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장. 백팔마귀단 (3/17)

제1장. 백팔마귀단

청성산으로 가는 길에 1백여 명의 도검을 찬 무인들이 나타났다. 맨 앞에는 하인과 홍자연, 양설란이 말을 달리고 있었고, 그 뒤에는 백호대와 황룡대, 그리고 객잔에서 만난 무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은목전왕과 혈마궁의 싸움을 직접 보기 위해 청성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마마, 은목전왕이라는 자를 꼭 따라가야 합니까?

수연 공주의 뒤에서 말을 달리고 있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물었다.

사실 공주는 이번 혈겁이 일어난 아미파에 가려던 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 은목전왕이라는 자를 보고 방향을 바꾼 것이다.

2명의 수신 호위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겉은 중년으로 보이지만 이미 90이 넘은 사람들.

그중 한 사람은 등에 장창을 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이름이나 한때 적혈마창(赤血魔槍) 이적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혈천신교의 후예로, 세상을 떠돌며 수많은 무황성의 무인들을 도륙한 적혈마창 이적. 그가 주수연 공주의 호위 무사가 되어 있다는 것을 만약 무황성의 무인들이 안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무정철궁(無情鐵弓) 진필성이다. 역시 혈천신교의 사람이었던 그는 한동안 중원 대륙을 헤매며 무황성의 무인들과 혈전을 벌였다.

그때 진필성의 철궁은 공포의 상징이었다. 그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면 한 사람의 죽음이 생겨났다. 그래서 그에게 붙은 명호가 무정철궁이었다.

그 역시 수연 공주의 수신 호위였다.

그들이 왜, 어떻게 공주의 호위가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제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혈전에 참가했던 무인들은 이미 늙었고, 두 사람 모두 환골탈태하여 중년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제가 보기에 이번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니에요. 혈마궁이 혈천신교의 후신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 두 사부님도 이상하다고 하셨잖아요? 무림이 혼란해지면 나라가 어지러워져요. 그렇게 되면 유리한 것이 누굴까요? 바로 진야동의 무리예요.

“으음…….”

공주의 전음에 두 사람은 신음을 흘렸다.

진야동.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환관이었다.

놈의 손에 금의위와 동창이 넘어갔고, 황제는 허수아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군을 동원할 명분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자칫하면 반역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불운하게도 지금 황제는 믿을 사람이 없었다. 황제를 둘러싼 놈들은 전부 진야동의 부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주가 직접 강호에 나왔다.

하지만 그녀도 막막했다. 이 드넓은 강호에서 놈의 음모를 알아내는 것은 마치 솔잎 속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저 은목전왕이라는 자를 우연히 만났다. 그녀가 보기에 저자는 무위가 엄청나게 강한 자였다. 만약 저자를 황궁에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황제에게 힘이 될 수 있었다.

그녀가 강호에 나와서 느낀 것은 힘없는 자는 죽는다는 것이었다. 황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만약 강호에서 힘을 만들어 돌아간다면 얼마든지 진야동의 무리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은목전왕을 따라가는 목적이었다.

‘어떻게든 무위가 강한 자들을 모아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주가 중얼거렸다.

* * *

마촌(馬村).

말처럼 생긴, 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그렇게 불리는 동네.

이곳에서 청성까지는 반나절 길.

마촌을 벗어나면 말의 가슴 부위에 해당하는 소로가 나오는데, 양쪽에 말의 갈비뼈처럼 생긴 절벽들이 삐죽삐죽하게 솟아 있고 오직 앞뒤로만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오고 있는가?”

바위 사이에 앉아 있던 자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자에게 물었다.

“예, 지부장님. 그런데 전서구에 적힌 대로 은목전왕이라는 자와 백여 명의 무림인들이 함께 오고 있습니다.”

말을 하는 자의 눈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은목전왕이라는 자의 손속이 매우 잔인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부장이라는 자의 길쭉한 얼굴엔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한꺼번에 놈들을 잡는다. 총사의 일을 방해하는 바보 하인이라는 놈도 죽여 버리고, 공주도 사로잡는다. 이거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닌가? 클클클!”

“하지만 지부장님, 은목전왕뿐 아니라 공주의 호위는 적혈마창과 무정철궁입니다.”

“그게 어때서? 저기 누가 왔는지 봐라. 백팔마귀단이다.”

“헉! 백팔마귀단!”

지부장의 심복은 그만 숨이 넘어갈 뻔했다.

백팔마귀단.

70년 전 혈천신교 말살 때 온몸을 피로 목욕하며 살아 있는 생명체를 모두 죽인 마귀들, 그들이 바로 저들이었다. 수많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짐승 한 마리까지 모조리 죽인 자들.

그 당시 소녀들까지 겁간한 주역이 바로 저들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들, 그들이 와 있었다.

“어떠냐?”

“다, 당연히 은목전왕은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부장이라는 자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따위 은목전왕이라는 애송이 때문에 저들이 온 것은 아니다. 저들의 목표는 공주와 두 혈천신교의 잔당들이다.”

그제야 지부장의 심복 후아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만산이 주수연 공주, 즉 칠봉의 한 명인 천화(天華)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무림칠봉 중 최고의 미인이라는 천화. 그녀가 황궁의 수연 공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후후. 제갈만산이 천화를 내자(內子)로 삼으려 한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하긴,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다 해도 욕심을 낼 만한 여인이었다.

백팔마귀단이 온 이상 이번 싸움은 해보나 마나였고, 무림칠봉 중 최고의 꽃인 천화의 운명은 명백했다. 아울러 적혈마창과 무정철궁의 운명도 끝이었다.

백팔마귀단에 겨우 2명이 대항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이치. 더불어 은목전왕이라고 이름난 바보 하인도 끝장이었다.

* * *

“가가, 이곳이 마골이라더니 정말 말의 갈비뼈 같아요.”

골짜기의 입구에 들어선 양설란이 양쪽 벼랑을 가리키며 하인에게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하인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서 범 잡는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분간하기 힘든 범 잡는 기운. 한데 지금, 그것이 무엇인가에 반응하여 사납게 일어서고 있었다.

‘하인아, 범 잡는 기운이 요동친다면 준비를 단단히 해라. 그건 너의 필생의 적들을 만났다는 신호. 모든 힘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단 한 놈도 살려 두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너와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다.’

‘할아버지, 그들이 왜 원수지요?’

‘인마, 내가 그렇다면 그렇게 알고 있어!’

‘아, 알았어요.’

할아버지의 호통이 귓가에 아련하게 들려왔다.

“가가, 제 말이 안 들리세요?”

그제야 하인이 입을 열었다. 여느 때와 달리 긴장한 목소리였다.

“물러서. 쥐새끼들이 있어.”

“쥐새끼?”

눈이 동그래진 양설란이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뒤따라오던 무인들도 골짜기를 통과하는 바람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의아해할 때, 홍자연이 소리쳤다.

“오라버니의 말이에요. 모두 준비하고 물러서세요.”

“맞네. 어서 물러서게.”

“은목전왕의 말이야. 모두 물러서게.”

귀걸개와 광검까지 나서서 홍자연을 지지했다.

그에 사람들은 급히 물러섰지만 양설란은 아직도 머뭇거렸다.

그때, 절벽의 중간쯤에서 사람의 모습이 언뜻 보이더니 시뻘건 강기를 머금은 창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처럼 쏘아져 내렸다.

쩌저정.

“아앗!”

시뻘건 강기를 머금은 창이 순식간에 자신의 눈앞에 다가오자 양설란은 기겁하며 눈을 감았다. 피할 길도 없었고, 하인의 구원을 바랄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창의 속도는 가히 섬전과도 같았다.

콰앙!

창이 땅바닥에 박히며 강기가 폭발했다. 흙덩이가 사방으로 비산하고, 목표를 명중시키지 못한 창이 분노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가.”

양설란은 어느새 나타나 자신을 안고 피한 하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제야 하인의 말을 조금이나마 의심한 자신이 미워졌다.

“뒤로 가. 그리고 싸움에 끼어들지 마라.”

“가가, 저도 함께 싸…….”

“흥! 넌 아직도 정신이 안 들었구나. 네가 나서면 오라버니가 더 힘들어진다는 걸 왜 모르니?”

홍자연이 매서운 눈초리로 하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양설란을 쏘아보았다.

“어, 언니, 난 그저…….”

“나고 너고 빨리 내려와. 저게 안 보이니?”

홍자연의 손끝을 따라 절벽을 본 양설란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흉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 자들이 양쪽 절벽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그녀는 아쉬운 마음으로 하인의 몸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재빨리 하인의 가슴에서 풍기는 냄새를 한껏 들이켰다. 약간 시큼한 것 같으면서도 정신을 짜릿하게 해주는 사내의 향기가 가득 밀려들어왔다.

“뭐 해? 빨리 내려!”

홍자연이 뾰족한 눈으로 쏘아보며 소리쳤다. 마치 네가 지금 뭘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 양설란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물러섰다.

“아, 알았어요… 어, 언니.”

후다닥.

양설란이 자신의 말 위로 올라갔다.

“크하하! 역시 조금은 하는구나, 은목전왕. 그러나 너는 애송이일 뿐. 우린 너 같은 애송이를 상대하러 온 것이 아니다. 저 뒤에 있는 적혈마창, 무정철궁, 그리고 수연 공주가 우리의 목표다. 자, 어떻게 하겠느냐? 잘 들어라. 너와 무림인들이 여기서 빠진다면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겠다. 살려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쳐라. 알겠느냐, 은목전왕?”

제법 멋진 말로 야유를 했다고 싱글거리던 후아부는 하인의 말소리에 얼굴을 찡그렸다.

“홍 매, 저 새끼 이름이 뭐야?”

“글쎄요, 오라버니. 생긴 것이 딱 원숭이 같지 않아요?”

홍자연이 후아부를 쳐다보며 원숭이가 퐁퐁 뛰는 시늉을 했다.

“응? 그러고 보니 정말 원숭이네.”

하인의 말에 긴장하고 있던 무림인들이 통쾌하게 웃었다. 자신들에게는 은목전왕이 있다는 믿음 덕분이었다.

“하하하.”

“흐흐흐.”

그러나 그들은 저 백팔마귀단이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웃고 있을 때, 이적과 진필성은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저들의 가면, 저것은 백팔마귀단의 상징이었다. 무공도 모르는 혈천신교의 교도들을 오직 혈천신교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가차 없이 찍어 죽이던 자들.

겁간을 당해 죽으면서 신음하던 여인들과 소녀들의 비참한 울부짖음이 머릿속에 울려왔다.

“이놈들! 네놈들은 혈천신교를 도륙한 백팔마귀단이구나! 잘 만났다. 네놈들을 죽여 혈천신교 여인들의 원한을 갚겠다!”

적혈마창 이적의 말에 무림인들은 기겁했다.

적혈마창.

30년 전에 무황성에서 공적으로 선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혈천신교의 사람이고, 지금 나타난 저자들은 혈천신교를 도륙한 백팔마귀단이라니?

뭐가 뭔지,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네놈들도 혈마궁이냐? 감히 혈천신교를 도륙한 놈들이 그 후예를 칭하고 다니다니! 이놈들, 뼈를 갈아 마시겠다!”

무정철궁 진필성이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카카카! 그렇다. 우리가 바로 혈천신교를 도륙한 백팔마귀, 혈마궁의 살인 전사단이다. 오늘 네놈들은 한 명도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저기 남복으로 가장하고 있는 주수연 공주… 아니지, 무림칠봉 중의 천화! 너는 우리 총사의 내자로 가게 될 것이다.”

검은 마귀상을 쓴 자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남복을 입고 있는 수연 공주를 가리켰다.

“허억! 천화라니!”

“무림칠봉 중 최고의 여인이라는 천화-!”

사람들이 놀랄 때였다. 차가운 눈으로 마귀상을 쏘아보던 수연 공주가 죽립을 벗었다.

스르르.

죽립을 벗자 새카만 머리가 허리까지 흘러내리며 그녀의 어깨와 가슴을 덮었다.

그리고 햇빛에 드러난 얼굴. 그것은 정말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요염한 것 같으면서도 농염하고, 신성한 것 같으면서도 색녀의 분위기까지 풍겼다.

그것이 바로 칠봉 중 최고의 미녀인 천화의 모습이었다.

“우하, 세상에!”

“허걱! 사, 사람이 아니여!”

“우물, 천상의 우물이야-!”

꿀꺽. 꿀꺽.

사방에서 목구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녀가 주위에 일으킨 파장은 그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홍자연과 양설란도 넋을 잃고 있다 갑자기 어느 한 곳으로 머리를 홱 돌렸다. 모든 남자들이 지금 천화를 보며 음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하인은 어떻겠는가? 그도 남자인 것이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두 여자의 얼굴에는 안도의 미소가 피어났다. 하인이 또렷한 시선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쟤들 왜 저래?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뒈진 다음에 여자가 왜 필요한데?”

그 말에 무림인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서로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지금은 적이 노리고 있는 상황. 대체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황급히 무기들을 꺼내들었다.

수연 공주는 야릇한 시선으로 하인을 바라보았다. 모든 남자들이 자신에게 침을 흘리고 있는데, 저 남자는 관심이 없었다. 잠깐 눈이 마주쳤음에도 그의 눈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하인이 손가락으로 수연 공주를 가리켰다.

“너, 남잔지 여잔지 모르겠지만 죽고 싶지 않으면 무기를 들어.”

“예? 예, 알았어요.”

수연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존칭을 붙였다. 그리고는 허리에 찬 채대를 풀었다. 그것이 그녀의 무기였다.

“호호, 역시 가가는 미혹되지 않네!”

양설란이 돌아서는 하인을 보며 방실거렸다. 그러나 홍자연은 불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저건 만음요화상(萬陰妖花像)!’

만음요화상은 천상의 우물. 예전에 사부에게 들은 말이 생각났다.

‘만음요화상은 천 년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하는 상. 그만큼 세상에 태어나기 힘든 상이지. 몸에 흐르는 음기 때문에 오래 살지는 못하지만, 죽을 때까지 뭇 사내들의 정혈을 빨아먹고 죽는 지독한 신체란다. 그녀와 관계를 한 남자는 가죽만 남아서 죽지. 만음요화상이 나타나면 무조건 죽여야 해. 그녀를 보면 모든 남자들이 그녀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란다. 더구나 그녀와 관계를 한 번이라도 가진 남자는 그 늪 속에서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죽여야 해. 살려 두면 오라버니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홍자연은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전투 상황. 만약 이 싸움에서 저 여자가 살아난다면 반드시 죽이리라. 그것이 홍자연의 결심이었다.

하인을 선두로 무림인들이 무기를 잡자 절벽에서 내려다보던 검은 마귀상이 명을 내렸다.

“벌레 같은 놈들. 그렇게 죽고 싶으면 깡그리 죽여주마. 자, 죽여라!”

“명이 내려졌다!”

“가자!”

백팔마귀단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마치 지옥에서 뛰쳐나온 마귀들이 날아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박쥐처럼 날아 내린 마귀들이 창을 비껴들었다.

“천화만을 놔두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라!”

“카카카카!”

백팔마귀들이 든 창에서 시뻘건 강기가 쏟아지며 그들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

하인은 홍자연과 양설란, 주수연을 돌아보고는 다시 귀걸개와 광검을 보았다.

“걱정 말게. 우리가 지키겠네.”

광검이 검을 꾹 쥐며 하는 말에 귀걸개가 맞장구를 쳤다.

“그야 당연하지. 동생, 어서 가게. 자네의 이 세 여자는 걱정 말고. 이 귀걸개가 누군가? 저깟 놈들쯤 어림도 없지, 아암!”

귀걸개의 말에 둥그런 진을 펼쳐 세 여인의 앞을 막아선 백호대와 황룡대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돌진해오는 저 마귀단은 간단한 자들이 아니었다. 저들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무서운 기세가 피부를 따끔따끔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데 저 마귀단보다 한참이나 약한 백골단에게도 꼼짝 못한 귀걸개가 큰소리를 치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귀걸개는 강기를 구사할 수 있는 고수였기 때문이다.

하인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머리를 돌리더니 한 걸음 내짚었다.

그때, 홍자연이 외쳤다.

“조심하세요, 오라버니!”

피잉.

그 순간 진필성의 시위에서 3발의 화살이 푸른 강기를 머금고 날아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놀라운 것을 봐야 했다. 빛살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함께 하인의 신형도 날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에라, 받아라! 이건 너희처럼 떼로 덤비는 암범 무리를 잡는 방법이다. 암범 때려잡기!”

짜아악.

허공을 날아가 마귀단의 앞에 도착한 하인은 두 손을 좌우로 휘둘렀다. 그의 손에서, 아니 손이 아니라 어깨에서부터 손까지 팔의 전체에서 은빛 강기가 양옆으로 날아갔다. 마치 하인의 팔이 쭉 뽑혀서 날아가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크악!”

“아악!”

마귀들의 몸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지고, 이내 두 동강이 났다. 정확히 배 부분이 잘린 그들의 상체가 미끄러지며 창자가 와르르 쏟아졌다.

털썩. 털썩.

상체가 떨어진 다음에도 조금 더 서 있던 하체가 무너졌다. 김이 물물 흐르는 창자들과 소나기처럼 뿜어지는 새빨간 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도살이었다.

그 모습에 달려오던 마귀들이 흠칫하고 멈춰 섰다.

“저건 대체 뭐지?”

은빛의 강기. 보통 손이면 수강이고, 주먹이면 권강이라고 부른다. 한데 저자의 강기는 어깨부터 손까지, 즉 팔 전체의 형상이었다. 이런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암범 잡는 방법이라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마귀단 단장인 조개벽은 그리 미련한 자가 아니었다. 아니, 반대로 무수한 싸움 속에서도 살아남은 백전노장이었다.

놈이 초식을 괴상한 명으로 부르며 공격하는 것은 무공명을 감추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아주 지능적이고 교활한 놈이었다. 게다가 놈이 자신의 총사와 비슷한 무위를 가진 자라는 것 또한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백팔혈마귀진을 펼쳐라!”

조개벽의 명에 마귀들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그 바람에 방어가 약해졌고, 또 10여 명이 죽고 말았다.

“암범 비틀기!”

두 손을 가운데로 모은 하인의 손에서 꽈배기 같은 나선형 강기가 빙글빙글 돌며 날아왔다. 그리고 미처 진에 합류하지 못한 8명의 몸을 말 그대로 비틀어버렸다.

나머지 2명은 적혈마창 이적과 무정철궁 진필성의 화살에 꼬꾸라졌다.

“크악…….”

“악!”

쓰러져 펄떡거리는 그들의 시체는 끔찍했다. 마치 비틀어서 물을 짠 것처럼 살이 전부 떨어져 나가고 빌빌 꼬여 부서진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뼈를 벗어난 몸체였다. 몸체들은 갈가리 찢긴 것이 아니라 마치 이름난 도살공이 뼈만 남기고 소고기를 발라놓은 것 같았다.

“잔인한 놈! 사람을 이렇게 처참하게 죽이다니!”

조개벽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사람을 이렇게 죽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어,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근데 난 범 잡는 방법밖에 모르거든. 죽이겠다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 어떤 거라도 써야지. 안 그래?”

하인의 말에 조개벽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펄떡거렸다. 반드시 저놈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었다.

암범 비틀기라니? 세상에, 그따위 무공명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놈은 어수룩한 척하며 자신을 놀리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이를 부드득 가는 조개벽의 말에 하인은 히죽이 웃었다.

“아까 니들이 저 절벽에서 소곤대는 소리를 들었거든. 너희들, 나더러 바보 하인이라면서? 맞아, 나 바보 하인이야. 근데 나 지금 무지 열 받아. 그러니 이것도 받아봐. 수범 내장 뚫기!”

하인의 두 발이 연거푸 내질러졌다. 마치 길거리의 광대들이 춤을 추며 발을 걷어차는 형식으로, 그냥 보면 엉성한 공격 같았지만 실상은 결코 엉성한 공격이 아니었다.

쿠쿠쿠쿠.

대기가 비틀리고 몰아치는 막대한 힘이 진을 향해 밀려들었다. 빙빙 돌아가는 은빛의 나선형 강기. 그 끝은 마치 창끝처럼 뾰족했다. 그것도 12개의 끝이 독사처럼 머리를 휘저으며 쏘아져 오고 있었다.

“저건 회전창!”

뒤에 서서 하인의 무지막지한 무위에 깜짝 놀라고 있던 이적이 큰 소리로 외쳤다.

회전창은 초절정 고수의 최상위급에 올라야만 펼칠 수 있는 무공으로, 자신도 아직은 시늉조차 못 내고 있는 공격법이었다.

그런데 저 평범한 청년이… 아니, 은목전왕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창도 아니고 발로 회전창을 만들어내다니! 게다가 저자는 겨우 20대 중반의 젊은이가 아닌가.

콰앙!

그가 멍한 눈으로 하인을 보는 사이, 귓전을 찢는 듯한 폭발음이 들리고 이어 자욱한 먼지가 일어났다.

“크윽… 쿨럭! 진을 갖춰라.”

원래 백팔혈마귀진은 아수라혈진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었다. 혈천신교의 아수라혈진, 그것은 소림의 백팔나한진과 그 위력이 비슷하다고 알려진 진식이었다.

그런데 저 애송이는 어떻게 된 일인지 진의 약점을 정확히 공격하고 있었다.

놈이 또다시 그 명칭도 이상한 암범 잡기라는 초식을 사용하기 전에 강기를 전면에 둘렀다.

한데 이번에는 무슨 괴상한 수범 내장 뚫기라더니, 회전창 비슷한 강기를 쏘아 보냈다.

진식의 약점은 한 사람이 아니라 수십 명이 함께 움직인다는 것에 있었다. 아무리 빨리 움직이고 합심해도 개인이 움직이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법.

강기가 방어막을 채 형성하기도 전에 놈의 강기가 약한 부위를 들이쳤다.

폭발과 함께 12명의 단원들이 팔다리가 뜯기며 그 육편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벌써 32명이 죽고 이제 남은 부하는 75명. 조개벽은 노화로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마귀단이 무림에 생겨난 이래 지금처럼 처참하게 당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강하다던 혈천신교와 싸울 때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부하 한 명을 죽이려면 적어도 적은 수십 명이 죽어야 했다.

그만큼 강한 진이 바로 백팔혈마귀진이었다.

“이놈! 네놈을 죽여 살점을 뜯어 먹을 테다. 마귀상 출!”

휘아악!

진의 가운데서 거대한 힘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였다. 시뻘건 강기의 회오리였다.

“광검, 저건 또 뭔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던 귀걸개가 광검에게 물었다.

귀걸개는 지금 기가 막힌 상태였다. 하인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제 20대 중반밖에 안 되는 자가 소림의 백팔나한진과 비슷하다는 저 진을 단신으로 깨고 있었다.

기세당당하게 모두를 도륙하고자 달려오던 자들이 거꾸로 죽음의 공포에 허덕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을 보니 자신의 나이가 한스러웠다.

‘이때까지 나는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정말 자신이 초라해지는 귀걸개였다.

어깨가 축 처진 귀걸개가 투덜거렸다.

“이거야 원, 이젠 창피해서 무림을 떠나든가 해야지. 젠장!”

광검이 의기소침해진 귀걸개를 보고는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보게, 너무 자책하지 말게. 하인 같은 사람은 천 년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무재야. 그리고 자네는 그의 의형이 아닌가? 이후 무림에 나서면 모두가 자네를 부러워할 걸세.”

광검의 말에 귀걸개는 귀가 번쩍 열렸다.

정말 그랬다. 자신은 은목전왕의 의형. 무림에서 인연은 무척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지! 난 은목전왕의 형이지. 음하하!”

귀걸개가 대소를 터뜨리는 것을 본 세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곧 뾰족한 눈이 되어 머리를 픽 돌렸다.

‘흥! 귀걸개, 싸움만 끝나 봐. 오라버니의 세 여자라고? 누가? 이것들이?’

이것은 홍자연의 분노였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어. 지가 천화면 천화지, 오라버니를 꾀어? 어림도 없지!’

이것은 매화 양설란의 앙큼한 독심이었다.

‘모두 나를 싫어하는구나. 훗!’

속으로 가벼이 미소를 지은 주수연은 다시 강기가 쏟아져 나오는 싸움판을 바라보았다.

쩌저정.

3개의 마귀상을 한 강기가 세 사람을 향해 쏘아져 왔다. 그러나 이적과 진필성에게 쏘아지는 강기는 희미한 것이, 누가 봐도 속임수임이 분명했다.

주공은 하인을 향한 것이었다.

거대한 마귀상. 시뻘건 마귀의 형상을 한 강기가 대지를 비틀며 덮쳐들었다.

그 순간 하인의 신형이 번쩍하더니 사라졌다.

콰앙! 콰앙! 콰앙!

세 곳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두 곳은 이적과 진필성이 있는 곳이었고, 한 곳은 하인이 있던 곳이었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하인이 있던 자리는 흙과 돌덩이들이 산산이 깨져 허공으로 비산하며 움푹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그러나 하인의 신형은 이미 그곳을 떠나 본진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강기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번개처럼 쏘아져 오는 하인을 본 조개벽은 기절초풍했다.

“저놈이……. 막아! 아니, 진을 해체하라!”

조개벽이 그만 갈팡질팡하며 소리쳤다.

온몸에 은빛의 강기가 넘실거리는 하인이 진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은빛이 하인의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휘감고 돌며 신비한 형상을 연출했다.

“암범 덮치기!”

하인의 신형이 진을 형성한 자들과 부딪쳤다.

퍼엉! 펑펑펑!

“크악!”

“아악!”

또다시 10명의 마귀단원들이 강기의 폭발로 몸이 찢겨 흩어졌다.

자욱하게 비산하는 피와 살점 사이로 하인이 단원들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을 본 조개벽은 희열로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놈이 진 안에 들어오면 압력을 수십 배로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화가 복으로 된 상황. 이 기회를 놓치면 저놈을 죽일 수 없었다.

순간 조개벽의 입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울렸다.

“봉쇄!”

수십 년을 한몸처럼 훈련한 단원들답게 일시에 진이 맞춰졌다.

“출강(出쾝)!”

파확.

거대한 강기, 시뻘건 빛이 진의 가운데를 뒤집어씌웠다. 백팔혈마귀진의 최후 진식이 발동된 것이다. 이 진식은 온몸의 공력을 모조리 진 안에 집중하여 적을 말살시키는 방법이었다.

강철도 두부처럼 잘라버리는 백팔마귀단의 강기가 하인의 전신으로 들이쳤다.

“크윽……!”

하인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 그의 몸에서 은빛의 강기가 흘러나와 전신을 감쌌고, 몰아쳐 오는 사나운 강기의 파도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됐다. 이젠 놈을 죽일 수 있다!’

조개벽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놈만 죽이면 나머지는 벌레처럼 짓밟아버릴 수 있었다.

“파혼강(破魂쾝)!”

강기를 뿜어내는 최후의 단계. 혼까지 부숴버린다는 파혼강이 무서운 기세로 하인의 몸에 조여들었다.

“으윽!”

털썩.

하인의 무릎이 굽혀지고 두 손이 땅을 짚었다. 수만 근의 바위가 몸을 짓이기는 것 같았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은빛 강기가 희미해지고, 연거푸 들이치는 혈강기에 옆구리와 어깨, 가슴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조금만 더 공력을 집중하라! 놈은 마지막 힘을 쓰고 있다!”

조개벽의 악청에 부르르 몸을 떨던 단원들이 진원진기를 끌어올렸다. 놈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들이 죽는 것이다.

우르르.

진이 몸부림치고, 땅이 지진을 만난 듯 흔들렸다. 멀리서 보이는 진 안은 온통 핏빛 강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공격해요! 은목전왕 대협이 위험해요!”

소리를 친 주수연 공주가 채대를 쥐고 달려 나갔다.

“뭐 하세요? 저 사람이 죽으면 여기 있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해요! 저놈들이 보이지 않나요?”

그녀의 외침에 머뭇거리던 무인들이 절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검은 장포를 입은 자들이 정렬해 있었다.

그렇다. 자신들이 죽고 사는 것은 모두 은목전왕에게 달려 있었다. 그가 살면 자신들도 살고, 그가 죽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와~ 쳐라!”

촹촹촹!

1백여 명의 사람들이 공격했지만 혈마귀진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진의 외벽을 흐르는 강기가 그들의 공격을 튕겨 내고 있는 것이다.

“언니,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안타까운 얼굴로 주수연이 홍자연을 바라보았다.

“어, 언니?”

홍자연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방금까지도 주수연에게 선수를 뺏겼다고 분해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저 절절한 눈빛을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하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누군가? 바로 황궁의 공주였다. 한데, 그런 여자가 자신보고 언니라고 했다.

차가운 얼음 같던 홍자연의 심장이 따뜻해졌다.

“있어. 자, 모두 줄을 맞춰요! 그리고 앞사람에게 내력을 보내세요. 우리들 개개인의 힘은 약하지만 그것이 합쳐지면 절정 고수의 강기를 뿜을 수 있어요. 귀걸개 님, 광검 님은 모두의 앞에 서시고, 백호대와 황룡대는 절벽에서 적이 내려오면 막으세요. 죽어도 막아야 합니다. 막지 못하면 우린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해요.”

“걱정 마시오, 염미화 님.”

백호대와 황룡대, 그리고 화산의 살아남은 검수들이 달려오는 검은 장포들을 맞받아 달려갔다.

촹촹촹촹.

“악!”

“윽!”

“죽어라!”

“너나 죽어라!”

곧 부딪친 그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지부장은 어떻게 해서든 이것들을 죽일 결심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제는 됐다, 하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저 찢어 죽일 천환지 요물인지 하는 계집의 충동질에 겁에 질려 있던 무림인들이 힘을 합쳐 서로가 서로에게 내력을 넘겨주고 있었다.

원래 내력전이는 초절정 고수가 돼야 가능한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강력한 내기로 상대를 치료하거나 벌모세수를 할 때의 경우였다.

고수가 아닌 일반인도 약간의 내공은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지금 저들이 하는 것이 바로 그 방식이었다. 비록 약한 힘들이었지만 그것이 합쳐져 맨 앞에 있는 자는 절정의 강기를 뿜을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마귀진의 힘이 약해지고 그 안에 갇힌, 그 사람 같지도 않은 괴물이 살아나면 자신들은 끝장이었다.

잔머리와 아부로 지부장의 자리까지 꿰찬 그였지만 무공은 약했다. 만약 마귀단이 죽으면 자신은 결코 살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들이 백팔혈마귀진을 공격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쳐라! 진을 보호해야 한다!”

“흥! 어림도 없다. 막아라!”

막는 자들이나 공격하는 자들이나 모두 필사적이었다. 자신들의 생명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컥!”

“으윽…….”

목이 잘려 떨어지고, 팔다리가 날아가고, 피가 흥건하게 땅을 적셨지만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출강!”

홍자연의 날카로운 고음이 울려 퍼지고, 비단 필을 찢는 기음이 울렸다. 모두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두 줄로 늘어서 있는 곳의 맨 앞에서 푸른 강기가 뿜어졌다.

쩡, 쩌엉.

콰앙, 콰앙!

순간 흠칫하더니 마귀진이 출렁였다.

이번에는 이적의 창이 강기를 두르고 진을 향해 돌진했고, 진필성의 화살이 연속으로 쏘아졌다.

콰앙! 콰앙! 콰앙!

백팔마귀진은 무너질 듯 색이 연해지고 출렁거렸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이를 악문 홍자연이 다시 소리쳤다.

“자, 조금만 더 힘을 내요! 이번에는 반드시 무너뜨릴 것입니다!”

무인들이 다시 내력을 뽑아냈다. 그들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핏줄이 일어섰지만 하나같이 결사적이었다.

“지독한 놈! 괴물 같은 놈!”

조개벽은 하인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진원진기까지 뽑아 올린 강기의 파도가 연속으로 덮쳤음에도 무릎을 꿇은 놈은 그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무슨 명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헉헉! 진원진기를 모두 뽑아라. 저놈이 살면 우리는 죽고, 저놈이 뒈져야 우리가 산다! 어헉!”

조개벽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너무 많은 진원진기를 뽑아낸 탓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단원들도 마지막 힘을 썼다.

콰앙, 콰앙!

진기의 파도가 강력하게 하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컥……!”

꺾어질 듯 뒤로 홱 돌아갔던 하인의 머리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더니 꼿꼿이 일어섰다.

조개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강기의 파도 속을 바라보았다.

“죽었는가?”

그러나 이상했다. 죽었다면 쓰러져야 할 것인데, 놈은 오히려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교활한 새끼! 그러다 우리가 진을 풀면 공격할 심보겠지? 흥, 어림도 없다!’

지금 상태에서 진을 풀면 놈에게 당할 수도 있었다. 진원진기까지 뽑았기에 지금 부하들은 심신이 녹초가 된 상황. 아주 조금 남은 진기마저 뽑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진원진기는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래, 저놈도 마지막 기운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명보다 우리가 우세한 것은 당연한 일. 기다리면 저놈은 진기가 고갈되어 쓰러질 것이다.”

조개벽은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죽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인은 동굴의 매끄러운 돌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의 양옆으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둘러서 있었다.

“아저씨, 아버지는 어디 갔어요? 예? 말해주세요.”

“소주(小主), 주군은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주군의 내단입니다. 입을 벌리세요.”

늙은 노인이 하인의 앞으로 내단을 가지고 다가왔다. 약간 불그스름한 내단.

하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싫어, 난 싫단 말이야!”

하인이 벌떡 일어나려고 하자 수십 명의 손이 그를 덮쳐눌렀다.

“소주, 소주는 천신의 후예. 우린 주군의 명대로 소주를 키워야 합니다. 용서하시기를.”

머리를 숙인 늙은 노인이 하인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하인은 내단을 안 먹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혈을 짚여 저절로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차갑고 비릿한 내단이 입 안으로 들어서자 하인이 눈을 부릅뜨고 악을 썼다.

“죽일 거야! 내가 크면 너를 죽일 거야!”

“소주가 하늘이 되시면, 신은 소주의 뜻대로 죽어드리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시작하라!”

그의 명과 함께 뜨겁고, 차갑고, 매서운 진기가 온몸을 헤집고 들어왔다. 지독한 고통. 몸이 산산이 부서지고 혼까지 소멸되는 것 같았다. 머리가 하얗게 변하며 백색 안개가 눈을 덮었다.

“으아악!”

“으아악!”

하인의 입에서 대지를 찢어발기는 듯한 부르짖음이 울려 퍼지자 조개벽은 환성을 뱉어냈다.

“흐흐흐! 이제야 가는구나, 지겨운 놈.”

진의 해체를 명하려던 조개벽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저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하인의 머리가 천천히 들려졌는데, 그의 눈은 감겨진 상태였다.

우두둑.

강기의 공격에 흙과 돌가루가 날려 와 푹 파묻혔던 다리도 일어섰다.

“저, 저게 대체……. 정말 저놈은 괴물인가?”

경악한 조개벽은 무슨 말이 나가는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했다.

그때 하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파앗.

“웃!”

“헛!”

그와 동시에 하인의 눈에서 강력한 은빛이 쏘아졌는데, 그것은 무시무시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난 누구지? 내가 누군가 말이다!”

하인의 한 손이 쳐들렸다.

“너, 너는 알지? 내가 누구냐!”

하인의 은빛 눈이 조개벽을 쏘아보고 있었다.

무섭다!

평생 겁이란 것을 모르고 살아온 조개벽은 공포가 척추를 타고 뇌리를 허비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아니야. 이자는 지옥의 괴물이야!’

“모른다면 죽어라!”

하인의 손이 좌에서 우로 그어졌다.

촤악.

은빛 강기가 빨랫줄처럼 늘어지며 조개벽의 몸을 후려쳤다.

“커억…….”

조개벽의 몸이 사선으로 잘리더니 털썩 쓰러졌다.

하인의 두 손이 다시 쳐들렸다.

“나는 누구란 말인가? 왜 내 아버지는 죽었는가? 누구냐, 나는!”

쏴아아아!

하인의 열 손가락에 둥그런 은빛 구가 생겨났다.

이글거리며 천천히 회전하는 은빛 구.

그것을 본 마귀단원들의 눈에 암울한 기색이 어렸다.

“저, 저것은 지탄강기(指彈쾝氣)!”

모두들 몸을 움츠렸다. 이제는 끝장이었다. 지탄강기가 무엇인가? 강기를 화살처럼 쏘아낼 수 있는 능력이다. 게다가 폭발까지 하는 것이었다.

도망친다고? 어림도 없다. 지탄강기를 사용하려면 초절정을 넘어 초극 고수가 되어야 하고, 초극 고수가 쏘는 지탄강기를 피해 도망칠 수는 없었다.

“모두 죽이리라,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죽어!”

쫘아아아앙!

고막을 뚫어버릴 듯한 소리가 울리고, 손가락을 떠난 구슬 같은 지탄강기들이 백팔혈마귀진을 휩쓸었다.

콰콰쾅, 콰콰쾅!

연속으로 울리는 폭음 소리.

백팔혈마귀진을 형성하고 있던 마귀단원들의 몸이 갈가리 찢겨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뼈와 살점들, 그리고 핏방울들이 우박처럼 사방으로 날아갔다.

밖에서 싸우던 두 패거리의 무인들이 일제히 패한 쪽을 바라보았다. 승패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도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은목전왕 님이시다!”

무인들이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

피와 살점, 뼈들이 수북이 쌓인 곳에 두 팔을 늘어뜨린 하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긴 것이다. 은목전왕이 이겼다!

그렇게 무인들이 환호를 올릴 때, 혈마궁의 사천 지부장은 그만 기겁을 했다.

세상에, 단신으로 백팔혈마귀진을 깨는 놈이 있을 줄이야! 그뿐인가? 백팔마귀단까지 전멸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이 뒤를 돌아보았다.

‘살아야 해. 도망쳐야 해.’

후다닥.

지부장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지, 지부장이 도망쳤다!”

“도, 도망쳐야 산다!”

검은 장포들도 미친 듯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가가!”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하인의 눈은 저 멀리 도망치는 검은 장포들을 보고 있었다.

“죽인다, 아버지의 원수들.”

피앗.

하인의 신형이 번쩍하고 사라지더니 사람들의 머리 위로 한 줄기 은빛이 쭉 늘어졌다.

“대체 어딜 가는 거지?”

홍자연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라진 하인의 은빛 줄을 바라보았다. 너무 빨라서 도저히 따라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걱정 말게. 도망치는 놈들을 잡으러 간 것 같네.”

광검의 말이었다.

“아암, 누가 감히 내 동생과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백팔혈마귀진을 단신으로 부수고 깡그리 쓸어버린 사람이야. 말 그대로 전왕이지. 역시 내가 동생 하나는 잘 삼았어. 흐흐흐!”

귀걸개의 껄껄거리는 웃음소리에 사람들은 눈을 돌렸다. 저 귀걸개가 부럽기도 하고 질투심이 생기기도 했다. 은목전왕을 동생으로 삼았으니 누구도 감히 그에게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의동생은 백팔혈마귀진을 박살낸 무적 고수. 무림은 힘의 대지이니 이제 시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무림에 강자는 많지만, 그래도 은목전왕 같은 나이에 그만한 고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구주팔기가 이젠 구주구기가 되겠어!”

“정말?”

“그럼. 구주팔기 혼자서 백팔혈마귀진을 박살낼 수 있나?”

“없지.”

“거봐, 그러니 은목전왕은 구주팔기에 충분히 들고도 남지.”

“그래, 맞아.”

무인들이 웅성거리는 말이었다.

양설란이 반짝이는 눈으로 광검을 보며 물었다.

“광검 님, 가가께서 진정 구주팔기의 실력에 들까요?”

“구주팔기라…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광검의 말에 양설란은 입을 딱 벌렸다.

구주팔기 위에는 뭐가 있던가? 그래, 무황! 무황성의 무황이 있다.

무인들까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광검은 피식 웃었다.

“무황성에는 세인들이 모르는 고수들이 구름처럼 있다네. 무황은 반신이나 같은 사람이지. 내가 보건대 은목전왕은 구주팔기의 선두 자리 정도는 될 거야.”

“우아!”

광검의 말에 무인들이 환성을 올렸다. 잠깐이지만 하인과 함께 싸웠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도 은목전왕의 싸움에 한 팔 거든 것이다.

이것은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공로였다.

나도 구주구기인 은목전왕의 싸움에 함께했다!

무인들은 흥분으로 한껏 들떴다.

그러나 홍자연은 하인이 사라진 쪽을 보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분명 평소와는 달랐어.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리고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주수연 공주 역시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하인이 사라진 길 쪽을 보고 있었다.

‘대단한 사람이야. 저 사람을 황실로 불러들인다면 아바마마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을 텐데, 그게 가능할까!’

이런 그녀들의 마음과 달리 한 시진이 흐르도록 하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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