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고금 제일의 무공
하루 종일 북적거리던 락하 부두가 조용해졌다. 오늘도 삶을 위해 꿈틀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잠에 빠졌기 때문이다.
객잔의 침실에서 어둠에 잠긴 창밖을 내다보던 주수연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이제 날이 밝으면 하인과 헤어져야 했다. 이미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 황실에 알려진 상태. 더 이상 하인을 따라다닐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떠날 순 없다는 생각에 무언가 결심을 굳히고는 침실 문을 열고 나서는 수연.
“어디 가시렵니까, 공주님?”
문밖을 지키고 있던 진필성과 이적이 공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공주가 천천히, 그러나 조금은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인 님에게 할 말이 있어서요. 따라오지 마세요.”
그녀가 자신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고는 급히 걸음을 옮기자 진필성과 이적의 눈길이 번개처럼 부딪쳤다 떨어졌다. 지금까지 공주는 밤이 깊은 시간엔 단 한 번도 하인의 침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밤중에 남자의 방으로 가다니! 더구나 공주의 몸가짐이 예전과는 달리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어쩌랴?
두 사람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들이 그녀의 무공 사부이기는 하지만 수신 호위도 되니 그녀가 하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휴~”
진필성이 한숨을 쉬고 머리를 돌리자 이적도 걸어가는 공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도 은목전왕이 바보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진필성은 이적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대체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공주는 천자의 딸이다. 한데 그런 그녀가 지금 무인에 불과한 하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리고 힘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다.
“밤중에 여긴 웬일입니까?”
하인의 침실을 지키고 있던 마르칸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 깊은 밤중에 공주가 왜 여길 온단 말인가!
“쉿. 마르칸 님, 조용히 하세요. 다른 사람들이 깨겠어요.”
조용히 다가온 공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날이 밝으면 떠나요. 그 전에 하인 님에게 할 말이 있어요. 비켜 주시겠어요?”
“예? 아, 예.”
마르칸은 떨떠름하게 비켜섰다. 비록 함께 다니긴 하지만 주수연은 공주였기에 마르칸으로서는 그녀의 말을 어길 수가 없었다.
방 안에 들어선 수연은 자신의 심장이 당장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슴이 너무나 쿵쾅거려 그 소리가 고막까지 터뜨릴 것 같았다.
두 손으로 세차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부둥켜안았다.
‘수연, 정신 차려. 오늘이 아니면 더 이상 시간이 없어.’
그녀는 희미한 달빛 아래 잠들어 있는 하인을 보았다.
하인.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눈에 비친 하인은 용맹한 무사의 표본이었다. 관군의 천호장에게도 거침없이 달려들던 자. 구중궁궐의 높은 대문 안에만 있던 수연에게 그런 하인의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더구나 그 당시 보여 준 그의 무시무시한 무위는 공주에게 개안을 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솔직히 공주는 무인 한 명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관군 수십 명을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 하인의 무위를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하인은 움직이는 일인 군단. 군사가 아무리 많아도 고수 한 명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이번 강호행을 통해 깨달았다.
하지만 수연이 하인을 마음에 품은 것은 무위가 강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긴 해도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지금만 봐도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현재 하인의 부인은 셋. 차분한 위소옥이 있고, 청성파의 허신영, 그리고 아름다운 벽안의 여인 부르나까지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줄 알면서도 중화 전장에 납치된 홍자연을 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것은 무모한 전쟁이었다. 중화 전장은 돈과 무력을 가지고 있는 방대한 세력. 반면 그에 도전하는 하인은 혼자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부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홍자연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것이 수연은 무엇보다 귀중하게 느껴졌다.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을 절대 버리지 않는 하인의 마음.
그런 자가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녀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하인 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늘 헤어지면 언제 만날지 모르지만 제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고 싶어요. 이것이 제가 당신에게 표현할 수 있는 제 마음입니다.’
그녀의 몸에서 옷가지가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희미하게 비춰드는 달빛 사이로 수연의 빙옥 같은 아름다운 몸매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쟤, 뭘 하자는 거야!’
하인은 지금 죽을 맛이었다. 문밖에서 수연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수연이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안 것도 오래전이었다.
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자신에게는 이미 3명의 여인이 있고,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실제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 자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강호에는 알려지지 않은 고수가 너무 많았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수연이 다가오는 것을 아예 모른 척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수연이 싫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으, 저게 누구 죽일 일 있나!’
하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달빛 속에 드러난 수연의 몸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마치 선녀가 하강한 것 같았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무리 모른 척하고 눈을 감고 있음에도 그녀의 빛나는 몸이 화살처럼 박혀 왔다.
‘이런 젠장! 어쩌지?’
하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였다. 당장 일어나서 내보내면 수연이 얼마나 참혹하겠는가? 더구나 그녀는 사람들의 떠받들림을 받던 공주였다. 아마 수치심으로 자결할지도 모른다.
‘이건 정말 힘드네. 어떡하지?’
하인이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수연이 그의 침상 앞으로 다가와 방긋이 웃는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하인을 내려다보았다.
스르륵.
‘허걱!’
하인은 그만 이를 악물었다. 사람의 피부가 아닌 선녀의 몸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맨몸이 살그머니 들어왔기 때문이다.
몸과 몸이 닿자 그만 부르르 떨고 말았다. 이럴 때는 그렇게 높은 무공도 소용이 없는지 도저히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아니, 다스리기는커녕 이미 온몸이 활화산처럼 끓어 번지고 있었다. 며칠 물을 못 먹은 것처럼 목이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하초가 끊어질 것처럼 곤두섰다.
‘으으, 제발… 제발 이러지 마.’
하지만 하인의 바람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수연의 나긋나긋한 손이 그의 목을 휘감은 것이다.
‘흑!’
하인은 숨을 멈추었다. 눈앞이 핑 돌고 수연의 향기로운 체취가 콧속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건 완전히 주화입마 상태였다.
“하인 님, 깨어 계신 거 다 알아요. 절 욕하시겠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이미 제 마음을 하인 님에게 빼앗겼는걸요.”
그녀가 뜨거운 입김을 불며 말하고는 하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사르르르.
그녀의 흑단 같은 머리가 하인의 몸을 덮어가며 피부를 간질였다.
와락!
“에라, 모르겠다. 너 후회 마라. 이건 네가 선택한 길이야.”
하인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부드럽고 향기 나는 몸이 그의 억센 두 팔에 조여졌다.
수연은 더욱 깊숙이 하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후회 없어요. 하, 하인 님, 전 이제부터 당신의 여자예요.”
이내 그녀의 얼굴이 쳐들렸다. 맑고 아름다운 얼굴. 마치 한 떨기 목련화가 파르르 떠는 것 같았다.
붉은 앵두 같은 그녀의 작은 입술이 하인의 두툼한 입속으로 사라졌다.
‘아흑! 하, 하인 님.’
수연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인의 입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자신의 몸을 송두리째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니, 빨려들고 있었다. 온몸이 뜨거운 가마 속에 들어간 것처럼 지글지글 끓고, 타는 듯한 갈증이 목을 태웠다.
‘하, 하인 님, 제발…….’
그녀는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빨리 이 불을 끄고 싶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부터 타오른 열기가 이제는 온몸을 집어삼키고 영혼까지 뜨거운 화로 속에 태워버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수연의 입이 딱 벌어졌다. 거대하고 화끈하게 뜨거운 것이 그녀의 몸을 통째로 꿰뚫는 것 같았다.
“아악!”
수연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그녀의 손이 본능적으로 하인의 가슴을 밀어내며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그녀가 움찔거릴수록 하인의 몸은 더욱 무서운 속도로 수연의 몸속으로 깊숙이 잠겨 들었다. 타오르는 열망이, 지금까지 수연을 보며 참아왔던 애욕이 폭발했다.
“아흑! 하, 하인 님…….”
두 손을 허우적거리던 수연이 맹렬하게 돌진하는 하인의 몸을 꽉 그러안았다.
수연의 눈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환희와 열정,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한 몸이 되었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아, 하인 님. 저 주수연, 이제부터 당신을 평생 지아비로 모시렵니다.’
방 안이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열기로 화끈해지고, 이를 악물고 터지는 희열을 참는 수연의 신음으로 가득 찼다.
“아흑, 흑!”
밖에서 파수를 서고 있던 마르칸의 눈이 둥그레졌다. 저쪽에서 달려오는 진필성과 이적을 본 탓이었다.
“무슨 소리냐? 공주님의 비명 소리다!”
진필성이 눈을 부라리며 하는 소리에 마르칸은 피식 웃었다. 이 자식은 왜 그렇게 눈치가 없는지.
마르칸이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이봐, 지금 공주님은 누구도 가까이 오길 원하지 않아. 그만 가서 잠이나 자라고. 오늘 밤은 내가 파수를 설 테니.”
“무슨 소리냐? 방금 공주님의 신음 소리가 났단 말이다!”
진필성이 가뜩이나 큰 눈을 뒤룩거리며 하는 말에 마르칸은 한숨이 나왔다.
대체 지금의 사정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비켜. 우린 공주님의 수신 호위. 안에 들어가 봐야… 응?”
마르칸을 밀어내며 안으로 들어가려던 진필성은 그만 굳어졌다.
“아학! 으윽… 하, 하인 님.”
그건 분명 공주 주수연의 목소리. 하지만 희열에 찬 목소리였다.
진필성의 눈이 둥그레졌다.
“서, 설마, 공주님이…….”
“그 설마가 맞아.”
마르칸이 의젓한 자세로 눈을 흘겼다. 이제 공주는 주공의 여인.
솔직한 말로 마르칸은 진필성과 이적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같은 무인이면서도 언제나 자신들은 공주의 무사라고 조금 뻐긴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위치가 바뀌었다. 아무리 공주라고 해도 주공의 여인이라면 진필성과 이적은 자신의 아래였다.
‘흐흐흐. 주공, 역시 주공이십니다. 공주를 부인으로 만들다니요. 크크크.’
마르칸의 커다란 얼굴에 능글거리는 웃음이 걸렸다.
“우린 그만 돌아가세.”
이적의 말에 진필성이 허청거리는 걸음으로 돌아섰다.
‘자식들, 이제야 수그러드는군. 히히.’
마르칸은 만족한 얼굴로 철퇴를 단단히 잡았다. 이 밤, 이곳에는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주공과 공주가 백년가약을 맺는 밤이 아닌가!
“아흑… 아아아!”
이제 방 안에서는 거침없는 신음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수연이 처음으로 여인이 되는 날이자 남자를 알게 된 깊은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만년소는 효산의 밑자락에 있는 150호가량의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드넓은 벌이 펼쳐져 있고, 뒤에는 효산의 산줄기가 삼문협을 향해 줄줄이 뻗어 있었다.
쿵쿵쿵쿵쿵!
지심을 울리는 소리. 이것이 바로 만년소라는 폭포에서 매일같이 터지는 음향이었다.
농사를 천업으로 알고 살고 있는 이 마을 사람들은 만년소의 폭포 소리를 자장가처럼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폭포의 바로 옆 산기슭에 있는 아름다운 장원은 중화 전장에서 은퇴한 무 대인이 사는 무장원이었다. 집 뒤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고, 양옆으로는 사람의 키보다 더 높게 풀이 자라 있었다.
휘이익.
갑자기 어디선가 들리는 묘한 휘파람 소리. 마치 휘파람새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밤새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울림.
곧 수풀 속에서 움직임이 일어났다.
사사사사사.
마치 새처럼 날아가는 자들. 하나같이 풀잎을 밟고 나가고 있는데도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
숨소리 하나 없이 묵묵히 날아가는 그들은 모두 도검을 휴대했고, 눈에서는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만약 지금 저들의 모습을 무인들이 봤다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사사사사사사.
하나같이 초상비(草上飛)의 경공을 사용하는 자들. 풀잎을 밟으면서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절정에서도 최상위에 오른 자들만이 가능한 것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캄캄한 밤,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달려가는 그들의 귀로 조장의 명이 전음으로 들렸다.
-우리의 목표는 무장원의 생명을 모조리 말살하는 것이다.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사정을 두지 마라. 특히 여자는 아이든 성인이든 이유를 불문하고 강간살해야 한다. 알겠는가?
-명!
간단명료한 대답.
검은 인영들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오자 주위의 숲에서 산새들이 푸드덕 날아오르고 잠을 자던 산짐승들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무재곤은 걱정하지 마라. 그자는 여기 계시는 십밀영(十密影)님들이 처리하실 것이다.
지금 검은 파도처럼 밀려가는 이들은 밀영사사대의 제2조였다.
50명으로 구성된 밀영사사대 2조는 말소리 하나 없이 오직 무장원을 목표로 전진만 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조장 마면추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그가 받은 명령은 아주 간단했다.
‘무장원의 생명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라. 단, 이 모든 것은 은목전왕이 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총사 제갈만산의 명이었다.
‘흐흐흐. 이제 우리가 그 바보 같은 두종악의 삼 조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총사에게 보여 줄 때가 되었다.’
마면추는 흡족한 눈으로 달려가는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원래 3조가 장안으로 떠날 때, 그는 남몰래 이를 갈았다. 같은 밀영사사대지만 서로 양보가 없는 경쟁 상대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선택되지 못하고 그들이 간다는 것을 안 후 이틀 동안 술독에 빠져 산 그였다.
한데, 그것이 자신에게 행운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기세당당하게 출전했던 밀영사사대 3조는 장안에서 은목전왕의 계집들에게 전멸했다.
은목전왕도 아니고 그의 여자들에게 몰살되다니!
그때 마면추는 마음껏 비웃었다.
그렇다고 은목전왕을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분명 자신과 경쟁하는 자이긴 했지만 밀영사사대 3조장 두종악은 결코 약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자신은 물론 그의 부하들까지 몰살되었다는 것은 은목전왕을 더욱 쉽게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더구나 은목전왕의 여자들이 그 정도로 강하다면 은목전왕은 더 강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십밀영이 출전했다. 크크크.’
마면추는 옆에서 장원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십밀영을 보았다.
십밀영.
복면을 쓰고 있는 그들에게서는 어떤 기운도 풍기지 않았다. 하지만 저들이 얼마나 강한지, 마면추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으로 떠나기 전, 저들의 무위를 얕보고 도전했던 그는 단 한 수에 박살이 났다. 그 자신 또한 초절정에서도 상급의 무인. 하지만 저들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건 저들이 이미 초절정을 넘어선 절대 고수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저…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면추가 주저하며 십밀영 중의 수석 밀영에게 물었다.
키가 약간 큰 그자가 바로 9명의 십밀영을 지휘하는 수석 밀영이었다.
저 앞의, 담을 날아 넘는 밀영사사대의 조원들을 보고 있던 그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무재곤이 나오면 우리가 들어간다. 너희는 맡은 임무만 수행하라. 단, 재물은 하나도 가질 생각 말고 즉시 다음 지점으로 이동하라. 알았느냐?”
“예, 수석 밀영님.”
마면추는 불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즉시 대답했다. 괜히 재물을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순식간에 목 없는 귀신이 될 수도 있었다. 저자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이제 강호에 출도했으니 앞으로 재물은 얼마든지 약탈할 수 있었다.
“아악, 적이다!”
“크악… 습격자들이다!”
“무기를 잡아라!”
촹촹촹.
퍽퍽.
서걱, 서억.
드디어 장원에서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 목이 잘리는 경쾌한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마을 쪽에서도 대혼란이 일어났다.
“아악… 살려 주세요!”
“엄마! 아빠!”
촤악. 촤악, 촤악.
“놔! 안 돼!”
여인들의 비명과 몸부림 소리, 옷이 찢어지는 소리.
찌지직. 우두둑.
“엄마야, 살려 줘.”
“이놈들! 이 무슨 짐승 같은 짓이냐?”
어느새 불이 붙은 집 안에서 뛰쳐나온 여인들과 소녀들이 밀영사사대원들에게 잡혀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일체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다.
아내와 딸들을 지키기 위해 도끼와 삽, 식칼을 들고 달려들던 남자들이 무참하게 쓰러지는 것이 불빛에 비춰 보였다.
뿌연 원을 그리며 휘둘러지는 검, 안개처럼 뿜어지는 피,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잘려진 목과 팔다리들.
이곳은 인세의 지옥이었다.
“아악… 이 악마들아!”
“살려 줘, 아빠.”
밀영사사대원들에게 잡혀 겁탈을 당하는 여인들과 소녀들의 절규가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을 구할 사람이 없었다.
발가벗겨진 여인들의 몸 위에 덮쳐들어 널뛰기를 하는 자들.
그동안 마령곡에서 굶주렸던 밀영사사대원들은 마음껏 달려들어 짐승의 욕정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놈들… 이 짐승 같은 놈들! 내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갑자기 벽력같은 고함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며 백발의 무재곤이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얀 머리와 하얀 눈썹,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밤하늘을 갈가리 찢었다.
번쩍!
촤악, 촤악.
“으악!”
“아악!”
미친 듯이 달려 다니며 살인과 강간을 일삼던 밀영사사대원들은 비명을 질렀다.
허공을 가득 메우고 떨어지는 빛의 검.
사방이 번쩍이는 검으로 메워졌고,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팔다리가 잘려졌다.
바로 무재곤의 일극섬전검(日極閃電劍)의 섬전분영세(閃電分映勢)였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천지를 덮어버리는 검의 폭풍. 역시 중화 전장 10대 고수 중의 한 명이었던 무재곤다웠다.
밀영사사대가 그의 광폭한 검에 밀려 마치 풀잎처럼 잘려지고 있었다.
“이젠 우리가 나설 차례로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수석 밀영이 두건을 벗었다.
주름진 얼굴에 가늘게 치째진 두 눈, 차가운 살기와 함께 그의 몸에서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무서운 자다!’
마면추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저자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분명 시체 썩는 냄새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마치 시신과 함께 산 자 같은 냄새.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면추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우두둑. 뿌두둑.
갑자기 수석 밀영의 얼굴에서 뼈가 엇갈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의 모습이 변했다. 그리고 짙은 눈썹과 우뚝한 코, 약간 둥근 얼굴을 가진 20대 중반의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저, 저건 은목전왕?’
마면추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수석 밀영이 만든 얼굴은 분명 이곳으로 떠나올 때 보았던 은목전왕의 초상과 비슷했다.
물론 아주 똑같지는 않았지만 밤에 보면 누구라도 저자가 은목전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제야 마면추는 제갈만산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저지른 모든 행위는 바로 은목전왕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고, 그는 살인마로 무황성의 추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자, 가자. 은목전왕의 역할을 해야지.”
“예, 수석님.”
핏핏핏핏!
수석 밀영의 뒤로 9명의 밀영들이 쏘아져 갔다.
“무섭구나, 제갈만산.”
빛처럼 쏘아져 가는 십밀영을 보며 마면추는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런 계책에 휘말리면 아무리 무죄를 외쳐도 무림공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은목전왕이 강하다고 해도 무림 전체와 싸울 수는 없는 일.
제갈만산이 노리는 것은 은목전왕의 죽음이지만, 그것도 치욕스런 죽음을 맞게 하려는 것 같았다.
사실 제갈만산이 가지고 있는 비밀 무력을 동원한다면 은목전왕을 죽이는 일쯤은 얼마든지 가능할 터였다. 그런데 굳이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무림공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은목전왕을 완전히 매장하려는 속심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역시 제갈만산이 주수연 공주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군. 흐흐흐.”
마면추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제갈만산이 주수연 공주를 맘에 두고 그녀의 옆에 접근하는 자는 가차 없이 매장시킨다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었다. 하인이라는 자도 그 때문에 처참하게 죽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게 남자 새끼는 거시기를 잘 놀려야지. 하필이면 제갈만산이 찍은 계집을 건드리다니. 쯧.”
혀를 찬 마면추는 사방에서 울리는 질펀한 소리에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여자를 가까이해보지 못했다. 마령곡에서 여자를 접하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흑, 살려 줘.”
“아저씨, 제발 이러지 마세요.”
여인들의 애원과 울부짖음 소리, 부하들의 헐떡거리는 소리가 마면추의 심장을 끓게 만들었다.
“이젠 나도 재미를 봐야지.”
마면추는 몸을 날렸다. 어차피 길길이 날뛰고 있는 저 무재곤은 십밀영에게 죽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은 그새 계집이나 즐기면 그만.
그의 신형이 저쪽 나무숲 속으로 도망치는 어린 여자에게로 쏘아져 갔다.
* * *
촹촹.
콰르릉!
검과 검이 부딪치며 거대한 폭음이 일었다. 마치 벽력탄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
“네놈은 누구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선 무재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일극섬전검을 막아낸 자.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자가 검을 축 늘어뜨린 채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재곤, 중화 전장 십대 고수 중의 한 명. 생사혈륜은 어디에 있지?”
하인으로 가장한 수석 밀영, 왕자춘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무재곤, 저놈의 실력은 자신과 동급이었다.
하지만 결코 놀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자신의 부하들도 만만치 않은 실력. 2명만 달려들어도 버거운 것이 그들의 실력이었다.
무재곤은 다리를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왕자춘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미 생사혈륜을 통해 은목전왕이라는 자에 대하여 들은 것이다.
‘으음, 이자가 은목전왕?’
이를 악물었다. 방금 부딪친 충격으로 보아 저자의 경지는 자신과 대등한 실력. 게다가 놈에게는 9명의 부하들이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자신과 반 수 정도의 차이. 이놈들이 덤벼들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필 생사혈륜 그놈과의 약속 때문에 이런 일에 말려들다니…….’
무재곤은 한숨을 쉬었다.
20년 전, 그는 생사혈륜과의 싸움에서 그만 부주의로 그의 딸을 죽였다. 때문에 그때 그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검을 내리고 말았다.
무인도 아니고 그 당사자도 아닌 그의 딸을 죽였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탓이었다.
‘생사혈륜, 너의 딸을 죽인 것은 내 본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은 무엇보다 귀중한 것. 언제든지 나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면 들어주마.’
그때 무재곤이 생사혈륜에게 다짐한 약속이었다.
그 후, 그는 손에서 검을 내려놓았고 은퇴했다.
중화 전장주는 극구 말렸지만 무재곤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언제나 외통수에 고지식한 무재곤은 그 길로 내려와 이곳에 장원을 짓고 조용히 살며 주변 사람들을 도왔다. 은퇴할 때 중화 전장주 하후극영이 준 자금이 제법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생사혈륜이 찾아왔다.
그는 은목전왕에게 받을 빚이 있다면서 웬 여인을 납치해 데리고 있었다.
그때 무재곤은 엄하게 생사혈륜을 꾸짖었다.
‘그대가 은목전왕과 어떤 은원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인을 납치하는 것은 결코 사내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다. 난 너를 도와줄 수 없으니 돌아가라!’
생사혈륜은 그런 무재곤을 비웃었다.
‘그렇군. 당신도 은목전왕을 무서워하는군. 이십 년 전 내 딸을 죽였을 때, 넌 나에게 어떤 일이라도 부탁하라고 했다. 뭐, 겁이 나서 못하겠다면 그렇다고 해라. 중화 전장의 십대 고수인 당신이 이런 겁쟁이일 줄은 몰랐다. 이 여자가 누군지 아는가? 바로 은목전왕의 여자다. 내가 이 여자를 납치한 것은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아내의 복수를 위해 잠시 이용할 뿐. 싫다면 가겠다.’
무재곤은 생사혈륜의 말을 듣고 갈등했다. 은목전왕이 그의 아내를 죽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무인이 당당하게 대결하지 않고 여자를 납치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지만, 상대는 혼자가 아니라 부하들까지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은목전왕의 여자를 납치해 그를 유인하는 길이라고 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지난날 생사혈륜의 딸을 죽인 죄스러움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서 생사혈륜을 놔두었고, 그는 벌써 5시진 전에 이곳을 떠났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생사혈륜의 말대로 은목전왕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야수였다. 농사밖에 모르고 살던 양민들이 검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고, 여인들과 소녀들이 능욕을 당하고 있었다.
이건 마도라도 잘 행하지 않는 짓이었다.
무재곤의 눈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네가 은목전왕?”
“알고 있군. 영감, 내가 바로 은목전왕 하인이다. 생사혈륜은 어디에 있지? 너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왔으니 속일 생각은 마라.”
왕자춘이 하인과 똑같은 말투로 말하며 무재곤을 쏘아보았다. 이미 하인에 대한 자료를 제갈만산에게 받은 그였다.
“이놈! 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건만, 네놈은 살아서는 안 될 놈이로구나. 짐승 같은 놈. 무인이 힘없는 양민들을 죽이고 여인들을 간살하다니, 나 무재곤이 오늘 네놈을 징벌하겠다. 하늘을 대신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재곤의 검이 수직으로 쳐들리고 기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우르르르, 번쩍!
밤하늘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검끝에서 쏘아진 하얀 광채. 그것은 12성의 공력을 실은 일극섬전검의 최후 초식, 천지멸(天地滅)이었다.
거대한 하얀 강기의 기둥. 하늘에서 태양이 떨어지는 것 같은 뜨거움과 함께 주변의 모든 것이 휩쓸렸다.
“막아라!”
기겁한 왕자춘이 몸을 날리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순식간에 삼각형의 진을 만든 십밀영. 그들의 몸에서 내력이 일시에 쏟아져 나왔다.
“지옥천강(地獄天쾝)!”
8명이 맨 앞에 있는 자의 등에 손을 대고 내력을 일시에 전가시켜 주는 내력전이법.
무재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8명의 내력을 합친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앞에 선 자의 검에서 새카만 강기가 기둥처럼 뿜어졌다.
콰콰쾅! 콰르르르!
귀청이 터질 것 같은 굉음, 사방으로 흩날리는 뼈와 살점들.
대지가 움푹 파이고 장원의 한쪽이 와르르 무너졌다. 강기의 폭발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것이다.
“컥, 클럭.”
먼지가 자욱하게 가라앉는 곳에서 무재곤이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갈가리 찢겨져 날아간 옷자락들. 한쪽 팔 또한 잘려 없어졌고, 온몸이 강기에 베여 성한 곳이 없었다.
하긴, 2개의 강기의 폭발을 고스란히 받았으니 그만해도 다행이었다.
무재곤을 공격한 9명 중 6명은 온몸이 폭발하여 시신도 남기지 못한 상태였다.
살아남은 3명의 십밀영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부하들의 공격에 가담하지 않고 보고만 있던 왕자춘은 눈이 둥그레졌다.
“크크크, 역시 중화 전장의 십대 고수로구나!”
전력으로 몸을 피했던 왕자춘이 피를 토하는 무재곤의 앞에 나타나 중얼거렸다.
실제로 왕자춘은 경악하고 있었다. 단번에 6명의 십밀영이 찢겨져 죽다니! 이건 상상외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양민들의 처참한 죽음에 분노한 무재곤이 진원지기를 모조리 끌어올린 결과였기 때문이다.
지금 무재곤은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악독한 놈! 네놈은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다. 컥!”
무재곤이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왕자춘은 그가 편하게 죽게 놔두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번쩍 휘둘러졌다.
촤악!
툭, 데구루루.
단칼에 잘린 무재곤의 목이 발밑으로 굴러왔다.
푹.
무재곤의 목을 검끝에 낀 왕자춘이 내공을 실어 외쳤다.
“무재곤, 잘 들어라. 나 은목전왕은 중화 전장과 인연이 있는 자들은 그가 누구든 모조리 죽일 것이다. 네가 그 시작이다. 으하하하!”
정신이 나간 것처럼 웃던 왕자춘이 무재곤의 머리를 허공에 띄우고 검을 휘둘렀다.
촤악!
2개로 갈라진 그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기다려라, 중화 전장이여. 나 은목전왕이 네놈들의 씨를 말려 버릴 것이다. 가자!”
“명.”
밀영사사대가 밤하늘을 날아가는 박쥐들처럼 왕자춘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악마… 아, 악마들이야!”
그들이 사라지고 얼마 후, 땅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기어 나오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바로 무재곤의 집에서 일하던 하인과 하녀들이었다.
그들은 악마의 손에서 살아남게 해준 부처님에게 감사를 드렸다.
하지만 그들이 알까? 왕자춘이 일부러 그들을 살려 두었음을…….
피의 바람이 뜨거운 8월의 밤에 시작되고 있었다.
그날 밤, 중화 전장 낙녕 분타가 불길 속에 잠겼다.
날이 밝은 후, 지부의 정경을 본 사람들은 기겁했다. 중화 전장 낙녕 분타의 모든 사람들이 여러 토막으로 잘려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 붙여진 한 장의 포고. 그것은 끔찍한 살육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나 은목전왕은 중화 전장에 다시 한 번 촉구한다. 홍자연을 내놓아라. 그녀를 내놓지 않는 한 나의 살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내놓을 때까지 중화 전장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은 시시각각으로 죽게 될 것이다.
-은목전왕 하인>
하남성에서 일어난 이 무자비한 살육은 일파만파로 대륙에 퍼져 갔다.
* * *
“이건 피비린내?”
말을 타고 달려오던 하인은 얼굴을 찡그렸다.
비릿하게 풍겨 오는 냄새, 이건 분명 피 냄새였다.
지금은 인시 정(새벽 4시경). 수연 일행을 황실로 떠나보낸 후 밤새 달려오던 하인 일행이었다.
그런데 이 비릿한 피 냄새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인의 기감은 5백 장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잡았다.
“피 냄새요?”
유흥상이 깜짝 놀라 하인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산골. 있다면 농사를 짓는 농민들과 무재곤의 장원뿐이었다.
그의 얼굴에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혹시?”
그가 중얼거릴 때였다. 하인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일단 가보자.”
말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렸다.
“세상에, 이게 대체!”
“맙소사, 이런 짓이라니!”
만년소에 도착한 일행은 숨을 들이켰다. 온통 시신들뿐이었다. 그것도 난도질을 당한 시체들.
목이 잘린 남자들의 시신과 온몸에 실 한 올 없이 알몸으로 죽은 여인들과 소녀들.
그녀들은 그냥 죽은 것도 아니었다. 분명 겁간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검에 팔다리가 잘려 죽은 시신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검붉은 피가 흘러 대지 또한 검게 물들어 있었다.
무재곤의 장원에 도착한 하인은 두 쪽으로 갈라진 노인의 머리통을 보았다.
“주공, 이건 분명히 무재곤의 머리 같습니다.”
마르칸의 말에 하인은 반쯤 무너진 장원을 바라보았다.
“이건 강기의 폭발이다.”
“강기의 폭발?”
유흥상과 동생들도 놀라서 하인을 쳐다보았다.
이 정도의 폭발을 일으키려면 진원지기까지 모조리 끌어올려야 가능하다!
이미 무재곤의 실력에 대해 알고 있는 일행이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하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파가 주변을 잠식했다.
아무도 없다. 아마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모두 도망쳤을 것이 분명했다.
사방에 널려진 살점들과 뼛조각들.
이건 일대일의 대결이 아니었다.
주의 깊게 둘러보던 하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적어도 10명 이상의 무인들과 대결한 상황.
하인이 장원을 바라보았다. 누가 왜 무재곤을 죽였든 상관이 없었다. 그가 걱정되는 것은 단지 홍자연의 상태였다.
“유흥상, 주변을 수색하라. 난 안에 들어가 보겠다.”
“옛, 주공!”
유흥상과 동생들이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하자 하인과 마르칸은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주공, 여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파앗!
하인의 신형이 번개처럼 후원의 독립 별채로 날아갔다.
앞에는 작은 꽃밭이 있고 2개의 방으로 된 별채. 그중 한 방에 이상한 그림이 있었다.
2개의 거대한 절벽이 있고 격랑 치며 흐르는 물결.
그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한데 마르칸이 이상하다고 한 것은 그림이 원래 있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래 그림이 있던 벽은 하얀색을 띠고 있고, 지금 놓인 자리는 바로 문 앞. 마치 누가 급히 나가면서 그 자리에 떨어 뜨려 놓은 것 같았다.
“이 그림은 무엇을 그린 것이지?”
하인이 중얼거릴 때였다.
“삼문협의 풍경 같습니다, 주공.”
마르칸은 비록 서역 출신이지만 중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팔혈마로 이름을 떨칠 때 중원 땅의 곳곳을 누볐기 때문이다.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2개의 절벽과 그 가운데로 흐르는 강은 분명 삼문협의 모습이었다.
“이건 삼문협이 맞습니다, 주군.”
유흥상마저 마르칸의 말에 힘을 실어주자 하인은 그림이 걸려 있던 자리와 떨어져 있는 곳을 세심히 살폈다.
“이건 홍 매가 떨어뜨렸어.”
“예? 그걸 어떻게……?”
유흥상이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이 냄새는 홍 매의 체취야.”
단언하는 하인의 말에 유흥상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 어떻게 여인의 체취를 냄새로 안단 말인가!
하지만 하인이 익힌 은천만상신공에는 극능체감술(極能體感術)이라는 기공이 있었다.
극능체감술은 사람의 체향이나 기감, 심지어 나무나 풀, 바위들의 특정한 냄새, 모양 등을 기억하는 기공이었다.
지금 저 그림에서 풍기는 냄새는 분명 홍자연의 체취였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주공?”
의아해하는 마르칸의 물음에 하인은 그림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알아. 나에겐 사람의 온도나 향기, 체취를 기억하는 무공이 있어.”
“세상에, 어떻게 그런 무공이!”
유흥상은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별의별 무공이 다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무공이 있다는 것은 생전 처음 들었다.
하지만 하인의 말이니 결코 거짓일 리 없었다.
‘주군의 무공은 정말 이해 불가로군!’
경탄 어린 눈으로 하인을 보는 유흥상의 생각과 반대로 마르칸은 구미가 당겼다.
‘거참, 기막힌 무공이네. 어떻게 좀 배울 수 없을까?’
“유흥상.”
“예, 주공.”
밖으로 나온 하인이 유흥상에게 명을 내렸다.
“이곳에서 가장 빠르게 삼문협으로 가는 길을 아나?”
“예. 일단 황수로 가서 배를 타야 합니다.”
황수(黃水)는 락하의 지류 중 하나로, 삼문협으로 가려면 그곳에서 배를 타야 했다.
“좋아, 그럼 가자.”
“예, 주공. 그런데 이런 짓을 한 놈들이 누군지 조금 찝찝합니다.”
유흥상은 시체를 둘러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강호 경험이 많았기에 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석연치 않았다.
하지만 하인은 무심했다. 어차피 죽은 사람들은 살아날 수 없었고, 그에게는 누가 죽든 상관이 없었다. 목표는 오직 하나, 홍자연. 그 외엔 어떤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가자.”
“예.”
7필의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렸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자신과 상관있다는 것을 하인은 곧 알게 될 것이었다.
* * *
무황성 총사의 집무실.
제갈만산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기쁨을 억지로 참는 모습.
반평산이 그런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흥에 겨워 말했다.
“낙녕의 중화 전장 지부에서 죽은 사람들을 보고 무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양민들도 격노하고 있습니다. 이제 만년소의 소식까지 강호에 퍼지면 놈은 피할 곳이 없습니다. 또한 총사님의 명대로 은밀하게 그에게 천의무신의 무공 비급이 있다는 소식도 흘렸습니다. 현재 전 무림의 무인들이 하남성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제갈만산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천의무신의 무공 비급.
대륙에서 고금 제일의 무인을 꼽으라면 단연코 천의무신이었다.
1천 년 전, 이 땅에 출현했던 천의무신. 그의 무공은 붉은 모습의 봉황장과 비슷하다고 했다.
현재 하인의 무공에도 은빛 봉황이 나타난다.
그 소식을 들은 제갈만산이 생각해낸 계략이었다.
살인마가 천의무신의 무공 비급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소문을 내면 어떻게 될까? 그다음 일은 안 봐도 뻔한 수순이었다.
무인들에게 무공 비급은 보석이나 황금, 돈보다 더 중요한 것. 더구나 천의무신의 무공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하인을 무림공적으로 만들면 전 대륙의 무인들이 하인을 공격하게 될 것이었다.
명색은 살인마인 무림공적을 처단하고 무림의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이지만 실제 속마음은 천의무신의 무공 비급. 그 때문에 하인은 반드시 죽게 될 터였다.
‘이 기회에 내 앞길에 적이 될 자들은 모조리 죽인다. 하인, 고맙다. 너는 나에게 행운의 부적이다. 흐흐흐.’
만족스럽게 웃은 제갈만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로들은 다 모였나?”
“예, 지금쯤 모두 모였을 것입니다.”
“그럼 가자.”
빨갛게 이글거리는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이고 있는 방 안에 수십 명의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 무황성 비상령 때문에 소집된 원로들과 장로들이었다.
비상령.
무황성주인 헌원상제만이 발동할 수 있는 최고의 권한으로, 무림에 위기가 닥쳤거나 긴급 사안이 생겼을 때만 사용하는 비상회의 권한이었다.
비상령이 발동되면 무황성 산하의 원로들과 장로들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모여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소림 출신인 천명(天鳴) 대사가 좌우를 보며 물었지만 다른 원로와 장로들도 뚱한 기색으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비상령이 발동한 원인을 그들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무량수불. 곧 무황께서 나오시면 알게 되겠지요.”
점잖게 도호를 외고 있는 사람은 무당의 옥청(玉淸) 진인이었다.
그의 말에 원로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무황님께서 나오십니다.”
밖에서 무사의 말소리가 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하얀색 일색인 노인이 들어섰다.
검은 머리가 단 한 올도 없는 하얀 머리, 길게 자란 은빛의 검미, 하얀 무복.
마치 순결한 백색의 설원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하얀 이 노인이 바로 무황성주이며, 강호에 무황(武皇)으로 우뚝 솟아 있는 무림의 절대자였다.
그의 깊은 눈 속에서 빛이 번쩍하는 순간 일부 원로들과 장로들이 일어섰다.
“성주를 뵈오.”
“무황을 뵙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들은 깍듯이 무황이라고 경의를 표하고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지만, 성주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머리만 숙일 뿐이었다.
이곳 무황성에서 무황 헌원상제를 충실하게 따르는 친성주파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서도 확연히 구분이 되는 상황이었다.
무황의 눈에서 마뜩찮은 빛이 순간적으로 뿜어졌지만 곧 온화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만면에 신선 같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 바쁜 것은 알지만 중대한 문제가 생겨 비상령을 발동하였습니다. 여기 모인 분들은 전부 천의무신을 알고 있지요?”
입을 연 헌원상제가 바로 본론을 말하고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순간 조용하던 좌중이 술렁거렸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돌멩이가 떨어진 것 같은 파동이었다.
“아미타불. 혹시 천 년 전 대륙의 성자셨던 그 천의무신을 말하는 것입니까?”
천명 대사의 말에 헌원상제는 굳어진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무공이 현세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의 말에 모두들 입을 딱 벌렸다.
“천의무신의 무공이 나타났다고요?”
“그게 어디에 있소?”
갑자기 원로들과 장로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고, 그들의 몸에서 뿜어진 열기로 방 안이 후끈해졌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천의무신, 고금 제일의 무인.
한데 그의 무공이 나타났다니!
원로들이나 장로들 모두 무인이기에 강한 무공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드디어 걸려들었다!’
헌원상제의 뒤에 서 있던 제갈만산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무인들에게 쥐약은 강한 무공 비급이었다.
헌원상제가 머리를 돌렸다.
“군사, 그대가 알아온 정보이니 직접 공표하게.”
“예, 성주님.”
헌원상제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제갈만산이 앞으로 나섰다.
“무황성의 군사 제갈만산이 원로님들과 장로님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인사는 생략하고 어서 말해보게. 대체 천의무신의 무공 비급이 어디에 있다는 건가?”
제갈만산의 말을 자르며 다그치는 것은 구주팔기 중의 하나인 벽력광제(霹靂狂帝) 구광이었다.
구광은 만폭문(萬爆門)의 장로로, 그의 온몸에는 수많은 벽력탄이 숨어 있었다. 더구나 성질이 너무 급해 사람들이 말을 섞기를 매우 두려워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구주팔기 중에서도 가장 성격이 급한 사람. 그의 몸속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벽력탄, 진천뢰, 광천뢰가 쏟아지면 일개 문파는 단숨에 날아갈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기피 대상 1호가 바로 이 사람이었다.
“예.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갈만산은 원로들과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번들거리는 눈으로 자신의 입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흐흐흐, 늙은 구렁이 같은 놈들. 천의무신의 무공 비급이 탐나 죽겠지?’
뱃가죽이 흔들거렸지만 겉모습은 반대로 침통한 표정이었다. 마치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
제갈만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원로님들과 장로님들도 사천에서 혈마겁을 막아낸 은목전왕을 아실 것입니다.”
“당연히 알지. 그럼 그가 천의무신의 무공 비급을 가지고 있는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던 벽력광제 구광이 이번에도 먼저 물었다.
“정보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현재 그는 중화 전장과 전쟁 중입니다. 그의 명분은 중화 전장이 자신의 여자인 홍자연을 납치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영 석연치 않습니다. 일단 중화 전장은 그런 일이 없다고 발표했고, 저희가 알아본 바에도 중화 전장이 홍자연을 납치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제 은목전왕은 중화 전장 낙녕 지부를 공격하여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남자들은 다 찍어 죽였고, 여자들은 아이부터 성인까지 모조리 간살하고 죽였습니다.”
“저런 죽일 놈!”
벽력광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성격이 급하긴 하지만 의협심 또한 누구보다 강한 것이 바로 그였다.
그가 보기에 은목전왕은 인간 망종이었다. 어떻게 무공도 모르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단 말인가? 더구나 여인들은 모조리 간살했다니, 이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았다.
“아미타불. 어찌 그런 일이!”
“무량수불. 이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로다.”
소림의 천명 대사와 무당의 옥청 진인이 불호와 도호를 외웠다.
“군사, 그건 정확한 증거요? 내가 아는 하인은… 아니, 은목전왕은 그런 자가 아니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외치는 사람은 바로 개방의 귀걸개였다. 그로서는 지금 제갈만산이 하는 말이 어이가 없었다. 하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물론 하인이 좀 예의가 없고 싸가지를 물에 막아 먹긴 했지만 아무 사람이나 마구 죽일 인간은 아니었다.
하인 덕에 살아난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당장 무황성의 황룡대와 백호대도 하인에 의해 살아나지 않았는가! 청성과 아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맞네, 나도 그를 잘 알지. 그의 손속이 무자비하긴 하지만 아무 사람이나 죽이진 않아. 우리 무황성에도 그에게 생명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네. 나부터도 말일세.”
귀걸개의 말을 지지하고 나선 사람은 장로 황해염이었다.
그 역시 제갈만산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무황성의 젊은 무사들 속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사람은 바로 은목전왕 하인이었다. 그에게 구출되어 돌아온 황룡대와 백호대가 동료 무사들 속에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뒈질 놈의 영감들! 하지만 이럴 것을 예견해서 미리 준비해둔 것이 있지.’
제갈만산은 슬픈 표정으로 황해염과 귀걸개를 바라보았다.
“저도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아 다방면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왜 그가 이렇게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지. 하지만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비고에 있는 무림 비사를 뒤져 보았습니다. 원로님들, 그리고 장로님들! 이것은 ‘무림괴이지’를 서술한 분이 쓴 내용입니다. 비록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이니 한번 보십시오.”
제갈만산이 한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누렇게 변색된 양피지가 한 장 들려 있었다.
“이건!”
“이럴 수가!”
원로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는 양피지. 그곳에는 드문드문 지워진 글씨가 보이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안타까운 말로 하소연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의원인 나 역시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그의 무공은 천고의 무공. 하지만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8성에 이르면 광기가 들리는 것이었다. 마치 마도의 무공처럼 피와 살육을 즐기게 되는 미친 무공.
광기가 없이 8성을 넘자면 만년삼왕이나 만년청양수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그러나 그런 하늘의 영약이 아무 곳에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애석하다. 정말 애석하도다!
…오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더 이상 살육의 욕구를 억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아, 하늘이여! 어이하여 의인(義人)을 냈으면서도 영약을 주지 않았소이까.
나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무공을 그의 관에 숨긴다.
혹시라도 이것을 얻는 자여, 8성을 넘지 못하면 절대로 무림에 출도하지 말지어다. 광기에 들리면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친구도 살리지 못한 생사신의가>
“생사신의(生死神醫)!!”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사신의는 무림 역사상 가장 의술이 능했던 의원이었다.
그가 1천 년 전 천의무신과 친구였다는 사실은 이미 무림에 회자된 일이었다. 한때는 생사신의의 묘에 무신의 무공이 있다는 소문에 대륙의 모든 무덤을 파헤치는 일도 있었다.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멍청한 늙은이들. 그래서 무만 아는 너희 같은 놈들은 죽을 때까지 이용물에 불과한 것이다.’
제갈만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실제 저것은 제갈만산이 위조한 양피지였다. 하지만 너무도 교묘해서 절대로 알아내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그럼 그 은목전왕이라는 아이가 주화입마에 걸렸단 말인가?”
지금까지 말이 없던 헌원상제가 드디어 제갈만산에게 물었다.
“예, 성주님. 아무래도 그가 천의무신의 무공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욕심이 과해서 무림에 출도하는 바람에 그만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종합해보건대 그는 지금 팔 성의 단계에 들어섰고, 그래서 살육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정보에 의하면 중화 전장에서 얼마 전에 가지고 있던 만년청양수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본 결과, 은목전왕이 중화 전장과 싸우는 이유는 만년청양수가 목표인 것 같습니다.”
“으음, 살인마가 날뛰다니. 아미타불.”
“무량수불. 어찌 되었든 이것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외다.”
천명 대사와 옥청 진인의 말에 다른 원로들과 장로들도 벌 떼처럼 들고일어났다.
“맞습니다! 그자를 무림공적으로 규정하고 하루라도 빨리 척살령을 내려야 합니다.”
“옳소! 더 이상의 희생이 나기 전에 죽여야 합니다.”
콰앙!
원로들과 장로들이 벌 떼처럼 떠들어댈 때, 일순 탁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짓이오? 무림공적? 혈마궁이 사천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때 막은 사람이 누구요? 아미파와 청성파, 백호대와 황룡대를 구한 사람이 바로 은목전왕이오. 그런데 그를 무림공적으로 규정한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귀걸개가 두 주먹을 쥐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혈마겁 때 이들은 모두 무황성에서 편하게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아니, 처첩들을 끼고 풍류까지 즐기지 않았던가? 대신 사천으로 간 무황성 정의대가 전멸했고, 사천당문이 몰살당했다.
그것을 막은 사람이 바로 하인이었고, 혈마궁을 말살한 것도 그였다.
한데 혈마궁을 무림공적으로 규정하기는커녕 강 건너 불 보듯 하던 자들이 지금은 하인을 무림공적으로 몰아 추살령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귀걸개가 부릅뜬 눈으로 원로들과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만약 그가 주화입마에 빠진 게 사실이라면 고쳐 주어야 옳다고 생각하오. 지금 벌어진 살겁이 그가 한 일이란 보장이 어디에 있소? 난 인정할 수 없소!”
귀걸개의 말에 원로들이 저마다 소리쳤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넨 군사의 말을 믿지 않는단 말인가?”
“흥! 그에게 목숨 빚을 졌다더니, 이젠 무공의 한 조각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