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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만독화룡 (6/17)

제2장. 만독화룡

암흑, 사방이 암흑이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스스스스스.

거대한 동공에 무엇인가 커다란 괴물이 나타났다. 머리가 황소의 대가리만 하고 사발만 한 눈에서는 불길이 뿜어지는 괴물.

삐죽삐죽 날카로운 이빨들이 돋은 입을 쩍 벌린 괴물은 뜻밖에도 만독화룡(萬毒火龍)이었다.

만독화룡.

1만 년을 독정신수(毒湞神水)에서만 살며 내단을 만들어 승천한다는 만독화룡은 천고에 없는 보물이었다.

만독화룡의 내단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금강불괴가 되며, 독인이라면 꿈에도 그리는 독존지체가 되는 것이다.

독존지체(毒尊之體)!

사람들이 말하는 독종이나 독인 같은 것은 독존에 비하면 어른과 아이의 차이였다.

때문에 독을 주 무기로 삼는 무인들에게 만독화룡의 내단은 최고의 보물이지만 상상 속의 떡일 뿐이었다.

만독화룡은 인세에서 볼 수도 없고, 또한 잡을 수도 없었다. 만독화룡이 뿜어내는 독도 무섭지만 가죽은 도검이 불침하는 단단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나, 잡기만 한다면 남자들에게는 최고의 영약이었다. 만독화룡의 내단을 먹으면 엄청난 양기가 생겨나고 마를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독존지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금을 통틀어 만독화룡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전설 속의 만독화룡이 지금 쓰러져 있는 하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스스스슷.

사발 같은 눈을 뒤룩거리며 쓰러진 하인을 내려다보던 만독화룡이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았다.

지금 만독화룡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오늘은 5백 년에 한 번씩 지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독무(毒霧)가 솟구치는 날이었다.

지금까지 9천 년을 살며 지심 속의 독무를 흡수한 만독화룡은 이제 두 번만 더 독무를 흡수하면 승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잔뜩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중 이 조용한 지저혈에 이변이 일어났다. 인간이 들어선 것이다.

크르르르.

입을 쩍 벌린 만독화룡은 단숨에 하인을 삼켜 버렸다. 이 인간이라는 벌레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 그것에서 자신의 기운과 상극이 되는 냄새가 풍겼다.

은은한 은빛이 몸을 감고 도는 인간. 살려 두면 자신이 승천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 단번에 삼켜 버린 것이다.

만독화룡의 위장에 들어가면 어떤 생물체도 녹아버린다.

크라라라라!

하인을 삼켜 버린 만독화룡이 힘차게 포효를 하고는 스르르 방향을 돌렸다. 이제는 독정신수에 가서 조금 있으면 솟구칠 독무를 흡수해야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순간 위장이 찢어지는 아픔이 느껴졌다. 아니, 이건 찢기는 것이 아니라 뭔가가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몸이 뒤틀리고 내장이 한곳으로 몰려드는 기분이었다.

크라라라라!

거대한 만독화룡이 비명을 지르며 태질하기 시작했다.

우르르릉! 콰콰콰콰!

만독지저혈이 지진을 만난 것처럼 뒤흔들리고 마구 무너져 내렸다.

쾅쾅쾅쾅!

시간이 갈수록 고통이 심해지자 만독화룡은 크게 몸부림쳤다. 대체 뭐가 이렇게 고통스럽단 말인가? 길길이 날뛰면서 동공의 벽을 꼬리로 후려치고 몸통 박치기를 했음에도 아픔은 점점 더 심해졌다.

카라라라.

비틀고, 꼬고, 후려치고 하던 만독화룡은 기겁을 했다. 자신의 몸에서 수분이 말라가고 뭔가가 무서운 속도로 내단을 흡수하고 있었다.

바로 위장 속에 들어간 하인의 생사흡정대법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하인은 정신을 잃은 상태. 그러나 그에게는 은천만상신공이 있었다. 이미 쓰러지기 전에 발동된 은천만상신공은 온몸을 회전하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세맥을 하나하나 뚫고 있다가 위험이 닥쳐오자 스스로 생사흡정대법을 발동한 것이다.

만약 하인이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독의 기운 때문에 죽음의 위험에 처했을 테지만, 지금은 무의식 상태. 만상신공이 숙주에게 위험이 닥쳐오자 스스로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츄츄츄츄츄.

9천 년 동안 지심 속의 독정과 열양지력을 흡수했던 내단이 녹으며 하인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하인에게는 천고의 기연이었지만, 만독화룡의 고통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크라라라라.

만독화룡은 맹렬한 속도로 전진하다 동굴 벽에 몸통을 들이박았다.

콰앙! 콰쾅! 쾅쾅!

우르르르, 콰당탕!

동굴의 암벽들이 부서지고 쪼개지며 무너져 내렸고, 무너진 암석들은 만독화룡의 몸부림에 다시 잘게 부서져 가루로 변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천독지저혈은 형체를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지하의 공동이 완전히 무너지고 겨우 한쪽 동굴만이 남아 있었다.

크르르르.

깨어진 암석들이 가루로 변해버린 돌가루 위에 축 늘어진 만독화룡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엄청나게 거대하던 만독화룡은 온데간데없고, 뼈에 검붉은 색이 번들거리는 가죽만이 남아 기괴한 형상을 연출했다.

하인에게 모든 정혈과 생기를 흡수당했기 때문이다.

쿠웅!

마침내 만독화룡의 뼈와 가죽만 남은 머리가 툭 떨어졌다.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기운이 없었다. 9천 년 동안 승천하려고 만들었던 내단을 강제로 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생명력까지 빼앗겼으니 만독화룡으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 세상은 고금 이래 약자는 강자에게 먹히는 것이 창조주가 만든 자연의 섭리인 것을.

* * *

한쪽에는 흑옥으로 만든 넓은 침상이 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는 공동. 그곳에 몸에 뼈만 남은 중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얼마나 살집이 없는지, 마치 뼈에다 가죽을 씌워놓은 것 같은 형상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후~ 우, 후~ 우.”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은빛 기운이 미약하게나마 회오리치며 주변을 휘감았다.

그때였다. 암동의 밖에서 여인의 앙칼진 말소리가 들렸다.

“비켜라! 감히 나를 막을 테냐?”

그리고 주저하는 듯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주모, 저희가 어찌 감히……. 하지만 주군께서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흥! 폐관에 들어간 지 오 년이 지났다. 그이가 나에게 오 년을 약속했단 말이다. 그런데 아무런 기별도 없이 나오지 않고 있어. 혹시 무슨 일이 생겼는데 너희가 숨기는 것이 아니냐?”

여인의 말에 무사들이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주모님을 속이겠습니까? 단지 저흰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주군의 명을 지킬 따름입니다. 죄송합니다, 주모.”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 어서 비켜라!”

날카로운 설전이 오가는 것을 듣던 중년의 눈이 번쩍 떠졌다.

“설 매가 온 모양이군.”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만. 양 장로, 들여보내라.”

중년의 말이 밖으로 전해지자 대답 소리가 들렸다.

“옛, 주군!”

그리고는 마지못한 듯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주모.”

“흥!”

차가운 코웃음을 흘린 여인이 암동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여인은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미인이었다. 맑고 아름다운 얼굴, 비단 천에 휘감긴 육감적인 몸매에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염기가 폭발하듯 뿜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예쁜 아미가 살짝 찌푸려지며 가부좌를 하고 있는 중년을 보았다.

“당신이 여긴 웬일이오?”

“웬일이라니요? 상공이 저에게 약속한 기한이 오 년입니다. 그런데 오 년이 지나도 나오시지 않으니 제가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변하셨습니까, 상공?”

중년의 곁으로 다가온 여인이 섬섬옥수를 들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뼈가 없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손길, 여인에게서 풍겨 오는 향기. 5년 동안 폐관수련하며 여인을 접하지 않은 중년의 숨결이 가빠졌다. 사내의 욕망은 아무리 무공이 높아져도 변함이 없는 모양이었다.

“서, 설 매, 밖에 부하들이 있소.”

중년의 말에 여인이 생긋 웃으며 오히려 그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전 당신의 아내인데. 제가 오 년 동안 얼마나 외롭게 지냈는지 아세요? 상공은 너무 무심합니다.”

여인의 품에 안기자 중년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풍만하고도 육감적인 여인의 몸에서 사내를 홀리는 향기가 코로 스며들었다.

중년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여인을 힘껏 끌어안았다.

“나도 보고 싶었소, 설 매.”

그가 여인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은 순간, 여인의 부드러운 옥수가 그의 하체로 들어갔다.

“헉!”

여인의 말랑말랑한 손이 중년의 하초를 살그머니 감싸자 벌떡 일어선 하초가 용틀임하기 시작했다.

방긋 미소를 머금은 여인이 남자라면 살살 녹을 만한 음성으로 말하며 몸을 비벼 댔다.

“상공, 폐관수련을 더 하시려면 오늘 저를 안아주세요. 지난 오 년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외로운 밤이었어요.”

그녀의 몸이 중년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중년이 그런 그녀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결혼한 지 10년. 그동안 오직 하나, 무공 수련 때문에 아내와 몸을 섞은 게 불과 몇 번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 아내였다.

아내의 그런 심정을 짐작한 중년이 그녀를 꼭 안았다.

“미안해, 설 매. 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

중년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쪽으로는 여인의 옷을 벗겨 냈다. 옥으로 빚은 듯 희고 아름다운 몸매, 달덩이 같은 둔부와 쭉 뻗어 내린 새하얀 두 다리. 그 사이에 검은 숲이 오목하게 모여 여인의 밀문을 숨겨 놓고 있었다.

“상공.”

이미 여러 번 몸을 섞은 사이였기에 여인은 부끄럼을 타지 않고 주저 없이 중년의 몸을 가로타고 앉았다.

“사랑해, 설 매. 하지만 난 아직 새로운 무공을 익히지 못했어. 몇 년만 더 기다려 줘.”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하던 중년이 입을 딱 벌렸다. 자신의 몸 한 부분이 뜨겁고 미끈거리는 깊은 계곡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건 끝없는 쾌락과 온몸이 녹는 것 같은 희열의 깊은 우물이었다.

“허억!”

중년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하초로부터 전해진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타고 뇌리로 솟구쳤다.

“상공, 사랑해요. 으윽!”

여인이 온몸을 활짝 열고 중년의 몸을 한껏 받아들였다. 밀문에 꽉 찬 남성으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쾌감이 밀려왔다.

여인은 중년의 등을 꽉 잡고 파르르 떨었고, 중년 역시 깊고 깊은 우물 속에 잠겨 희열에 몸부림쳤다.

“나도 사랑해, 설 매.”

“아흑!”

여인의 희고 커다란 둔부가 맹렬하게 들썩이며 가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암동은 두 사람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해졌고, 인간의 남녀만이 낼 수 있는 야릇한 음향으로 가득 찼다.

촹촹촹.

“악!”

“으악!”

밖에서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무사들의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내 이놈들을!”

하지만 중년은 일어설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몸은 반신불수의 상태. 내공 한 점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뼈에다 가죽만 씌워놓은 것 같은 중년의 눈이 죽은 사람처럼 우묵하게 들어가 있었다.

얼핏 보면 해골 같은 모습의 중년이 이를 바득 갈았다.

“설 매, 내 너를 그렇게도 사랑했건만 네가 나를 해치다니…….”

중년의 입에서 아내를 저주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날 방사를 한 후부터 중년은 온몸의 내공이 역류하며 발작을 일으켰다. 독에 중독된 것이다.

하지만 어찌나 지독한지 그 누구도 이 독을 해독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주군, 피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역도들을 막을 힘이 없습니다.”

늙은 부하가 피 묻은 검을 들고 외쳤다.

하지만 중년은 이미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내에게 배신당한 자신이 살아서 뭐 한단 말인가?

“크크크, 하하하! 내가 이런 일을 당하다니. 어리석었구나, 정말 어리석었어.”

하늘을 우러러 허탈한 웃음을 흘리던 중년의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클럭, 컥! 그래, 지금은 비겁하지만 떠난다. 그러나 내가 다시 돌아오는 날, 너희 배신자들을 한 놈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중년이 한스러운 부르짖음을 남기고 쓰러지자 늙은 부하, 양 장로가 그의 몸을 안아들었다.

“주군, 살아야 합니다. 강산이 푸른 한 복수는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둘러선 무사들에게 외쳤다.

“암동을 폭파하라! 그리고 너희는 이곳에서 끝까지 적을 막아라!”

“주군! 천세, 천천세.”

무릎을 꿇고 소리친 후 검을 들고 일어선 부하들이 암동의 비상 굴로 빠져나가는 양 장로에게 허리를 굽혔다.

“수석호법님, 반드시 주군을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주군, 반드시 살아나셔서 이 한을 풀어주십시오. 저희는 주군을 믿습니다.”

콰르르릉!

산이 폭발했다. 대지가 화산처럼 들고일어나고, 바위들이 깨져 조약돌처럼 사방으로 날려 갔으며, 거대한 불 구름이 산 정상을 휘감았다.

* * *

“허억!”

눈을 번쩍 뜬 하인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

하인이 손을 들자 그의 손에서 은빛 강기가 불쑥 솟구쳤다.

촤악.

“이건 만독화룡?”

만독화룡의 배에서 밖으로 나온 하인은 길게 누운 용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이건 분명히 천독지저혈에서 만 년을 산다는 그 만독화룡이다. 그렇다면 여기는 천독지저혈?”

책에서 본 적도 없고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건만 하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쩍 갈라진 만독화룡의 배 속에서 주먹 절반만 한 둥그런 구가 희미하게 보였다.

바로 화인에게 흡수당하고 남은 만독화룡의 내단이었다.

“이건 분명히 내단인데…….”

그것을 집어 든 하인은 문득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을 때 떠올랐던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설 매, 내 아내가 나를 중독시켰단 말이지?”

분명 아내였다. 그녀의 이름이 설려화라는 것과 그녀의 농염한 자태까지 생생히 떠올랐다. 그리고 양 호법. 그는 바로 진시황의 무덤에서 자신을 가르쳤던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나를 지키던 무사들은…….”

하인은 상념에 잠겼다. 아내인 설려화에게 중독당한 이후 어떤 일로 인해 기억을 잃었고, 그 후 어떤 대법에 의해 몸이 어려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생각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상태일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 이상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좋아,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무공을 익혀야 한다.”

하인은 가부좌를 틀고 은천만상신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위해 죽은 사람들, 그리고 언젠가는 마주칠 적을 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다.

쿠쿠쿠쿠.

하인의 몸을 휘감은 은빛 기류가 점점 진해지며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휘류륭. 휘리링.

광폭한 기운을 풍기는 은빛 기운 속에 검붉은 기운이 섞여 들어갔다. 만독화룡의 내단이 녹으면서 흡수된 독과 천독지저혈의 독기가 흡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하남성에는 삼국지의 장사 관우의 머리를 묻어놓은 관림이 있다.

사람들은 관우를 신성시하여 관신이라고 부르며 사당을 만들고 제를 올렸다.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관림(關林)의 사당. 한 무리의 무사들이 어둠이 짙은 사당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들의 앞에 선 선비처럼 보이는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희는 여기 있어라.”

문사 차림의 사내가 섭선을 들고 내리며 무사들에게 명을 내리자 짙은 눈썹에 장비처럼 생긴 자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책사님, 그러다 위험에 처하시면…….”

“무영살귀가 죽이고자 마음먹으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살아나갈 수 없어. 그러니 얌전히 기다리게.”

문사는 바로 중화 전장의 책사, 동중산이었다.

삐이걱.

관우의 사당 문을 열고 들어선 동중산은 으스스한 기운에 몸을 떨었다. 괴괴한 정적이 감도는 사당 안에는 향불이 타오르는 제기만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 바로 죽음의 살수 무영살귀에게 청부를 하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았다.

동중산이 제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영살귀 님에게 중화 전장의 책사 동중산이 청부를 하려고 합니다.”

머리를 숙이고 잠시 기다렸지만 개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없는 빈 사당 같았다.

하지만 동중산은 개의치 않았다.

“여기 이만 냥의 금자에 해당하는 전표를 가져왔소이다.”

동중산이 품속에서 전표를 꺼내놓았을 때였다. 어디선가 쇠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금자 이만 냥이라……. 죽일 자가 누구인가?”

사방에서 울리는 말소리. 이건 분명 천하의 고수들만이 사용한다는 육합전성이었다.

동중산의 얼굴에 희열이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무영살귀는 엄청난 고수인 것이다.

“은목전왕입니다.”

그의 말에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사당을 스치는 소리만이 괴괴하게 들릴 뿐이었다.

동중산의 얼굴에 살짝 이채가 어렸다.

‘설마 무영살귀가 은목전왕을 두려워하는가?’

그가 조바심을 치고 있을 때였다.

“은목전왕을 청부하면서 겨우 금자 이만 냥? 지금 장난하는가!”

순간 동중산은 심장이 멎는 것을 느꼈다. 어디선가 쏘아진 살기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정신이 아찔해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살기였다.

“아, 아닙니다. 어찌 감히 저희가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건 선불금입니다. 무영살귀 님께서 은목전왕을 처치하시면 이만 냥의 금자를 더 드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전장주님께서 수결한 보증서입니다.”

그제야 쏘아지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후~’

한숨을 내쉰 동중산은 온몸이 물에 젖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좋다. 은목전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예. 현재 그는 사천의 만세 금광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가 나름대로 파악한 은목전왕의 무공을 적은 서책입니다. 혹 도움이 되실까 하여 가져왔습니다.”

“좋다. 기한은?”

“당장은 아닙니다. 현재 그를 회유하는 작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실패하면 그땐 무영살귀 님께서 가차 없이 죽여주십시오.”

“크크크, 중화 전장이 꼼수를 부리고 있군. 자기 것이 되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 그런 것인가?”

사방을 울리는 기괴한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실려 있었다.

그에 동중산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무영살귀 님이십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자가 우리 편이 된다 해도 선불금으로 드린 돈은 무영살귀 님의 것입니다.”

“좋아, 난 굿이나 보다 떡이나 먹으면 되겠군. 그러나 작전이 실패하면 가차 없이 은목전왕을 죽인다.”

그 말과 함께 동중산의 앞에 놓여 있던 전표와 종이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피융.

종이들이 마치 화살이 쏘아지듯 창문으로 날아 나갔다. 기가 막힌 허공섭물이었다.

‘역시 무영살귀! 이로써 은목전왕에 대한 처리는 끝났다.’

천천히 절을 하고 일어선 동중산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당을 나섰다. 이것으로 중화 전장의 명예를 실추시킨 은목전왕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살든가, 아니면 죽든가.

그러나 그는 은목전왕을 너무도 쉽게 보고 있었다.

* * *

휘리링. 휘링.

은빛의 찬란한 구체가 맹렬히 회전하고, 하인의 몸이 허공에 떠서 돌아갔다.

지금 하인은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몸 안에 들어온 만독화룡의 기운이 몸 안의 혈도를 거침없이 휘돌며 아직까지 잠자고 있던 세맥을 모조리 뚫고 있었다.

인간에겐 360개의 혈도와 그보다 몇 배 더 많은 3만 6천 개의 세맥이 있다. 일반적으로 고수라 하면 임독양맥을 뚫은 사람들을 말하지만, 은천만상신공은 다르다. 상, 중, 하단전을 열고 인간의 혈맥과 세맥을 모두 열어야 했다. 그래야 대자연의 기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몸을 하나의 매개체로 만들어 대자연의 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투두둑. 투득.

허공에 뜬 하인의 몸에서 피부가 부서지고 새로운 피부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완벽한 탈태환골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이나 피부가 벗겨졌을까?

수십 번을 뱀이 허물 벗듯 벗겨진 피부에 아기처럼 희고 맑은 피부가 새로이 돋아났다.

그때야 몰아치던 은빛 기운이 스르르 몸속으로 잦아들었다.

“으음.”

바닥에 서서히 내려와서 조용해진 지 일각 후, 하인의 눈이 떠졌다.

“내가 기연을 만났군!”

지금 하인의 눈에 캄캄한 동굴 속은 대낮처럼 환하게 보였고, 미세한 소리까지 모두 들렸다. 게다가 몸속에는 엄청난 힘이 잠들어 있었다. 아니, 분출구를 찾아 조용히 숨을 죽인 채 때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인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은천만상신공이 구 단계까지 올랐어!”

자리에서 일어선 하인은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몸이 탈태환골하면서 옷이 가루로 변한 것이다.

승천하려고 9천 년을 살아온 만독화룡. 하지만 이제는 뼈와 가죽만 남은 채 길게 누워 있었다.

하인은 손에 쥐어진 만독화룡의 내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하지만 어쩌겠니? 세상은 강자존의 이치인 것을.”

하인의 손에서 은빛 강기가 스르르 나타났다.

삭삭삭.

도검이 불침하는 만독화룡의 가죽이지만 강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가죽을 모두 벗긴 하인은 만족스러워하며 웃었다. 이 정도 크기면 20명은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다.

“잘됐어. 위 매에게 줘야지.”

무공을 모르는 위 매에게 이것으로 옷을 해 입히면 웬만한 공격은 모두 막을 수 있을 터였다.

하인은 동굴을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독기가 풍겨 오고 있었다. 아마도 이 독기가 풍겨 오는 곳이 바로 천독지저혈의 풍구일 것이었다.

“이제 백만 냥은 벌었다.”

하인의 신형이 바람처럼 쏘아졌다. 가서 풍구를 파괴하면 임무는 끝나는 것이고, 돈을 벌 수 있었다.

“저것인가?”

화살처럼 쏘아져 한참을 달려온 하인은 눈앞에 보이는 녹색 호수를 보고 신형을 멈추었다. 바닥에 작은 호수가 빙글빙글 돌면서 물이 흐르고 있고, 그 위로는 수직으로 뚫린 굴이 보였다.

“그렇군. 저기서 바람이 들어와 이곳의 독 기운을 실어 날랐어!”

하인은 저 호수가 독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코를 허비는 지독한 비린내. 돌을 던져 보니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녹색 물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이 호수가 바로 독정신수였지만 하인은 모르고 있었다.

“근데 이건 누가 싸우는 소린데…….”

하인은 수직으로 뚫린 위를 쳐다보았다. 그곳에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대략 3백 장 정도 높이 위였다.

귀를 기울여 본 하인은 은천만상신공의 천리기음(千里氣音)을 시전했다. 이 무공은 천이통과 비슷한 것으로, 5백 장 정도의 모든 음향을 들을 수 있었다.

“죽어도 그냥 죽지는 않는다. 천뢰파!”

여인의 악에 받친 소리가 울리고 뭔가가 폭발하는 소리, 그리고 강침들이 날아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건 당문의 암기! 그렇다면 저 여자는 독화 당수해인가?”

당문이 멸문하고 당수해와 당세기가 탈출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은 상태. 여자의 목소리로 보아 당수해 같았다.

하인은 빛살처럼 떨어져 내리는 물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저 상태로 떨어지면 독정신수에 들어가 뼈까지 녹을 것이 분명했다.

하인의 손이 휘둘러지자 수직굴에 은빛의 기막이 생겨났다. 바로 강기로 원형의 막을 형성하는 기강벽공이었다.

투웅. 퉁.

돌덩이처럼 떨어져 내리던 사람들이 둥그렇게 만들어진 기막에 걸려 고무공처럼 튕겨 올랐다.

처음에는 당세기가 떨어졌고, 그다음은 명왕단 놈들이었다.

“이 자식들은 혈마궁의 명왕단 놈들인데!”

하인은 입은 옷을 보고 그들이 명왕단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검각에서 본 명왕단의 옷과 똑같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수해의 몸이 떨어져 내렸다.

온몸에 구멍이 뚫린 당수해. 그녀의 얼굴을 본 하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뭐야? 무림칠봉이라더니 얼굴이 다 망가졌네, 쯧.”

중얼거리며 그녀의 주글주글한 얼굴을 보던 하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건 독에 당해 피부가 짓이겨진 모습이었다. 반쪽은 아름다웠지만 나머지 반쪽은 끔찍한 형상.

당세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수해는 아직 살아 있었지만 당세기는 죽었는지 꼼짝도 못했다.

남매의 몸을 살펴본 하인은 어찌할지 망설였다.

당수해는 강침이 온몸을 관통했음에도 다행히 급소는 비껴나서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당세기의 상처를 본 하인은 입맛을 쩝쩝거렸다.

“살아도 정상이 되긴 힘들어.”

당세기의 머리는 검강에 당해 뇌의 한쪽이 파괴된 상태. 살아도 정상인이 될 수 없었다.

“그래도 당가의 씨를 뿌리는 데는 이상이 없을 거야.”

하인은 홍자연에게 들어 당문의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당가는 오직 핏줄로만 이어져 내려온 가문. 그런 곳이다 보니 다시 일어서자면 남자가 있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어쨌든 살려 보자.”

하인의 한 손에서 약간 검붉은 은빛이 구름처럼 뿜어져 나와 당세기와 당수해를 휘감았다.

그 상태로 하인은 생사흡정대법을 전개했다.

핏핏핏.

은천만상신공의 생사흡정대법이 쓰러진 명왕단원들의 몸을 순식간에 미라처럼 만들기 시작했다. 생기를 모조리 빨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몸에서 뽑혀 나온 생기가 하인의 몸을 통해 정제된 뒤 다시 흘러나가 두 남녀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하인의 몸속으로 흡수되고 남은 내단이 모두 녹아 남매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천고의 기연을 만난 것이다.

약 2시진 동안 남매의 몸에 생기를 넣어준 하인은 두 사람의 몸을 독정신수 속으로 날려 보냈다.

마치 끈이 달린 것처럼 날아가던 당세기와 당수해가 녹색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후,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인은 투덜거렸지만 사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내에게 배신을 당하고 모든 것을 잃은 자신이나 혈마궁에 가문이 멸문당하고 얼굴까지 뭉개진 두 남매에게 동정심을 느낀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사람들은 동병상련이라고 하지만 하인은 그냥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남매를 살려 놓았다. 그리고 독정신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지금까지는 두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아나기 힘들었다. 저들은 정신을 잃은 상태. 스스로 운기를 할 수 없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 하인이 강제로 운기를 시켜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하인이 당문의 무공을 모른다는 데 있었다.

“할 수 없지. 은천만상신공의 인독공(人毒功)으로 타혈하는 수밖에.”

인독공.

세상에는 독공에 관한 심법이 많지만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는 것이 바로 은천만상신공의 인독공이었다.

하지만 하인은 인독공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모르고 있었고, 그로 인해 무시무시한 독존지체가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독존지체, 독공 최후의 경지.

숨결까지도 독으로 화하고, 그 주변의 1백 장을 독으로 말살시킬 수 있는 무서운 신체였다.

뭐, 그 위에 독신지체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독신지체는 인간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고금을 통틀어 독신지체는 그냥 전설일 뿐, 그건 너무도 높은 경지여서 인간으로서는 환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부글부글.

독정신수에 들어간 남매의 몸에서 수증기가 치솟고 물이 끓어 번졌다.

“뭐야, 이건 무슨 현상이지?”

격공타혈의 방법으로 인독공을 대주천시키던 하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저런 현상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놀라움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부글부글 끓던 물이 진한 녹색 운무로 변하며 남매의 몸을 휘감고 회오리치는 것이 아닌가!

“독을 흡수하고 있어!”

하인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인독공은 마치 생명이 달린 것처럼 스스로 움직여 남매의 몸을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스르르르.

남매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뽀얀 녹색 운무가 거침없이 흡수되었다.

그리고 곧 탈태환골이 시작되었다.

“허, 탈태환골까지!”

하인은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 보니 이건 손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하인이 누구인가? 진시황의 무덤에서 할아버지에게 철저한 교육을 받은 그가 손해를 볼 수만은 없었다.

“흠, 가문이 망했으니 돈은 없을 테고……. 뭐를 받아야 하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하인이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도 남매의 탈태환골은 맹렬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우두둑. 투득.

온몸의 뼈가 비틀리고 피부가 벗겨지자 하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금 그의 눈앞에 무림칠봉 중의 한 명인 당수해의 아름다운 모습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독에 당하여 주글주글하던 피부가 벗겨지며 해맑은 피부가 돋아났고, 미끈하고 볼륨 있는 몸매가 빛을 뿌리며 하인의 눈을 현혹시켰다.

“꿀꺽. 무림칠봉이라더니 정말 죽인다!”

하인은 저도 모르게 하초가 불끈 일어서는 것을 느끼고는 물끄러미 하초를 내려다보다 머리를 흔들었다. 이미 내자가 셋씩이나 있는 자신이 또 다른 여자에게 음심을 가지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다.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놈이네. 그래도 정말 예쁘긴 예쁘다, 쩝.”

말은 그렇게 해도 눈은 자꾸 당수해의 쭉 빠진 몸매로 쏠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에이, 만독화룡의 뼈나 가져오자.”

하인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동굴 속으로 걸어갔다. 이제야 생각난 것이지만 만독화룡의 뼈는 강철처럼 단단해서 무기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더군다나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꼭 저 독화를 덮칠 것만 같았다. 그만큼 탈태환골하는 당수해의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하인이 사라진 후에도 남매의 탈태환골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 * *

“으음.”

정신이 든 당수해는 서서히 눈을 뜨고 머리를 돌렸다. 무너지고 깨어진 동굴, 그리고 움푹한 바닥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

사실 움푹한 것은 독정신수가 있던 웅덩이였지만 이제는 한 방울의 물도 없었다. 독정신수가 운무로 변해 전부 남매의 몸속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하인이 발동시킨 인독공의 효능으로 인해 엄청난 존재가 만들어졌지만, 당수해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여긴 어딜까?”

옆을 보자 벌거벗은 남자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 벌거벗은 몸.”

멍하니 중얼거리던 당수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 몸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치솟으며 동굴의 천장에 그대로 들이받는 것이 아닌가.

콰앙!

후드득.

당수해의 머리가 부딪친 동굴의 천장이 비명을 질렀다.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의 머리가 박살난 것이 아니라 암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다급히 당문의 신법인 천녀월보(天女月步)를 펼쳐 바닥에 내려선 당수해는 다시 그 남자를 보았다.

“오빠?”

벌거벗은 몸으로 고르게 숨을 쉬며 잠들어 있는 남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오빠 당세기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당수해는 어리둥절했다. 아무도 없는 동굴.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고 있는 오빠와 자신.

그녀는 급히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아니, 있긴 있었다. 눈처럼 해맑고 보드라운 피부. 손을 보니 오동통하니 흠집 하나 없었다.

“이게 대체!”

그녀는 급히 얼굴을 만져 보았다. 주글주글하게 녹아 붙었던 한쪽 뺨이 비단처럼 매끄러웠다. 분명 명왕단 놈들의 독을 맞아 얼굴이 눌어붙었었다.

그러고 보니 오빠도 미남으로 변해 있었다.

이런 경우는 단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이 방싯 열리고 경악에 찬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설마 탈태환골?”

“맞아, 너희는 탈태환골을 했어.”

갑자기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당수해의 몸이 번개처럼 보법을 밟았다. 얼마나 빠른지, 마치 바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누구냐?”

그녀의 손에서 당문의 지법인 묵룡독지(墨龍毒指) 중 제2초인 팔룡지(八龍指)가 바람을 가르며 쏘아져 왔다.

쉭쉭쉭.

마치 작은 용 같은 모습의 녹색 지풍 8개가 날아오자 하인은 한 손을 들어 원을 그렸다.

텅텅텅텅.

팔룡지가 은빛 원에 막혀 맥없이 스러졌다.

그녀는 즉시 두 손을 들어올리며 날카로운 어조로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냐?”

하인은 어이가 없었다. 기껏 살려 놨더니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당수해의 모습이었다. 양귀비가 울고 갈 정도로 아름다운 몸매를 그대로 드러낸 채 오직 공격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빙기옥골(氷肌玉骨)이라더니, 맑고 아름다운 피부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쭉 빠진 몸매로 자세를 취한 그녀의 두둑한 배 아래의 짙은 숲이 그대로 보이는 것은 정말 자극적이었다. 마치 일부러 남자를 홀리려는 것 같았다.

하인은 피식 웃었다.

“어이, 그 몸부터 가려. 어떻게 살려 준 은인에게 다짜고짜 살수냐?”

하인이 만독화룡의 가죽 조각을 그녀의 발아래로 집어던졌다.

“누구냐고 물… 앗!”

그녀는 삼양신장(三陽神掌)을 내치려다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다급하게 몸을 옹송그린 당수혜가 쪼그리고 앉으며 뾰족한 소리를 질렀다.

“당장 눈 돌려!”

하인은 시물시물 웃었다. 한 손은 가슴을, 다른 손은 하체를 가린 당수해의 모습은 참으로 고혹적이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커다란 가슴을 다 가릴 수 없어 훤히 보였고, 하체도 마찬가지였다.

“쿡. 다 보이는구먼, 뭐.”

“뭐야? 내가 일어서면 널 죽여 버릴 거야. 당장 머리 안 돌려!”

당수해의 새된 외침에 하인은 쓰게 웃으며 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기어이 한마디 하고 말았다.

“무림칠봉이라더니 별로 예쁘지도 않구먼, 뭘.”

중얼거리는 하인의 말에 가죽 조각으로 하체를 가리던 당수해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이 별로라고? 어디를 가든 무림의 청년 고수들에게 떠받듦을 받던 그녀였다. 그런데 저 자식이 자신을 우습게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세상에 태어나 다른 사내에게 알몸을 보인 적은 단연코 없는 그녀였다. 한데, 저자는 이미 자신의 몸을 다 본 상태.

분노한 당수해는 그대로 손을 내쳤다.

“벼, 별로라고? 죽어!”

쐐애액.

당문의 자랑인 삼양신장이 독 기운을 머금고 벼락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따위 것은 하인에게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이미 은천만상신공이 9단계에 오른 그였다.

하인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손을 휘젓자 은빛이 번쩍이며 쏘아져 들어오던 삼양신장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스러지고 말았다.

“삼양신장을 저렇게 소멸시키다니!”

당수해의 눈이 둥그레졌다. 삼양신장은 결코 저 정도로 막을 수 있는 장법이 아니었다. 한데, 저자는 장난하듯 흩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저자는 대체 누구지?’

그녀가 하인을 보며 무림의 고수들을 탐색해볼 때였다.

“이봐, 당수해, 일단 가릴 것은 가린 것 같으니 이제 계산을 해야지?”

“계산? 무, 무슨 계산?”

하인의 느긋한 말에 그녀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어쨌든 저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처음으로 본 남자였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니 오빠와 자신을 탈태환골시킨 사람이라면 절대 고수가 분명했다.

하지만 저 사람의 얼굴은 분명 20대 중반의 모습이었다.

“내가 너희를 살리는 데 만독화룡의 내단을 썼거든. 그리고 탈태환골시키는 데 인독공을 사용했고. 그러니 그 값을 내야지?”

“인, 인독공?”

당수해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중원 독의 조종이라고 알려진 당문의 여자. 인독공이라는 것에 대해 언젠가 할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가 독의 조종이라고 하지만, 세상에는 정말 강한 독공이 있단다. 천 년 전부터 전설로 내려오는 인독공이라는 독공이지. 인독공을 익히면 독존지체가 되고, 금강불괴가 된단다. 잘하면 독신지체도 될 수 있는 것이 인독공이야. 그러나 지금까지 인독공이 세상에 다시 나타난 적은 없어. 참 아쉬운 일이지.’

당수해는 만독화룡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데, 그 내단을 오빠와 자신에게 썼다니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오빠가 살아난 것도, 그리고 자신들이 탈태환골한 것도…….

좀 전에 천장을 들이받았을 때 머리가 멀쩡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바로 전설의 인독공으로 인해 자신의 몸이 금강불괴에다 독존지체가 된 것이 분명했다.

당수해는 멍한 눈빛으로 하인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머릿속으로 생각해보아도 중원 무림에서 이런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다.

“야,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냐?”

하인이 벌컥 역증을 내자 당수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번개처럼 돌아갔다.

인독공, 금강불괴, 독존지체, 그 모든 것을 저 사람 때문에 얻었다. 평생을 노비로 살아도 갚지 못할 은혜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맙다는 말 대신 빽 소리를 질렀다.

“왜 큰소리야! 누가 나를 살려 달라고 했어? 지 맘대로 살려 놓고는 무슨 값? 난 이제 아무것도 없어. 집도 없어졌고, 가문도 몰살됐고. 그래도 계산하겠다면 내 몸을 가져.”

보법을 밟아 하인의 앞에 나타난 당수해는 하체만 가린 알몸을 바싹 들이댔다.

“하, 뭐 이런 게 다 있어? 너 정말…….”

아예 몸을 들이대는 바람에 기가 막혀 주먹을 쳐들던 하인은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당수해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크고 아름다운 녹색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샘솟듯 하고 있었다.

“난 이제 아무것도 없어. 남은 것은 이 몸뚱이뿐이야. 그것도 네가 살렸으니 지지든 볶든 마음대로 해.”

당수해가 눈물이 그렁하니 고인 눈으로 하인을 쏘아보았다.

‘이런 젠장!’

하인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당수해의 눈물을 보니 차마 돈을 받겠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가문이 몰살된 여자가 아닌가? 갑자기 당수해가 측은해졌다.

‘그래! 안 받는다, 안 받아.’

속으로 중얼거린 하인은 다시 당수해를 쳐다보았다.

“좋아, 뭐 내가 조금 손해를 봐도 할 수 없지. 너 내 부하가 돼라, 오 년만.”

“부하?”

하인의 말에 당수해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은 당문을 재건해야 할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오빠만으로는 너무 힘들었다. 이번에 겪은 혈마궁은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오빠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분명 그자들이 또다시 공격해올 터. 이건 좋은 기회였다.

이 사람은 절대 강자. 이런 사람의 부하가 된다면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데 강력한 힘이 될 것이고,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당수해에게는 아주 유리한 조건이었다.

더구나 이 사람에게 빚을 진 상태.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당문을 일으켜야 했다.

“알았어, 딱 오 년 동안만이야.”

하인은 당돌한 눈으로 도전하듯 쳐다보는 당수해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사실 부하가 되라고 한 것은 다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당수해는 독존지체. 독으로는 세상 최고가 되었다. 그런 당수해를 위소옥의 호위 무사로 만들면 그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5년이면 위소옥 역시 강력한 무인이 될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결심이었다.

‘흐흐, 멋진 호위 무사를 얻었어!’

싱긋 웃은 하인은 웅덩이 속에 누워 있는 당세기를 향해 손짓하였다.

둥실.

당세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가공할 허공섭물이었다.

그것을 본 당수해는 눈을 부릅떴다. 대체 내공이 얼마나 강하면 사람을 저렇게 쉽게 들어올릴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허공을 격하고 혈도까지 두드리는 것을 보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이 사람은 분명 은거기인일 거야!’

당수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겨우 20대 중반이 저 정도의 가공할 능력을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이 빛을 뿌리듯 반짝거리며 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배고파, 형아. 밥 줘.”

정신을 차린 당세기가 하는 말에 당수해는 입을 딱 벌렸다. 오빠의 말을 보니 지능이 어린아이 같았다.

그것을 본 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생각대로 살아나기는 했으나 머리는 정상이 아니었다.

“역시 머리가 잘못됐어.”

하인의 말에 당수해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빠는 자신조차 몰라보고 있었다.

“당신, 오빠를 어떻게 한 거야!”

따지고 드는 당수해의 모습에 하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건 물에 빠진 자를 꺼내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네 오빠는 뇌의 한쪽이 파괴됐어. 그래서 살리기는 했지만 지능이 떨어지게 된 거야. 저걸 고치려면 전설의 신안천수(神顔泉水)가 있어야 해.”

신안천수!

신이 세안을 한 물이란 뜻이다.

태초에 인류가 생겨날 때 신이 지상의 단 한 곳에 영원히 줄지도 차지도 않게 만들어놓았다고 알려진 물. 사람의 숨이 끊어졌다고 해도 썩지 않은 육체를 이 물에 담그면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 소생의 물이라고도 불린다.

하인의 말에 당수해는 쌍절벽에서 떨어지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오빠는 명왕단 놈들의 검에 머리를 맞았던 것이다.

순간 정신이 아뜩해졌다. 당문의 마지막 남은 남자인 오빠가 바보가 되었으니 이제 당문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당신이 살렸으니 당신이 정상으로 만들어. 그렇게 못하면 난 죽을 때까지 당신을 따라다니며 괴롭힐 거야.”

눈을 부릅뜨고 하인에게 쏘아붙이는 당수해.

그에 하인은 기가 막혔다.

“이게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막 나가네. 야, 당수해! 너 정말 죽고 싶어?”

하인의 말이 나오기 바쁘게 당수해가 육탄으로 달려들었다.

“그래, 죽여! 죽이란 말이야! 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러더니 펄썩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아아, 할아버지, 이젠 당문의 대가 끊어졌어요. 으흐흑.”

알몸으로 주저앉아 통곡하는 당수해를 본 하인은 입맛을 다셨다. 가문이 몰살되고 마지막 남은 당세기마저 바보가 됐으니 왠지 그녀가 안쓰러웠다.

‘에이, 그냥 죽게 내버려 뒀어야 하는데…….’

“됐어, 내가 어떻게든 알아볼게. 그러니 그만 뚝 해라.”

하인이 당수해의 어깨를 흔들며 하는 말에 정말 그녀의 울음소리가 멎었다. 그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하인을 쳐다보았다. 언제 울었나 싶게 그녀의 얼굴에서 열기가 반들거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약속할 수 있지?”

벌떡 일어선 그녀가 와락 안기는 바람에 하인은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당수해의 솜처럼 부드러운 몸이 빈틈없이 하인의 몸을 누르며 말초신경을 자극했고, 커다란 가슴이 눌리자 심장이 고동쳤다.

“그, 그래. 야, 약속하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얼결에 답하자 당수해가 하인의 몸을 와락 끌어당겼다.

“고마워. 오빠만 고칠 수 있다면 네가 하라는 것은 무엇이든 할게.”

“야, 좀 물러서라. 가만?”

얼떨결에 대답하던 하인은 그제야 당수해가 자신에게 반말을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왠지 속은 감이 들어 그녀를 와락 밀어냈다.

“너, 그런데 왜 반말이냐?”

하인이 눈을 부라렸다. 자신은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었다. 이번에 되찾은 기억을 보면 적어도 중년 이상은 됐다. 그런데 겨우 20대 초반인 당수해가 반말을 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곧 튀어나온 당수해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흥! 난 스물여섯이야. 넌 아무리 봐도 나보다 어려 보여. 하지만 뭐, 나와 오빠를 살려 줬으니 그냥 오빠라고 부를게. 그렇지만 말은 놓을 거야.”

“하, 이거야 원. 너 부하가 주군에게 말을 놓는 거 봤어?”

하인의 말에 당수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봤어. 지금 여기 있잖아. 나에게 반말을 듣기 싫으면 부하를 시키지 말든가?”

“이런, 젠장! 어휴. 그래, 네 맘대로 해라.”

하인은 입맛이 써서 그만 돌아서고 말았다. 더 말해봐야 저 뻔뻔한 당수해에게 이길 것 같지가 않았다.

‘흥! 내가 미쳤냐? 손해를 보게.’

독존지체를 만들고 그냥 놔줄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큰 손해가 아닌가? 그깟 반말은 그냥 흘려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때였다.

“형아, 나 배고프다. 밥 좀 줘.”

“커억!”

하인은 그만 숨을 들이켰다. 당세기가 어느새 다가와 자신의 앞에 서서 배를 쓸고 있었다.

이건 완전한 혹을 붙인 셈이었다.

“오빠, 여기 형아가 밥을 줄 거야. 절대로 형아에게서 떨어지면 안 돼. 알았지, 오빠?”

당수해가 이때라는 듯 하는 말에 당세기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 밥 줘, 형아.”

“내가 미친다, 미쳐.”

하인이 당세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순간 당세기가 흠칫했다. 하인의 눈에서 은빛의 광폭한 힘이 순간적으로 쏘아지며 그의 심신을 얽어맸기 때문이다.

9단계에 오른 은천만상신공의 은목군림강이 당세기의 심신을 사정없이 묶은 것이다.

“어어? 무섭다, 형아.”

당세기가 비틀거리며 물러서는 것을 본 하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은목군림강에 심신이 제압된 상태에서도 움직이다니, 역시 독존지체다웠다.

“넌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어야 해. 아니면 형아가 때려 준다. 알겠니?”

순간 당세기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은목군림강의 압력이 2배로 쏟아졌기 때문이다.

“아, 알았어, 형아.”

그제야 하인은 남매의 몸을 양쪽에 꼈다.

“단단히 잡아, 당수해.”

쐐애액.

하인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쏜살같이 스치는 수직 암동, 얼굴을 때리는 바람.

당수해의 눈이 기쁨으로 반들거렸다.

‘당신이 누군지는 몰라. 하지만 이 당수해, 이제부터 당신을 놓치지 않을 거야.’

그녀는 하인이 겉모습과 달리 은거기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반말을 한 것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마저 정신이 잘못된 지금, 당문을 다시 세우려면 이런 강한 남자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선 가까이 접근해야 했고, 그러자면 친구가 되는 것이 제일 유리했다.

하지만 당수해는 아직 하인이 은목전왕이라는 것도, 그녀가 복수하려는 혈마궁이 몰살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하인에게 자신 못지않은 여인들이 있다는 것은 더욱 몰랐다.

“여기가 입구였군.”

절정봉의 위에 올라선 하인은 바람이 회오리치며 들어가는 동굴의 양옆에 서 있는 쌍절벽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까르륵.

하인의 손을 따라 기음이 들리며 은빛 봉황이 나타났다. 봉황장 제5초 폭멸장(爆滅掌)이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제 은천만상신공이 9단계에 오른 하인이기에 봉황장은 제 모습을 확연하게 갖추고 있었다. 물론 아직 진한 은빛은 아니었지만…….

끼아악.

당수해는 입이 딱 벌어졌다. 은빛의 봉황이 쏘아져 나가며 대기의 기운이 회오리치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건 상상할 수 없는 자연의 기가 한곳으로 몰려드는 엄청난 힘이었다.

콰르르릉!

봉황장에 맞은 쌍절벽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자욱하게 치솟는 돌의 파편. 마치 광천뢰가 터진 듯한 폭음과 함께 높이 솟아 있던 절벽이 왈칵 무너졌다.

우당탕! 콰콰쾅!

절정봉의 쌍절벽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날이었다.

제3장. 홍자연을 잡아라

장안성의 낭인촌.

일명 낭인 시장이라고 하는 장안의 외곽 거리. 그러나 있을 것은 다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낭인 거리였다.

길의 좌우로 시장 통이 늘어서 있고, 객잔과 주루도 보였다.

시장 통을 벗어나면 약간 둔덕진 야산에 사당이 하나 있는데, 이곳 낭인촌의 사람들은 그곳을 장수사(長壽寺)라고 불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점을 치고 부적을 파는 도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점을 칠 때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다 죽어가는 낭인촌의 사람을 부적을 써서 살려 준 후부터 사람들은 그를 장수도사라 불렀다.

그때부터 생긴 장수사는 언제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장수도사는 특히 아이가 없는 집의 점을 잘 쳐주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딸보다는 아들을 낳아 대를 잇기를 원했기 때문에 결혼을 하면 장수사에 와서 하룻밤 치성을 올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첫날밤 이곳에서 치성을 올린 여인들은 예외 없이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밤하늘에 휘영청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 어둠에 잠긴 장수사의 객방들에도 밝은 달빛이 비춰들었다.

“아하, 아흑.”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린가? 신성한 장수사에서 쾌락에 달뜬 여인의 비음이 흘러나오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저곳이로군.”

장수사의 지붕 위에 검은 무복에 검은 복면 일색인 괴한이 서서 한 곳을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그곳은 바로 야릇한 여인의 비음이 새어나오는 객방이었다.

휘익!

괴한의 신형이 비조처럼 쏘아졌다.

“아흑, 아아아!”

지금 객방에서는 낯 뜨거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본래 장수사의 객방은 하룻밤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자고 가는 곳이었다. 때문에 작은 방들이 가득하고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 자고 있어 남녀가 그 짓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 객방의 한 곳에서는 온몸에 실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여인이 남자의 몸에 안겨 방금 물에서 잡아낸 생선처럼 펄떡이고 있었다.

하얀 살결, 뜨거운 비음을 흘려 내는 방싯한 입술. 이제 18세 정도 된 여인이었다.

“으흐흐, 오늘은 내 너에게 진짜 장수신의 아이를 점지해주마. 크흐흐.”

여인의 하얗고 부드러운 몸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사내가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겨우 5척의 짜리몽땅한 키, 하지만 옆으로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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