢰만방에 맞았을 때 한순간 의식이 날아가 자하신공이 끊겼다.
‘역시 이름값 하나는 확실하네....’
제갈 사혁은 온몸의 기운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척추에는 느낌이 없고 다리는 후들후들 거렸다.
‘주먹은 쥐어지나?’
간신히 왼손을 들어 주먹을 쥐려하자 겨우 주먹이 쥐어졌다.
‘망할.....’
주먹을 쥘 수 있게 되자 제갈 사혁은 허탈하게 웃으며 천천히 지친 육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천중기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포기를 모르는 구나.”
“내가 포기를 정말 잘하거든 그런데.....”
주먹을 쥘 수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여 성장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놈이 끝이잖아.”
“........”
“천하제일이 눈앞에 있는데 포기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제갈 사혁이 천중기의 얼굴을 친 순간 천중기는 바닥을 구르며 날아갔다.
내공은 단 한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내공이 없다고 해서 육신의 강함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마화천. 이 멍청한 새끼야....... 너도 일어나. 끝장을 보자!”
제갈 사혁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마화천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기혈이 뒤틀릴 정도였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대력검을 들만한 여력이 없는 마화천은 오른발 발목에 숨겨둔 단검을 꺼냈다.
천중기 역시 몸을 일으키며 입안에 구르고 있는 어금니를 뱉었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제갈 사혁은 호흡을 빠르게 하며 최소한의 내공을 긁어모았다.
“죽고 싶은 놈부터 튀어나와!”
“애송이들! 이 몸을 이기려면 10년은 멀었다!”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
마화천은 가장 먼저 제일 가까운 제갈 사혁을 향해 달려들었고 천중기 역시 두 사람을 향해 뛰어갔다.
“큭!”
마화천의 단도가 제갈 사혁의 콧잔등에 상처를 입혔고 천중기의 주먹이 마화천의 목을 쳤다. 몸 상태가 상당히 나쁨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이를 악물고 서로를 물어뜯었다.
마화천이 좌수비도(左手飛刀)를 펼치자 제갈 사혁은 산화무영수(散花無影手)를 펼쳐 천중기의 팔을 붙잡은 뒤 자신을 향한 공격을 타인의 손으로 막았다.
“아직 멀었다. 이놈아!”
천중기는 대방칠교격(大榜七攪擊)을 펼쳐 연타를 날린 뒤 제갈 사혁이 쓰러지자 그의 머리를 발로 밟았다. 그러자 제갈 사혁은 머리가 밟힌 상태에서 그의 발목을 붙잡고 근맥을 끊었다.
“으윽!”
공격을 당했을 때야 말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천중기가 근맥을 잘리고 절뚝거리자 마교의 무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천중기는 그들에게 정신적 지주이고 자부심이며 하늘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후기는 없습니다.
잠 좀 자고 오늘 안에 바로 다음편을 쓸 생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