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반드시 청부 값을 주고 말 테야 (10/17)

제2장. 반드시 청부 값을 주고 말 테야

“닥쳐라! 그녀들이 헌것이라니? 감히 어디서 거짓말이냐!”

마대로는 악소희가 그녀들의 정체를 까밝히자 급해졌다. 당장 저자가 눈치라도 채면 끝장이었기에 재빨리 두 자매에게 살기를 쏘아 보냈다. 자신의 모든 내력을 끌어올려서.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의 살기가 쏘아진 순간 하인의 몸에서 일어난 은영막이 그녀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을.

무음무형이라 그로서는 은영막을 볼 수가 없었다.

“흥! 내가 모를 줄 알고? 그것들은 혈주의 노리개. 오빠가 쓰레기나 주워 먹는 까마귀냐!”

아주 교활하고 지능적인 악소희의 일갈이었다. 그녀에게는 이판사판인 것이다.

악소봉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져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동생을 응원했다.

‘잘한다, 소희야!’

그 소리를 들은 하인이 짙은 살기를 풍기며 마대로를 쏘아보았다.

“영감, 그거 사실이야?”

“그, 그게……. 대협, 그녀들이 혈주님의 여자들은 분명하지만…….”

그 순간, 마대로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음향을 들었다.

빠각. 따악.

“꺼억!”

어느새 하인의 발에 정강이를 얻어맞은 마대로는 땅바닥을 대굴대굴 굴렀다. 정강이가 반대로 접혔고, 척추를 타고 뇌에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은 머리를 하얗게 만들고 있었다.

“이거 정말 뚜껑 열리네. 야, 이 시발 놈아! 내게 너희 혈준지 성준지 하는 자가 먹다 버린 잡것들을 주려고 했단 말이지? 네 눈엔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너 죽어봐라!”

하인이 씽하고 날아가더니 일어서려고 버둥거리는 마대로의 머리를 걷어차 버렸다.

퍽석.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마대로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지며 허연 뇌수와 핏물이 사방으로 뿜어졌기 때문이다.

검을 뽑던 강도만은 흠칫했다. 마대로는 혈마궁의 십이 장로. 서열이 장로들 중 제일 아래이기는 했지만 초절정에서도 최상위급의 인물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머리가 반쯤 깨져 죽어버리고 말았다.

‘으으, 저놈은 정말 무서운 자다.’

그가 부들부들 떨며 하인을 볼 때였다. 하인이 손을 툭툭 털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거 뭐가 이렇게 약해? 젠장!”

돌아선 하인은 얼굴이 하얗게 변한 혈골대를 노려보았다.

‘어, 어떡하지?’

강도만이 머리를 분주하게 굴리고 있을 때였다. 하인의 차갑고도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 하얀 해골, 이리 와.”

“나, 난…….”

갑자기 온몸을 압박하는 진한 살기. 마치 살인의 밧줄 같은 음습한 기운이 강도만의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그것은 하인이 쏘아 보내는 무형의 기운이 혈천신공의 내력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오라면 올 것이지, 너 안 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강도만은 모든 힘을 다해 내력을 끌어올렸다.

저놈은 마대로조차 단숨에 때려죽인 자. 어떡해서든 혈주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했다.

이곳에는 일대일로 저자를 이길 자가 없지만 혈주라면 다를 터. 그는 안간힘을 써서 품속에 간직하고 있던 신호용 폭죽을 꺼내들었다.

피융. 퍼펑.

허공으로 날아 올라간 폭죽이 폭발을 일으키며 붉은 섬광을 사방으로 뿌렸다.

‘이젠 됐다!’

강도만은 갑자기 힘이 솟았다. 신호를 보냈으니 반드시 혈주가 올 것이다. 그가 아는 혈주는 무림 최고. 혈주가 오는 시간이 바로 저놈이 죽는 순간이었다.

하나,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하인이 그의 움직임을 모르지 않았으며, 일부러 폭죽을 터뜨리게 했다는 것을…….

‘흐흐. 그래, 이젠 덤벼라. 그래야 네놈들을 죽일 명분이 생기지.’

하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곳은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곳. 명분 없이 무조건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신호를 보냈으니 이제 죽기 살기로 덤벼들 것이 분명했다.

하인의 생각은 옳았다. 검을 추켜든 강도만이 부하들에게 외쳤다.

“조금 있으면 혈주님이 오신다! 모두 저놈을 쳐라!”

방금 전까지도 겁에 질려 있던 혈골대원들의 얼굴에 생기가 솟구쳤다.

“장로님의 원수를 갚자!”

“혈마궁의 힘을 보여 줘라!”

와다다다.

불을 향해 덤벼드는 불나방을 이런 것이라고 해야 할까?

보고 있던 악소봉과 악소희는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검마다 강기를 이글거리며 달려드는 혈골대원들은 마치 붉은 구름이 덮쳐 오는 것 같았다.

‘이길 거야. 아니, 꼭 이겨야 해.’

악소봉은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고,

‘이기지 못하면 국물도 안 줄 거야!’

입을 꼭 다물고 옹알거리는 것은 악소희였다.

‘그래, 잘한다, 배신자들의 후예들이여!’

하인의 몸에서 붉은 안개가 넘실거리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음습하고도 뼈가 시린 차가운 살기에 주변이 순식간에 얼음골처럼 냉각되었다.

“헉!”

“흑!”

기세등등해서 달려들던 혈골대 50명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무서운 기세를 그제야 느낀 것이다.

‘안 돼! 저자는 이길 수 없는 자야!’

‘덤비면 죽는다. 도망쳐야 해!’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하인의 손에서 붉은 구름이 회오리치더니 수십 개의 새빨간 구슬들이 생겨났다.

혈천신공의 혈탄강기(血彈쾝氣)!

-너희들은 혈마의 후예. 나를 원망 마라!

그들의 뇌리 속을 쩌렁쩌렁 울리는 하인의 전음이 들리는 순간, 수십 개의 핏빛 구슬들이 전방을 덮으며 날아들었다.

핑핑핑핑핑핑.

퍽퍽퍽퍽퍽.

“악!”

“으악!”

섬전처럼 날아드는 구슬. 그것은 저승으로 부르는 악마의 방울이었다.

“강기로 만들어진 지풍이다!”

쾅쾅쾅쾅!

기겁해서 검을 휘두른 혈골대원들은 억이 막혔다. 보기에는 홍옥처럼 아름다운 구슬들이 사람의 살을 찢고 몸을 무처럼 뚫고 지나갔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검으로 막으면 검이 부러지고 폭발까지 일으켜 검의 파편에 동료들이 쓰러져 갔다.

“악마다!”

“도망쳐라!”

머리가 뚫려 죽은 자, 가슴에 구멍이 관통되어 맥없이 쓰러진 자 등 동료들이 무리로 쓰러지자 살아남은 혈골대원들은 그만 눈이 뒤집혀 급기야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 또한 빨간 구슬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이 젖 먹던 힘까지 쓰며 도망치고 있을 때, 귀청을 울리는 날카로운 음향이 들렸다.

발은 그대로 내달리며 머리만 돌려 본 그들은 새빨간 구슬이 얼굴에 들이닥치는 것을 보아야 했다.

“안 돼! 살려 줘!”

펑펑펑펑.

비명도 없었다. 허공으로 비행하며 쏘아져 간 구슬들이 혈골대원들의 얼굴을 뚫고 들어가 폭발을 일으켰다.

자욱하게 일어나는 피의 비.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박살 난 머리통들.

사람들은 너무도 끔찍한 현실에 눈을 감았다.

‘나를 살인마라고 해도 좋다. 다시는 적을 남겨 두어 내 사람들이 불행한 일을 당하게 하지는 않는다.’

하인은 마지막으로 남은 강도만에게 눈길을 돌렸다.

섬뜩한 눈길, 그 안에서 회오리치는 광폭한 기운에 강도만은 온몸이 졸아드는 것을 느꼈다.

“으으으.”

“와라.”

하인이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잡아당겼다.

“으헉!”

휘리릭.

허공을 허수아비처럼 날아와 하인의 손에 잡힌 강도만은 얼이 나가버렸다.

이런 무지막지한 고수라니!

혈주라고 해도 이자와의 싸움에서 이길 순 없다는 것을 그제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잡아다 어디에 쓰려고 했는지 솔직히 말해라, 큰 소리로.”

하인은 강도만을 사람들 앞으로 집어 던졌다.

-네놈이 살길은 이실직고하는 것뿐이다. 참고로 말하는데, 네놈이 믿는 혈주와 장로들은 이미 내 손에 다 죽었다. 내가 바로 은목전왕이다!

“으힛!”

하인의 전음에 얼마나 놀랐는지, 강도만은 땅바닥에서 펄쩍 일어섰다. 그의 눈이 죽립을 쓰고 있는 하인을 보며 공포로 굳어졌다.

은목전왕 하인!

저자가 터무니없이 강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러고 보니 백면수룡의 두 딸이 여기에 있는 이유 또한 알 수 있었다. 혈주가 살아 있다면 절대 저 여자들이 나올 수 없었다.

저렇게 젊은 나이에 하늘의 무공을 지닌 자라면 은목전왕밖에 없다는 것을 왜 몰랐단 말인가?

이제 희망은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강호를 제패하려던 혈마궁의 야망도, 그에 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했던 자신의 꿈도 깨졌다.

그럼 남은 것이 무엇인가?

이젠 목숨이라도 살려야 했다. 이렇게 비참하게 맞아 죽을 수는 없었다.

“마, 말하겠습니다. 여자들은 피를 뽑아 혈마천인이라는 강시를 만드는 데 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처녀들은…….”

“처녀들은?”

강도만이 머뭇거리자 하인의 무서운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부르르.

“처녀들은 음부취정대법으로 겁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순음지기를 흡수할 수 있고, 강시가 혈마천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벌떡 일어섰다.

“뭐, 뭐라고?”

“이런 짐승 같은 놈들!”

사람들이 치를 떨며 땅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집어 들었지만 하인이 손을 들자 이내 조용해졌다.

“남자들은 어떻게 하려고 했지?”

“나, 남자들은 강시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전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강도만은 납작 엎드려 빌었다. 지옥의 사신에게 걸린 이상 살아날 길은 은목전왕의 자비밖에 없었기에 숨김없이 다 털어놓았다.

하지만 하인은 혈마궁도들을 한 명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넌 이곳 여자들을 몇 명이나 겁간했지?”

“그, 그게…….”

-당장 목을 비틀어줄까?

하인의 전음에 강도만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세 명… 아니, 네 명을 강간했습니다!”

“그녀들의 음기를 흡수했지?”

“예. 그, 그렇습니다.”

“시체는 어디에 있지?”

“강물에 버렸습니다.”

“누구의 딸이었나?”

몸을 후들후들 떨던 강도만이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이미 공포에 질린 데다 하인이 시전한 은천섭심마안에 정신이 잠식당했기에 거부할 힘이 없었다.

“저기 저 사람의 딸, 저기 만두 장사꾼의 막내딸, 그리고 어물 장사를 하는 진 노인의 손녀딸…….”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는 말에 진 노인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 나왔다.

지금까지 손녀딸이 실종되어 밤낮으로 찾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부모를 일찍 잃고 자신의 손에서 자라고 있던 어린 손녀딸이 놈에게 죽었단다. 그것도 겨우 12살 난 애가 저놈에게 겁간을 당하고 죽었다니,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달려 나온 노인이 하인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협, 우리의 생명을 살려 주신 의협님! 저놈을 제 손으로 죽이게 해주십시오. 이 늙은 것이 애지중지 키우던 손녀딸이었습니다. 이제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는데 저 악마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의협님. 으흐흐.”

노인의 수세미 같은 하얀 머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앙상한 두 어깨를 들먹이며 통곡하는 노인을 본 하인은 눈을 들었다. 잇달아 달려 나오는 마을 사람들. 그들의 눈에도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대협이시여, 저놈을 우리 손으로 죽이게 해주십시오!”

하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강도만을 바라보았다.

-넌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러니 죽음으로 저 사람들의 한을 달래주어야겠다.

“아니, 살려 주겠다고…….”

팍팍팍.

하지만 강도만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인의 손에서 쏘아진 지풍이 그의 마혈과 아혈을 일시에 점해버린 탓이었다.

“여러분, 이놈들은 악마입니다! 여러분의 손에 맡길 터이니 채 피지도 못하고 죽은 딸들의 한을 풀어주십시오.”

“와아아!”

하인의 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죽어라, 이 짐승 같은 놈아!”

“아이들을 겁간하고 음기를 뽑아 죽여? 죽어! 죽어라!”

“내 손녀가 어떤 아이였는지 아느냐, 이 개 같은 놈아!”

퍽퍽. 짝짝.

발로 차는 사람, 돌멩이로 찍는 사람.

강도만의 머리칼을 잡아 뜯은 여인들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팔다리를 물어뜯었다.

사람 하나 잡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완전히 걸레처럼 짓뭉개진 강도만이 숨을 거두고 너부러진 것은…….

‘저 사람, 그냥 살수가 아니야!’

악소봉은 경탄하는 눈으로 하인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곳에서 벌인 저 사람의 잔혹한 살수는 끔찍했다. 순식간에 50여 명의 혈골대를 갈가리 찢어 죽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저 한 놈이 한 말로 인해 협사로 탈바꿈되고 말았다.

강시로 변할 자신들을 구해준 은인! 더구나 처녀들에게는 죽음보다 더 수치스러운 겁간을 막아주고, 생명까지 구해준 무림의 청년 영웅이었다.

보라, 저 처녀들의 눈에서 반짝이는 흠모와 이글거리는 애모의 정을…….

‘안 돼! 저 사람은 내 거야.’

악소봉과 악소희는 하인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어느새 하인의 신형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봐요, 우릴 두고 가면 어떡해요?”

악소봉이 소리쳤고, 악소희는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가며 냅다 외쳤다.

“오빠, 청부 값을 드릴게요!”

악소희가 얼굴에 철판을 두르고 소리쳤지만 하인의 신형은 점점 까만 점으로 변해갔다.

-청부 값은 받은 것으로 하마.

아득하게 들려오는 전음 소리에 악소봉은 안타까이 발을 굴렀다.

“흥!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해. 어서 가, 언니.”

악소희가 언니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백룡대가 있는 곳으로 가면 되지.”

‘네가 나보다 한 수 위로구나!’

부끄러워 얼굴을 숙이고 있던 악소봉은 감탄하며 악소희를 쳐다보고 있다 저도 모르게 신형을 날렸다.

“고맙습니다, 협사시여.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까맣게 사라져 가는 하인을 보며 어물 장수 노인이 허리를 굽혔다.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하인이 사라진 곳으로 허리를 굽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녀들은 두 주먹을 쥐고 너 나 할 것 없이 내달렸다. 방금 악소희가 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가자, 백룡대가 있는 곳으로. 그곳에 자신들을 구해준 청년 협사가 있다!

그녀들이 달려가는 길 위로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고 있었다.

* * *

사방이 진펄과 늪으로 둘러싸인 곳.

안개가 자욱하게 흐르는 이곳은 백룡대와 수룡대가 있는 팔미토였다.

팔미토는 대낮에도 안개가 너무 짙게 흐르고 있어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늪과 진펄 가운데에 있는 섬이다.

더구나 팔미토로 들어가는 입구는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다. 그 외에는 자칫 발을 잘못 짚으면 순식간에 사람을 집어삼키는 진펄과 늪이었다.

팔미토의 공터에선 지금 한창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촹촹촹.

쾅쾅쾅.

“으악!”

“아악!”

검과 검이 부딪치고 사람의 목과 팔다리가 잘려 떨어졌다.

안개처럼 솟구치는 피분수와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

3백 명의 백룡대와 수룡대가 연이어 몰려드는 혈마궁도들을 향해 악을 쓰며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검을 들고 백룡대와 수룡대를 향해 거침없이 살수를 쓰고 있는 무인들의 눈이 새빨갛고, 행동은 무인 같지 않게 민첩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가공할 만했다. 대략 2천 명의 사람들이 고의(팬티) 하나 달랑 걸친 알몸으로 검에 찔리고 목이 달아나면서도 물러설 줄을 몰랐다. 묵묵히 돌진해 들어와서는 앞을 막아선 백룡대와 수룡대원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은 살 떨리게 섬뜩했다.

“야, 장세동이! 이 개자식아, 정신 차려! 나 백룡수검(白龍水劍) 고황광이야!”

백룡대의 대주인 고황광이 검을 휘두르며 외쳤지만 그의 앞으로 달려드는 새빨간 눈알은 일절 흔들림이 없었다.

“주, 죽어. 나, 나의 주, 주인 혈주의 며, 명이시다.”

장세동이 더듬거리며 검을 휘둘렀다.

쉬익.

검이 떨어지자 고황광은 어쩔 수 없이 맞받아쳤다.

쨍, 쨍쨍.

“으아! 이 개놈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만든 거야? 죽일 놈들.”

지금 그들의 앞으로 밀려드는 자들은 전부 황하십육채의 수적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달려드니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더구나 이상한 것은, 그들은 전혀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고의만 입은 몸에 은은하게 흐르는 분홍빛 기운, 그리고 빨개진 눈알. 분명 무슨 짓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동료라고 해도 망설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벌써 50명이나 저들의 검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의 검에 죽다니, 개죽음도 이런 개죽음이 없었다.

“야, 이 멍청한 새끼들아! 어서 검진을 만들어! 이놈들은 강시대법에 걸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다!”

거대한 철퇴를 휘두르던 마르칸이 고황광을 향해 소리치고는 혈마천인들의 숲을 사자처럼 뚫고 나갔다.

콰앙. 퍽퍽.

우지끈, 쩌적.

마르칸이 전진하는 곳은 마치 무인지경 같았다. 그의 손에서 휘둘러지는 시커먼 철퇴에 정통으로 맞으면 머리통이 박살 나고 몸이 짓뭉개졌다.

“으하하! 이 족제비 같은 놈아, 네놈이 혈마궁의 장로라며? 비열한 새끼! 겁이 나서 강시나 내모는 고자 같은 놈. 가서 네 어미젖이나 빨아라. 퉤!”

쳐 죽이고 또 쳐 죽여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혈마천인들 때문에 마르칸은 머리끝까지 화가 올라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백룡대와 수룡대를 데리고 나가려던 순간, 혈마궁 놈들이 들이닥쳤다.

놈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도착하자마자 일제히 공격해왔다. 그것도 무려 2천 명의 혈마천인들을 앞세워서…….

그래도 다행인 것은, 혈마천인들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자들이었다. 저들이 완성됐다면 이곳에 있는 수적들은 몰살했을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마르칸 자신은 몸을 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나 마르칸이 누군가? 강호에서 알아주는 벽안신장, 그리고 위대한 주공인 은목전왕의 부하였다.

그런 마르칸의 자존심상 후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주군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것. 이놈들을 모두 쳐 죽이고 저 뒤에서 뺀질거리는 장로라는 놈의 골통을 부숴야 했다.

“너 족제비, 기다려라. 내 이놈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네놈을 으깨주마.”

“저놈이 감히!”

혈골대원들의 뒤에 서서 비릿한 눈으로 구경하고 있던 십일 장로 혁세춘은 그만 분통이 터졌다. 곰같이 덩치가 큰 놈이 좌충우돌하며 강시들을 때려눕히더니 자신을 도발하는 것이 아닌가? 그냥 두면 부하들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았다.

“오냐. 오너라, 이 곰 같은 새끼. 나 혁세춘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려 주마.”

스르렁.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대도를 꺼내든 그는 뒤에 있는 제2혈골대주 민천서에게 명을 내렸다.

“민천서, 내가 저자만 묶어놓으면 나머지는 간단하다. 모조리 죽여라.”

“충.”

그제야 혁세춘은 비릿한 웃음을 띠고 마르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실상 저 곰 같은 자만 없었다면 반란자들은 벌써 다 죽었을 것이다.

백면수룡도, 비마도룡이라는 자도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초보 단계지만 혈마천인들은 강했다. 그들이 쪽수로 밀어붙이면 그들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놈이 아수라처럼 날뛰며 혈마천인들을 막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이 아니면 이곳에 저자를 처리할 자는 없었다.

“이놈! 혈마궁의 장로가 바로 나 혁세춘이다!”

맹렬하게 달려간 혁세춘의 손에서 거대한 대도가 허공을 갈랐다.

휘익. 콰앙!

마르칸의 철퇴와 혁세춘의 대도가 부딪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화염탄이 폭발한 것 같은 엄청난 음향. 그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며 10여 명의 혈마천인들이 사방으로 날려 갔다.

‘으윽. 이놈, 장난이 아니다!’

무기가 충돌하자 혁세춘은 눈을 부릅떴다. 손이 째질 듯이 아프고 철퇴와 부딪친 충격에 어깨까지 저려 왔다. 아니, 떨어질 것 같았다.

“흥! 멍청한 새끼. 그걸 이제 알았냐? 넌 이제 죽었다. 금강파산!”

산이 울리는 것 같은 마르칸의 일갈과 함께 나무통 같은 철퇴가 벼락처럼 짓쳐 들었다.

“이놈이!”

대기를 찢는 무서운 음향에 혁세춘은 머리칼이 곤두섰다. 저 철퇴에 실린 힘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알 수 있었다.

‘정면으로 충돌하면 위험하다.’

재빨리 판단한 혁세춘의 도가 사선으로 올라가며 철퇴를 막아갔다. 철퇴를 옆으로 흘려 힘을 감소시키려는 수였다.

그러나 그 순간, 혁세춘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르칸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걸린 것을 본 것이다.

‘속임수?’

피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들 때, 맹렬하게 짓쳐 들던 철퇴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더니 6개로 갈라졌다.

금강분타(金剛分打).

6개의 철퇴가 벼락처럼 짓쳐 드는 수법이었다.

“으헛!”

기겁한 혁세춘은 그만 개구리처럼 펄쩍 튀어 옆으로 나뒹굴었다.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나 수치로 생각하는 철판교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죽은 다음에 자존심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쩌저정. 콰앙!

그가 뒹구는 땅바닥에 철퇴가 들이치며 흙과 돌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컥, 컬럭. 엄청난 놈이로구나!”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 속에서 혁세춘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놈의 철퇴가 지나가며 일으킨 바람에 얼굴 가죽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놈이 어마어마한 내가고수라는 뜻.

혁세춘은 처음 가볍게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저놈은 결코 자신보다 약하지 않았다.

“놈, 무공을 감추고 있다니!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다.”

“쭈그렁 영감탱이, 개소리하지 말고 어서 덤벼라. 응?”

“쭈, 쭈그렁 영감탱이? 이놈! 내 네놈의 아가리를 찢어버리겠다!”

이죽거리는 마르칸의 말에 혁세춘은 그만 머리끝까지 열불이 솟구쳤다. 감히 자신에게 쭈그렁 영감탱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새로 들인 열일곱째 첩년과의 잠자리가 시원찮아 골머리를 앓던 그였다. 예쁘고 탱탱한 젊은 여자와의 밤이 생각대로 잘 안 되면 남자로서 그만한 곤욕도 없었다.

한데, 저 개자식이 그 아픈 곳을 꼬집는 것이 아닌가!

“곰탱이 같은 놈! 네놈의 골통을 박살 내고 거시기를 뭉개주마.”

분기탱천한 혁세춘을 본 마르칸이 헤벌쭉 웃었다.

“크크크. 쭈그렁,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지? 저걸 어쩌나? 남자가 그게 잘 안 되면 송장이나 같은데. 차라리 나한테 양보하지 그래? 괜히 남자 망신시키지 말고.”

“으아아!”

분노한 혁세춘의 대도에서 검강이 석 자나 화악 솟아올랐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사방으로 뿜어지고, 기파가 피부를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마르칸은 씨익 웃었다. 놈이 흥분하면 할수록 자신에게는 더 유리했다.

“네놈들은 주공의 원수. 이 마르칸에게 걸린 이상 한 놈도 살려 두지 않는다.”

화악.

마르칸의 철퇴에서 똑같이 강기가 석 자가량 솟구쳤다.

쾅쾅쾅!

두 사람이 부딪치는 소리에 주변이 발칵 뒤집혔다.

“정말 대단하군!”

백면수룡 악우궁은 머리를 흔들며 감탄했다.

“그래서 내가 머리를 숙이는 것이지. 그리고 저것도 진짜 실력이 아니네.”

옆에서 비마도룡 적발개가 하는 말을 들은 악우궁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 실력이 진정한 실력이 아니라면 얼마나 강한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 우린 저놈들을 처리하세.”

“그러세.”

대답한 악우궁이 부하들에게 외쳤다.

“형제들아, 우린 황하의 의적이다! 지금 눈앞에 달려들고 있는 저들은 강시대법으로 이지를 잃었다. 비록 이전에는 우리의 형제였지만 지금은 적이나 다름없다. 사정 보지 말고 베어라!”

“옛!”

백룡대와 수룡대는 대답을 한 것과 달리 여전히 방어에 몰두하고 있었다. 차마 형제들의 목을 벨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계속 열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를 간 악우궁이 커다란 창에 강기를 일으켰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몇 명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시퍼런 강기를 뿜으며 혈마천인들을 덮쳐 가려는 순간이었다.

-멍청한 놈! 제 부하들을 죽이려고 하다니. 그럼 황하십육채는 너 혼자 다 해먹을래?

“응? 누구냐?”

귓전을 울리는 전음에 깜짝 놀란 악우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 총채주?”

옆에서 도를 휘두르던 적발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누가 나에게 전음을 보냈는데…….”

그때였다.

“으이그, 어째 비마도룡이나 총채주라는 자나 똑같이 멍청하냐?”

갑자기 맑은 음성이 들리고 허공에서 뚝 떨어지듯 죽립을 쓴 자가 나타났다.

“비마도룡, 주군을 뵙습니다.”

“묵연가 차자동, 주군을 뵙습니다.”

전장임에도 불구하고 적발개와 차자동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인이 온 이상 이곳에 있는 자들의 운명은 끝이었다. 그것은 적발개와 차자동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주군? 그럼 저자가 그 은목전왕?”

적발개와 차자동이 무릎을 꿇자 악우궁은 눈이 둥그레져서 하인을 쳐다보았다.

“너, 총채주라고 했지?”

코앞에 다가온 하인이 악우궁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흠칫.

악우궁은 하인의 죽립에서 쏘아져 나오는 기파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죽립을 써서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마치 보이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강렬하게 쏟아져 나오는 기파는 분명 안광이었다.

악우궁의 허리가 저절로 굽어졌다.

“예, 제가 총채주 악우…….”

“됐어. 네가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총채주라는 것을 알겠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쟤들이 펼친 진이 항마제혼진 아냐?”

항마제혼진(抗魔制魂陳)!

소림에서 파생되어 나온 진의 하나로, 천하의 마를 제압한다는 진이었다.

원래 악우궁의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진으로서 먼 조상이 소림과 인연이 닿아 전수받은 것을 악우궁이 백룡대와 수룡대에 전수한 것이었다.

“예, 맞습니다만…….”

악우궁은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며 하인을 쳐다보았다. 대체 항마제혼진은 어떻게 알며, 왜 화를 낸단 말인가?

그가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하인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쯧쯧, 그러니 황하십육채를 혈마궁에 통째로 들어 바칠 뻔했지. 넌 항마제혼진의 뜻도 모르냐?”

“예? 그럼 저 제혼진이?”

조금 멍해진 악우궁이 중얼거리자 하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산동악가의 조상들이 지하에서 울겠다. 저 제혼진은 사람의 혼을 제압하는 진이야. 뭐해?”

“예? 뭐, 뭐 말입니까?”

악우궁은 저도 모르게 존칭을 사용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그렇게 말해줘도 모르냐? 진을 발동해!”

“그럼 강시대법에 걸린 수적들이 죽습니다.”

“너 진짜 바보 아냐? 인마, 저거 왕년에는 마도의 인물들이 질색하던 진이야. 그냥 진을 펼쳐 에워싸고 발동하면 정신이 몽롱해져. 그때 제압하면 간단해. 그러다 죽는다면 그것도 저들의 운명이니 어쩔 수 없고.”

“그, 그런…….”

악우궁은 정말 눈이 둥그레졌다. 지금까지 진을 수련하게 했지만 그런 효능이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 뭐해? 부하들이 죽는 거 안 보여?”

“예? 아, 알겠습니다. 수룡대, 백룡대! 진을 발동시켜라!”

하인의 재촉에 정신을 차린 악우궁이 급하게 소리쳤다.

“항마제혼진을 펼쳐라!”

“저들을 에워싸라. 제혼진 발동!”

지금까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던 백룡대와 수룡대가 기세도 드높게 돌진해 나왔다.

혈마천인들은 초기 단계여서 동작이 굼떴기에 포위하기 쉬웠다.

3백 명이 일렬로 늘어서서 에워싼 형국. 그들이 추켜든 창이 숲처럼 일떠섰다.

“발동, 사마제혼.”

“사마제혼!”

부하들이 소리치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화르륵.

이내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개개인이 항마제혼진을 수련할 때는 몰랐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하얀 창강(槍쾝)이 뿜어지더니 잠깐 사이에 허공에서 합쳐졌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하얀빛의 부처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처님이시다!”

“사마제혼!”

백룡대와 수룡대가 감격에 겨워 함성을 질렀다.

무서운 기세로 솟구치는 창강.

또렷한 형상으로 나타난 부처의 상에서 수백 개의 실 같은 강기가 혈마천인들에게 쏟아졌다.

“끄그그.”

“키륵.”

머리를 직격당한 혈마천인들이 괴성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세상에, 항마제혼진에 저런 효능이 있었구나.”

악우궁이 가슴 벅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나 알려 줬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빚을 갚아.”

어깨를 툭 치며 말한 하인이 섬전처럼 쏘아졌다.

“아니, 어디로?”

눈앞의 하인이 없어지는 바람에 눈을 돌린 악우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 앞에 있던 하인이 벌써 혈골대의 앞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무섭도록 빠른 신법이었다.

“너무 놀라지 말게. 저분은 무신이나 다름없는 분일세. 우리의 능력으로는 감히 그 무게를 잴 수 없지, 아암.”

적발개가 하는 말에 악우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에서 은목전왕, 은목전왕 하기에 단순히 좀 강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그의 능력을 보니 이건 정말 하늘 위의 하늘이었다.

한편, 혁세춘과 마르칸의 싸움을 보고 있던 혈골대는 마음이 급했다. 별 이상한 놈이 나타나더니 수세에 몰려 쩔쩔매던 수적들을 공세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혈마천인들이 공격을 중단하고 머리를 싸쥐고 있는 것이었다.

“안 돼! 공격하라!”

제2혈골대주 야수철검 민천서는 악을 쓰며 부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번쩍하고 눈앞에 나타난 하인이 눈을 찡긋하며 민천서를 바라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이 개자식들은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만나는 자마다 놈이네. 다 뒈져라!”

하인이 정말 귀찮다는 듯 한 손은 하늘을, 다른 손은 땅을 가리켰다.

그 모습을 본 민천서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하려는 것이지?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는 픽 웃었다.

“미친 새끼! 저놈을 죽… 어어?”

부하들을 돌아본 민천서는 비명을 질렀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부하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핏빛 쟁반. 거대한 쟁반 같은 엷은 막이 내려오면서 혈골대원들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끄아악!”

“아악… 내 머리!”

“몸이 녹는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핏빛의 쟁반이 내리덮이면서 혈골대원들이 머리부터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손을 올리면 손이, 손에 쥔 검까지 엿가락처럼 휘어 물로 변해갔다.

“대체 저게 무슨 무공인가?”

악우궁은 넋이 나가 적발개를 돌아보았다.

“나도 모르지. 하지만 하나만은 알고 있네.”

“그게 뭔가?”

악우궁의 물음에 적발개가 뚫어지게 하인을 보며 대답했다.

“현 강호에서 주군을 당할 자는 없다는 것이지. 무황? 개떡 같은 소리! 그도 주군을 당할 수는 없어.”

적발개의 말에 악우궁은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졌다.

무황, 현 무림의 최고수!

하지만 지금 보이는 저런 무공을 가진 사람이라면 질 것 같지 않았다.

그에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저 정도라면 강호는 저분의 것이다!’

적발개의 말을 들어보니 지금 장안에서는 저 사람의 부인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무림의 연합체인 은정련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앞으로의 무림은 저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설사 무황과 비등하다고 해도 무림이 갈라질 수 있었다.

‘그래, 우리 황하십육채가 살려면 은정련에 가입해야 해.’

그는 하인을 보며 결심을 다졌다.

“이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혈골대주 민천서가 하인에게 악을 썼다.

“그냥 독을 좀 썼어. 그런데 너는 왜 멀쩡하지?”

“난 독 따위에 당하지 않는다. 죽어라, 이놈!”

검을 들고 외치며 번개같이 신법을 밟던 민천서는 문득 발이 허전한 것을 느꼈다. 갑자기 내짚은 발이 앞으로 나가지 않고 몸이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그의 눈에 보이는 오른쪽 발이 녹아 없어지고, 이번에는 왼쪽 다리까지 녹아내리고 있었다.

“으아아! 이건 아니야.”

민천서가 공포에 질려 고함을 지르자 하인의 차가운 말소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그의 귀에 들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놈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해.”

혈천인독파(血天人毒破).

하인이 은천만상신공의 인독공에 혈천신공을 가미한 독공이었다.

독으로는 최상위의 독공이 전개됐으니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옷과 살이 녹아내리고, 다음에는 하얗게 드러난 뼈가 녹아서 물로 변하더니 땅속으로 잦아들었다. 마치 화골산을 투여한 것처럼…….

‘정말 무섭다. 세상에 저런 독이 있었단 말인가!’

악우궁은 오한으로 몸을 떨었다. 온몸의 솜털이 올올이 곤두서고 등골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 독공이 펼쳐지면 누구라도 한 줌 물로 변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콰앙! 콰르릉!

“끄악!”

마르칸이 싸우고 있던 곳에서 굉음이 연속으로 울리며 목을 찢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끝났군.”

“아예 뭉개졌습니다.”

차자동이 적발개를 보며 몸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칸의 철퇴에 맞은 혈마궁의 십일 장로 혁세춘의 몸뚱이는 처참했다. 잘 다져진 어육처럼 변해버린 채 머리만 남아 버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철퇴를 쳐든 마르칸이 중얼거렸다.

“주공에게 덤비는 놈은 모두 너처럼 된다, 멍청한 놈아.”

휘익.

말이 끝나는 순간, 허공에 쳐들렸던 통나무 같은 철퇴가 내리쳐졌다.

콰작.

“캑!”

그것으로 끝이었다. 혁세춘은 머리 형체마저 없어져 뭉개진 고깃덩이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주공, 끝냈습니다.”

마르칸이 철퇴를 짚고 머리를 숙였다.

“응. 그런데 쟤들은 왜 저러고 있어?”

하인이 턱으로 항마제혼진을 가리켰다.

그에 악우궁은 머리를 홱 돌려 보았다. 백룡대와 수룡대가 쓰러진 2천 명의 수적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이 죽은 것에 대해 피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하인의 눈에 기광이 번뜩 지나갔다.

‘흠, 수적치고는 의리가 대단하네. 그럼 이거 생각을 달리해야겠는데?’

하인은 저런 끈끈한 의리라면 부하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수적들을 부하로 삼았다고 뭐라고 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 무인은 모두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평소 신조였기 때문이다.

정도든 마도든 사도든, 밥 먹고 똥 싸는 것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게… 주공, 저들은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의형제들입니다.”

“그래? 그럼 살릴까?”

하인의 말에 적발개의 눈이 둥그레졌다.

적발개뿐이 아니었다. 악우궁과 백룡대, 수룡대도 머리를 번쩍 들고 하인을 쳐다보았다.

“사, 살릴 수 있습니까, 주군?”

적발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인마! 내가 누구냐? 천하의 은목전왕이 못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

하인의 말에 적발개는 목이 부러질 듯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은목전왕 님께서 못하실 일은 없습니다.”

“자식, 알긴 아네.”

그것을 본 악우궁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너 뭐하냐, 지금?”

하인의 말에 악우궁은 머리를 땅에 박았다.

“은목전왕 님, 수적들을 살려 주십시오. 하찮은 목숨들이지만 그래도 제 부하들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내가 왜? 죽을 운명은 죽어야 해. 그게 하늘의 도리야.”

냉정하게 말하고 돌아선 하인이 마르칸을 바라보았다.

“마르칸, 그만 가자. 오랜만에 힘 좀 썼더니 피곤하다. 에이, 떨어지는 것도 없이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나 몰라.”

“예, 주공. 요 앞 저잣거리에 나가면 목화루라는 곳이 있답니다.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한숨 쉬고 나시면 피곤이 쫘악 풀릴 겁니다. 헤헤.”

마르칸의 말에 하인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좋은 곳이 있었네. 가자.”

하인이 무심하게도 그냥 가려고 하자 백룡대와 수룡대가 일제히 달려와 하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너희들 뭐야?”

“은목전왕 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에 팔미토가 드르릉 울렸다.

“뭐야? 귀청 떨어지겠다.”

하인이 그만 가려고 하자 백룡대의 대주 백룡수검 고황광이 머리를 조아렸다.

“은목전왕 님, 형제들을 살려 주십시오. 간절히 부탁합니다.”

“내가 왜? 이봐, 제혼진의 묘리를 알려 줬으면 됐지 뭘 또 바라냐? 너희들 진짜 양심도 없다. 안 그래?”

하인의 말에 고황광은 말문이 막혔다. 분명 옳은 말이었다. 그 방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자신들은 오히려 형제들의 검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형제들을 살리고 싶었다.

더구나 방금 비마도룡이 보낸 전음을 듣고 하인의 앞을 막아선 이들이었다.

-이 멍청한 새끼들아! 형제들을 살리려면 주군에게 사정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말이다. 그분이면 형제들을 구할 수 있어.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고황광이었다. 게다가 방금 하인이 혈골대를 없애버리는 것을 보고 더 믿음이 갔다. 천하의 혈골대가 물이 되어 없어진 것이다.

“은목전왕 님, 형제들을 살려 주시면 저희들은 평생 은목전왕 님의 노비라도 되겠습니다. 비록 힘은 약하지만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형제들을 살려 주십시오.”

쿵쿵쿵.

고황광이 머리를 땅에 박자 무릎을 꿇고 있던 부하들도 일제히 그 행동을 따라 했다.

“형제들을 살려 주십시오!”

백룡대와 수룡대가 동시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이런 젠장! 난 이거 맘이 약해서 탈이라니.”

정말 마음이 약하다는 듯 머리를 흔든 하인이 악우궁에게 눈을 주었다.

후다닥.

하인의 앞으로 달려온 악우궁은 무작정 엎드렸다. 완전한 오체복지. 그리고는 외쳤다.

“은목전왕 님! 가능하다면 제발 부하들을 살려 주십시오. 무엇이든 명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노비가 되라면 되고, 돈을 내라면 내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그가 땅에 머리를 박자 하인은 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됐어. 그만 일어나. 살려 주면 되잖아.”

“저, 정말입니까?”

악우궁이 놀란 눈으로 하인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나? 내 이래서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젠장.”

하인은 스적스적 쓰러져 있는 수적들에게 다가갔다.

모두 숨을 죽이고 하인의 등만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죽은 사람들을 살릴 것일까?

이것이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분명 형제들의 맥박이 멈춘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항마제혼진에 당하면 마기가 역류하면서 뇌가 잠에 빠지고 심장이 약하게 뛴다. 그것은 마치 귀식대법과 같은 것이어서 심검의 경지에 오른 자가 아니라면 감지할 수 없었다.

‘클클클. 이로써 주공은 수적들마저 손안에 넣으셨다.’

마르칸은 웃음이 터지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는 이미 심검의 경지. 저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조용한 곳에서 수적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인의 두 팔이 허공으로 쳐들렸다.

“옥황상제시여, 여기 당신의 자식이 불쌍한 영혼들을 살리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역천의 행위이나 저들은 억울하게 죽은 운명. 저들의 처자식을 생과부나 편모슬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벌을 받으라면 훗날 제가 죽은 다음 영혼을 바치겠사오니 천상의 생명수를 내려 주십시오.”

‘크크크. 주공은 이제 광대가 다 됐어.’

마르칸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근엄한 표정이었다.

우르릉! 콰콰쾅!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휘몰아치자 수적들은 입을 쩍 벌렸다.

정말 하늘의 옥황상제가 노해서 벼락을 치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것은 하인의 몸에서 소리 없이 올라간 무형의 기운이 폭발하는 소리였다.

‘흐흐, 이 정도로 연기를 했으면 됐고……. 이제 그만 살려야지.’

하인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둥실.

하늘에 올라선 하인의 몸에서 찬란한 은빛이 쏟아졌다.

쏴아아아!

그것은 다름 아닌 은천만상신공의 생사흡출공이었다.

수적들의 몸에 쌓여 있는 혈마기를 뽑아내면 정상으로 돌아갈 터.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하인의 몸에서 뿜어지는 빛이 마치 옥황상제가 내린 신의 빛 같았다.

은빛이 수적들을 감싸고 얼마 후, 붉은 혈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악마의 기가 뽑히고 있다!”

“세상에, 저분은 천인이시다!”

수적들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들의 외침 소리를 들은 하인은 속으로 좋아서 헤벌쭉거렸다. 이제 저들은 어떤 명령을 해도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혹세무민이지만 뭐 어떻단 말인가? 하인은 이미 세상에 군림하겠다고 결심한 상황이었다.

꿈틀꿈틀.

누워 있던 수적들이 움찔거리기 시작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 이제는 빨갛던 눈동자가 아니라 정상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우리가 왜 여기 누워 있어?”

모두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우와와!”

“살았다!”

백룡대와 수룡대가 일제히 달려가 동료 수적들을 얼싸안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오히려 수적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희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수룡대의 대원이 묻자 혈마천인이 됐던 수적이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아, 생각난다! 무슨 약인가를 먹고 빨간 물감을 탄 욕통에 들어갔었어.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지 수적이 끙끙거리자 다른 수적이 손뼉을 쳤다.

“맞아! 그 빨간 물에서 비린내가 났어. 그다음엔 정신을 잃은 것 같아.”

“너희들은 강시로 만들어졌었어. 그것을 저분께서 살려 주셨다.”

악우궁이 하는 말에 수적들은 벌떡 일어섰다.

“총채주님을 뵙습니다!”

“죽었던 너희들을 살려 주신 분은 바로 저분, 은목전왕 님이시다. 모두 은인께 인사를 올려라.”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는 악우궁의 모습에 걸어가던 하인이 팔을 흔들었다.

“야, 귀찮다. 나 그런 애들 필요 없어.”

그리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멍해진 수적들이 그를 볼 때였다. 팔미토로 들어오는 길 위에 두 사람의 신형이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니, 저 애들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펄펄 날리며 쏘아져 오는 것은 분명 악소봉과 악소희였다.

‘살았구나! 역시 은목전왕이 내 딸들을 구했어!’

악우궁은 기뻐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자신에게 안길 두 딸을 생각하며…….

한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오빠, 혼자 가면 어떡해요?”

악소희의 뾰족한 목소리.

숨을 할딱이는 악소희의 뒤에서 달려오는 악소봉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벌어진 일은 악우궁의 눈이 째지게 만들었다.

“지금 가요, 우리 방에.”

“너희 방에? 거긴 뭣하러?”

“청부 값을 받아야죠, 오빠.”

거침없이 말하는 악소희.

모든 수적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금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야, 됐다. 별로 예쁘지도 않구먼.”

중얼거린 하인이 마르칸에게 소리쳤다.

“그만 가자, 마르칸. 목화루가 괜찮나?”

“코빨개에게 들었으니 그럴 겁니다. 좋다고 하던데요?”

“마침 잘됐다. 빨리 가자.”

그들이 하는 말은 이미 저 멀리 허공에서 들리고 있었다.

“흥! 우릴 놔두고 목화루에 간다고? 어림도 없어. 가자, 언니.”

“응? 그, 그래.”

악소봉의 손을 잡은 악소희가 또다시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그녀의 옹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흥! 남아일언 중천금이지. 반드시 청부 값을 주고 말 테야. 언니, 단단히 맘먹어.”

“응. 아, 알았어.”

피융!

두 여인이 번개처럼 사라져 갔다.

“이게 대체 뭔 소리지? 청부 값은 뭐고, 반드시 준다는 것은 또 뭐야?”

악우궁이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적발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적발개라고 알 수 있겠는가? 그도 영문을 몰라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 * *

태안은 예로부터 공자의 고향으로 유명한 곳이다.

공자의 집안이 자체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으로, 일개 자치국과도 같았다. 그것은 한대에서부터 현재의 명대에 이르기까지 황실에서 공자의 가문을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은 70년 전으로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무황성이 태산에 만들어진 후, 태안의 모든 실권은 공자의 가문에서 떠나갔다. 명색으로는 아직도 공자의 가문이 자치하는 곳이지만, 실상은 무황성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하나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이 있듯, 지금 공자의 가문도 비슷했다.

태안의 북쪽 산기슭에 있는 거대한 장원은 방만 해도 450개가 되고, 아름다운 화원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어딘가 쇠락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 공자의 가문은 황실의 보호로 인해 풍족한 삶을 누렸고, 가주는 180명의 처첩을 거느린, 말 그대로 태안의 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 그들은 숨을 죽이고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꺼리고 있었다. 한 걸음만 나가도 무인들이 활개 치는 곳이 바로 태안이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 보이는 신성한 산인 태산의 정상에 우뚝 선 거대한 성, 그것이 바로 무황성이었다.

그래도 공자묘는 아직까지 무황성이 관활하지 않았다. 이곳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제를 올리기 때문이다.

공자묘의 옆에는 여러 개의 작은 암자가 있다. 바로 공자묘에 제를 올리는 스님들과 비구니들이 있는 곳이었다.

향제암(香祭庵)의 작은 방에서 한 명의 여인이 수심에 잠겨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인이 그렇게도 찾고 있는 염미화 홍자연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그동안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무엇인가 이상해. 왜 사부님께서는 오라버니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까? 왜?’

홍자연에게 문상 하후극영은 사부였다. 그런데 하인이 혈천신교의 후예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에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밖에 나갈 수가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은 태산, 바로 무황성이 있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암자의 비구니들에게 간간이 강호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인이 자신을 구하러 왔다 죽었다는 소식부터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나 무황성 낙양 분타를 괴멸시켰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가 마르칸을 구해 사라졌다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분명 오라버니는 나를 구하러 오고 있어. 이 상태로 있으면 중화 전장은 오라버니와 대결을 하게 될 거야. 그런데 사부님께서는 왜 침묵하고 계시지?’

홍자연은 그것이 의심스러웠다. 일이 제대로 될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면 안 된다는 명령만 받았기에 속이 바질바질 탔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홍자연의 눈이 순간 번쩍 떠졌다.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낀 것이다.

“암화 언니?”

스르륵.

허공에서 진한 갈색 옷을 입은 인영이 내려섰다. 바로 어둠의 꽃, 암화 연자경이었다.

“응, 동생. 내가 왔어.”

“기다렸어요, 언니!”

홍자연이 반색을 하며 연자경의 손을 잡았다. 드디어 밖의 정확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온 것이다.

“언니, 밖은 어때요? 오라버니는 무사해요?”

“넌 그저 은목전왕밖에 없구나.”

“아이, 언니도. 알면서.”

홍자연이 살짝 눈을 흘기자 연자경이 머리를 끄덕이며 얼굴을 감쌌던 두건을 풀었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네.”

그녀가 머리를 흔들자 삼단 같은 머리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대략 30대 초반 정도의 여인. 방 안이 환해질 정도로 아름답고 농익은 여인은 바로 연자경이었다.

“언니, 정말 예뻐요!”

“얘, 네가 말 안 해도 나 고운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예쁘면 뭘 하겠니? 난 이렇게 어둠 속에서 혼자 살다 죽을 운명인걸. 후~”

연자경의 한숨 소리에 홍자연은 그만 가슴이 아파왔다. 여성으로서 온몸을 가리고 어둠 속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는 하후극영의 허락 없이는 시집도 갈 수 없었다. 살수가 연정을 품게 되면 마음이 약해진다고 하여 만든 문상의 율이었다.

“미안해요, 언니. 내 생각만 해서…….”

“아냐, 그 사람은 괜찮아. 하긴, 너무 세서 누가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겠지만. 암튼 네가 걱정하는 그 사람은 아무 탈 없이 중화 전장으로 오고 있어.”

“언니, 그게 사실인가요?”

홍자연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

그가 중화 전장으로 오고 있다면, 자신을 구하러 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만약 사부가 제대로 말하지 않을 경우, 중화 전장에 피바람이 일어날 터였다.

하인의 성격을 잘 아는 홍자연은 다급해졌다.

“안 돼요, 언니! 내가 중화 전장으로 가야겠어. 아니야, 오라버니가 지금 어디로 오고 있는지 알려 줘요. 제가 가서 사실을 말하면 오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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