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상인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한다
외창의 정문이 벌컥 열리고 완전무장한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둘러라! 공주님께서 반역도들에게 납치당하셨다!”
쏟아져 나온 무사들은 황의 경장에 가슴에는 작은 금검이 그려져 있었다.
이들이 바로 황제의 정보 조직이며 반역자들을 색출, 처단하는 외창의 무사들이었다.
정문을 통해 연이어 쏟아져 나오는 무사들은 적게 잡아도 5백 명이 넘는 인원이었고,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싸늘한 살기로 주위가 차갑게 냉각되었다.
“목표는 팽가. 가자!”
“명!”
척척척척.
무사들이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사라지자 대로 옆의 풍화루에서 한 명의 여인이 냉랭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시작되었군. 하지만 너희들은 오늘 잘못 출전하였다.”
대략 40대 중반 정도 된 그녀는 풍만한 몸매에 이지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몸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삼 호, 주군께서는 어디까지 오셨나?”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새벽에 주구점을 출발하였습니다, 지부장님.”
주구점은 북경의 남문 앞에서 불과 10리도 안 되는 곳이고, 팽가까지는 대략 한 시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팽가로 집결하는 적들의 수는 얼마나 되지?”
“금의위가 일천 명, 외창의 무인들이 일천 명, 그리고 북경 군부에서 출발한 군사들이 이천 명가량 됩니다. 한데, 그들을 제외하고 약 삼백 명의 소속을 알 수 없는 자들이 더 팽가로 가고 있습니다.”
허공에서 울리는 대답 소리에 여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놈들은 분명 진야동의 부하들일 것이야. 하지만 놈들은 모두 죽는다.”
그녀의 자신만만한 말소리에 허공에서 근심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지부장님,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군은 겨우 세 명의 부하를 데리고 오고 있습니다. 만약…….”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 삼 호. 주군은 천인. 감히 누가 그분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없다.”
“꿀꺽!”
허공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유령문의 북경 지부장으로, 수십 개의 기루와 주루를 가지고 있는 기녀들의 대모였다.
그녀가 잔잔한 미소를 띠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삼 호, 즉시 주군에게 가라. 그분에게 팽가에 주수연 공주와 홍자연이 있다는 것을 알려라.”
“알겠습니다, 지부장님.”
쓰쓰쓰쓰.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뱀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음이 들렸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여인의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진야동, 이제 너에게도 서서히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기다려라.”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기를 품고 있어 방 안이 차갑게 냉각되었다.
* * *
사보둔은 천진에서 북경으로 가는 관도상에 위치해 있는 작은 마을이다. 우측으로는 관도가 있고, 좌측으로는 운하로 흐르는 지류가 있는 곳.
그래서 경치가 아주 좋은 덕에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 유람객들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보둔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야산.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는 곳에 한 명의 노인이 표표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가 저곳에 있단 말이지?”
“예. 방금 탈명일섬 님도 저곳으로 갔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노인에게 말하는 무인은 무당의 태명단 3조 조장인 여의태였다.
그의 뒤에는 50명의 3조원들이 긴장한 모습으로 검을 잡고 있었다.
정정에서 산동으로 향하던 태명단이 무황성의 전서구를 받은 것은 출발한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전서구에 적힌 명령은 간단했다.
<즉시 산동 동평호에 가서 옥청 진인의 명을 받아 현빙마녀를 척살할 것.
-무황성 군사 제갈만산>
그 바람에 동평호에 도착한 여의태는 옥청 진인과 만났고, 지금껏 한 여인을 추격하고 있었다. 아니, 추격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앞에서 싸우고 있는 무인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여의태는 그것이 의심스러웠다. 대체 무엇 때문에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는단 말인가!
지금 그들이 추격하고 있는 여자는 무황성의 장로이고, 현 무림에 9명밖에 없다는 구주팔기 중의 1명인 현빙마녀 채국연이었다.
채국연.
여인의 몸으로 무림의 하늘이라는 구주팔기에 당당하게 올라선 여인.
그녀는 모든 무림인들에게 꿈의 여인이었다.
한데, 지금 그녀가 무황성의 명으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명의 추격을 받는 그녀가 산동성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보름 동안 수많은 무인들이 산과 계곡에서 무주고혼이 되었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구주팔기 중의 한 명인 것이다.
그 바람에 지금 그녀를 공격하는 무인들은 악에 받칠 대로 받쳐 있었다. 그녀의 무자비한 손속에 동료가, 또는 친구가 얼음덩이로 부서져 죽은 것이다.
하지만 여의태의 의심은 동료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왜 그녀가 무황성의 적이 되었단 말인가! 더구나 옥청 진인은 천천히 그녀를 추격하면서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였다.
그 통에 태명단은 아직 한 명도 죽은 사람이 없지만 여의태의 의문은 깊어만 갔다.
‘대체 옥청 진인의 생각은 무엇인가?’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옥청 진인이 말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옥청은 청력을 높여 저 멀리 보이는 낮은 야산에 집중했다.
“악!”
“으악!”
촹촹촹촹촹.
무인들의 비명 소리, 검과 도가 부딪치는 음향들이 지척인 듯 들려오자 그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물결쳤다.
‘크크크. 채국연, 넌 이제 빠져나갈 곳이 없다.’
옥청은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자신이 원하던 그녀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지금 그는 무당에서 진퇴양난에 처한 상태였다. 귀폭협 사건으로 태극단을 전부 잃어버린 데다 화염탄까지 사용한 것이 무당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 탓에 무당의 장문인과 장로들은 자신을 견원시하며 소환까지 하려 하고 있었다.
그가 산동의 동평호에 와서 흑도의 방파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빙마녀 채국연만 잡으면 무황성의 제갈 군사가 모든 것을 처리해주기로 돼 있었다.
다른 사람은 제갈만산을 잘 모르고 있지만 옥청은 그를 아주 잘 알았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가리지 않는 자,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무당파여. 이제 내가 무당의 주인이 될 것이다.’
옥청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 무림은 무황에 의해 숙청의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리되면 구파일방 중 무황의 의지에 반하는 문파들은 봉문이나 몰살을 당하게 될 것이고, 복종하는 문파만 살아남을 터였다.
지금의 무당은 그런 무황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무당의 완고한 늙은이들을 숙청하고 자신이 장문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자신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단은 채국연을 잡아야 했다. 그의 삶에서 채국연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여자였다.
“조장.”
“예, 장로님.”
여의태가 허리를 굽혔다.
“채국연을 생포한다.”
“예? 죽이지 않고 생포합니까?”
여의태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군사의 서신에는 분명 척살하라고 되어 있었건만, 옥청 진인은 지금 생포를 명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그녀는 지금까지 무림의 안녕을 위해 청춘을 바친 무황성의 장로다.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니 무조건 생포하라. 절대로 그녀가 다치면 안 된다. 알겠는가?”
“명!”
태명단원들이 일제히 외쳤다. 그들은 지금 옥청 진인의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가자!”
팟팟팟팟팟.
옥청과 태명단원들의 신형이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야산을 향해 쏘아졌다.
* * *
스르륵. 척.
관도의 대로에 한 명의 남자가 솟아나듯 나타났다. 검은 복면에 검은 옷, 등에는 검은색의 피풍의까지 걸친, 한마디로 검은색 일색인 남자였다.
“뭐지? 당신은 누구요?”
마차 앞에서 말을 타고 달리던 사자천극(獅子天戟) 용비강이 극(戟)을 잡으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에 저절로 긴장한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전혀 싸울 생각이 없는 듯 허리를 굽히며 포권을 취했다.
“은목전왕 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분이 마차에 계신다면 전해주시겠습니까?”
“은목전왕? 당신은 누구인데…….”
용비강은 흠칫 놀랐다. 그의 눈이 저도 모르게 마차의 옆에서 말을 타고 오는 거대한 덩치의 마르칸에게 쏠렸다. 황금 거북이가 그려진 깃발이 날리는 마차에는 대륙 전장주와 은목전왕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정정에서 곧장 북경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돌아온 것은 대륙 전장주 금적산이 각 지부에 들를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검둥이, 넌 누구지?”
마차의 옆에 있던 마르칸이 커다란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 나서자 검은 피풍의가 조용히 포권을 했다.
-은목전왕 님의 제일 호위인 벽안신장 님을 뵙습니다. 전 유령문의 유령 삼 호로, 북경 지부장님의 연락을 가져온 사람입니다.
피풍의가 전음을 보내자 사나운 기세로 쏘아보던 마르칸의 기세가 조금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자세는 완벽했다. 마차의 앞머리로 약간 나와 있는 그의 위치는 피풍의가 어디를 공격하든 모두 차단할 수 있을 듯했다.
그것을 본 피풍의의 눈에 감탄의 표정이 살짝 스쳤다.
‘역시 벽안신장. 겉은 우직한 것처럼 보여도 무공은 감히 맞설 자가 없다더니!’
“유령문?”
마르칸이 중얼거릴 때였다.
“마르칸, 그자를 데려와.”
마차 안에서 하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예, 주공. 검둥이, 여기로 와라.”
마르칸이 마차의 옆으로 물러서며 팔짱을 꼈다.
드르륵.
곧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눈부신 백의를 입은 하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유령문의 유령 삼 호, 주군을 뵙습니다.”
하인의 모습이 나타나자 피풍의가 허리를 직각으로 꺾었다.
“무슨 일이지?”
-주군, 홍자연 님과 주수연 공주님이…….
3호가 전음으로 말하려는 순간, 하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봐, 여긴 전부 믿을 만한 사람들이야. 그냥 말해.”
“예? 하, 하지만…….”
3호는 깜짝 놀라 마차 안을 들여다보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 안에 대륙 전장주인 금적산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3호가 놀란 것은 하인의 명 때문이었다. 아무리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유령문은 제삼자가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을 전음으로 처리한다. 한데 새로운 주군이 된 하인은 공개적으로 보고할 것을 명하고 있었다.
“너, 지금 주공께서 하신 말씀 못 들었냐? 내가 말하게 해줄까!”
갑자기 옆에서 귀를 울리는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 옆을 보니 마르칸이 마뜩잖은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며 철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3호가 급히 머리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주군. 현재 홍자연 님과 주수연 공주님께서는 팽가에 계십니다.”
“팽가? 자연이가 왜 팽가에 갔지?”
“그건 북경 초씨 가문에서 두 분을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황실에서는 그분들이 팽가에 납치되었다고 발표하였고, 금의위와 외창이 출동하였습니다. 지금쯤 팽가와의 접전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황실? 그럼 진야동의 짓이겠군.”
“예, 주군. 지부장님도 그렇게 알고 계십니다.”
“진야동, 그 불알도 없는 새끼가 빨리 죽으려고 용을 쓰네.”
하얀 백의에 문사건을 쓰고 있어 마치 유생처럼 보이던 하인의 입에서 걸쭉한 말이 쏟아져 나오자 3호는 어이가 없어 하인을 쳐다보았다.
‘과연 이 사람이 그토록 강한 무위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지금 천하에 울리는 은목전왕의 신위는 말 그대로 천인이었다. 하지만 3호가 본 하인은 그저 유생 같은 모습이었다. 이미 생사경의 최후 단계에 오른 하인이었기에 그 어디에도 무를 익힌 흔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 말하는 것은 완전 저잣거리의 무뢰배들 같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하인이 무섭게 격노하고 있다는 것을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보게, 아무래도 진야동 그놈이 무인들을 숙청할 명분을 만들고 있는 것 같네.”
옆에 앉아 있던 금적산이 근심스런 눈으로 하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명분?”
“군부와 관부는 이미 진야동의 명을 거스를 세력이 없어. 놈이 황제의 칙령을 맘대로 사용하기 때문이지.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무인들뿐이네. 만약 무인들까지 없애버리면 세상은 그의 천하가 되네.”
“그게 어때서?”
하인이 금적산을 빤히 바라보며 반문했다. 어차피 세상은 힘 있는 자가 가지기 마련 아닌가? 하인에게는 진야동이 황제를 하든, 주씨가 황제를 하든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지인들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아무 상관이 없었다.
“험험! 지금 황제는 자네의 장인이 될 분이시네.”
금적산은 며칠 동안 하인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상계에서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본 그가 보건대, 하인은 친인들이 위험하지 않다면 태산이 무너져도 꿈쩍도 안 할 사람이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주수연 공주를 들먹인 것이다.
“응? 맞아. 그냥 두면 수연이 섭섭해하겠지?”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나. 누구나 자신의 아버지가 위험해진다면 제일 처음 탓하는 것이 능력 없는 남편이겠지.”
그 말에 하인의 눈초리가 말려 올라가며 금적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진 금적산이 허둥거리며 물었다.
“왜, 왜 그러나?”
“영감, 혹시 나에게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난 진야동만 처리하면 돼. 맞지?”
하인의 말에 금적산은 펄쩍 뛰었다.
“마, 맞네. 진야동만 처리하면 되네.”
그에 머리를 끄덕인 하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놈은 걱정할 것 없어. 밤중에 몰래 들어가서 목을 뚝 따오지, 뭐.”
하인의 말에 금적산은 눈을 치켜떴다. 밤중에 몰래 목을 따온다? 그럼 암살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은 잘 몰라도 금적산은 하인의 능력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원래 절정 고수였던 자신을 단 하루 만에 초절정의 고수로 만든 자가 바로 저 하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하인의 무위는 도저히 측량할 길이 없었고, 그건 하인의 무위가 이미 천의무봉이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태청방의 무인들을 태풍처럼 쓸어버렸겠는가!
“이보게, 그놈이 그렇게 죽으면 정계가 대혼란에 빠지네. 놈의 죄를 세상이 알게 하고 처단해야 관부나 군부가 우리 일에 동조할 걸세. 아니면…….”
“아니면 뭐? 천하가 혼란에 빠진단 말이지? 그건 나하고 상관없잖아. 내가 영감과 약속한 건 놈의 목이야. 어떻게 죽이든 목만 따오면 되는 거지.”
하인이 머리까지 흔들며 말하고는 밖에 있는 마르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마르칸, 저 앞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 같아. 들리지?”
“예, 주공. 웬 피라미 새끼들이 여자 하나를 공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서 입을 막아버리겠습니다.”
“그래, 소란스러워 죽겠네. 가서 좀 조용히 만들어.”
“흐흐. 알겠습니다, 주공.”
말이 끝나는 순간 머리를 숙이고 있던 3호는 깜짝 놀랐다.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마르칸이 마치 포탄이 쏘아지듯 허공으로 솟구쳤기 때문이다.
슈우우.
“으하하! 이놈들, 몸 좀 풀어보자.”
희열에 찬 마르칸의 목소리가 까마득한 멀리에서 들려왔다.
‘대체 주군의 무위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3호는 머리가 멍해졌다.
마르칸은 주군의 제1부하라 알고 있었다. 한데 그런 자의 무위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다면 하인의 무위는?
그는 갑자기 온몸에 솜털이 돋는 것을 느끼며 경악에 찬 눈으로 하인을 쳐다보았다.
‘설마 무극경?’
무극경.
무의 최고봉이라는 경지.
무극경에 도달하면 사람이 아니라 거의 반신과 같은 상태라고 했다. 무를 익혔지만 평범한 범부 같아 보이고,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반신의 경지.
하지만 그건 무림에 전해오는 전설에 불과했다.
머리를 갸웃거리는 3호의 귀에 금적산의 말이 들려왔다.
“이보게, 어차피 황실의 일을 처리할 거라면 좀 깨끗이 해주게. 황실도 따지고 보면 자네 장인 집이네.”
그러자 하인이 머리를 흔들었다.
“영감, 황제에게 귀중한 것이 있을까? 돈이 될 만한 거 말이야. 난 돈이 안 되는 일에는 흥이 나지 않아서 말이지. 아마 진야동 그 새낀 북경의 무림인들을 다 죽일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그래야 명분을 만들 수 있으니까.”
“끄응.”
금적산은 신음을 흘렸다. 하인의 말이 맞다. 진야동은 무림인을 숙청하는 본보기로 북경의 무인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할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엔 전군에 황제의 칙령을 내려 제국의 무인들에 대한 척살령을 내릴 것이 뻔했다.
그럼 힘을 가지고 있는 무인들이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고, 다음은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이것이 진야동의 진정한 속심이었다.
무림과 관, 군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진야동은 황실을 제압하고 현 황제를 퇴위시킬 것이 분명했다.
“얼마면 되겠나?”
금적산의 말에 머리를 숙이고 있던 3호는 흠칫 놀랐다. 갑자기 이 자리에서 돈 문제가 왜 나온단 말인가?
그때 무심한 표정의 하인에게서 말이 흘러나왔다.
“금자로 천만 냥. 이건 수연이를 생각해서 싸게 부른 거야.”
‘커억!’
3호는 그만 황당해졌다. 1천만 냥이라니?
그러나 다음에 들린 말에는 아예 기절할 정도가 되었다.
“알겠네. 금자 천만 냥. 됐는가?”
“흐흐. 코빨개.”
“옛, 주군.”
“들었지? 금자 천만 냥이다. 기록해둬.”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적발개의 우렁찬 대답이 3호의 귀를 때렸다.
“그럼 영감은 뒤따라와. 저 앞의 싸움이 치열한 것 같아. 삼 호, 너는 돌아가서 곧 내가 북경에 도착한다고 전해.”
“명!”
너무도 황당한 나머지 멍해 있던 3호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그럼 나 먼저 간다.”
파앙!
갑자기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3호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자 저 멀리 한 줄기 점이 되어 사라지는 하인의 모습이 보였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경공이다!’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지부장님께 가야 한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야, 차자동, 우리도 가자.”
“예, 비마도룡 님.”
팟팟팟팟팟.
적발개와 차자동이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용비강, 어서 가세.”
“저기, 장주님, 정말 돈을 주려고 하시는 겁니까?”
“자네도 알지 않나? 저 친군 돈을 주지 않으면 황제도 죽일걸.”
“그렇지만 장주님, 지금까지 주기로 한 돈이면 우리 대륙 전장은 거덜이 납니다.”
용비강이 근심스런 눈으로 장주를 바라보았다.
“그래. 하지만 나에게도 다 수가 있다네. 흐흐흐.”
금적산의 눈에 야릇한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수가 있다고?’
용비강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불과 며칠 동안이지만 그가 본 하인은 한번 한다면 무조건 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관인이든 상인이든, 또는 무인이든 돈에 관해서는 양보가 없었다.
한데 무슨 수란 말인가!
그런 그의 머리에 번개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은목전왕은 자신의 여자들에 대해서는 끔찍한 사람이다. 혹시?’
그는 야릇한 웃음을 흘리고 있는 장주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장주가 아연해서 쳐다보는 용비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난 상인이야. 상인은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하지. 크크크.”
그제야 머리를 끄덕인 용비강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역시 장주님이십니다. 흐흐흐.”
“자네 생각도 나와 같은가?”
“예. 장주님은 아주 명석한 해결 방법을 내놓으셨습니다. 흐흐흐.”
용비강의 입에서 음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럼 가세. 이제 우린 천하의 대상단이 될 걸세.”
“옛, 장주님!”
호기롭게 대답하고 돌아선 용비강이 명을 내렸다.
“전속으로 달린다.”
“명.”
관도로 말들이 뿌연 먼지를 말아 올리며 기세 좋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수를 생각했기에 용비강이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그것은 금적산과 용비강, 두 사람만이 알 일이었다.
* * *
“현빙마녀, 네년을 죽여 내 동생의 한을 풀어줄 것이다.”
“죽일 년! 어서 항복해라. 아님 네년은 여기서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
“흐흐흐. 우리에게 항복해라. 이제 네가 갈 곳은 없다.”
낮은 골짜기, 수많은 무인들이 포위망을 서서히 좁히며 악다구니를 써댔다.
골짜기에는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하고 수십 명의 시신들이 너부러져 있었지만, 무인들은 피 냄새 따위에 개의치 않고 오직 현빙마녀 채국연에게만 눈길을 꽂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채국연은 흐려지는 눈을 들어 몰려드는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오는 보름 동안 운기행공을 하여 어느 정도 내상을 회복했던 것이 무색하게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그녀였다.
보름이 지난 날부터 무황성의 명을 받은 수많은 무림인들이 그녀를 추격하였기에 채국연은 단 일각도 쉴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어쩔 수 없이 앞을 막는 무인들을 격살했지만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하북과 천진, 그리고 산동의 문파들과 흑도의 방파들까지 몰려든 탓에 채국연으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이미 내력은 바닥이 났고, 내상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엄중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팽가가 나올 것임에도 불구하고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전서구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팽가는 존주를 도와야 할 숨은 세력. 그런데 자신이 그곳에 연락하면 그들 또한 이 많은 문파와 결전을 해야 할 터. 그렇게 되면 존주를 돕기도 전에 팽가는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도 있었다.
절대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던져 버리는 것이 혈천신교의 무상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내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어차피 죽는 것,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 했다.
“채국연, 그만 항복하라. 성주님께는 내가 잘 말하겠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맘을 돌려라.”
느끼하면서도 탁 갈린 목소리, 바로 탈명일섬 번도출의 목소리였다.
놈의 탐심 어린 눈과 시선이 마주친 채국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그녀는 놈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놈이 바라는 것은 하나, 바로 자신의 몸이었다.
“호호호. 번도출, 더러운 색마! 네놈이나 무황이나 똑같이 더러운 자들이다. 수백만 무인들을 속이고 이 땅에 둥지를 튼 천계의 악마들에게 꼬리 치는 개. 네놈은 꼭 그분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기억해두라.”
채국연의 일성에 번도출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함을 쳤다.
“채국연! 혈천신교의 잔당이 말이 많구나. 무황성은 무림의 정의를 실현하는 단체다. 감히 무황을 천계라는 얼토당토않은 곳과 엮다니. 내 너를 잡아 반드시 무황성으로 압송할 테다. 뭣들 하느냐? 저 계집은 혈천신교의 잔당이며, 무림공적인 은목전왕과 연결된 년이다. 공격하라! 먼저 잡는 무인이나 문파에게 일만 냥의 포상금을 내릴 것이다!”
“우아아! 쳐라!”
“잡아라!”
“포상금은 우리 것이다.”
돈에 눈이 먼 무인들이 맹렬하게 몰려들었다.
이제는 마지막이다. 채국연의 두 손이 새카맣게 물들어갔다.
“오라! 나 채국연의 저승길이 외롭지 않게 한 놈이라도 더 데리고 갈 것이다!”
그녀의 손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검은 기운이 짙은 살기를 띠고 휘둘러졌다.
파란 하늘에 검은빛으로 번들거리는 36개의 손이 나타났다. 채국연의 독문 무공으로, 대성하면 수백 개의 손이 천지를 뒤덮는 흑섬마수(黑閃魔手)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채국연이 사용할 수 있는 한계였다. 내상으로 인해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피하라! 악마의 손이다!”
“젠장, 밀지 마라!”
돈에 눈이 어두워 미친 듯이 몰려들었던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려고 발버둥 쳤지만 뒤에서 밀려오는 무인들 때문에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사신의 손길이 덮쳐들었다.
쩡- 쩌정.
“아악!”
“크윽!”
흑섬마수가 덮친 곳은 참혹했다. 갈가리 찢긴 시신들. 목이 없어진 채 우뚝 서 있는 무인들. 팔다리가 얼음으로 변해 몸부림치는 무인들.
퍽석. 털썩. 투두둑.
각양각색의 음향이 조용한 골짜기를 울렸다.
목이 없어진 것도 모르고 서 있던 무인들이 넘어지는 소리. 뒤늦게 얼어붙었던 팔다리가 깨지는 소리. 이곳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아악! 내 다리! 내 다리 붙여 줘.”
“으악! 팔이 없어졌다!”
무인들의 절규가 울리는 곳의 중심에서 얼굴색이 하얗게 변한 채국연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으흐흐, 이제야 끝났구나. 채국연, 넌 이제 내 것이다.’
무인들의 뒤에 서서 채국연을 주시하고 있던 번도출은 입이 귀까지 쭉 찢어졌다. 그동안 채국연에게 들인 공이 얼마였던가. 지난 세월 동안 계속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구애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이제 채국연은 손안에 든 먹이였다. 무황의 척살 명이 떨어진 이상 데리고 살 수는 없지만 죽기 전에 저 계집을 실컷 농락할 수는 있었다.
어떻게 죽이든 척살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클클클. 채국연, 이제 넌 끝났다.”
그가 기쁨으로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한 발 앞으로 나섰을 때였다.
“탈명일섬, 물러서라.”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
“큭! 이건 또 뭐야?”
번도출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머리를 휘젓는 이 목소리는 내력을 실은 것이었다. 구주팔기인 자신이 놀랄 정도라면 같은 구주팔기가 분명할 터.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개 같은 새끼!’
그는 머리를 홱 돌렸다. 그곳에는 새카만 관(冠)을 쓴 무당의 도인, 옥청 진인이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자넨 옥청이 아닌가? 마침 잘 왔네. 저 배신자를 겨우 잡게 되었네.”
그가 짐짓 웃음을 띠며 하는 말에 옥청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번도출, 조용히 물러나라. 아님 넌 내 손에 죽는다.
-뭣이? 감히 네가 나를 협박하는가? 이 탈명일섬 번도출을!
번도출의 눈에 시뻘건 화광이 이글거렸다. 그것은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짐승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옥청의 얼굴에는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지금까지 채국연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뒤를 따른 것은 바로 이놈 때문이었다.
옥청은 지금까지 전혀 싸우지 않았기에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고, 내력도 충만한 상태였다. 하나 번도출은 부하들을 거의 다 잃은 데다 내력도 많이 손실돼 있었다.
지금 싸움이 붙는다면 백이면 백 옥청의 승리였다.
이래서 늙은 생강이 더 맵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클클클. 번도출, 네가 채국연에게 관심 있는 거 안다. 하지만 나도 양보할 생각은 없다. 넌 지금 지쳤고, 난 쌩쌩하다. 정말 해보자는 것이냐?
‘으음, 이 늙은 여우 같은 놈!’
번도출은 신음을 흘렸다. 놈의 말대로 자신은 이미 지쳤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동안 저 계집을 잡기 위해 들인 노력이 너무도 아까웠다.
-옥청,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옥청이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징그러운 웃음을 띠었다.
-어차피 채국연은 죽어야 하네. 하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승자니 저 계집은 내가 먼저 시식해야겠네. 내 말뜻, 알겠나?
‘으드득!’
이가 부서져라 갈아붙인 번도출은 옥청을 쏘아보았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채국연의 처녀를 가지는 기쁨을 만끽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그녀를 데리고 놀 수는 있다는 소리였다.
번도출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처녀를 갖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어쩌랴? 욕망보다 목숨이 더 귀중한 것을.
-좋아. 며칠인가?
그녀를 며칠 동안 데리고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흐흐, 오 일이네. 그다음은 자네가 처리하게.
‘이런 개자식!’
5일이라니? 채국연을 척살했다는 보고를 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7일이다. 그럼 자신에게는 이틀밖에 시간이 없다는 것과 같았다.
으드득.
이를 간 번도출이 전음을 보냈다.
-좋아. 시간을 어기면 그땐 자네와 생사를 결할 것이네.
-으흐흐, 걱정 말게. 오 일 후에는 자네에게 물려주겠네.
“으드득!”
다시금 이를 갈아붙인 번도출이 한발 물러서자 옥청이 태명단원들을 데리고 앞으로 나섰다.
“채국연, 이제 그만하게. 자네가 혈천신교의 후예이고 무림공적인 은목전왕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이미 판명이 됐네. 자네도 알지 않은가? 은목전왕과 친분이 있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척살 대상이네. 하지만 난 자네를 죽게 만들지 않을 거야. 나와 함께 가면 내가 직접 무황께 말해 자네를 사면시켜 주겠네.”
옥청의 얼굴에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이 어렸다. 함께 온 태명단원들도 안타까운 시선으로 채국연을 바라보았다.
채국연은 다른 여자들처럼 미모로 무림에서 선망의 대상이 된 여자가 아니었다. 순수한 실력으로 무인의 최고봉에 오른 여자. 그래서 그녀를 더욱 존경하는 태명단원들이었다.
“옥청, 넌 이제 짐승이 다 됐구나. 무림을 집어삼키고 황실까지 넘보는 천계의 쫄따구가 그렇게 좋더냐? 아니, 그것이 네 목숨을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참으로 어리석다. 잘 들어라, 옥청, 이제 존주께서 세상에 강림하셨다. 너희들은 그분에게 죽는다. 기다려라.”
채국연의 불같은 말에 옥청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더 이상 놔두면 저 계집이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이미 이곳에 모여든 무인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년! 내 너를 가상히 여겨 살려 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나. 너를 잡아 무황을 비방한 값을 치르게 해주겠다. 공격하라!”
말이 끝나는 순간, 옥청의 손에서 적양신공을 바탕으로 한 오행참마(五行斬魔)가 쏘아졌다.
우르릉!
원래 적양신공은 뜨거움의 무공이다. 검 대신 손으로 펼쳤지만 주위가 화로 속에 들어간 것처럼 뜨거워지고 시뻘건 강기가 여섯 갈래로 펼쳐져 채국연에게 날아갔다.
그녀가 피할 수 있는 모든 범위를 감안한 공격.
옥청은 채국연이 피할 곳을 차단하고 태명단원들이 그녀를 제압하게 할 참이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적양신공의 오행참마가 쏘아지자 채국연은 급히 혈도를 찍었다. 그에 온몸이 달아오르고 진원진기가 폭풍처럼 두 손으로 몰려들었다.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무공, 혈마풍의 최후 수단인 혈풍폭살(血風爆殺)을 시전하려는 것이었다.
혈풍폭살은 적과 동귀어진을 하는 무공으로, 온몸을 폭발시켜 적을 죽이는 무공이었다. 더구나 혈풍폭살에는 독까지 있어 사방 10장 안에 있는 적은 모조리 독에 당해 죽는 무시무시한 자살공이었다.
“그래, 함께 가자. 헛!”
진원진기를 끌어올리던 채국연은 깜짝 놀랐다. 뭔가 허공에서부터 거대한 것이 들이닥치더니 자신의 몸을 냉큼 안아들고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이내 귀청이 드르릉 울리는 목소리가 사방을 진동시켰다.
“남자 새끼들이 연약한 여인을 괴롭히다니, 네놈들은 숨을 쉴 자격이 없구나.”
그리고 울리는 굉음.
콰르릉!
“윽!”
“컥!”
무인들이 귀를 막고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옥청이 쏘아 보낸 오행참마와 괴인이 휘두른 철퇴가 부딪치며 울린 폭음에 고막이 파열될 뻔한 것이다.
“너, 넌 벽안신장?”
채국연을 빼가는 바람에 어이가 없어 허공을 쳐다보던 옥청의 입에서 기겁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하늘에는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한 손에는 철퇴를 쥐고, 다른 손에는 채국연을 안은 채 둥둥 떠 있었다.
“그래, 내가 바로 은목전왕 님의 부하 벽안신장 마르칸이다!”
“헉! 벽안신장이다!”
“저자가 은목전왕의 부하?”
무림인들이 깜짝 놀라 웅성거렸다.
벽안신장 마르칸.
색목인으로, 은목전왕의 가장 충실한 부하라는 그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하였다. 바로 은목전왕의 출현!
사람들의 눈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실수다. 무인들이 겁을 먹고 있어!’
옥청은 이를 부드득 갈며 급히 내력을 끌어올려 기의 파동을 감지해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순간적으로 공포의 감정이 어렸다. 저 멀리서부터 쏘아져 오는 미세한 파장. 이건 분명 누군가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강자가…….
‘이 정도의 속도로 올 자는 분명 그놈밖에 없다!’
옥청은 찰나지만 망설였다. 지금 도망치면 살 순 있으나 그렇게 되면 저 계집은 영영 품에 안지 못할 것이다. 그에 번도출에게 급히 전음을 보냈다.
-이봐, 자네도 느꼈지?
잔뜩 굳은 얼굴의 번도출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우리 합공하세. 그럼 놈이 오기 전에 채국연을 빼앗을 수 있어.
옥청의 말에 굳어졌던 번도출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들은 구주팔기. 벽안신장 마르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자신들의 적수는 되지 못한다. 그런 데다 둘이 합공한다면 놈은 단 1초도 버틸 수 없을 것이 자명했다.
‘그래, 일단 계집을 빼앗아서 도망치는 것이야.’
마음이 통한 둘은 곧 내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옥청이나 번도출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지금의 마르칸은 예전의 마르칸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신안천수를 먹고 하인에게 추궁과혈을 받은 후 초극의 고수가 되어 있는 상태. 둘이 달려든다 해도 채국연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색욕에 눈이 뒤집힌 둘은 아직도 마르칸을 귀폭협에서 만났을 때와 같이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뒈져라, 오랑캐 새끼!”
“감히 우리를 막은 죄다!”
쏴아아아!
번도출과 옥청의 검이 순식간에 뽑혔고, 둘의 성명절기인 절혼광섬(折魂光閃)과 오행광격(五行光擊)이 하늘을 덮으며 쏘아졌다.
하지만 허공에 떠 있는 마르칸은 태연했다.
이미 구주팔기보다 한 수 위인 그로서는 옥청과 번도출의 공격이 가소로웠다.
“무황의 졸개들. 네놈들의 목은 내가 갖는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이곳에 모인 무인들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콰콰콰콰콰!
그것은 검은 해일이었다. 하늘 가득 새카만 철퇴가 뒤덮이더니 날아오는 두 사람의 강기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펑펑펑펑펑!
“으헛, 피하라!”
“강기의 파편이다!”
넋을 잃고 구주팔기의 공격을 바라보던 무인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개미처럼 흩어졌다. 붉은빛과 검은빛의 강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인들이 아무리 빨라도 강기만큼 빠를 수는 없었다.
퍽퍽퍽퍽.
“컥!”
“아이고!”
달아나던 무인들이 강기의 파편에 맥없이 나뒹굴었다. 그러나 겨우 도망친 무인들은 숨을 헐떡이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무림의 최고수들이라는 구주팔기의 격돌 장면은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죽어라, 이놈!”
“그녀를 내놔라!”
어느새 마르칸의 3장 앞에까지 도달한 번도출과 옥청이 두 손을 갈퀴처럼 벌리며 날아들었다. 그들은 마르칸이 자신들의 합공을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멍청한 영감들.”
비릿한 미소를 흘린 마르칸의 철퇴가 손에서 떠났다.
슈아아아!
“엇! 이, 이것은 이기어극?”
맹렬하게 쏘아지던 번도출이 질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하나 너무 늦었다. 겨우 3장 안의 거리에서 그가 피할 길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콰드득.
“끄악!”
허공에 떠서 쏘아지던 번도출의 머리가 철퇴에 맞아 폭발하며 피와 뇌수가 폭죽처럼 터져 버렸다.
“어, 어떻게…….”
너무도 순간적인 공격에 온몸이 굳어졌던 옥청이 눈앞으로 들이닥치는 강력한 기파에 급히 몸을 비틀었다.
“이놈! 감히 오랑캐 주제에… 윽!”
급하게 도망치려던 옥청은 숨이 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그의 목은 마르칸의 솥뚜껑 같은 손에 잡혀 있었다.
“쌍놈의 영감! 오랑캐의 맛을 봐라.”
금강마라수(金剛魔羅手)로 옥청의 목을 잡은 마르칸이 히쭉 웃더니 사정없이 힘을 주었다.
옥청은 기겁했다. 목을 조여 오는 엄청난 악력.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마르칸의 무심한 눈빛이었다.
‘나, 나를 죽이려고 해.’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하지만 목이 꽉 잡혀 있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네놈이 귀폭협에서 화염탄으로 주군을 공격했다지? 주군의 적은 모두 내 손에 죽는다.”
마르칸이 옥청의 목을 나뭇가지 꺾듯 비틀어버렸다.
우두둑.
“끄, 끄극.”
옥청의 목이 축 늘어지고 허연 거품을 문 혓바닥이 개처럼 길게 밀려 나왔다. 무림을 진동시키던 구주팔기치고는 너무도 처참한 죽음이었다.
철썩.
옥청의 시신을 집어 던진 마르칸의 등잔 같은 커다란 눈이 무인들을 쓰윽 훑어보았다.
흠칫.
무인들은 마르칸의 눈이 자신들을 훑고 지나가자 몸을 떨었다. 세상에, 이게 현실이란 말인가?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그들은 몸을 떨고 있었다.
벽안신장, 벽안신장하고 무림에 소문이 나긴 했지만 저 정도의 고수일 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은 똑똑히 보았다. 2명의 구주팔기가 합공을 하고도 단 일각을 버티지 못한 채 1명은 머리가 박살이 나서 죽고, 다른 한 명은 목이 부러져 죽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일이었지만 이것은 실제 상황이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난 은목전왕 님의 부하다. 주군은 소란스러운 것을 무척 싫어하시지. 또다시 소란을 일으키는 자는 저놈들처럼 죽는다. 조용히 하란 말이다!”
그렇게 말한 마르칸이 돌아섰지만 감히 누구도 막으려는 자가 없었다. 너무도 압도적인 무위에 기가 질려 버린 것이다. 하긴, 구주팔기의 2명을 손쉽게 꺾어버린 마르칸에게 덤비는 것은 죽여 달라고 목을 들이미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누가 달려들겠는가?
조용해진 골짜기에서 마르칸이 걸어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 사람, 대단해!’
마르칸의 품속에 안긴 채국연은 감탄하며 안도의 숨을 들이켰다. 마르칸이 이곳에 왔다는 것은 자신의 주군인 하인이 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 그분을 뵙게 됐어, 드디어!’
이제야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줄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의 긴장이 풀린 채국연의 코로 마르칸의 땀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약간 시큼털털하면서도 억센 사내의 냄새였다. 그녀의 일생에 처음으로 안긴 남자의 품이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마음이 안정되었다.
‘자고 싶어.’
그녀의 눈이 사르르 감겼다.
* * *
차거현.
1천 년의 전통을 가진 중원 칠대세가의 하나가 있는 곳, 바로 도의 가문인 팽가가 있는 곳이었다.
팽가가 이곳에 있는 덕에 흑도의 불량배들이나 다른 문파가 얼씬도 못했기 때문에 차거현은 관보다 팽가의 위엄이 더 강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들로 흥청거리던 차거현이 오늘은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으로 덮여 있었다.
“말해보게, 우리가 어떻게 할지.”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고 눈이 부리부리한 사람이 둘러앉은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며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머리는 검은 머리칼이 하나도 없는 순백색이었다.
이제는 아들에게 가주직을 물려주고 혈림에 은거하고 있는 전대 가주로, 가문의 생사가 달린 일이 아니라면 절대로 나서지 않는 천력도(天力刀) 팽거창이었다.
30년 전, 마씨세가를 몰살시키고 천하를 향해 일갈함으로써 팽가의 기상을 천하에 알렸던 영웅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태상가주님, 생각할 것이 뭐 있습니까? 우리 팽가는 건드리면 그에 상응한 값을 치러주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방 안에 둘러앉은 사람들 중 노인 한 명이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하는 말에 다른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클클클, 부대주님의 말이 맞습니다. 외창이든 금의위든 팽가를 공격하면 모두 죽여 버립시다.”
“흐흐흐, 그렇지 않아도 내 도가 피를 원하고 있었는데 차라리 잘됐습니다.”
마치 천하에 적이 없다는 식으로 태연한 노인들의 말에 현 팽가의 가주인 잔혈도(殘血刀) 팽도웅이 주먹을 불끈 쥐며 빠르게 천력도 팽거창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장로님들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 팽가가 언제 적에게 굴복한 적 있습니까? 아무리 외창이나 금의위라고 해도 우린 팽가입니다. 더구나 지금의 우리는 삼십 년 전의 팽가가 아닙니다. 모두 쓸어버려야 합니다.”
잔혈도 팽도웅, 현재 나이 45세. 그의 성격은 불같았고, 적이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10년 전, 만리장성을 넘은 내몽고의 혈랑대가 하북의 북방을 휩쓴 적이 있었다. 그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말 그대로 이리들이었다. 혈랑대는 무인이든 관군이든, 또는 양민이든 앞을 막는 자들은 가차 없이 목을 잘랐다.
황실에서 급하게 관군들로 막아섰지만 혈랑대는 관군이 막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무위는 엄청났고, 관군의 목은 나뭇잎처럼 떨어졌었다.
하북의 북방은 한마디로 살육과 죽음의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몰려온 곳이 바로 차거현이었다.
그때 팽도웅은 팽가의 무인들을 데리고 그들을 맞받아나갔다. 그리고… 혈랑대는 처음으로 팽가의 무지막지한 도를 겪어야 했다.
당시 팽도웅은 혈랑대를 몰살시킨 데 이어 그들을 따라다니던 혈랑대의 가솔들까지 모조리 찍어 죽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하북팽가의 팽도웅을 잔혈도라 부르게 되었다.
잔혈도.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팽가의 앞을 막는 자는 살려 두지 않는다!
이것이 현 가주 팽도웅의 의지였다.
팽거창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팽거창은 눈을 감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험험! 하지만 태상가주님,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명을 받는 금의위와 외창입니다. 그들을 치면 명군이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황실의 주수연 공주를 내놓고 그 홍자연이라는 여자를 넘겨주면 됩니다.”
이견을 내놓은 것은 팽거창의 동생인 쌍철쾌(雙鐵?) 팽거교였다.
팽거교는 명호에서 알 수 있듯 쇠로 만든 젓가락을 무기로 쓰는 자로, 도를 기본으로 하는 팽가에서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쌍철쾌는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무공이었다. 지금도 그의 온몸에는 작은 젓가락이 수백 개나 꽂혀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홍자연을 내놓자는 말입니까? 우리 팽가에 도움을 바라고 들어온 사람을!”
팽거교의 말에 팽도웅이 눈을 부릅떴다. 그로서는 어이가 없는 것이다. 지금 공주라는 주수연은 부상을 입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딸인 팽비연은 집에 도착한 후 잠에 빠져들어서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의원의 말에 의하면 팽비연은 천일몽침이라는 침에 맞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팽도웅은 분노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팽거교가 분노로 펄펄 뛰는 팽도웅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주님, 현명한 자는 나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물러서야 할 때입니다. 우리 팽가가 어떤 가문입니까? 지난 칠십 년 동안 무황성의 치하에서도 꿋꿋이 홀로 선 가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때와 달리 가장 강성해지긴 했지만 상대는 국가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한때의 굴욕은 참고 물러서야 합니다.”
팽거교는 마치 스승이 아이를 가르치는 것처럼 팽도웅에게 말했지만 팽도웅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 팽가를 포위하고 있는 자들이 황실의 명을 받았다고 해도 꺾이면 꺾였지 절대 굽힐 수 없는 팽도웅이었다.
“안 됩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팽가는 비겁하게 우릴 믿고 온 사람들을 내줄 수 없습니다. 절대로! 더구나 그 여인은 은목전왕의 여자라고 했습니다. 그녀를 내놓으면 무림인들은 우리 팽가를 손가락질할 것이고, 팽가의 전통은 땅에 떨어질 겁니다.”
팽도웅의 말에 팽거교가 벌컥 화를 냈다.
“가주, 정신 차리게. 그깟 전통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가주란 가문의 안위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 그걸 모른단 말인가!”
그때였다. 지금까지 눈을 감고 아무런 말도 없던 팽거창의 입에서 낮으나 차가운 말이 흘러나왔다.
“거교야, 네가 가주냐, 아니면 도웅이 가주냐?”
“혀, 형님, 난 그저 가문이 걱정돼서…….”
“닥쳐라! 이곳은 공식 석상이다. 네가 감히 가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냐?”
팽거창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쏟아졌다.
휘리링. 휘링.
팍삭. 팍팍팍.
방 안에 있던 집기들이 엄청난 압력에 부서지고 가루로 흩어졌다.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가공할 기운이었다.
“으으… 자, 잘못했습니다, 태상가주님.”
“가주는 팽가의 근본이다. 그가 설사 잘못했다고 해도 가주의 말은 곧 법이다. 또다시 가주의 권위에 도전한다면 널 팽가의 율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예예.”
팽거교의 등으로 진땀이 흘러내렸다. 역시 팽거창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으음. 형님, 아무리 그래도 팽가는 더 이상 힘듭니다. 대세를 읽지 못하면 더는 존재할 수 없단 말입니다.’
이를 악문 팽거교의 눈이 암흑의 새카만 기운으로 번들거렸지만 너무도 순간적이라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다시 눈을 감은 팽거창은 머리가 아팠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홍자연의 처우 문제였다. 실상 밖에서는 공주를 납치했다 하고 있지만, 주수연 공주가 깨어나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테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바로 홍자연이라는 여인이었다.
홍자연, 은목전왕의 여자. 바로 그것이 팽거창이 결심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변수였다.
강호에서 은목전왕은 혈천신교의 후예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현 가주인 팽도웅도 모르고 있지만, 팽가는 혈천신교 존주의 비밀 무사들인 천호단이 아닌가?
정말 은목전왕이 존주라면, 그렇다면 존주의 여인인 홍자연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다. 설사 팽가가 몰살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무상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소식도 없었다.
‘후~ 난감한 일이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였다. 눈을 감고 있는 팽거창의 귀로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단주님, 천령입니다.
천령.
천호단의 비밀 정보원들이 바로 천령들이었다.
30년 전, 마씨세가 사건 때 정보의 중요성을 절감한 팽거창이 만든 어둠의 그림자들.
-무슨 일이냐?
-북경성에서 무인들에 대한 척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북경의 삼대 장군가 중에서 도민부의 관군이 무림 문파를 모조리 공격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팽거창의 굵은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이제는 알 만했다. 진야동은 이번 기회로 무인들을 몰살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모두 들어라.”
“옛, 태상가주님!”
방 안에 모여 있던 50여 명의 장로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이들은 장로들로 만들어진 멸살대의 대원들이다. 바로 천호단의 중추인물들인 것이다. 나머지 5명은 팽가의 무력 단체인 홍살대, 청살대, 은살대, 백살대, 흑살대의 대주들이었다.
각각 1백 명으로 구성된 무인들의 대. 지금의 팽가는 이미 30년 전의 그 팽가가 아니었다. 모두 일류나 절정으로 구성된 5개 대는 관군 5천 명 정도는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는 무인들이었다.
“우린 무인들이다. 그리고 은목전왕은 우리와 남이 아니다.”
“형… 아니, 태상가주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이 아니라니요?”
깜짝 놀란 팽거교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지만 팽거창은 그 물음에 답변을 주지 않았다.
“지금은 알려 줄 수 없다. 다만, 이것만은 알아둬라. 우리 팽가는 도움을 바라고 들어온 무인을 정당한 명분 없이 관군에게 넘겨줄 수 없다. 지금 즉시 전투 준비를 하라. 이건 태상가주로서 내리는 명이다.”
“명! 태상가주님의 명을 받습니다.”
50명의 장로들, 멸살대원들이 일제히 복창하고…
“명.”
나머지 5대의 대주들이 일제히 외쳤다.
‘그렇단 말이지? 은목전왕 그자가 외인이 아니란 말이지?’
머리를 숙이고 있는 팽거교의 눈에 새카만 암흑이 짙어졌다.
“가주, 관군에서 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
“두 시진을 줬으니 이제 반 시진 정도 남았습니다.”
반 시진이면 어둠이 깃들 것이다. 밤이 되어도 공격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준비는 철저히 해야 했다.
“좋아. 팽가의 기개를 보여 준다. 이 시간부터 총동원령을 내린다.”
“알겠습니다, 아버… 아니, 태상가주님.”
둥둥둥둥둥.
조용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팽가에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총동원령이었다.
“서둘러라. 전투 준비를 갖춰라.”
“각 대는 위치로!”
대주들의 고함 소리,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 무인들이 달려 다니는 발걸음 소리로 팽가가 발칵 뒤집어졌다.
* * *
척척척척.
북경의 서문로에 위치한 소월보의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위사 장개는 질서 정연하게 다가오는 관군을 보고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지?”
다가오는 관군은 창과 방패를 든 데다 궁수들까지 포함돼 있어 완전무장 차림이었다.
원래 북경은 천자(天子)가 있는 곳이기에 군인들이 저렇게 완전무장하고 시내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다가오는 저들은 분명 당장이라도 전쟁을 치를 태세였다.
“그러고 보니 저들은 도민부 장군가에 소속된 군인들이잖아?”
맨 앞줄에 있는 방패를 든 군인들의 군복에 누런 주먹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장개의 눈에 확연히 보였다.
북경에는 3대 장군가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