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회: 미혼지인(迷魂之人) -->
“교주님이 지는 거 아니야.”
누군가가 말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독처럼 퍼져나가 마교인들의 사기를 떨어트렸다.
애초에 병력으로 밀어붙이면 끝날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천중기라는 거대한 지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둥이 흔들리고 있다.
“닥쳐라!”
좌호법 우사는 일갈을 내지르며 뒷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저 자리에 뛰어 들어가고 싶은 건 우사였다. 그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천중기에게 만큼은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 그만큼 그의 강함은 모든 것을 초월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죽어라!”
제갈 사혁은 이마에 피를 흘리며 천중기의 육신을 때리고 또 때렸다. 때리다보면 언젠가 쓰러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제갈 사혁의 의도를 알기에 천중기는 절대 꺾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갈 사혁의 이마를 들이 받으며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마화천이 정면에서 파고들어오자 천중기는 제갈 사혁을 발로 차 마화천과 부딪히게 만들었다.
“젠장!”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난 제갈 사혁은 패성각(覇成脚)을 펼쳤지만 천중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갈 사혁의 얼굴에 또 다시 주먹을 날렸다.
패성각은 원래 단순히 지면을 세게 차 상대를 주춤거리게 만드는 무공이다. 이토록 긴장감이 고양된 상태에서 절대 효과를 볼 수 없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끄아악!”
상대의 발을 밟기엔 이보다 더 좋은 무공이 없었다.
발등이 박살나버린 천중기는 비명을 질렀고 제갈 사혁은 그 틈을 타 일권복호(一拳伏虎)를 날렸다. 그리고는 연속해서 같은 공격을 했다.
“일권복호를 총 스물다섯 번 내지른다 하여 복호백열격(伏虎百閱拳)이라 부른다.”
복호백열격의 마지막 스물다섯 타를 맞은 천중기는 온전하지 못한 다리로 끝까지 버티며 제갈 사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멍청한 놈. 고작 스물다섯 번 밖에 안 때리는 주제에 뭐가 백열격이냐?”
그 순간 천중기의 손날이 제갈 사혁의 복부를 꿰뚫었다.
“죽어라. 애송이!”
조금만 더 깊숙이 들어간다면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상대를 쓰러트릴 가장 확실한 기회였다.
“꼴이 이게 뭐냐.”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갈 사혁은 천중기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살이 뜯겨져 나가며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았던 천중기가 사방으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교주!!!”
좌호법 우사의 외침이 하늘을 뒤덮은 순간 그의 분노가 마교의 무사들과 동조했다.
“봉황대는 제갈 소협을 보호해라!”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교주의 죽음을 그들이 인정할 리 없었다.
“정파인을 죽여라!”
좌호법 우사가 제일 먼저 제갈 사혁을 향해 주먹을 날리자 그 순간 우사가 피를 흘리며 튕겨져 나갔다. 저 멀리서 누군가 창을 던져 우사의 어깨를 맞춘 것이다.
무림맹이었다.
흑사련의 방해를 뿌리치고 무림맹이 배교의 본단이 있는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제일 먼저 본 것은 제갈 사혁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천중기였다.
“천중기를 물리쳤다! 마교인을 쓸어버리고 천하를 평정하자!”
그 말을 외친 사람은 총사 여망상도 오대주들도 아니었다. 그저 무림맹의 무림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정파의 목소리기도 했다.
무림맹과 마교가 칼끝을 겨누고 격돌하려는 순간 제갈 사혁이 그들의 한 가운데에서 패성각을 펼쳐 그들을 막았다.
“배교는 멸문했고 천중기는 쓰러졌다. 정사대전은 이걸로 종결짓겠다.”
그러자 무림맹의 무림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어째서입니까!? 지금이야 말로 정의를.....”
“이것은 정도(正道)도 아니며 정의(正義)는 더더욱 아니다. 나는 무협지사(武俠志士)이며 무림인(武林人)이다.”
제갈 사혁은 이번 싸움이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의 결과물임을 못 박았다. 어찌됐든 그가 천중기를 물리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에게 대척할 수 없었다.
제갈 사혁은 마교인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무림맹의 수많은 무림인들을 쳐다봤다. 그런 뒤 쓰러져 있는 마화천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화산파는 들어라.”
그의 목소리에서는 평소와 같은 힘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이 시간부로 화산파는 봉문에 들어간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발언이었다. 아무리 화산파의 후계자라고 하지만 일개 제자일 뿐이다. 그것이 화산파 전체의 의견이 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그것이 부당하다며 항명할 수 없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무덕을 중심으로 화산파의 매화검수들은 제갈 사혁의 명령을 따랐다.
화산파가 갑작스럽게 발을 빼자 무림맹은 난처해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결국에 물러났다. 그리고 마교 역시 천중기의 유해를 수습하고 물러났다.
“막주. 괜찮으세요?”
혼란을 틈타 주공은 연곡진을 부축하며 얼마 남지 않은 배교의 무사들과 함께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제갈 사혁과 마화천 그리고 천중기가 싸우기 시작하자 누구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토록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무림은 배교를 외면했다.
“다시 시작해요. 다시 시작하면......”
“다시 해서 될 것 같아?”
“!”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 순간 주공과 연곡진을 보호하고 있던 배교의 무사들이 쓰러졌다. 그리고 주공의 등 뒤에서 누군가 칼을 들이밀었다.
“살려주세요. 우리는 이제 그러지 않을 겁니다.”
주공은 두려웠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우린 이제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를 내버려 두십시오. 그런 힘 있는 자들이 약자를 두고 떠날 때 멋지게 하는 말이야. 왜 있잖아? 은거기인 같은.....”
그는 칼을 거두고 주공과 정면으로 마주봤다. 그는 몸 여기저기가 성한 곳이 없었지만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그쪽도 그러나?”
“!”
제갈 사혁이 관심을 보인 대상은 바로 연곡진이었다.
연곡진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제갈 사혁은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가리켰다.
“성의를 보여줘. 내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연곡진은 쓰러지듯 무릎을 꿇으며 이마를 땅에 댔다.
“다시는 강호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연곡진이 그리 말하자 주공은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제갈 사혁은 고개를 저었다.
“가라. 가서 다시는 이 무림에 나타나지 마라.”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연곡진을 보며 제갈 사혁은 움켜쥐었던 검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 저물어가는 태양과 함께 두 사람이 사라지자 제갈 사혁은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 물었다.
“별일이야. 너라면 분명 그들을 죽을 줄 알았는데.”
대력검 하나에 몸을 의지해 걷고 있는 마화천을 보며 제갈 사혁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기세등등하더니 제대로 걸을 수는 있냐?”
“뭣하면 여기서 일 내볼까?”
“자존심은 살아가지고. 아서라! 딸내미 얼굴은 보고 죽어야지.....”
얼굴도 못 본 딸 이야기가 나오자 마화천은 언짢은 심기를 드러냈다.
“됐고! 저들을 살려준 이유나 좀 듣자. 날 살려준 이유는 나도 나름 납득이 가.”
“그 이유를 네가 제공했다는 게 나에게는 참으로 거지같은 일이지. 넌 정말 교활해.”
“별 말씀을.”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마냥 비아냥거리는 마화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와 실랑이를 할 힘이 없었다.
“연곡진의 눈을 봤거든.”
“뭐?”
“눈을 봤다. 패배자의 눈 말이야.”
“패배자의 눈 같은 소리하지 마라.”
하지만 제갈 사혁의 표정이 진지하다는 걸 깨달은 마화천은 대력검을 들고 성치 않은 몸으로 제갈 사혁을 지나쳤다.
“거참!”
그러자 제갈 사혁은 천지유벽세(天地柔劈細)를 펼쳐 그를 날려버렸고 마화천은 공중에서 중심을 잡고 고양이처럼 나무 위에 착지했다.
“정말이라니까. 다시는 강호와 인연을 맺지 않을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자신들의 자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마화천은 단순히 제갈 사혁이 천중기를 물리치고 마음이 들떠서 변덕 부리듯 그들을 살려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이 멍청이는 이런 일을 가지고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생각해봐. 마교에 대한 원한은 배교의 것이지 살막의 것은 아니야. 배교의 정통성을 지녔다는 것을 핑계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연곡진이 정말로 마교에게 원한이 있었던 건 아니잖아.”
출신의 염증을 느끼고 살막의 감춰진 내력을 들춰 배교임을 자처했던 자들이다. 마교를 향한 증오는 그들에게 좋은 변명거리가 되어줬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강호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은 무림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다.
“연곡진의 눈을 네가 직접 봤다면 납득이 갔을 거야.”
“그럼 마교는 어떻게 할 거냐? 그 놈들이 외치는 거 들었지?”
정파인을 죽여라. 였던가? 제갈 사혁은 그 생각을 하며 히쭉히쭉 웃었다.
“천중기가 죽어서 기가 죽지 않았으니 다행 아닌가?”
“뭐?”
“네가 말했잖아. 싸울 상대가 없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강호무림이 만들어낸 증오의 고리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무림맹과 흑사련 그리고 마교 수십 수백 년이 흐른 뒤 쇠퇴하고 몰락하게 되더라도 이름만 바뀔 뿐 나와 다른 너를 구분하고 차별하며 이 싸움은 계속 될 것이다.
“싸울 상대가 없으면 만들면 되지.”
“내가 꺼낸 말이지만 참 지겨운 세상이다.”
그 대답과 함께 마화천은 정신적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느끼고 제갈 사혁을 등지고 떠났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천중기를 잃고 분노에 휩싸인 마교와 아미파 그리고 화산파의 봉문으로 숨고르기에 들어간 무림맹. 사실상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흑사련.
평화는 다음 싸움을 위한 연장선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마교는 신강을 서장을 되찾았지만 교주인 천중기를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강자존의 법칙에 따라 가장 강한 자가 교주 자리에 앉는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됐으며 좌호법 우사와 우호법 망지성은 마교의 호법으로서 다음 교주가 정해질 때까지 마교를 지탱했다.
좌호법과 우호법 중에 교주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세간의 예상과는 너무 다르게 흘러갔다. 무림맹은 정사대전의 패자(霸者)가 되었으나 사실상 모든 공을 세운 화산파가 봉문을 했기 때문에 그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그리고 흑사련은 가장 적은 피해를 입고 가장 커다란 이득을 챙기며 사실상 정사대전의 승자가 되었다. 흑사련의 련주인 사지성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련주 자리에서 퇴임을 했으며 마화천은 흑사련 최고의 이름인 흑도섬을 계승하지 않고 스스로 문파를 만들어 개파조사(開派組師)의 자리에 올랐다.
============================ 작품 후기 ============================
이것으로 정사대전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제갈 사혁은 천하제일인이 되었죠.
그리고 마교는 물러나고 제갈 사혁은 연곡진을 살려줬습니다.
물론 갑작스레 정리가 된 것 같아 납득이 가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마지막 쳅터가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완결을 내는 날이 온다면 저는 그 마지막을 하나의 쳅터로 마무리 짓고 싶었습니다.
이야기의 끝은 시작만큼이나 중요하니까요.
마지막에 천중기를 쓰러트릴 때 제갈 사혁이 한 말은 죽기 전에 자신에게 하던 말입니다.
그리고 목을 물어뜯어 죽인 것은 제갈 사혁의 이미지를 호랑이로 잡았기 때문이죠.
절세무공이 아닌 본능적인 투쟁심으로 이끌어낸 승리.
마지막 쳅터는 제갈 사혁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아닌 어떻게 살아가는가? 에 대해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럼 마지막까지 지켜봐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