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 회: 난세의 시작. -->
호랑이가 새겨진 곰방대를 물며 화산파의 도복을 입은 사내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 전날 술을 너무 마셨나?”
술도 약하면서 아침까지 술을 마신 사내는 비틀비틀 거리며 무림맹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정사대전으로부터 겨우 4년이 흘렀을 뿐이지만 강호는 또 다시 혼란에 휩싸이려 하고 있었다. 마교는 그 사이에 장로들 사이에서 새로운 교주를 맞이했고 흑사련은 사람을 모우기 시작했다.
화산파가 봉문한지 4년이 지난 지금 드디어 걸어 잠근 문을 열고 천하를 향해 포효할 때가 온 것이다.
바람을 이정표 삼아 며칠에 걸쳐 이 마을 저 마을을 전전하며 겨우 사천에 도착한 사내는 곧바로 무림맹에 들리지 않고 옆길로 빠져 하오문이 관리하는 도박장으로 향했다.
“홀이오? 짝이오?”
도박사가 그릇에 주사위를 넣어 흔들자 사내는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홀.”
그러자 그릇 안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감지됐고 이내 결정을 번복했다.
“아니요. 짝으로 하겠소. 남자는 뭐니 뭐니 해도 짝이 맞아야지 그렇지 않소?”
결정을 번복하자 도박사는 똥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릇을 뒤집자 아니나 다를까 주사위의 수는 짝이었다.
제법 따게 된 사내는 그만 자리에 일어날 준비를 했는데 그때 갑자기 도박장 안으로 괴한들이 쳐들어왔다.
“꺄아!”
기녀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얼마 후 사내들의 단말마적 비명이 뒤따랐다.
하오문의 무사들이 도박장을 지키기 위해 들어왔지만 일초지적(一招之敵)도 되지 못했다. 실력을 보아하니 보통 놈들이 아니었고 겨우 하오문 도박장이나 털어갈 수준도 아니었다.
괴한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부하에게 귓속말을 하자 얼마 후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가 그들에게 끌려나왔다.
“마혼지(魔魂紙)는 어디에 있느냐?”
끌려나온 사내는 손을 파르르 떨며 사내에게 낡은 두루마리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괴한은 부하에게 손짓을 하더니 무언가를 속삭였고 갑자기 그들은 도박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들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고 괴한들은 기어이 사내가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사내를 향해 괴한이 검을 휘두르자 사내는 허리에 찬 은색의 도(刀) 백해(百解)를 뽑아 상대의 검과 함께 머리를 잘랐다.
피가 사방으로 튀기며 사내의 검은 도복에 묻었지만 칠흑의 어둠은 붉은 피를 집어삼켰다.
“사천 한 가운데에서 이런 짓을 하더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셨고만.”
신기하게도 피가 한 방울도 묻지 않은 검을 집어넣으며 사내는 어이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지금 가면 살려줄 생각이 있는데 말이야.”
그 말은 곧 여기 있는 모두를 제압할 수 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괴한들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괴한 중 한명이 사내를 향해 단도를 던지자 놀랍게도 단도는 사내의 복부에 맞았다.......
“.......”
사내는 자신의 복부에 꽂힌 단도를 보더니 자책하듯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돌겠네.... 진짜!”
배에게 그대로 꽂힌 단도를 뽑아내며 사내는 단도를 흔들며 괴한들을 가리켰다.
“나는 사부처럼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진 않지만 예의 경고가 끝나면 깨닫게 될 거야. 내가 그 스승의 그 제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사천 시내 한 가운데에서 2층짜리 건물의 지붕이 날아갔다.
“뭐야!”
“!”
그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크게 당황했고 어떠한 힘에 의해 터져버린 지붕 위로 수십 명의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모두 손에 칼을 쥐고 있었고 자신들과 옷차림이 다른 오직 한명의 사내에게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정파의 성역 한 가운데에서 난데없이 무림인들이 칼부림을 하자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지붕 위에 착지한 사내는 손목을 가볍게 흔들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나는 사부보다 더 무자비해.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게 사부의 가르침이니까.”
사내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괴한을 공격했고 상대는 자신의 가진 기술을 펼쳐보기도 전에 압도적인 힘에 밀려 시체가 돼버렸다.
“웃기는 소리지. 자기도 아직 현역이면서 나보고 자기보다 더 잘해야 한데.”
그러면서 사내는 검을 집어넣었다.
“봐주는 건 없다.... 죽고 싶은 놈부터 튀어나와!”
그 순간 잔상을 남기며 은밀하게 왼쪽에서 상대가 접근해오자 사내는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매화산수(梅花散手)를 펼쳐 사내의 머리를 붙잡고 힘을 줘 숨통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한명을 처리한지 겨우 눈 깜빡할 사이에 양 옆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공격이 들어오자 사내는 다가오는 두 사람의 속도에 맞춰 몸을 뒤로 뺀 뒤 손을 교차하며 복호파산(伏虎破山)을 펼쳤다.
“패성멸격각(覇成滅擊脚).”
왼발로 중심을 잡고 오른발로 원을 그리듯 몸을 한 바퀴 돌며 발차기를 날리자 기격이 터지며 괴한들의 가슴이 움푹 파였다.
사내의 압도적인 실력에 괴한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우두머리격인 자가 자리를 뜨고 나머지가 사내를 막았다.
“가지가지 한다.”
사내는 괴한들을 비웃으며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를 펼쳐 순식간에 괴한들의 우두머리와 얼굴을 마주했고 그 순간 그의 가슴에 매화청심장(梅花淸心掌)을 펼쳐 즉사 시켰다.
“!”
“!”
귀신과도 같은 솜씨로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제거하자 남은 괴한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들보다 한참 어리지만 마치 부처님 손바닥 안의 돌원숭이가 된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뭐야? 안 덤벼?”
괴한들이 기수식을 거두자 사내는 인상을 구겼다. 게다가 그들은 도망칠 생각도 없어보였다.
괴한들에게 다가간 사내는 그들의 어깨를 두들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싸울 생각 없으면 집에 가라.”
“!”
노골적으로 자신을 업신여기자 남은 두 사람 중 한명이 사내에게 검을 휘둘렀지만 사내가 펼친 금나수에 제압되어 허리가 꺾였다.
“싸울 생각 없으면 집에 가라니까.”
팔뚝으로 그자의 목을 제압한 사내는 그대로 그의 목을 부러트려버렸다. 그리고 남은 한명과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턱을 까닥 거리며 그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던 그자는 손에 든 검으로 자신의 목을 그어버렸다.
도박장에서 그들이 어떤 물건을 챙긴 것을 기억해낸 사내는 우두머리의 시체로 나가가 그의 품에서 낡은 두루마리를 꺼냈다.
“뭐.... 일단 챙기고 봐야겠지.”
두루마리의 정체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사백 어르신의 가르침에 따라 사내는 두루마리를 품에 넣었다.
얼마 후 무림맹에서 파견된 자들이 나타나자 사내는 서둘러 사람들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래저래 조사 받는 게 귀찮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숨어 사건 현장과 멀어진 뒤 무림맹에 도착한 사내는 일사분란하게 현장으로 뛰쳐나가는 무림맹 소속 무림인들을 보며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런 위화감 없이 무림맹 안으로 들어간 사내는 이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화산파다!”
지난 번 정사대전의 중심에 서 있던 화산파는 정사대전이 끝나자마자 봉문을 했고 4년이 지난 지금 화산파의 제자가 무림맹에 모습을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신기한 듯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들은 화산파 도복을 입은 그에게 관심을 가졌고 여인들은 그의 외모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데 누구지? 화산파는 다 젊어서 누가 누구인지....”
“잠깐 나 저 사람 누군지 알아!”
사내를 알아본 무림인은 더듬거리듯 그의 이름을 말했다.
“화..... 화산파의 태제(太帝)!”
“태제가 누군데? 화산파는 무(無)자 항렬 아니었어?”
화산파는 무자 항렬이 이어받았기 때문에 남자는 태자 항렬을 지닌 저 젊은 사내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는 화산파 장문인의......”
“하루 만에 도착한다고 했잖아.”
그가 사내의 정체를 말하기도 전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화제의 중심에 서있는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대체 왜 늦은 거야?”
여인이 왜 늦은 거냐고 따지자 사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으면서 대충 넘어가려 했다.
“미안해요. 이래저래 늦장부리다가 늦었어요. 미려(美麗).”
“하여간....”
남궁 미려가 사내를 향해 손을 내밀자 손을 잡아주는 대신 품에서 옥가락지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에 끼어주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마음이 풀렸는지 옥가락지를 한번 본 미려는 사내를 향해 미소지었다.
“잘 왔어. 정말 잘 왔어. 이신(離身).”
============================ 작품 후기 ============================
그로부터 4년이 흘렀습니다.
분명 마지막 쳅터인데 제목이 이런 이유는 역시 화산의협답게 끝내려하기 때문입니다.
이신을 주인공으로 한 것은 제갈 사혁의 제자이기 때문이죠.
원래는 화산의협의 마지막을 생각할 때 이렇게 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 이 내용 그대로 제갈 사혁이 나올 예정이었는데 이신을 주인공으로 2부를 쓸 생각이 없냐고 물으셔서 그럴 계획은 전혀 없지만 마지막 에피소드를 이신에게 맡기는 건 괜찮을 것 같아서 이신을 내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