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전왕사신녀
날이 푸름푸름 밝아오는 장안성의 거리가 말발굽 소리에 발칵 뒤집혔다.
이내 홍경로에 있는 기루와 객잔들에서 사람들의 머리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싸움이라도 일어났나?”
“이른 아침부터 웬 소란이야?”
두덜거리며 창문을 열고 내다보던 사람들의 눈이 둥그레졌다.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말을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검도를 착용한 무인들이었던 것이다.
“위가장주다!”
“그렇군. 위가장주 위소옥이 맞아!”
밤빛 준마에 탄 위소옥이 맨 앞에서 말을 달리고 있고, 4명의 여인이 호위하듯 그녀의 앞뒤를 에워싼 채 함께 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이 둥그레진 것은 다름 아닌 여인들의 아름다운 자태와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분 때문이었다.
쭉 빠진 몸매에 황금색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인의 등에는 2자루의 짧은 단창이 걸려 있고, 다른 여인은 뜻밖에도 멸망한 당문의 여인 당수해였다.
그 뒤로 검을 차고 말을 달리는 여인은 화산의 매화 양설란이었고, 또 한 명의 여인은 면사를 썼지만 환상적인 몸매로 사람들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 뒤에는 경공으로 허공을 매처럼 날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르칸과 이적, 진필성, 그리고 유흥상과 그의 동생들까지 8명의 무사들이 다섯 여인들을 하늘에서 보호하며 질주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보고 있는 사람들 또한 모두 무인. 그들은 저 사람들이 상승의 고수들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미끄러지듯 날아가는 저 경공은 하나같이 상승의 경신법이었고, 강력한 내공이 없다면 전개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독화 당수해!”
“화산의 매화 양설란이다!”
사람들의 탄성에 말을 타고 내달리던 양설란이 해맑은 미소와 함께 손까지 살짝 흔들어주었다.
“우아, 정말 예쁘다!”
모두 한 미모 하는 여인들. 주수연 공주만이 면사로 얼굴을 가렸고, 나머지 여인들은 맨얼굴이었다. 이제는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빨리빨리!”
말들이 지나가자 은천대가 창검을 들고 먼지를 일으키며 따라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객잔에 투숙하고 있던 무인들의 눈이 번쩍 빛을 발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안면은 없었지만 서로가 무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다!”
“은목전왕이 왔다!”
핏핏핏핏.
홍경로 주변에 있던 객잔들에서 무인들이 쏘아져 나왔다. 창문으로, 또 대문으로 무슨 사태가 난 듯 달려 나온 무인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위소옥과 함께 달리는 여인들은 분명 은목전왕의 여자들. 무림에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그들이 싸울 상대는 틀림없이 중화 전장일 것이다.
이것은 무인들에게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혈마겁을 종식시킨 은목전왕 하인. 그가 중화 전장에 전쟁을 선포한 후, 무림인들은 장안성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중화 전장에 들어가 돈을 벌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하인의 무위를 보기 위해 온 자들이었다.
“여보게, 오늘 은목전왕의 무위를 볼 수 있을까?”
정신없이 은천대의 뒤를 따라 달리던 낙양의 낭인 무사 한 명이 옆의 동료에게 묻자 발에 땀이 나도록 달리던 그의 동료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야, 보면 모르겠냐? 방금 달려간 여자들은 모두 은목전왕의 여자들이야. 당연히 은목전왕이 나타나겠지.”
동료의 대답을 듣고서야 낭인 무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헉헉, 정말 예쁜 소저들이다. 그치? 아, 난 언제쯤 은목전왕처럼 되나?”
무사의 얼굴에 동경의 빛이 어렸다.
“은목전왕도 처음엔 우리 같은 낭인이었다고 했어. 우리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지.”
동료의 말에 무사는 희망 어린 얼굴이 되었다.
“그래, 혹시 모르지. 우리에게도 기연이 찾아들지.”
“어쨌든 빨리 가자. 이런 싸움을 보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거야.”
그들이 달리는 옆으로 경지가 높은 무인들이 획획 스쳐 지나갔다. 모두 상승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 * *
하늘에서 한 마리 새처럼 날아온 사람이 거대한 전각의 지붕 위에 내려섰다.
하인은 하루를 시작하는 중화 전장 장안 분타의 장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방금 일어난 듯 마당을 쓰는 하인들이 보였고, 주방 쪽에서는 구수한 음식 냄새와 함께 하녀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방마다 절제된 움직임이 감지되었는데, 그것은 상당한 실력을 지닌 무인들의 기운이었다.
“홍양기가 죽었는데 너희들은 잘도 사는구나. 하지만 오늘, 그 피 값을 치러야 한다.”
하인이 정원으로 뛰어내리려고 한 걸음 내짚을 때였다. 공기가 일그러지며 불쑥 화산제일검이 나타났다.
“자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려는가?”
위가장에서 다른 이들보다 먼저 떠나온 양안당은 방금 몽화각에서 하인이 종남의 도사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도 남을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죄 없는 여인들과 위가장의 무사들이 저들로 인해 두 동강이 나서 죽은 것이다.
그러나 종남에 전쟁을 선언하는 하인의 말을 듣고는 기가 막혔다.
종남이 어떤 곳인가? 5백 명도 넘는 제자들과 상승의 고수들이 부지기수로 있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화산도 한 수 접어주고 물러나는 곳이 종남이었다.
만약 그들이 모두 몰려온다면 아무리 하인이 강하다고 해도 결코 살아날 수 없었다.
그런데 전쟁을 선언하다니!
이건 겁이 없는 건지 무식한 것인지,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에 하인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급히 따라왔다. 만약 중화 전장 장안 분타에서도 똑같은 살인을 한다면 그건 위험한 짓이었다. 무황성이 이 기회에 하인을 살인마로 규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뭐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면 그냥 두겠지만, 하인은 자신의 딸 설란이 사랑하는 자. 하인이 살인마가 되면 딸의 신세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사전에 막아 나선 것이다.
하지만 하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졸졸 따라온 것이 나를 막기 위해서요? 당신이 홍양기를 살려 낼 수 있소? 그럴 수 없다면 나를 막지 마시오. 난 저들을 살려 둘 수 없고, 내 앞을 막는 자 역시 죽일 것이오.”
하인의 말에 양안당은 숨을 들이켰다. 이 어린놈은 자신이 몰래 뒤따라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은 심공의 경지. 더구나 사문의 은신술인 매화잠영술(梅花潛影術)을 시전한 상태였다.
한데, 그것을 알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 보니 확실히 자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매화잠영술을 시전한 자신의 존재를 알아볼 수 없었다.
현 무림에서 자신의 은신술을 알아볼 자는 열 손에 꼽을 정도. 그런데 저 하인이 그 안에 들었다.
‘정말 무형공의 경지란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현실은 그것이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막아야 했다. 지금 장안 분타에 있는 자들은 아무리 많다 해도 하인을 막을 수 없었다. 무형공의 경지에 이른 자에게 숫자의 많고 적음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리가 떼로 있어도 성난 사자를 막을 수 없는 이치와 같았다.
화산제일검의 머릿속에 핏속을 뒹구는 수많은 시신들이 떠올랐다.
“안 돼! 저들은 무고한 사람들이야!”
양안당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순간 하인의 몸에서 소름 끼치는 살기가 흘러나와 주변을 휩쓸었다.
“무고하다고? 그럼 홍양기는 무슨 죄를 지었지? 저들은 아무 죄도 없는 홍양기를 죽였어. 당연히 저들도 죽어야 한다!”
하인의 눈에서 은빛 기운이 쏘아지자 피부가 따끔거리며 눈알이 터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이건 정말 상상외로군. 나도 견디기 힘든 내력이야. 대체 어떤 무공이란 말인가?’
양안당은 기를 맞받아치며 내심 놀라고 있었다. 심공에 이른 자신이 압박감을 느낄진대 다른 무인들이 하인 앞에 서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명확했다.
아마도 호랑이 앞에 선 이리 떼처럼 오금이 저릴 것이다.
“저들은 홍자연을 납치했고, 홍양기를 죽였다. 그뿐인가? 위가장을 지키는 호위 무사들이 백 명도 넘게 죽었어. 그런데 무고하다고? 웃기는 소리! 난 내 아내를 겁간 살해하려고 한 자들을 살려 줄 정도로 마음이 너그럽지 않아. 할아버지가 그랬지. 적은 애초에 뿌리를 뽑아버리라고. 내 앞을 막는다면 설령 당신이 설란의 아버지라도 치워버린다!”
하인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짙은 구름처럼 사방을 잠식하는 기운, 무형의 내력이었다.
만약 하인이 분노하면 순식간에 이 기운이 공간을 장악할 것이었다.
‘이 정도였는가!’
양안당은 숨을 들이켰다. 공간 장악!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공을 넘어 무형공에 도달한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천의무봉의 경지.
그 공간에서는 하인이 신일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심공을 이룬 사람이지만 공간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무섭구나, 공간을 지배하다니!’
양안당은 마른침을 삼키며 온몸을 얽어매는 기운에 결사적으로 대항했다. 그리고 무조건 하인을 막아야 한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설사 하인과 대결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지 않다면 정말 이곳은 피바다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 되네. 정말 죄를 지은 자는 죽여도 되지만, 이들은 돈을 벌려고 온 무인들일 뿐이야. 자네가 무림공적이 될 수도 있네. 그러니 죽여도 죄를 지은 자만 골라서…….”
가까스로 심혼을 억누르는 기운을 제어하며 말하던 양안당은 입을 닫았다. 차가운 비웃음이 어린 하인이 도중에 말을 잘라버린 탓이다.
“무림공적이라……. 후후. 지들은 아무 사람이나 맘대로 죽여도 되고, 다른 사람은 복수를 하는데도 무림공적이 된다면 난 기꺼이 무림공적이 될 것이오. 더구나 저들은 돈 몇 푼에 팔린 쓰레기들. 내 앞을 막지 않는다면 살 수 있을 것이지만 막는다면 그 누구도 살려 두지 않아!”
하인이 몸을 돌리자 양안당은 다급해졌다. 더 이상 그에게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능력으로 막을 수도 없었다.
‘큰일이군. 이거 살귀를 사위로 맞는 거 아닌지 몰라.’
그가 이를 악물고 내력을 끌어올릴 때였다. 갑자기 장원 밖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맑은 음성.
“난 위가장의 장주 위소옥이에요! 분타주에게 할 말이 있으니 문을 여세요!”
“응? 위 매가!”
당장 마당으로 내려서려던 하인의 신형이 멈춰 섰다.
그것을 본 양안당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래, 바로 저거였어!’
하인은 거칠 것이 없는 자. 그러나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위소옥을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답게 양안당은 그것을 재빨리 간파했다.
‘위소옥을 이용하면 이곳의 혈풍을 막을 수 있겠어!’
회심의 미소를 지은 양안당이 위소옥에게 전음을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노인장, 만약 위 매를 이용하려 한다면 당신은 내 손에 죽어. 알아서 하도록!
하인의 살기 어린 전음이 그의 뇌리를 흔들었다.
‘이런, 망할! 귀신처럼 눈치가 빠른 놈!’
양안당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무지막지한 자가 설란의 아버지라고 자신에게 손을 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휴, 그래. 오래 산 내가 참자, 참아.’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양안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하인이 서 있는 곳에서부터 무형의 기운이 자신을 덮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전설의 은영막? 세상에!’
지금 하인과 자신의 몸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이건 언젠가 사부에게 들었던 바로 그 무공, 은영막(隱影膜)이었다.
은영막은 기로써 공간을 감추는 무공.
무인들에게 자신의 몸을 감추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지만 공간을 기의 막으로 감추는 것은 상상 속의 경지였다.
그런데 하인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 무공을 시전하고 있었다.
양안당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인이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라는 것을 이제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만약 오늘 그와 대결했다면 필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저 과격한 성질만 고치면 천하제일인이 될 수도 있는데, 거참!’
생각해보니 자신의 딸이 신통했다. 그녀는 하인의 능력을 이미 알아보았다는 것이 아닌가!
‘그럼, 당연하지. 누구의 딸인데!’
양안당의 주름진 얼굴에 흡족한 웃음이 걸렸다.
* * *
중화 전장 장안 분타의 수문 위사 양통은 지금 눈앞의 사람들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여자들이 있었단 말인가!
그의 앞에선 말에서 내린 위소옥과 부르나, 당수해, 양설란, 그리고 면사를 쓴 주수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양통이 평생 살면서 처음 보는 미인들.
이 중에서 제일 미모가 떨어지는 위소옥조차 범접할 수 없는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분명 무공을 익힌 여인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서는 도도한 그 무엇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더구나 그녀들의 뒤에는 수많은 무림인들이 따라와 있었다. 대로에도, 대로 옆집의 지붕 위에도 무인들이 모여 흥미진진한 눈으로 분타의 정문을 지켜보았다.
저들은 한시라도 빨리 자신들과 위가장이 싸움을 하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누가 죽든 상관없이 구경을 하는 것이 목적이겠지만, 당사자인 양통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양통은 머리를 숙였다.
“위 장주님을 뵙습니다. 분타주님께 연락을 해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정중하게 포권을 한 양통의 말에 위소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빨리해야 할 것입니다. 곧 있으면 상공이 오실 테니까요. 그분은 지금 분노하고 계십니다. 그 전에 분타주와 제가 만나는 것이 이곳에 있는 무인들에게도 이로울 것입니다.”
위소옥의 말에 양통은 다급하게 줄을 당겼다. 그녀가 상공이라고 부를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은목전왕 하인이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잘못하면 명년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될지도 모른다.’
하인에 대한 소문을 다시금 머리에 떠올린 양통은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적에게는 가차 없이 살수를 쓴다는 사람. 특히 자신의 지인을 건드리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는 소문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지금까지 중화 전장의 호위 무사들은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화 전장은 중원 대륙에서 돈이 제일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하여 무인들은 중화 전장의 호위 무사가 되는 것을 꿈으로 여겼다. 전장에 소속되기만 하면 안전한 일자리와 보수를 지급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인의 전쟁 선포로 중화 전장에 소속된 무사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물론 호위 무사들 중에 하인이 중화 전장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 거라 여기는 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엄청난 고수라는 은목전왕을 이기려면 수많은 무사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죽은 다음에 돈이 다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중에서도 이곳 장안 분타의 무사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장안에 은목전왕의 집과 부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눈앞에 닥쳤다. 바로 은목전왕의 부인이 온 것이다. 그것은 곧 광풍이 온다는 신호나 다름이 없었다.
댕댕댕댕!
갑자기 장안 분타의 넓은 장원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타의 비상을 알리는 소리였다.
이곳저곳에서 호위 무사들이 달려 나오고, 방문들이 벌컥벌컥 열리며 이곳에 식객으로 와 있던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빨리 정문으로! 위가장에서 무사들이 왔다!”
중화 전장에는 금왕단(金王團)이 있다.
금왕단은 전 대륙에 있는 전장의 분타를 호위하는 무사들의 집단으로 각 분타마다 대로 되어 있고, 장안 분타에도 금왕단 소속의 금왕 7대가 있었다.
7대주 광풍검(狂風劍) 채환소는 부하들을 재촉했다.
성격이 불같은 그는 절정 고수로, 중화 전장에서는 감히 누구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말보다 검을 먼저 휘두르는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야, 칠 대주? 그자가 왔어?”
거검을 쥐고 달려가려던 채환소가 흠칫 놀라며 머리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명의 늘씬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눈이 약간 치켜 올라간 여인, 바로 중화 전장 금왕 6대의 대주인 혈룡녀(血龍女) 음사희였다.
붉은색 채찍을 사용하는 음사희는 남자들이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기피 대상 1호였다.
그녀가 웃으며 다가오자 채환소는 슬슬 뒷걸음질 쳤다.
“아직 모르겠소. 난 바빠서 이만.”
“호호. 광풍검 님, 가까이서 보니 역시 남자답군요. 어때요? 오늘 저녁 우리 진하게 한잔하는 것이.”
음사희의 눈에서 유혹적인 미소가 번들거리자 채환소는 한 발 더 물러섰다.
‘미친년! 내가 만만해 보이냐?’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깟 혈룡편은 무섭지 않으나 음사희의 구천침우(九天針雨)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9개의 하늘을 뒤덮는다는 독암기의 폭우.
지금까지 음사희의 마수에 걸린 남자들은 모두 그녀의 구천침우에 맞아 한 줌 물이 되어 사라졌다.
하얀 무복을 입은 음사희는 결코 무림칠봉에 떨어지는 미모가 아니었다. 지금도 둔부를 살랑이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지독한 음심이 일어나게 하고 있었다.
“꿀꺽.”
늘씬한 육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린 어깨 밑에는 도발적으로 솟아오른 가슴이 있고, 그 밑으로는 한 줌밖에 안 되는 허리가 한들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허리 밑으로 급격하게 경사를 이루며 남자의 눈을 자극하는 둥글고 탱탱한 엉덩이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채환소는 머리를 흔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저 아름다움에 유혹되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도 그는 음사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남자를 품에 안지 못하면 하루도 잠을 자지 못하는 색녀, 그것이 바로 음사희의 정체였다.
더구나 그녀가 상대하는 남자의 기한은 보통 한 달. 길어야 여섯 달이면 죽어야 했다.
한 남자와 오래 사귀지 않는 음사희는 싫증이 나면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반드시 상대를 죽였다.
그걸 알고도 저 요녀의 웃음에 걸릴 채환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수많은 남자가 쉬어간 저 여자의 몸은 벗기고 보면 썩은 냄새가 진동할 것 같았다.
“호의는 고맙지만 내가 요즘 새로운 무공을 익히느라 술을 먹지 못하오. 그럼 난 바빠서 이만.”
말을 마친 채환소가 번개처럼 달아났다. 그것도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신법을 발휘해서. 그야말로 번개가 무색할 지경의 속도였다.
“호호호. 채환소, 도망쳐 봐야 넌 갈 곳이 없어. 난 한 번 찍으면 반드시 먹는다.”
종알거리며 입술을 붉은 혀로 핥는 음사희는 요귀 같았다.
‘지독한 음기다!’
지붕 위에 몸을 감추고 있던 양안당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심공의 경지에 오른 그는 음사희에게서 풍기는 사이한 기운을 읽고 있었다.
그는 슬쩍 옆에 서 있는 하인을 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썩을 놈!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 반말이나 찍찍 갈기고. 으음…….’
아까는 하인의 무시무시한 살기에 대항하느라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괘씸했다. 자신은 화산제일검이자 무림의 대선배가 아닌가? 더구나 앞으로 장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 그런데도 저놈은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아무리 무림에선 힘과 명성이 그 사람의 신분을 결정한다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따져 봐야 저 싸가지를 물에 말아 먹은 자가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에효, 딸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양안당은 못마땅해하며 하인을 흘깃거렸지만 지금 그는 뚫어질 듯 음사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여자에게서 풍기는 음기는 분명 설려화의 것과 비슷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밤꽃 같은 향기. 저것은 만독화룡의 동굴 속에서 뇌리에 떠오른 기억 속 아내의 그 냄새와 너무도 비슷했다.
설려화, 그녀와 똑같은 향기와 음기를 가지고 있는 여자. 잘하면 자신의 과거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인의 눈은 둔부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가는 음사희를 계속 주시했다.
* * *
“내가 중화 전장 장안 분타 금왕 칠 단의 대주인 광풍검 채환소다. 위 장주가 여긴 웬일인가?”
신법을 전개해 음사희를 피해 달려온 채환소는 정문 앞에 서 있는 위소옥을 보고는 흠칫 놀라며 멈춰 섰다. 눈앞에 뜻밖의 장면이 펼쳐진 탓이었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여인들. 이건 마치 미인 모임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여인들 덕택에 살벌한 분위기마저 무색해지는 듯했다.
자신보다 먼저 달려온 금왕단 6대와 7대의 부하들이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서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때, 고막을 울리는 호통이 터졌다.
“네놈은 눈깔이 없냐, 아니면 위아래도 모르는 후레자식이냐! 주모님은 당당한 위가장의 수장이시다. 분타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을 타 먹는 네놈이 감히 반말을 해도 되는 신분이 아니시란 말이다! 당장 사과를 하고 예를 갖춰라!”
“컥! 이, 이런.”
어찌나 소리가 요란하지, 귀가 터질 것 같았다.
채환소는 깜짝 놀라 소리친 자를 보았다. 마치 곰처럼 엄청난 몸에 거대한 철퇴를 메고 있는 사내, 바로 마르칸이었다.
급히 내력을 끌어올려 마음을 진정시킨 채환소는 마르칸을 쏘아보았다. 감히 벽안인 따위가 함부로 나서다니!
방금 전 무방비 상태에서 놀라기는 했지만, 오랑캐 따위에 놀랐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채환소의 몸에서 살기가 쏟아졌다.
“여긴 너 같은 서역의 잡종이 나설 곳이 아니야! 그리고 우리와 위가장은 이미 전쟁을 선포한 상태. 이것도 과분한 대우다.”
채환소의 말에 마르칸의 얼굴이 벌게졌다. 감히 팔혈마인 자신을 몰라보다니! 그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뿜어졌다.
“잡종? 네놈이 나를 잡종이라고 했냐? 그럼 어디 잡종의 맛을 봐라!”
분노한 마르칸이 철퇴를 들고 나서려는 순간, 위소옥의 차분한 말소리가 울렸다.
“마르칸 님, 물러서세요.”
“옛, 주모님!”
당장 달려 나가려던 마르칸이 허리를 기역 자로 굽히며 철퇴를 들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커다란 눈으로는 계속 채환소를 노려보았다. 명만 떨어지면 당장 머리를 박살낼 기세였다.
“이것이 분타주의 대답인가요, 칠 대주님?”
광풍검 채환소는 가엾다는 눈으로 위소옥을 바라보았다. 고고한 모습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여자.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 불쌍한 여자군. 남편만 잘 만났다면 현모양처로 이름을 떨칠 여자인데, 요절하겠어.’
방금 비상종이 울렸을 때, 채환소는 이미 분타주의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위소옥이 왔다면 모욕을 줘서 먼저 도발하게 해라. 그리고 은목전왕이 왔다면 폭죽을 터뜨려라. 그럼 뒷일은 우리가 처리하겠다.’
현재 이곳 장안 분타에는 많은 고수들이 와 있었다. 모두 은목전왕을 잡으려는 사람들. 은목전왕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들 모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오늘부로 은목전왕의 명성은 스러지고 생명마저 부지하기 힘들게 될 것이다.
그럼 저 여자들은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 패자의 여자들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도 명백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저 여자들의 운명일 것이다.
어깨에 힘을 준 채환소가 입을 벌리려는 순간, 간드러진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호호호. 맞아요, 위 장주. 이번 전쟁은 위 장주의 부군인 은목전왕이 먼저 도발을 건 것. 여기에 온 이상 그대들은 살아 돌아갈 수 없어요. 뭐, 항복한다면 생명은 보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반항한다면 여인들은 창녀로 팔려 갈 것이고, 남자들은 노비가 되겠지요. 너무하다고 생각지 마세요. 중화 전장은 무림 문파가 아니어서 패자에 대한 처리가 다르답니다.”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함께 몸에 딱 붙는 눈처럼 하얀 무복을 입은 혈룡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위맹한 모습의 남자들이 10여 명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모두 중장년들로, 그들에게서 강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갔다.
“중화 전장의 혈룡녀다!”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무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혈룡녀의 소문은 중원 천하에 명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별로 좋은 명성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혈룡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손을 들어 까딱이며 유혹적인 웃음을 흘리고는 위소옥을 보며 생글거렸다.
그녀가 보기에 위소옥은 무공을 모르는 여자. 요리하기가 너무 쉬운 상대였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위소옥이 너무나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럼 나도 한마디 하죠. 우리 위가장 역시 무림 문파가 아니라 상가(商家)입니다. 이건 상가 대 상가의 싸움. 우리도 이번 일을 우리 식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이견은 없겠죠?”
위소옥의 말에 채환소는 힐끔 혈룡녀를 훔쳐보았다. 음사희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무인이 아니라고 위소옥을 얕보았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다.
‘바보 같은 년! 잘난 척 나서더니 결국 한 방 먹었군.’
잠시 말문이 막혔던 혈룡녀가 깔깔거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정말 참을 수 없이 웃긴다는 표정이었다.
“깔깔깔! 좋아요. 뭐, 상가든 전장이든 그만한 힘이 있는 자가 승자가 되겠죠. 그런데 이걸 어쩌나? 은목전왕이 오지 않았다면 좀 힘들 텐데.”
“상공이 오면 아마 후회할걸요? 그리고 그런 말은 여기 있는 사람들을 이긴 다음에 해야 할 겁니다.”
위소옥의 담담한 말.
사실 그녀는 지금 몹시 떨렸다. 그러나 부르나의 전음에 힘을 내고 있었다.
-형님, 걱정 마세요. 이곳에 있는 언니들은 모두 강자입니다. 그리고 지금 어디선가 대가께서 여기를 보고 계실 거예요. 절대로 기죽지 마세요.
배에 힘을 준 위소옥이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난 위가장주로서 피를 보고 싶지 않아요. 당신들이 납치한 우리 위가장의 장로 홍자연만 돌려준다면 전쟁은 없던 일로 하겠어요. 하나, 만약 돌려주지 않는다면…….”
“돌려주지 않는다면?”
혈룡녀가 싸늘히 웃으며 살기를 쏘아 보냈다.
음사희는 무공도 모르는 계집이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괘씸했다. 아닐세라, 살기가 쏘아지자 위소옥의 낯이 창백하게 변했다.
‘호호호, 멍청한 년. 무공도 모르는 년이 어딜 감히! 응?’
고소한 눈으로 위소옥을 보며 쾌감을 느끼던 음사희의 등골에 순간 무시무시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정말 잠깐이었지만 소름 끼치는 살기. 그 바람에 기겁한 음사희의 살기가 사그라졌다.
‘대체 누가!’
음사희는 주변을 번개처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런 살기를 쏘아 보낼 사람은 없었다.
‘내각 착각했나?’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위소옥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위소옥의 창백했던 얼굴이 어느새 안정되어 침착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음사희가 살기를 쏘아 보내자 부르나와 주수연이 내력을 쏘아 위소옥의 심신을 안정시킨 것이다.
“돌려주지 않는다면 힘으로 찾는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되면 피가 흐르겠지만.”
“호호호, 힘이라……. 좋아요, 그 힘을 한번 보도록 하죠. 하나, 한 가지는 명백하게 해두고 싶군요. 위 장주가 말하는 홍자연을 우리 중화 전장은 본 적도 없으며, 납치한 적은 더더욱 없어요. 이것이 우리 중화 전장의 공식 대답입니다. 그럼 이젠…….”
음사희가 말을 끊고 반들거리는 눈으로 위소옥과 그 뒤에 있는 여인들을 훑어보았다.
황금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은 조금 강해 보였지만 음사희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자신은 초절정의 고수. 저런 오랑캐 계집 따윈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다음은 화산의 양설란이었다.
‘흥, 네년이 화산의 양설란이로군. 그러나 넌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눈이 이번엔 당수해에게서 멎었다.
당수해의 아름다운 얼굴을 본 음사희는 그녀의 허리띠가 채찍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자신 또한 편(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음사희의 얼굴에 사이한 웃음이 피어났다. 채찍을 쓰는 계집. 아직까지 채찍으로 자신에게 상대가 되는 자는 없었다.
“…힘을 쓰는 일만 남았군요. 상가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무인. 누가 옳은지는 하늘이 가려 주겠죠. 자, 그럼 누가 나설 건가요?”
비웃음 어린 눈으로 위소옥을 바라보며 말하던 음사희의 손이 창끝처럼 당수해에게 겨누어졌다.
“당신은 채찍을 쓰는군요. 어때요, 주인을 위해 나와 겨뤄보고 싶지 않아요? 분타주님을 보려면 우리를 이겨야 하거든요. 용기가 없다면 할 수 없고.”
음사희는 도발적인 언어로 당수해를 충동질했다.
만약 그녀가 저 아름다운 여자가 당수해인 줄 알았다면 감히 도발을 못했으리라.
그러나 운명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분타주 역시 이곳에 당수해가 나타날 줄은 모르고 있었다. 무황성이 중화 전장의 모든 정보선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었다.
당수해의 얼굴에 차가운 빛이 어렸다. 본시 독화였을 때도 자존심이 강했던 그녀였다. 더구나 지금은 하인의 덕으로 독존지체가 된 그녀가 보기에 음사희는 하수도 한참 하수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똥강아지 주제에 호랑이에게 덤비는 가련한 여자, 그것이 음사희를 보는 당수해의 생각이었다.
당수해가 한 걸음 내짚고는 돌연 위소옥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주모님, 미숙하지만 제가 저 버릇없는 계집을 주모님의 발 앞에 무릎 꿇리겠습니다.”
아주 정중한 태도. 정말 부하가 주모에게 하는 태도였다.
위소옥은 깜짝 놀랐다. 지금은 비록 가문이 몰살됐지만 당수해는 당문의 자랑이었던 여자. 예전 같으면 위소옥에게 머리를 숙일 여자가 아니었다.
-위 매, 걱정 말고 수해를 내보내.
그제야 위소옥은 하인이 이 근방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마음이 뿌듯해지고 힘이 솟아났다.
“그래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예, 주모님.”
당수해가 위소옥에게 머리를 숙인 것은 다 생각이 있어서였다. 지금 이 주변 어딘가에 하인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하인은 위소옥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숙일 때 확실히 숙여 위소옥을 받드는 것이 앞으로 당문을 세우는 데 더욱 도움이 될 터였다. 하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소옥의 신임은 그녀에게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네년은 죽었어!’
머리를 돌리는 당수해의 얼굴에 싸늘한 냉기가 일렁거리며 그녀의 눈에서 녹색 기운이 확장되었다.
번쩍.
“헛!”
음사희는 흠칫 놀랐다. 당수해의 눈에서 창끝처럼 무시무시한 기운이 쏘아졌기 때문이다. 그건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기운이었다.
그때, 구경하는 무인들에게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더욱 기겁했다.
“저 여자는 독화가 아닌가?”
“맞네. 독화 당수해야!”
“흐흐, 그럼 음사희는 이제 끝장이로군!”
“아니지. 독화 당수해도 강하지만 음사희 역시 초절정의 고수야. 꽤 볼 만한 싸움이 되겠어!”
‘독화라고? 저년이!’
음사희는 천적을 만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천당문.
비록 지금은 혈마궁에 의해 사라졌지만, 그들은 중원 천하에서 독으로는 최고를 자랑한 가문이었다.
음사희는 애써 벌렁거리는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녀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한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혈마진독. 구십 년 전, 혈천신교의 마의가 만들어낸 약이지. 이 독을 해독하는 약은 아직 없다. 독의 조종이라고 하는 사천당문도 혈마진독은 해독하지 못했지. 하지만 이것은 정말 위험할 때만 써야 한다. 자칫하면 알아보는 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 그녀가 평생 동안 사랑한 ‘그’가 준 혈마진독이 있는 이상 당수해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음사희가 수많은 남자를 품는 색녀라고 소문난 것은 누구도 모르는 그녀만의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음사희는 남자의 양기를 뽑아 공력을 높이는 내공심법을 익힌 여자. 그녀가 남자를 품는 것은 바로 양기 때문이지 색녀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네년의 그 잘난 얼굴을 짓이겨 주마. 호호호.’
그녀는 천성적으로 예쁜 여자들을 증오했다. 아니, 예쁜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자신보다 더 예쁜 여자들은 모두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무림에는 예쁜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더구나 감탄을 하면서 당수해를 멍하니 보고 있는 무인들을 보자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눈깔이 없는 놈들! 네놈들이 선망의 눈으로 보는 저년을 오늘 아주 망가뜨려 주마. 여자도 볼 줄 모르는 병신 새끼들!’
이를 뽀드득 간 음사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사천당문의 독화 당수해인가요? 유감이군요. 겨우 살아난 당문의 마지막 후예인데.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 싸움은 무공 대련이 아닌 전쟁인 것을. 당문의 마지막 후인을 내 손으로 없애는 것이 좀 서글프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어서 오세요. 당문의 독이 허풍이라는 것을 내가 보여 드리죠. 호호호.”
음사희는 머리를 젖히고 한바탕 웃어젖혔다.
-수해, 그년을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 알아낼 것이 있어.
하인이 전음을 보냈지만 이미 늦었다. 사천당문을 들먹인 것에 당수해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저년, 죽일 거야. 날 막지 마. 막으면 평생 널 저주할 거야!
당수해의 살기 어린 전음에 하인은 입맛을 다셨다. 음사희를 잡아 설려화와 비슷한 저 기운을 알아보려고 했지만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가문을 가지고 까불었으니 당수해가 살려 줄 리 없었다.
하인은 당수해가 얼마나 독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멋모르고 덤비는 저 혈룡녀라는 계집이 불쌍했다.
‘미친 계집! 당해도 지독하게 당하겠군.’
속으로 혀를 차는 하인의 귀로 당수해의 말이 들렸다.
“혈룡녀 음사희라고 했지? 넌 오늘 당문을 입에 올린 것을 죽어서도 후회하게 될 거야. 내가 네년의 입을 갈가리 찢어버릴 테니까. 막을 수 있으면 막아봐라!”
파앗, 핏핏핏.
말이 끝나는 순간, 당수해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당문의 유명한 암룡구궁신법.
한 마리 흑룡 같은 당수해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자 음사희의 손에 혈룡편이 스르르 솟구쳐 올랐다.
“호호호, 좋아. 내가 왜 혈룡녀인지 보여 주리라. 혈룡회편(血龍回鞭)!”
촤악.
대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은 혈룡이 무려 10여 개나 나타나 매서운 속도로 짓쳐 들었다.
상하좌우로 휘어지며 밀려드는 혈룡의 무시무시한 강기.
“혈룡이다!”
무인들의 입에서 경악 소리와 찬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사희의 혈룡, 저것에 몸이 녹아내리는 무서운 독이 있다는 것을 무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호호, 병신 같은 새끼들. 이제 네놈들은 당문의 계집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게 될 거야!’
혈룡편을 휘두르는 음사희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그녀가 공격하는 혈룡편에는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 혈마진독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공격하던 음사희의 눈이 커졌다. 당수해가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쏘아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흥! 감히 이따위로 나를 상대하겠다고?”
당수해의 손이 기묘하게 굽어지며 짓쳐 드는 혈룡들을 모조리 쳐냈다.
펑펑펑펑!
하늘을 가득 메우는 손그림자. 마치 천수보살이 손에 쥔 별을 뿌리는 것처럼 하늘이 온통 밝은 별빛으로 메워졌다.
“와~ 당문의 삼양수(三陽手)다!”
무인들이 탄성을 질렀다.
삼양수.
당문의 유일한 금나수이며, 수공이기도 했다.
“저년이!”
음사희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당수해는 혈룡편을 손으로 쳐내고도 중독 현상이 없었다.
강기가 사방으로 비산하는 가운데 당수해의 신형이 직선으로 날아들자 음사희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설마 만독불침?”
하지만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가 아는 예전의 당수해는 그저 절정의 고수일 뿐, 무공이 분명 높아지긴 했으나 만독불침은 어림도 없었다.
혈마진독이 퍼지려면 아마도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음사희가 이번엔 신법을 펼쳤다.
‘흥! 조금 있으면 네년은 독에 중독될 터. 일단 피한다.’
그러나 그것은 음사희의 실수였다. 정면 대결로도 이길 수 없는 당수해에게서 빠져나가려고 했으니 말이다.
음사희도 만약 현재의 당수해가 독존지체라는 것을 알았으면 대결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내 앞에서 피하려고? 어림도 없다!”
파앗!
당수해의 신형이 허공으로 녹아드는 것 같더니 9개의 흑룡이 나타났다. 빛살처럼 덮쳐드는 9마리의 흑룡.
“암룡구궁신법이다!”
음사희는 무인들의 함성을 들으며 급히 몸을 비틀었다. 측면으로 날아드는 엄청난 기를 느낀 탓이다.
“에잇!”
그녀가 몸을 비틀며 손처럼 생긴 수강을 쳐내려는 순간, 강렬한 충격이 옆구리를 가격했다.
퍼억.
“악!”
음사희는 피를 뿌리며 내팽개쳐지듯 10장이나 날아가 태질을 당했다.
“우아, 당수해 님이 이겼다!”
뒤에서 도열하고 있던 위가장의 은천대 무사들이 환성을 질렀다. 악명 높은 혈룡녀가 단 몇 수만에 쓰러졌기 때문이다.
휘익, 척.
“감히 쨉도 안 되는 것이 독을 뿌려? 이 세상에서 독의 하늘은 하나, 사천당문뿐이다!”
당수해의 신형이 쏘아지자 그제야 사람들은 음사희가 독을 쓴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혈마진독이 얼마나 강한 독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 쌍년! 오늘 네년을 찢어 죽인다! 오호호.”
입으로 피를 토하며 일어선 음사희가 이를 갈았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당수해는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의 고수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그’가 준 혈마진독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품 안에서 옥병을 꺼내든 그녀가 허공으로 던지며 뿌렸다. 안개처럼 자욱하게 흩어지는 혈마진독.
이어 음사희의 악청이 울렸다.
“구천침우!”
그녀의 양 소매 속에서 엄청난 암기가 쏟아졌다.
9개의 하늘을 덮는다는 암기의 폭우.
빛처럼 쏘아지던 암기들은 혈마진독을 통과하며 무서운 독암기의 폭풍으로 변했다. 단 1개라도 맞으면 사지 육신이 마비되는 혈마진독.
하지만 음사희는 처음부터 당수해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흑룡만천(黑龍萬天).”
촤르르르.
당수해의 허리에서 흑룡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흑룡이 날아오르며 만 개의 하늘을 휩쓴다!
허공이 온통 흑룡편으로 덮이며 폭우처럼 쏟아지던 독침이 가루로 부서지고 혈마진독마저 강기로 태워졌다.
매서운 속도로 날아든 흑룡이 음사희를 덮쳤다.
촤악, 촤아아악.
“아악!”
음사희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새카맣게 하늘을 덮었던 흑룡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채찍을 쥔 채 당당하게 서 있는 당수해는 처음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음사희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녀의 옷이 갈가리 찢어졌고, 두 팔은 흑룡편에 잘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잘린 양어깨에서는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미끈하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게다가 피부가 질질 녹아 떨어지는 모습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독이다!”
“암향천독!”
무인들 속에서 두려움 가득한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어, 어떻게……. 혈마진독은 누구도 해독할 수 없는데!”
비칠거리는 음사희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짙게 어려 있었다.
당수해가 차가운 눈으로 그런 음사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멍청한 년. 어떤 독도 사천당문의 위에 있을 수는 없다. 다신 내 앞에서 독을 쓰지 마라. 하긴, 더 사용하고 싶어도 못하겠지만.”
촤르르르.
흑룡편이 살아 있는 물체처럼 당수해의 허리로 올라가 똬리를 틀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위소옥에게 머리를 숙였다.
“주모님의 명대로 처리했습니다.”
“수, 수고했어요.”
위소옥이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녀는 무인이 아닌 범인. 오늘 당수해의 무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늘을 휩쓸던 검은 흑룡들. 대체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에 음사희가 풍비박산 났다.
“감사합니다, 주모님.”
생긋 웃으며 허리를 굽힌 당수해가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두 팔이 잘린 채 이를 갈던 음사희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쏘아졌다.
쐐애액.
그녀의 두 발에서 붉은빛으로 번들거리는 비수가 쏘아졌다. 음사희가 언제나 최후의 무기로 가지고 있던 독비수.
그것을 본 은천대가 비명을 질렀다.
“독화 님, 피하십시오!”
“독비(毒匕)다!”
“호호호. 함께 죽자, 당수해!”
음사희가 미친 듯이 웃으며 육탄으로 날아들자 사람들은 그만 입을 쩍 벌렸다. 너무도 가까운 거리. 당수해가 아무리 빨라도 피할 수 없는 거리였다.
그 순간, 픽 몸을 돌린 당수해의 손바닥에서 녹색 강기가 빛을 뿜었다.
삼양신장의 일수장(一手掌).
번들거리는 녹색 장이 음사희의 가슴을 후려쳤다.
퍼엉!
“아아악!”
마치 물속에서 벽력탄이 폭발하는 것처럼 둔중한 소리. 하지만 눈앞에 일어난 현상은 끔찍했다. 삼양장의 강기에 맞은 음사희의 몸이 폭발하며 갈가리 찢겨 허공으로 비산한 것이다.
“으악! 물러서라!”
“피하라!”
하늘 높이 솟구쳤던 뼈와 살 조각들이 우박처럼 떨어지자 혼비백산한 장안 분타의 무인들이 사방으로 물러섰다. 음사희의 살점들에는 독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명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독의 제물이 되었다.
“으악, 내 팔!”
“몸, 몸이 녹아. 살려 줘.”
바닥을 뒹구는 장안 분타의 금왕단 무사들. 그들의 몸이 독에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손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방법이 없었다. 오직 독을 사용한 당수해만이 해독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눈은 차가웠다.
‘흥! 당문을 깔본 대가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모두 두려운 눈으로 당수해를 힐끔거렸다. 만약 당수해가 이곳의 무인들에게 독을 살포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렸다.
그제야 그들은 사천당문의 독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더 해야 할까요, 칠 대주님?”
당수해가 돌아와 뒤에 서자 위소옥이 채환소를 보며 하는 말이었다.
‘이건 상대가 안 돼. 당수해가 저 정도의 무인이라니!’
채환소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제 그는 위소옥의 뒤에 있는 여인들이 무서워졌다.
그는 절정의 고수. 처음부터 여인들은 상대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녀들에게서 어떤 기세도 풍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만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남자들은 당수해가 나와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등골에 땀을 흘릴 때였다.
-바보 같은 놈. 너의 뒤에 있는 사람들은 강하다. 그들을 내세워라.
‘헛!’
깜짝 놀란 채환소는 숨을 들이켰다. 분명 분타주의 전음이었다. 음사희의 뒤를 따라왔던 10명의 무인들. 그들이 눈을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걱정 마라, 우린 강하다.
입술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말을 전달하는 전음법. 그건 이자들이 엄청난 강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난 바보였다. 강호에는 알려진 고수보다 숨은 고수들이 더 많은 것을…….’
그는 가슴을 펴고 숨을 한껏 들이켰다. 이제 조금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당연히. 우리 중화 전장에 음사희 하나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 오. 위 장주, 이 사람들이 당신들을 상대할 테니 나서보시오.”
반말을 하려던 채환소는 위소옥의 뒤에서 눈을 부라리는 마르칸을 보고는 급히 말을 높였다. 솔직히 우습게 보았던 당수해가 무서운 고수라는 것을 안 이상 위가장의 무인들이 더 이상 쉽게 보이지는 않았다. 자칫해서 저 무지막지한 놈이 자신보다 더 강하다면 철퇴에 머리가 박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 한 명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난 두종악이오. 강호는 처음이라 명호는 없소. 그리고 뒤에 있는 사람들은 내 동생들이오. 위 장주, 어떻소? 모두 한 번에 해결하는 것이.”
두종악의 말에 위소옥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놓았다.
-걱정 마, 위 매. 뒤의 사람들을 내보내. 그들은 강해.
하인의 전음에 뒤돌아보자 부르나와 양설란, 주수연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들의 눈에는 한 점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대단해. 상공은 어디서 이런 여자들을 얻었을까?’
위소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있는 여자들은 인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는 여인들. 왠지 열등감이 들었다.
‘나도 무공을 배울 거야. 그이에게 짐이 되기는 싫어.’
피가 나도록 입을 앙다물었다. 무인의 아내는 무인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주모님, 저희가 나서겠습니다.”
“재밌겠다. 나도.”
유흥상이 나서자 싱글거리며 구경하던 당세기도 따라나섰다.
“저도요, 형님.”
“저도 할 수 있어요, 형님!”
부르나가 나서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나서는 양설란. 그 말에 뒤에 서 있던 주수연의 진한 눈썹이 꿈틀했다.
형님이라니, 정말 뻔뻔한 여자가 아닌가?
‘화산의 양설란까지?’
위소옥은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그녀보다 더 놀란 것은 은영막 속에서 지켜보고 있던 하인이었다.
‘저, 저게!’
그는 지금 위소옥이 움찔거리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부르나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양설란은 아니었다.
-양설란,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인의 전음에 양설란은 배시시 웃었다. 역시 하인은 주변에 있었다.
-왜요? 내가 못할 말을 했어요?
-그럼 그게 할 말이야? 저 사람들, 너와 나를 이상한 사이로 알 것 아냐!
-이미 그렇게 소문이 난걸요. 저기 있는 무인들에게 한번 물어볼까요? 오빠 때문에 난 시집도 가기 틀렸어요. 강호에 양설란은 은목전왕의 여자라고 소문이 났단 말이에요. 이젠 오빠가 책임져요.
-그, 그야 네가 날 따라다녔으니 당연…….
전음을 보내던 하인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정말 그렇게 소문이 났다면 양설란은 시집가기가 힘들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양설란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무인들에게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양설란이 하인을 따라다닌 것을 이미 수많은 무인들이 보았으니 말이다.
‘젠장! 위 매에게 뭐라고 하지?’
하인은 입맛을 다셨다.
‘흐흐. 잘한다, 설란아!’
옆에서 모른 척하고 있던 양안당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심공의 고수.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지금 하인이 딸과 전음을 주고받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듣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었다.
‘그래, 그렇게 밀어붙여라!’
그는 당수해의 실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가 독존지체가 됐다는 것은 몰랐지만, 초절정을 넘어섰다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부르나라고 하는 색목인 여자도 당수해보다 높은 경지.
하인의 옆에 있는 자들은 모두 무섭게 강한 자들이었다.
가히 저들만 나서도 일개 문파 정도는 존망이 어려우리라! 중화 전장과 싸움이 붙어도 저 정도의 고수들을 부하로 둔 하인이 패할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조금 어렵긴 하겠지만, 화산이 도와주고 청성파까지 나선다면 결코 약한 전력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사천과 섬서를 비롯한 무림 문파들이 무황성을 등지고 하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단체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들은 이미 무황성의 횡포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인이 그들의 구심점이 될 수만 있다면 새로운 무림 조직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화산으로서도 대찬성이었다. 그러니 딸이 더욱 대견스러웠다.
“좋아요, 그럼 나서세요.”
그렇게 해서 위소옥의 뒤에 있던 10명의 사람들이 앞으로 나섰다.
부르나, 양설란, 주수연, 마르칸, 당세기, 이적, 진필성, 유흥상과 그의 동생들인 유성낭아추 전중공, 대황패력봉 조철기였다.
혈권 상계훈과 적수귀장 소달은 위소옥의 옆에 있는 당수해 주위에 포진했다. 만약 어떤 일이 벌어진다면 즉시 위소옥을 호위할 수 있는 자세였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이기면 홍자연을 돌려줄 건가요?”
위소옥의 말에 7대주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이긴다면 분타주님을 만날 수는 있을 거요.”
채환소의 대답에 위소옥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이 싸움은 끝장을 보아야 하는 대결. 무인이 아닌 그녀였지만 상황을 파악하고도 남았다.
위소옥이 부르나를 바라보았다.
“동생, 부탁해요.”
“알았어요, 형님.”
생긋 웃은 부르나가 앞에 선 두종악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도톰하고 빨간 입술이 열리더니 낭랑한 말이 흘러나왔다.
“일대일로 할까요, 아님 한 번에 할까요?”
그러나 두종악은 부르나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 계집은 진품이다!’
그는 부르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목구멍으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다. 열기로 마른 입술을 저도 모르게 빨며 침을 삼켰다. 저 무르익은 몸을 품에 안으면 한이 없을 것 같았다.
‘으음, 죽이긴 아까워.’
게슴츠레한 눈으로 부르나를 훑어보던 두종악이 입을 열었다.
“색목인 소저, 그만 항복하는 게 어떤가? 싸워봤자 소저는 우리에게 상대가 안 돼. 항복한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그대를 살려 내리다.”
두종악의 눈에 진정으로 안타까워하는 기운이 어른거렸다.
그것을 본 부르나의 얼굴에 방실거리는 웃음이 걸렸다. 그녀의 눈에서 반짝이는 빛은 지독한 유혹이었다.
부르나가 살짝 몸을 비틀며 봉긋한 입술을 열었다.
“으응, 난 벌써 죽기 싫은데. 항복하면 절 어떻게 하실 건가요, 두 대협?”
‘으으, 눈이 부시다. 저 파란 눈, 붉은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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