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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난 하인인데요 (2/17)

제1장. 난 하인인데요

장안은 진나라 시대에 가장 번영했던 도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명나라가 된 지금도 여전히 비단길의 시작점으로 번성하고 있었다.

장안성에 있는 여산 북쪽 기슭에는 금광이 있고, 남쪽 기슭에는 옥을 캐는 옥광(玉鑛)이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옥은 명나라 전국으로 팔려 갔으며, 비단길을 따라 저 멀리 서역과 바다 건너 왜국에까지 가고 있었다.

쨍쨍.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바위투성이의 벼랑 턱에 붙어 돌을 깨는 작업 중이었다.

웃통을 벗어젖히고 열심히 망치를 휘둘러 정을 때리는 남자들의 구릿빛 상체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여보게들, 배나 채우고 하세!”

밑에서 인부들의 조장이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떠오른 정오.

그제야 정신없이 망치를 휘두르던 사람들이 허리를 폈다.

“가세. 먹어야 일을 하지.”

“후우~”

사람들이 먼지가 뿌옇게 묻은 수건을 털어 땀을 닦고는 소쿠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소쿠리에는 만두(중국식 빵)가 가득 담겨 있었고, 토기로 만든 항아리에는 염수(鹽水)가 출렁이고 있었다.

뜨거운 햇빛 아래 땀을 흘린 사람들은 땀 속의 염분이 수분으로 방출되는 탓에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된다. 때문에 소금물로 몸의 염기를 보충하는 것이다.

“조장님, 그나저나 이번 달 급료는 받을 수 있을까요?”

만두를 볼이 터지게 먹던 더벅머리 사내가 하는 말에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조장을 쳐다보았다.

이 옥광산의 주인은 장안성에 있는 위가장이었다.

위가장.

먼 옛날에는 중원 칠대세가에 든 적도 있다고 하지만, 지금 그것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현재의 위가장은 작은 중소 문파 측에도 끼지 못하는 그저 그런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조장의 얼굴이 약간 찌푸려졌다. 아무리 위가장이 몰락의 위기에 처했다고는 하지만, 급료를 주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으니 옥광산을 책임진 조장으로서는 마음이 언짢았다.

“자네, 이곳에서 하루 이틀 일했나? 아무리 어려워도 위가장은 급료를 떼먹지 않아!”

조장의 말에 사람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위 소저는 절대로 그럴 분이 아니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머니 약값 때문에…….”

말을 꺼냈던 더벅머리가 황급히 변명을 했다.

위가장의 장주는 5년 전에 죽고, 지금은 그의 외동딸인 위소옥이 장주가 되어 있었다.

위소옥.

올해 25살인 그녀는 혼기가 꽉 찼음에도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한번 기울어진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만은 충분히 공급하고 있었다. 만두를 이렇게 마음껏 먹는 광산 인부들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저 금광에서 일하는 인부들만 해도 자신이 먹을 것은 직접 챙겨 나와야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비록 만두일망정 공짜로 배불리 먹고 있었다.

그건 위 소저가 그렇게 하도록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걱정 말게. 이번 달 급료도 제 날짜에 지불될 것이네.”

조장이 사람들을 안심시킬 때였다.

“저어기, 여기 일자리가 있나요?”

조장은 흠칫 놀라 돌아섰다. 분명 아무런 기척도 없었는데 언제 왔는지 장신의 남자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만두를 먹던 사람들의 눈도 둥그레졌다.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차림이었다. 찢겨지고 구멍이 숭숭 뚫린 상의와 하의. 키는 거의 6척이나 됐고, 마구 뒤엉킨 머리칼이 길게 늘어져 얼굴을 절반가량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는 얼굴은 2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흠, 자넨 어디서 왔나?”

조장의 얼굴에 신기한 동물을 본 것처럼 호기심이 어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내는 굉장히 특이했다.

떡 벌어진 어깨에 탄탄한 가슴, 일반인보다 더 긴 두 팔. 발에는 짐승의 가죽을 잘라 대충 비끄러맸고, 풀뿌리처럼 뒤엉킨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풀잎과 먼지투성이였다.

이건 마치 산에서 살다 나온 산사람 같은 차림새였다.

“저기서 왔는데요.”

사내가 손을 들어 산 쪽을 가리켰다. 그쪽은 여산의 북쪽으로, 금광이 있는 곳이었다.

“금광에서 일했나?”

“그게 아니라, 그 뒤의 산에서요.”

“산이라고? 그럼 자넨 산에서 살았나?”

“예.”

사내의 말에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그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그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 살았다면 아무리 거지라도 저런 차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몇 살인가?”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내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하는 말에 조장은 물론 인부들도 어리둥절해졌다. 제 나이를 모른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조장이 입맛을 쩝 다시고는 물었다.

“부모는 있나?”

“없어요.”

“그럼 자넨 혼자 살았나?”

꼬치꼬치 묻는 조장의 말에 사내는 머리를 흔들었다.

사람들이 그런 사내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여산의 북쪽은 대낮에도 범이 출몰하는 곳. 더구나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옛날 진나라 황제의 묘가 있다는 전설도 있고, 일설에는 진시황의 귀신이 떠돈다는 소문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이었다.

“할아버지하고 같이 살았는데, 이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머리칼에 가려 한쪽밖에 보이지 않는 사내의 눈에 순간적으로 슬픔이 어렸다 사라졌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세상을 살아온 조장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 사내는 순박하다!

눈빛은 약간 흐릿했지만, 그 말과 행동은 어수룩했다. 그건 그동안 사람을 접촉하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쯧쯧, 안됐구먼. 그럼 그곳에서는 어떻게 살았나?”

“짐승을 잡아먹고 살았어요.”

“그렇군.”

조장은 사내의 몸을 슬쩍 보았다. 큰 키에 단단하게 균형 잡힌 체격이었다. 더구나 기다란 두 팔과 대지를 짚은 단단한 두 다리는 사냥으로 단련되었다면 인부로 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위가장의 자금 사정이 너무 어려웠다. 아마 위 소저가 마음이 곱지 않았다면 이곳의 인부들도 절반은 내보냈을 것이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동정심에 이 사내를 받으면 다른 인부들의 돈이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안됐네만 지금 이곳은 더 이상 인부를 받을 수가 없네. 성안으로 가보게. 그곳에 가면 자네 같은 젊은이가 일할 자리쯤은 있을 거야.”

조장이 조금 미안해하며 청년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어르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청년은 발길을 돌렸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청년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앞에 커다란 바위가 길을 막고 있었다.

청년은 바위와 마차를 번갈아 보았다. 이곳은 마차가 다니는 길. 절벽에서 떨어진 저 바위는 너무 커서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야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것이 길을 막고 있으면 마차가 다니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청년이 바위의 한쪽 귀퉁이를 두 팔로 잡았다.

그것을 본 조장은 피식 웃었다. 역시 처음 봤던 대로 순박하고 어진 청년이었다. 산속에서만 살았으니 순진할 수밖에.

“이보게, 어서 성안으로 가게. 그건 자네 혼자서는 어림도 없는… 어어!”

조장은 말을 하다 말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조장만이 아니었다. 인부들도 입을 떡 벌렸다. 장정 10여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움직일 바위가 번쩍 쳐들린 것이다.

머리 위로 바위를 들어올린 청년이 주위를 들러보더니 냅다 그것을 집어던졌다.

휘잉, 쿠웅!

마치 공깃돌처럼 날아간 바위가 땅속에 절반이나 박혀 버렸고, 바위가 떨어지는 충격에 땅이 부르르 흔들릴 정도였다.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엄청난 힘이 아닌가!

“세상에, 장사야!”

“장군감이다!”

인부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리자 손을 탁탁 턴 청년이 어줍은 웃음을 지었다.

“이게 길을 막은 것 같아서요. 그럼 수고하세요.”

청년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조장은 순간적으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보게, 거기 좀 서게!”

조장이 소리치며 후다닥 달려갔다.

“어르신, 저 말인가요?”

씩씩거리며 달려온 조장을 어수룩하고 순박한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보며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저요? 하인인데요.”

“하인? 하인이란 거 말고, 자네 이름 말일세.”

조장의 말에 눈을 끔벅거리던 청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이 하인인데요.”

“그래, 하인 말고 이름… 엉? 이름이 하인이라고?”

“예. 할아버지가 늘 부르시던 제 이름이에요.”

조장은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손자의 이름을 하인이라고 지어주는 할아버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의 어떤 할아버지도 손자의 이름을 심부름꾼이라고 짓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핏줄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공통된 심정. 때문에 이름을 잘 짓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문득 조장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자네 혹시, 산에 살 때 사냥을 혼자 했나?”

“예.”

“밥은 누가 했나?”

“제가요.”

“빨래는?”

“제가요.”

“집안 청소는?”

“제가요.”

“어휴, 그렇군.”

조장은 탄식했다. 이건 분명 친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순박한 이 청년을 머슴으로 부린 것이다.

이처럼 순박한 청년을 등쳐 먹은 영감이라니, 눈앞에 있다면 한 방 쥐어박고 싶었다.

“자네, 몇 살 때부터 산에 있었나?”

하인이 손을 들어 손가락을 펼치더니 활짝 편 양손의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뭔가 애써 생각하는 듯한 표정.

두 손의 손가락을 이쪽저쪽 보던 하인이 곧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어르신, 잘 모르겠어요. 아주 쪼그마했을 때 같은데…….”

조장은 손가락과 하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 죽어 자빠진 영감은 하인에게 그동안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 나이가 먹도록 셈조차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니, 정말 죽일 영감이었다.

‘셈을 잘 셀 줄 몰라. 쳐 죽일 놈의 영감탱이!’

조장은 속으로 치를 떨었다. 그 나쁜 영감이 고아인 이 청년을 데려다 종으로 부려 먹은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이 청년은 자신의 이름이 하인인 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다행이었다. 하늘이 이 청년을 불쌍히 여겨 영감에게 죽음을 주었으니, 이제라도 제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릴 때부터 밥하고 빨래하고 나무를 했나?”

“예. 요 때부터 커다란 목통에 물을 길었어요. 하루에 이만큼씩.”

하인이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5살 때부터라는 소리. 그리고 다른 손은 10번을 구부렸다 폈다. 50번이라는 것이다.

“크윽!”

조장이 신음을 질렀다. 세상에, 5살짜리에게 하루에 50번씩 물을 긷게 하다니. 이건 사람도 아니었다.

조장이 신음을 흘릴 때, 다른 인부들의 얼굴에도 격분한 표정이 어렸다.

“아니, 뭐 그런 영감이 다 있나?”

“천벌을 받을 놈!”

사람들이 분개해서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저기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우리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거든요.”

하인이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더욱 측은하게 쳐다보았다. 이건 완전히 세뇌되어 진짜 자신의 할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생각할수록 패주고 싶은 영감탱이였다.

“저기, 조장님. 저 하인, 아니 청년에게 일자리를 주면 안 될까요?”

“그래, 동전 한 문씩만 줄이면 돼.”

사람들의 말에 조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너무도 순진한 청년. 성안에 들어가면 저 청년은 분명 또 당하고 살지도 모른다.

지금 같은 험한 세상에 아무것도 모르는 저 청년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래, 그러면 되겠군!”

조장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무릎을 탁 쳤다.

“하인… 아차! 이거 뭐라고 불러야 하지?”

조장은 난감했다. 이름이 하인이라니.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어르신, 그냥 하인이라고 부르세요.”

‘할 수 없지.’

“그래, 하인. 자네, 검을 쓸 줄 아나?”

하인이 머리를 흔들었다.

“모르는데요.”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냥을 하려면 적어도 검이나 도, 또는 활로 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다못해 도끼질이라도 잘해야 했다.

“그럼 짐승 사냥은 뭐로 했나?”

“아, 그거요? 몽둥이로요.”

“모, 몽둥이로?”

“예. 보시겠어요? 저기, 그거 잠깐만 빌려 주세요.”

하인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인부가 잡고 있는 정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작은 정이 아니라 3척이나 되는 긴 정이었다. 바위의 틈을 깰 때 쓰는 것이어서 클 수밖에 없었다.

“이거 말인가?”

인부가 어리둥절해할 때였다. 어느새 정을 잡은 하인이 그것을 어깨에 척 메고 방금 던진 바위 앞에 섰다.

그리고는 조장을 보며 히죽 웃었다.

“몽둥이로 호랑이의 머리를!”

쐐액.

갑자기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하인의 어깨에 있던 정이 번갯불처럼 날아올라 바위를 때렸다. 마치 빛이 번쩍이는 것 같은 속도였다.

쩌엉!

바위가 정에 맞으며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내려치면 돼요. 헤헤.”

척.

바위를 내려친 하인이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헤헤거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표정.

쩌저적.

정에 강타당한 바위가 비명을 지르며 수백 개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가로세로 금이 간 바위가 작은 돌로 변하며 쩍 벌어졌다.

사람들은 입을 헤벌리고 멍해진 눈으로 하인을 바라보았다.

‘세, 세상에! 가공할 힘이다!’

‘타고난 장사다!’

‘으아, 바위가 쪼개지다니!’

조장의 얼굴에 희열이 번들거렸다. 언젠가 위가장의 총관이 정문 위사를 구해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금 정이 움직인 속도, 그건 무공을 하는 사람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굉장한 빠름이었다. 아니, 그가 보기에 방금 그것은 무림인들도 감히 피할 수 없는 번개와 같은 힘과 속도였다.

‘됐어. 저 정도면 위사로는 문제없겠어.’

“자네, 무공을 배웠나?”

조장의 물음에 하인이 머리를 흔들었다.

“무공이요? 그거 혹시 밥할 때 쓰는 건가요? 사실 전 밥하기가 제일 싫었거든요.”

“커윽!”

조장은 어이가 없어 그만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무공을 밥하는 데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하인 한 명뿐일 것이다.

조장은 마음속으로 단단히 결심을 다졌다.

만약 저 청년이 불량배들의 눈에 걸리면 나쁜 길로 들어설 수도 있었다.

더구나 지금 위가장에는 총관 한 사람을 제하고는 강한 위사들이 없었다. 호위 무사 한 사람이라도 무척 귀중했지만, 가세가 기운 탓에 어느 누구도 위사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이건 하늘이 준 기회였다.

저 청년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꼭 위가장으로 보내리라.

마음을 다진 조장이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이보게, 하인, 내가 서신을 써줄 테니 위가장으로 가게. 그곳에 가면 급료도 받고, 썩 좋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대우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에 하인이 허리를 굽적 굽혔다. 무척 고마운 표정이 얼굴에 감춤 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전 그냥 먹을 것하고 잠자리만 있어도 됩니다, 어르신.”

조장이 손을 홰홰 저었다.

“에이! 하인, 난 자넬 동생으로 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형, 동생 간에 어르신이라고 하면 안 되지? 형님이라고 불러보게.”

“예? 하, 하지만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모두 어르신이라고 할아버지가 그러셨는데…….”

‘지독한 영감. 아예 바보로 만들었어!’

조장은 하인이 안쓰러웠다. 저 나이까지 당하고도 그 악독한 노인을 할아버지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더 고맙지. 자네 같은 장사를 동생으로 얻었는데. 하하하!”

조장이 몸을 흔들며 웃었다.

“이걸 가지고 다른 데 한눈팔지 말고 꼭 위가장으로 가게. 알았나?”

“예, 어르… 아니, 혀, 형님!”

“그래, 어서 가게.”

허리를 굽적한 하인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을 보며 뭔가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조장은 마음이 개운했다.

그러나 그가 어찌 세상일을 알 수 있으랴?

오늘의 만남으로 인해 훗날 천하제일인의 형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게 될 줄 말이다.

그날 진시황의 전설이 잠들어 있는 산에서 내려온 하인이라는 어수룩한 청년은 장안성으로 입성했다. 그냥 먹을 것과 잠자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얼빵한 청년이…….

* * *

언덕 위에 세워진 고풍스런 전각 안에서 짜증 어린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직도 그년이 항복을 안 하고 있단 말이지? 그래서 네놈은 보고만 있고. 그런가? 이 밥벌레 같은 놈아!”

배가 항아리처럼 불룩 나온 자가 눈알까지 붉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에 따라 화려한 비단옷에 감싸인 비곗덩이가 풀럭거렸다. 온몸이 비계로 덮여 있어 조금만 소리를 쳐도 숨을 헐떡거리는 것이다.

“저… 장주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제 버티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위가장이 운영하는 옥광산까지 빚값으로 빼앗으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때 손을 내밀면 그녀는 끌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화를 삭이십시오.”

총관이 달래는 말에 배불뚝이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삶은 돼지 간처럼 붉게 변한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이년! 어서 닦지 않고 뭐 하느냐?”

“예, 자, 장주님. 잘못했습니다.”

그의 고함에 뒤에 서서 잔뜩 허리를 굽히고 있던 하녀가 화들짝 놀라 급히 다가오더니 비단 수건으로 그의 시뻘건 얼굴을 닦아주었다.

“좋아. 총관, 당장 기별을 해서 최후통첩이라고 해. 삼 일 안에 돈을 갚지 못하면 광산과 장원을 차압한다고.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장주님.”

총관이 허리를 굽히자 장주는 귀찮은 듯 손짓했다. 빨리 꺼지라는 표시.

밖으로 물러가는 총관의 뒤통수가 따가웠다. 장주의 뱀 같은 눈이 쏘아보고 있는 것이다.

“밥값도 못하는 버러지들. 엥이!”

중얼거리던 장주는 땀을 닦아주는 하녀를 보았다. 키가 모자라 발끝을 든 채 땀을 닦고 있는 하녀의 봉긋한 가슴이 그의 어깨를 살짝살짝 건드리고 있었다.

순간 장주의 눈에 음침한 기운이 돌았다.

‘이년이 언제 이렇게 컸지?’

하녀의 가슴이 어느새 다 자란 처녀의 그것이 되어 있었다.

장주의 음흉한 눈이 하녀를 훑어보았다.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그녀의 엉덩이가 좌우로 흔들리고, 하얀 다리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아주 먹음직하게 자랐군. 이젠 시식을 할 때도 됐어. 클클클.’

장주가 징그러운 웃음을 띠고 하녀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꽉 잡았다.

“헛! 자, 장주님.”

하녀가 기겁을 하며 굳어졌다.

일순 뱀에 물린 종달새처럼 굳어졌던 하녀는 정신이 번쩍 들자 몸을 비틀었다.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둘 장주가 아니었다.

“어허! 이년, 난 네 주인이다. 가만있어. 반항하면 홍등가에 팔아버린다?”

몸부림치던 하녀가 이내 잠잠해졌다.

홍등가.

하룻밤에도 수십 명의 남자를 상대로 몸을 팔아야 하는 곳. 그곳에 가면 여자로서의 운명은 끝장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 비곗덩이 주인에게 유린당하는 것은 끔찍했지만, 참아야 했다. 하녀는 사람이 아니라 종이기 때문이다.

“으흐흐. 좋아, 좋아. 아주 맛있겠어!”

장주의 털이 수북한 손이 하녀의 순결한 몸을 마구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군. 어휴!”

밖으로 나온 총관은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머리를 흔들었다. 어느새 장주의 헐떡거리는 소리와 하녀의 비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루도 그 짓을 안 하는 날이 없다니까.”

이곳은 장안성의 수전노 곡부통의 장원이다.

곡부통.

천민 출신인 그는 지독한 자린고비였다.

젊었을 때 시장 통의 금전소에서 고리대금업을 시작한 이래 수많은 양민들의 피와 땀을 짜냈고, 그로 인해 장안성의 갑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엄청난 이자로 돈을 불린 것이다.

돈만 있으면 병신도 대신이 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 돈이란 것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곡부통은 전장을 운영하고 있고, 거기다 뒷골목의 왈패들까지 턱짓으로 움직였다.

그뿐이랴?

장안은 화산파와 점창파의 앞마당이다. 현 무림의 황성인 무황성의 주축을 이루는 2개의 문파가 있는 곳. 그들에게 잘못 찍히면 사파나 마도로 몰려 참살당할 수도 있었다. 이 두 문파는 그만큼 현 무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점창과 화산은 곡부통이 하는 일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가 매해 엄청난 기부금을 두 문파에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곡부통의 신념이 보여 준 결실이었다.

그렇게 천민으로 성공해 부자가 된 곡부통이었지만 이루지 못한 하나의 소원이 있었으니, 바로 신분 상승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상류사회에 살고 있는 자들은 곡부통을 벌레처럼 바라보았다. 바로 그가 천민 출신이기 때문이다. 상류층으로 진입하자면 이 천민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했다.

그래서 노린 것이 장안성의 명문가인 위가장이었다.

위가장은 무림에서 명문가였고, 관에서도 이름 있는 가문이었다. 현 위가장주 위소옥의 백부가 황성의 학사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 백부가 죽었지만, 명문가를 노리는 곡부통에게는 아주 맛있는 먹이나 마찬가지였다.

치밀한 곡부통은 위소옥을 점찍고 차근차근 일을 벌였다.

5년 전부터 위가장이 운영하는 가게들에 물건을 대는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했고, 돈이 말을 듣지 않는 곳에는 폭력을 썼다.

그 때문에 위가장의 가게들은 하나 둘 망해갔다.

다음은 위가장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에게 위가장보다 두세 배 더 많은 급료을 주기로 하고 하나 둘 빼돌렸다.

그 바람에 위가장의 정예 무사들은 낭인 시장의 무사로 자리를 옮겼다. 명칭은 낭인 무사였지만 곡부통에게 급료를 받는 곡가장의 무사로 자리를 옮긴 셈이었다.

지금 위가장에 남아 있는 소수밖에 안 되는 무사들은 별 볼 일 없는 쭉정이들, 즉 삼류 무사라 갈 데가 없는 자들뿐이었다.

당장 힘으로 위소옥을 누를 수도 있지만, 곡부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위가장의 숨통을 끊어 그녀가 항복하고 스스로 품에 안기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때가 멀지 않았다.

곡부통의 나이 55세. 위소옥과 무려 30년 차이가 나지만, 대륙에서 그 정도의 나이 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70이 넘은 사람도 15세짜리 어린 소녀를 첩으로 삼는 것이 지금 세상의 풍습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총관은 위소옥이 불쌍했다.

비록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총명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 한데, 그런 여자가 곡부통의 욕심 때문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건 셈이지. 쩝!”

총관은 머리를 흔들며 문을 나섰다. 위소옥이 가련하긴 했지만 자신은 곡가장의 총관. 곡 장주의 명을 시행하려면 낭인 무사촌에 가야 했다.

장안성에는 비단길을 따라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낭인 무사들을 사서 호위를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장안성 낭인 시장에선 돈만 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협박, 폭력, 청부 살인, 암살 등 낭인들은 가리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생겨난 낭인촌은 몇 해 전부터 촌장이라는 놈이 모든 것을 장악해 낭인 무사단을 만들었다.

* * *

위가장의 정문 위사인 곽방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주춤거리며 다가오던 거지가 점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손에 들고 있는 서신을 보아 분명히 장원에 오는 자였다. 하지만 옷을 보니 거지도 상거지가 따로 없었다.

거지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허리부터 굽혔다.

“저어기, 무사님, 이곳이 위가장이 맞나요?”

허리를 굽혔을 때 보니 머리가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씻지 않으면 저렇게 될까?

이건 분명히 적선을 바라고 온 거지였다.

예전 위가장이 성세를 떨칠 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오면 적선을 해주었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곽방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고울 리 없었다.

“어이! 지금은 나도 먹을 게 없어. 알았나? 적선을 받으려면 다른 곳으로 가보게.”

‘나이도 젊은 놈이 일해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에이!’

가까이 온 것을 보니 20대 정도밖에 안 돼 보였다. 그것이 더욱 곽방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팔다리가 성한 젊은 놈이 일할 생각은 않고 동냥을 받으려고 하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저기요, 그게 아니고, 이 서신을 총관에게 전해주라고 해서…….”

거지가 쭈뼛거리며 서신을 내밀었다.

“응? 서신?”

그제야 곽방원은 서신을 받아들었다. 겉봉에 써진 글을 보니 옥광산에서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 위가장의 유일한 수익원은 옥광산뿐이니 결코 소홀히 할 문제가 아니었다.

“거지… 아니, 자네! 잠깐 기다리게.”

곽방원이 서신을 들고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하인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높은 담장 위로 전각의 처마들이 보였다. 오랜 옛적이기는 하지만 중원 칠대세가에 들었던 위가장이니 건물들이 고풍스럽고 웅장했다.

“할아버지 말처럼 인간 세상에는 멋진 것들이 정말 많아!”

하인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하인은 산속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낮에는 짐승을 잡는 법을 배웠고, 밤에는 굴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 굴은 이상한 곳이었다. 수많은 군사들의 조각상이 각종 무기를 들고 파수처럼 지키고 있고, 문도 요란하게 컸다.

굴속의 가장 안쪽에는 커다란 방이 있었으며, 그곳에는 돌로 만든 거대한 침상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한빙옥(寒氷玉)으로, 몸의 열을 식혀 주고 육신의 세포가 젊어지게 한다고 했지만 하인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냥 그곳에서 늘 할아버지와 함께 자곤 했다.

“자네가 하인인가?”

생각에 잠겨 있던 하인은 들려오는 음성에 놀라 머리를 들었다. 등에 커다란 도를 멘 눈빛이 날카로운 중년이 서 있었다.

“예. 제가 하인입니다, 어르신.”

하인이 허리를 굽혔다.

중년의 차가운 눈이 그런 하인의 몸을 꿰뚫기라도 하듯 샅샅이 훑어보았다.

쾌도(快刀) 한중건.

일반적으로 쾌검은 있지만 도가 빠른 무인은 드물다. 그러나 한중건은 도로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이었다.

그의 도는 빛처럼 빨라 쾌도라는 명호가 붙었고, 최정상을 달리는 일류 고수였다.

위소옥의 아버지 대에서부터 위가장의 충신이 바로 쾌도 한중건이었다.

그가 보기에 저 하인이라는 청년은 무인이 아니었다. 일단 내공이 없었다. 해서 외공을 익혔는가 봤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흠, 힘이 장사라……. 그런데 이젠 위사가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한 한중건은 하인의 눈치를 살폈다. 위가장을 찾아온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대부분 실망하거나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저 분부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일 뿐이었다.

“자네, 힘은 세다니 어떤가? 지금 위가장에 남아 있는 직업은 마구간지기뿐인데, 그거라도 하겠나?”

하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자신에겐 먹을 것과 잠자리만 있으면 충분했다. 돈? 할아버지에게 돈이 인간 세상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듣긴 했지만, 아직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예, 어르신. 전 그냥 먹을 것과 잠자리만 있으면 됩니다.”

거짓이 아니다.

흐릿한 하인의 눈을 보던 한중건은 머리를 흔들었다.

옥광산의 조장은 한중건의 고향 선배였다. 그의 부탁을 무시할 수가 없어 받아들였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찜찜했다.

흐릿한 눈, 그리고 어수룩한 몸가짐.

뭔가 부족한 자 같았다.

‘머리를 맞았나?’

그럴 수도 있었다. 서신에 보면 어릴 때부터 사냥을 해서 먹고살았다니, 가능성이 있었다. 무공이 없는 자가 짐승을 잡으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구간지기라면 오히려 저런 자들이 맞춤일 수도 있었다.

“아닐세. 일을 시키면 당연히 급료도 주어야지. 한 달에 동전 백 문, 그리고 옷은 일 년에 두 벌이 지급될 테니 그리 알게.”

하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직업이 생긴 것이다.

그의 허리가 직각으로 굽혀졌다.

“고맙습니다, 어르신.”

“난 어르신이 아니야. 총관이라 부르게.”

“예, 총관 어르신.”

이번에는 총관 뒤에 어르신이 붙었다.

한중건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이런. 허 참! 할 수 없군. 따라오게.”

‘분명 머리가 잘못됐어. 선천적인가?’

선천적이라면 머리가 잘못된, 그러니까 정신적인 불구다. 뭐, 그래도 마구간지기는 상관이 없었다. 하루 종일 말똥을 쳐내고 짚과 두엄 속에 묻혀 사는 것이 마구간지기의 운명. 외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잘됐어.’

한중건이 어떻게 생각하든 뒤따라가는 하인은 그저 좋아서 헤벌쭉거리고 있었다.

‘하인아, 세상에 나가면 일단 먹을 것과 잠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돈은 그다음에 벌면 된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공기와 같지. 그러니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악착같이 벌어야 한다.’

할아버지의 말대로 이젠 정착을 할 수 있게 됐다. 그것이 하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돈은 천천히, 세상을 안 다음에 벌어도 되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범 잡는 기술만 있으면 어딜 가든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하인은 할아버지의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 * *

“어머나!”

“세상에, 멋져!”

이곳은 위가장의 후원. 하인들이 몸을 씻는 목욕탕이었다.

한중건은 하인에게 마구간을 알려 주고 목욕을 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아무리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뼈대 있는 위가장의 사람이 저렇게 지저분한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한중건이었다.

하인에게 입힐 청색 하인복을 가지고 온 2명의 하녀들은 깜짝 놀라고 있었다. 옷을 입고 욕실에서 나온 하인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미와 야성미가 넘치는 구릿빛 얼굴, 붓으로 찍어놓은 것 같은 진한 일자 눈썹에 우뚝한 코와 두툼한 입술은 헌헌장부였다.

게다가 6척의 늘씬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에 새 옷을 걸치자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비록 기름이 반질거리는 부잣집 공자처럼 잘생기지는 못했지만, 저 넓은 가슴에 안기면 모든 근심이 사라질 것 같았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은, 눈빛이 흐릿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녀들의 눈빛은 몽롱해졌고, 얼굴이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저 남자는 이 집에서 제일 신분이 비천한 마구간지기. 그러나 자신들도 하녀였다. 초록은 동색이고, 까마귀는 까마귀들과 어울리는 법. 두 하녀의 가슴이 팡팡 뛰놀았다.

“저, 하인 님, 시장하시죠? 제가 마, 만두를 가져다드릴게요.”

하녀 유단의 말에 몽롱한 눈으로 하인을 보고 있던 호련도 뽀르르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전 탕을 가져올게요. 손님들이 남긴 우탕(牛湯)이 있어요. 그렇지만 숟가락을 넣지 않은 새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두 하녀가 경쟁적으로 말하며 다가오는 바람에 하인의 얼굴이 벌게졌다. 생전 처음으로 만난 인간 세상의 여자들. 갑자기 가슴이 벌렁거리고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게다가 머리까지 이상하게 어지러운 감이 있었다.

‘하인아, 여자들 속에는 위험한 존재들이 있단다. 백 년 묵은 여우가 여자로 둔갑해 사람들을 홀리고 있지. 만약 네가 여자를 만나 가슴이 풀떡거리고 하초가 꿈틀거리면 무조건 피해라. 백 년 묵은 여우는 남자의 정혈을 빨아먹고 껍질만 남긴단다.’

‘배, 백 년 묵은 여우다!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어!’

하인이 급히 뒤로 물러서자 두 여우가 살살 웃으며 다가들었다.

하인은 범 잡는 기운을 끌어올리다가 급히 풀었다. 이곳은 위가장, 짐승 잡는 곳이 아니었다.

“하인 님, 여기로 가져올까요?”

“자리에 앉아요.”

그녀들이 웃자 하인은 그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게다가 하초가 불끈 일어섰다. 위험한 증상.

비칠거리며 뒤로 물러섰지만 하녀들이 바싹 다가오자 아찔한 육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이건 여우의 미혼향? 안 돼. 물러가!”

‘여운지 아닌지는 간단하게 알 수 있지. 약간 비릿하고 싱그러운 냄새는 사람을 미혹하는 여우의 미혼향이란다.’

할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손까지 홰홰 젓던 하인이 후다닥 달아났다. 범 잡는 기운을 사용하면 죽일 수도 있지만, 저 여우들을 위가장에서는 사람으로 알고 있을 테니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얻은 정착지를 잃고 싶진 않았다.

“하인 님, 어디 가세요?”

“거기 서세요.”

두 하녀가 따라오며 소리치자 하인은 귀를 막고 냅다 달려갔다.

“이봐, 신참! 왜 그래?”

마주 오던 남자 하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하인은 멈추지 않았다.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머리만 돌리고는 손가락질했다.

“도망쳐요! 저기 백 년 묵은 여우가 나타났어요!”

그리고는 화살처럼 달아났다.

남자 하인은 눈이 둥그레져 두 하녀를 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벌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백 년 묵은 여우? 흐흐흐. 머리가 잘못된 것 같다더니 정말 바보로군!”

그 말에 두 하녀도 서로를 쳐다보았다.

“호호호, 백 년 묵은 여우래! 깔깔깔. 정말 순진하신 분이야!”

호련이 배를 쥐고 뱅글뱅글 돌아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기집애, 분이라고?’

안방 하녀 유단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구간지기를 보고 그분이라고 하는 하녀는 없었다.

‘흥, 어림도 없지!’

유단은 입술을 깨물고 마구간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부엌 쪽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빨리 가서 음식을 가져다주고 싶었다.

목욕을 했으니 배가 고플 것은 당연지사. 배고플 때 음식을 주는 사람은 기억에 남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호련은 그런 유단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흥! 기집애. 고기는 내가 이미 숨겨 놓았거든? 넌 고작 만두만 가져가야 할 거다. 하지만 난 우탕이야.”

원래는 정문을 지키는 곽방원에게 가져다주려고 숨겨 둔 고기 음식이었다. 그런데 하인을 본 순간 고기의 주인이 그만 바뀌고 말았다.

만약 곽방원이 이를 알았다면 당장 결투를 하자고 할 만한 일이었지만 어쩌랴. 여심은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른 것을…….

그래서 익은 과일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따먹는 사람이 임자인 것이다.

호련도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다.

정문으로 교대하러 가던 무사들이 놀라서 바라봤지만, 두 하녀는 개의치 않았다.

한편, 두 하녀의 애틋한 심정도 모르고 마구간에 도착한 하인은 가슴을 내리쓸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대낮에 백 년 묵은 여우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분명 여우는 밤에 출현한다고 했다. 그것도 남자가 자고 있는 방에.

하인이 허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할아버진 잘못 아셨어요. 여우는 낮에도 나타나요. 내가 봤거든요.”

제2장. 바보 하인의 신위

장원의 뒤,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 넓은 마구간에는 10여 필의 말이 있었다.

위가장이 한창 번성했을 때는 이 마구간에 수십 필의 말이 있었고, 마구간지기도 여러 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10여 필의 말이 총재산이었다.

“어! 이거, 마구간이 깨끗해졌군.”

위가장의 마부 왕장곤이 마구간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지저분하던 마구간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고, 한쪽에서 팔을 걷어붙인 하인이 비질을 하고 있었다.

‘바보라더니 일은 잘하는군. 잘됐어.’

왕장곤도 하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하녀를 보고 백 년 묵은 여우라고 도망친 남자는 아마도 저 신참이 유일할 것이다. 그것도 위가장에서 제일 예쁜 유단과 호련을 보고 여우라고 하다니, 이건 위가장의 하인들이 대를 두고 전설처럼 전해 내려갈 이야깃감이었다.

“이보게, 난 장주님의 마부 왕장곤일세. 자네 이름이 하인이라지?”

왕장곤의 말에 마구간에서 나온 하인이 허리를 굽혔다.

“예, 마부 어르신. 제가 하인입니다.”

“아니, 이러지 말게. 자네와 난 같은 하인일세. 자네 이름 말고 위가장에서 잡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하인이지. 그리고 자네와 난 처지가 같으니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게.”

하인이 어르신이라고 하자 질색한 왕장곤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무리 바보라고 하지만 함께 일해야 할 같은 동료였다. 게다가 왕장곤은 마부였으니 하인과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예, 형님.”

“그리고 저 말이 장주님의 말(馬)이네. 일각(15분) 후에 정문 쪽으로 가져오게. 장주님이 밖에 행차하시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게.”

왕장곤은 머리를 끄덕이며 걸어갔다. 이제 마구간 일은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까지 마구간지기가 없어 고달팠던 그였다.

* * *

곽방원은 앞의 도로를 보고 긴장했다. 흔들거리며 오는 8명의 남자들은 전부 도검을 착용한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무인들이라고 해서 긴장한 것은 아니었다. 건들거리며 오는 그들의 앞에 있는 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흡혈귀 곡부통의 총관 마파두.

사람들은 곡부통을 흡혈귀라고 불렀다. 본인은 곡 장주라고 불리기를 바라지만, 인간의 피와 뼈를 빨아먹는 그를 장주라고 부를 사람은 이 장안성에 없었다.

저놈이 오는 것은 필시 빚 독촉 때문일 것이다.

위가장이 곡부통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젠장, 오늘은 일진이 사납네. 퉤!”

잇새로 침을 뱉은 곽방원은 검을 꽉 잡았다. 비록 삼류 검법인 육합검법을 익혔을 뿐이지만, 위가장을 지키는 위사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어이! 이거 신수가 멀쩡하군. 잘 있었나?”

마파두의 뒤에서 오던 자가 눈을 찡긋거리며 곽방원에게 말을 걸었다.

곽방원은 이를 악물었다.

혈쌍검 궁일평.

놈은 한 고향에서 함께 자란 놈이다. 지금은 낭인 무사가 되었지만 한때는 포목 가게를 하던 집안의 자식이었고, 곽방원의 부모는 그 집의 하인이었다.

태생부터가 다른 것이다.

“위가장에 돈이 좀 생긴 모양이군. 얼굴에 기름이 도는 걸 보니. 곽방원, 어차피 곧 망할 텐데 우리에게 오지 그래? 고향 친구니 내 특별히 혈사대에 받아주지. 뭐 처음에는 꼬붕 노릇을 해야겠지만, 급료는 이곳보다 높을 거야. 그리고 자네 부모는 원래 우리 집안의 하인이었지, 아마?”

너의 부모가 하인이었던 것처럼 너 역시 자신의 부하로 들어오는 것이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소리였다.

“크크크!”

“하하하!”

그 말에 궁일평의 뒤에 서 있던 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곽방원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뽑을 수는 없었다. 붙어봐야 일합도 겨루지 못하고 목이 달아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밸이 꼴려 기어이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궁일평, 난 위가장의 위사다. 옛날의 내가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위가장은 절대 망하지 않아.”

“어쭈, 기세가 대단한데? 곽방원, 잘 생각해봐. 여긴 삼 일 안에 망한다. 그땐 울고불고해봐야 늦어. 고향 친구니 내 특별히 생각해주는 거야. 어때?”

궁일평이 빈정거리며 곽방원을 격동시켰다.

곽방원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검을 잡은 손에 땀이 흥건히 고였다.

“크크크. 잘하면 검을 뽑을 기세인데, 어디 한번 뽑아봐. 그 잘난 육합검법으로 말이다. 네 사부라는 영감이 우리 단주에게 죽은 것처럼 너는 나에게 죽고 싶냐, 이 벌레 같은 자식아!”

순간 곽방원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3년 전, 그의 사부는 낭인단의 단주와 시비가 붙어 그만 목이 잘렸다.

곽방원의 부릅뜬 눈에 증오가 이글거렸다.

“이 개자식! 감히 사부님을 모욕해? 오늘 사부님의 원수를 갚지 않으면 내가 곽방원이 아니다!”

촤앙.

이성이 끊어지며 검을 뽑아든 곽방원이 그대로 돌진했다.

그러나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았기 때문이다.

“곽방원, 너는 위사다. 이게 무슨 짓이냐?”

언제 나왔는지 총관 한중건이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초, 총관님.”

곽방원의 입으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분노로 이를 악문 탓이었다.

“물러서라, 곽 위사. 위사는 위가장의 얼굴이다.”

“예, 총관님.”

분노가 펄펄 끓었지만 곽방원은 뒤로 물러섰다.

만약 방금 붙었다면 자신은 목이 잘렸을 것이고, 저놈은 만족해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궁일평은 그만큼 강했기에 분명 자신의 주군인 위 장주를 협박하는 데도 효과를 봤을 것이다. 여인에게 피는 두려움이니까…….

그러나 한중건이 제때 도착하는 바람에 일이 꼬이고 말았다.

“궁일평, 나는 피를 보고 싶지 않다. 위가장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가? 정 싸우고 싶다면 생사투라도 마다하지 않겠다.”

한중건의 몸에서 싸늘한 기세가 뿜어지자 궁일평이 움찔했다. 그도 일류 고수였지만 한중건은 그보다 한 수 위.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생사를 판가름해야 했다.

누가 죽을지는 모르지만, 궁일평은 그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자와 붙어서 목숨을 버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궁일평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 뒤에 서 있던 한 명의 왜소한 늙은이가 나섰다. 그의 옆구리에는 사발 같은 비발(飛鉢)이 각각 2개씩 걸려 있었다.

“자네가 쾌도 한중건인가?”

그를 본 한중건의 얼굴이 굳어졌다.

비발쌍마 척천양.

사발 같은 비발을 무기로 쓰는 그는 최상위를 달리는 일류 고수였다.

쾌도로 장안성에서 제법 이름을 떨치는 한중건이었지만, 비발쌍마는 그로서도 힘에 겨운 상대였다. 아니, 죽을 수도 있었다. 비발쌍마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쌍둥이였다.

그의 뒤에 서 있는 6척 장신의 여자가 그의 쌍둥이 누나 척천화였다.

그러나 여자라고 얕보았다간 큰코다친다. 그녀의 손속은 잔인했고, 시비를 건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살려 두지 않았다.

저들은 언제나 둘이서 합격하였기에 그것이 더 무서웠다. 오죽하면 비발쌍마라는 명호가 붙었을까?

잠시 굳어 있던 한중건이 포권을 취했다.

“제가 위가장의 총관을 맡고 있는 한중권입니다. 비발쌍마 선배님들께서 위가장엔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한중권의 정중한 말에 척천화가 앞으로 나섰다. 여자는 크고 남자는 작다. 이상한 조합이었다.

“호호, 역시 쾌도는 예의가 있어. 우리야 위가장과 볼일이 뭐가 있겠어? 돈만 주면 누구든 도와주는 거지. 이번에 곡 장주의 부탁을 받고 왔거든. 위가장에서 돈 받을 게 있다는데 정말 그래, 후배?”

살살 눈웃음을 치며 묻고 있었지만 척천화의 눈은 살모사처럼 날카로웠다. 저들은 낭인촌의 낭인 무사. 결론은 청부를 받고 왔다는 뜻이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아직 삼 일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우리와 곡 장주 간의 문제가 아닙니까?”

한중건의 말에 척천화가 머리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맞아. 우린 거치적거리는 놈이 있으면 처리해달라고 해서 왔어. 최후통첩이라나 뭐라나! 후배만 얌전히 굴면 우리도 피를 보고 싶진 않아.”

“그렇군요. 이 후배가 조그마한 명호를 얻긴 했지만 어떻게 두 분 선배님에게 견줄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 장주님은 무공도 모르시는 분입니다.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 있는 분들이 점잖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형평에 어긋나는 일이 벌어진다면 저도 도를 뽑아야겠지요. 위 장주님은 제 주군이시니까요. 그게 도리가 아닙니까, 선배님들?”

한중건이 차가운 눈으로 척천화를 마주 보았다. 그쪽에서 먼저 도발하지 않으면 자신도 가만있겠다는 뜻. 하지만 위협을 가한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좋아, 좋아. 말로 하는 것이 피차에게 좋겠지. 마파두, 할 말을 해봐.”

척천화가 한발 물러섰다.

사실 2명의 비발마가 온 것은 바로 한중건 때문이었다. 위가장의 유일한 고수인 그만 눌러버린다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 위 장주님을 만나 우리 장주님의 말을 전달해야 합니다.”

마파두가 하는 말에 한중건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가 장주님께 전하겠소. 너희는 정문을 지켜라!”

“옛, 총관님.”

검을 쥐고 뒤에 도열해 있던 위가장의 무사들이 일제히 좌우로 벌려 섰다. 총인원 30명. 이들이 위가장의 마지막 무사들이었다.

그러나 이 중 강한 자는 1명도 없었다. 모두 삼류를 조금 넘은 무사들. 이것이 지금 위가장의 현주소였다.

그것을 본 마파두가 피식 비웃음을 띠었다. 오늘은 꼭 위소옥을 만나 직접 전달해야 한다. 아니, 협박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때문에 거금을 들여 비발쌍마까지 데려왔다. 그들이 있는 한 한중건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난 들어가야 합니다. 이건 우리 곡 장주님의 명이오. 만약 막는다면 이곳에서 피가 흐를 것입니다.”

“마파두! 네가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한중건의 몸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오자 마파두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무공을 모르는 범부인 그가 일류 고수의 살기를 견뎌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을 본 척천화가 기를 뿜어냈다.

“한중건, 어쩌지? 우린 이 사람의 의뢰를 맡았거든. 정녕 피를 봐야 하나?”

척천화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고, 낭인 무사들이 검과 도를 잡았다.

정문 앞이 순식간에 차가운 살기로 냉각되었다. 여차하면 칼부림이 일어날 판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곳은 아직 위가장이에요. 나의 허락 없인 누구도 이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어요.”

활짝 열린 정문 안에 장주 위소옥이 서 있었다.

모두의 눈이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위소옥은 평범한 여자였다. 하지만 척천화는 대번에 그녀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내미지상(內美之象)! 훗. 곡부통, 그 돼지가 욕심을 낼 만도 하네.’

겉은 범부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아름다운 여자.

하지만 그 말에는 다른 뜻도 숨어 있었다. 얼굴은 평범하나 옷 속에 감추어진 육신은 아름답다는 뜻이었다.

저런 여자는 겉으로는 냉정하게 보여도 속에는 뜨거운 화산을 간직하고 있었다.

남자들에게는 최상의 잠자리를 만들어줄 수 있는 여자. 다른 말로는 명기라고도 불리는 여인이 바로 내미지상이었다.

“마 총관, 용건이 뭐죠?”

위소옥의 눈이 마파두에게 돌아가자 마파두가 싱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위소옥의 바로 앞까지 접근할 순 없었다. 한중건이 중간에 막아섰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더 이상은 허용하지 않는다.”

“총관님, 비켜 주세요. 무슨 일인지 말을 들어보지요.”

위소옥의 명에 한중건은 할 수 없이 물러섰다.

“이건 우리 장주님의 서신이오, 위 장주. 그것이 마지막 통보이니 신중하게 생각하기 바라오.”

느긋한 태도로 말한 마파두가 위소옥의 표정을 살피고는 속으로 킬킬거렸다.

‘크크크, 아마 분노하겠지. 그래, 어서 읽어라. 네가 분노해야 오늘 일이 제대로 된다.’

서신을 읽던 위소옥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는 마파두를 보며 그것을 박박 찢었다.

‘드디어 시작이다, 위소옥.’

마파두는 내심 쾌재를 올렸다. 하지만 겉모습은 몹시 분개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위 장주! 이게 무슨 짓이오? 서신을 찢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소?”

“나를 무엇으로 보느냐? 뭐, 품에 안기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마 총관, 곡부통에게 똑똑히 전해라. 그 돼지의 품으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위소옥의 입에서 분노에 찬 말이 쏟아져 나왔다.

박박 찢은 서신을 마파두에게 던진 위소옥은 치욕으로 몸을 떨었다.

팔랑거리는 종잇장들이 마파두의 얼굴에 부딪혀 발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때다. 마파두, 도발을 해라.

위소옥의 기세에 질려 있던 마파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저 도도한 계집의 콧대를 꺾어야 했다. 그래야 곡부통의 뜻이 실현될 수 있었다.

“위 장주, 당신은 지금 나의 주군을 모욕했소. 당장 사과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후부터 벌어지는 일은 모두 위 장주의 책임이오!”

마파두가 제법 당당하게 외쳤다.

“흥! 모욕은 곡부통이 먼저 했어요. 처녀인 나에게 빚 대신 품에 안겨 운우지정을 나누자고? 이게 한 가문의 수장인 나에게 할 말인가요? 말해보세요.”

위소옥의 말에 마파두는 기가 막혔다. 어떻게 된 것인지 저 계집은 겁도 없는 것 같았다. 비발쌍마가 누구던가? 손을 쓰기만 하면 숨통을 자르고 마는 잔인한 쌍둥이였다.

-뭐 하느냐? 멍청한 자식! 어서 명을 내려라.

왜소한 키의 척천양이 전음을 보냈다. 자신들은 청부 무사. 의뢰인의 말이 있어야 명분이 섰다.

순간 마파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것으로써 곡부통의 명을 이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발쌍마 님, 그리고 혈쌍검 님! 의뢰를 이행해주시오. 저 위 장주는 빚을 지고도 우리 장주님을 모욕했습니다. 난 주군을 모욕한 위 장주에게 사과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못할 시에는 이 자리에서 배를 가르고 자결할 것입니다!”

마파두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단검을 뽑아 배에 가져다 대자 기다렸다는 듯 궁일평이 쌍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렁, 스릉.

비발쌍마 남매도 옆구리의 비발을 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이거 할 수 없군. 피를 볼 수밖에. 어떤가, 위 장주? 이제라도 사과를 하면 물러서주지.”

척천화의 말에 한중건이 도를 잡고 위소옥의 앞을 막아섰다.

“유감이군요, 선배님. 내가 살아 있는 한 주군을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자, 오시오.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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