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혈천의 율법
하인의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들었던 연자경이 살며시 눈을 떴다.
한참 동안 누운 자세로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부드럽고 탄탄한 팔, 봉긋한 가슴을 쥐고 있는 손. 이제야 자신이 하인의 품에 안겨 있다는 현실로 돌아왔다.
몸이 날아갈 것같이 가볍고 기운이 넘쳐난다!
일순 연자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람 죽이는 방법밖에 모르던 그녀는 어젯밤의 일이 떠오르자 부끄럽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그의 품에 안겨 희열에 몸부림치고 몇 번이나 까무러치며 울던 생각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그래도 마음은 날아갈 것처럼 기뻤고, 그런 행복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까울 것 같지 않았다.
홍시같이 빨갛게 상기된 연자경의 얼굴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다정한 기운이 물결쳤다.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잠든 하인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하인, 난 이제 당신의 여자야. 다시는 죽음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게. 죽는 순간까지 이 연자경, 당신의 품에서 죽고 싶어.’
그것은 커다란 변화였다. 살심과 딱딱하게 마른 감정만을 가지고 살던 그녀에게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긴 것이다. 이제 중화 전장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하인이 곁에만 있어준다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그녀였다.
사르르.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홍자연이 깨어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홍자연이 하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한편으로는 홍자연에게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다.
‘어마!’
자리에서 일어선 연자경은 자신의 알몸을 보고는 비명이 터지는 입을 막았다. 기름을 바른 것처럼 매끈거리던 자신의 몸 여기저기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고 하체에서는 아직도 쾌락의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 왔다.
연자경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는 하인을 흘낏 쳐다보았다.
‘나의 사랑, 잘 자요!’
입속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옷을 입고 문밖에 나섰다.
삐걱.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아직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호~ 됐어!”
그제야 툇마루에 나선 그녀는 순식간에 경공을 펼쳐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숨어서 그녀를 몰래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스르르.
연자경이 사라지자 지붕 위에서 한 명의 여인이 바람이 날리듯 내려섰다. 바로 염미화 홍자연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은 밤새 잠을 못 잔 것처럼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랬다. 홍자연은 밤새 지붕 위에서 하인을 원망하며 한잠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오라버니, 어떻게… 어떻게…….’
그녀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홍자연은 서럽고 분했다. 결코 연자경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연자경이 하인의 품에 안겨서도 아니었다. 그녀가 가슴이 쓰리고 아픈 것은 하인의 태도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 세상은 공평한 세상이 아니다. 하인 같은 사람에게 여인들이 많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고, 자신 혼자 그를 독차지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연자경은 만난 지 불과 이틀째이고, 자신은 처음부터 하인과 함께한 여자가 아닌가? 그런데 자신은 동생에 불과하고 연자경은 하인의 여자가 됐다는 것이 쓰리도록 가슴이 아팠다.
“오라버니, 이 홍자연… 더 이상 당신 곁에 머물지 못합니다. 난 떠나겠어요.”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홍자연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씻을 생각도 못하고 정처 없이 걸을 때였다.
“아니, 홍 언니, 무슨 일 있어요?”
말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주수연이었다.
그녀를 보자 홍자연은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밀려 올라오며 서러움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수연 동생… 으아앙!”
그녀는 주수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터뜨렸다. 서럽다. 그리고 이 감정을 터뜨리지 않고는 죽을 것 같았다. 그러다 주수연을 보니 그녀가 자신의 동생뻘이라는 생각도 잊고 그저 한 여인으로서 몸부림칠 뿐이었다.
“괜찮아, 언니.”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던 주수연의 눈이 뾰족해지더니 하인의 방을 쏘아보았다.
‘바보 같은 오빠. 홍 언니를 울리다니!’
주수연은 이미 어젯밤의 일을 알고 있었다. 연자경이 아무리 기척을 숨기고 하인과 몸을 섞었다 해도 주수연이나 홍자연 모두 초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하인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억눌린 듯한 여인의 신음과 환희의 소리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사실 어젯밤엔 주수연도 분했었다. 자신부터 찾지 않고 연자경과 함께 있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 홍자연을 보니 오히려 그녀가 가엾어졌다. 자신은 이미 하인의 여자지만 홍자연은 아직도 하인의 여자가 되지 못했다. 오랫동안 홍자연이 하인을 사랑하고 갈망했다는 것을 주수연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하인이 더욱 미웠다.
‘바보. 멍청이.’
주수연은 황실의 공주로 있으면서 수많은 궁녀들을 보았다. 궁녀들은 황제의 사랑을 단 한 번이라도 받기 위해 언제나 몸을 정갈하게 하고 기다린다. 그러나 수천 명의 궁녀들이 황제의 사랑을 받을 기회는 천 번 중의 한 번밖에 없었다. 어떤 궁녀는 평생 황제의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홍자연의 심정을 더 잘 이해하는 주수연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어.’
속으로 결심을 다진 주수연이 홍자연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언니, 오빠 때문에 그러죠?
눈물을 흘리던 홍자연이 뚝 그쳤다.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주수연보다 나이가 더 많은 언니가 아닌가? 그런데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그녀가 몸을 떼려고 할 때였다.
-언니,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했어요. 궁녀들은 황제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과감하게 몸을 던져요. 목숨을 걸고요.
그녀의 말에 홍자연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주수연을 바라보았다. 이미 눈물은 마른 지 오래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쉿.”
입술에 손가락을 댄 주수연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언니, 오빠에겐 신안천수가 있고 음양천락환체대법(陰陽天樂歡體大法)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걸 이용해요.
주수연의 말에 홍자연은 멍해졌다. 신안천수가 하인에게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음양천락환체대법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명칭을 보니 분명 색공 같은데 그런 것으로 하인의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하인의 진정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홍자연의 눈이 매서워졌다.
-수연,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아무리 수연 동생이라도 오라버니에게 그런 수치스러운 짓을 하는 것은 내가 용서 못해.
-호호호. 홍 언니, 그게 아니에요. 음양천락환체대법은 부부만이 할 수 있는 무공이고, 그것을 시행하면 언니는 단번에 초극의 고수로 진입할 수 있어요. 나도 이미 했지만 그땐 신안천수가 없었거든요. 뭐, 언니가 싫다면 내가 해야죠.
-그, 그게 사실이야?
주수연이 머리를 돌리자 홍자연은 급해졌다. 그것을 시전하면 초극의 고수가 될 수 있다지 않은가? 안 그래도 무공 수위 때문에 고민이 많던 그녀였다.
사실 하인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홍자연은 무림을 독보하며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당하고 보니 무림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지계나 천계의 무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수들. 하인의 곁에 있으려면 일단 강해져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하인에게 짐이 될 뿐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짐이 된다는 것은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싫은 일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부부만이 할 수 있다지 않은가! 이건 꿩 먹고 알 먹고 둥지까지 털어 불 때는 격이었다.
-수연! 저, 정말이지?
홍자연은 붉어지는 얼굴로도 다급하게 물었다.
-정말이라니까요. 아마 연 언니도 그거 했을걸요?
-그, 그럼 그 언니도 초극 고수?
-당연하죠.
-어떡하지?
홍자연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것을 보는 주수연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방실거렸다.
-언니, 이렇게 해요.
-어떻게?
주수연이 전음을 보내기 시작했고, 홍자연은 연방 머리를 까딱거렸다.
-알았어. 수연 동생, 정말 고마워.
-호호. 고맙긴요, 우린 자매잖아요.
주수연의 말에 홍자연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우린 자매야. 오라버니를 매개체로 묶인 자매!’
홍자연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주수연을 따라 경공을 전개했다.
그녀들이 사라지자 커다란 나무에서 2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바로 하북팽가의 전대 가주인 팽거창과 현 가주인 팽도웅이었다.
“너도 봤지?”
“예, 아버님.”
아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팽거창은 하인이 자고 있는 별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젯밤 연자경이 하인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들과 함께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비연이 임독양맥을 타통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우주만상도를 익히기는 어렵다. 방법은…….’
팽거창은 주군인 하인의 능력에 감탄했었다. 아니, 감탄한 정도가 아니라 매료되어 있었다. 더구나 오늘 아침 하인의 방에서 나오는 연자경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몸에 은은히 흐르는 외기(外氣)는 분명 초극의 고수만이 풍길 수 있는 절대의 기운이었다.
단 하룻밤에 초극의 고수가 된다!
이건 고금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인과 그녀가 한 일이라곤 둘이 잠을 잔 것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주군인 하인에게는 뭔가 남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아.”
“예, 아버님.”
비장한 각오가 어린 것 같은 팽거창의 부름에 팽도웅은 재빨리 대답했다. 아버지가 저런 음성으로 말할 때는 뭔가 단단한 각오를 했을 때였다.
“그녀는 이제 초극의 고수가 되었다. 이제 연자경은… 아니, 주모는 암살의 황제다.”
“예,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팽도웅은 아버지의 말에 긍정했다. 분명 비정상이지만 사실이 그러니 어쩌겠는가?
“우주만상도 말이다, 반드시 익혀야 할 우리 가문의 절대적인 숙명이다. 그래야 도의 제일 가문이 팽가라는 것을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것이야. 그러자면.”
“그러자면?”
아버지의 말을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던 팽도웅이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 아버지, 어떻게 하시려고…….”
“우리 비연이를 던지자.”
“예? 던지다니요? 어디로요?”
깜짝 놀란 팽도웅이 떨떠름하게 팽거창을 쳐다보았다. 대체 자신의 딸을 어디로 던진단 말인가?
“어디긴? 주군에게 던져야지.”
팽거창의 말에 팽도웅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아니, 주군이 던진다고 받겠는가?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아버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주군이 고맙다며 받겠습니까? 비연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쯧쯧, 이래서 사람은 살아온 연륜이 있어야 한다니. 잘 들어라, 아들아.”
“예, 아버님. 귀를 씻고 듣지요.”
주위를 둘러본 팽거창이 전음으로 뭔가 쑥덕거리기 시작하였고, 팽도웅은 연방 머리를 끄덕였다.
“어떠냐, 아들아?”
다 말한 팽거창이 흡족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과연 아버님이십니다. 알겠습니다. 흐흐흐.”
팽도웅이 아버지를 쳐다보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대체 부자간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까?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알 일이었다.
* * *
“으아, 잘 잤다!”
“흥, 그렇겠죠.”
“엉?”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잠을 잔 하인은 여인의 앙칼진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침대 끝머리에 그린 듯이 서 있는 것은 주수연이 아닌가? 한데 그녀가 자신을 죽일 듯한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제길, 내가 너무 긴장을 풀었군!’
하인의 은천만상신공은 잠을 자든 길을 걷든 언제나 몸을 회전한다. 그 때문에 언제 어느 때든 적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주인에게 적의 출현을 알려 준다. 하지만 하인은 어젯밤 모든 감각을 차단해버렸다. 이곳은 천호단의 기지. 이미 한 차례 접전이 끝났기에 당분간 진야동은 이곳에 침입할 수 없다는 생각에 편히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수연이 쏘아보자 그만 찔끔해졌다. 도적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있듯이 어젯밤 연자경을 안은 사실을 그녀가 알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젯밤, 기분 좋았어요?”
아닐세라 주수연의 입에서 매몰찬 소리가 튀어나왔다.
‘젠장! 알아버렸군.’
하인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잤더니 피곤이 쫙 풀렸어.”
천연스런 하인의 대답에 가까이 다가온 주수연이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래요? 부인이 옆에 있는데 다른 여자를 품으니 기분이 좋단 말이죠?”
‘아이고, 들켰네!’
하인은 이제 우겨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럴 때는 그저 비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주수연이 연자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여인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질투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수연, 미안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 어쩌다 보니 때문에 홍 언니가 떠나려고 해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뭐! 홍 매가 떠나? 왜?”
하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자신이 연자경을 안았는데 왜 홍자연이 떠난단 말인가?
눈이 휘둥그레진 하인을 보며 주수연은 혀를 찼다.
“정말 홍 언니 마음을 모르고 있었어요? 아님 알면서도 모르쇠를 하는 건가요?”
주수연이 쏘아붙이는 말에 하인은 멍해졌다.
‘홍 매가!’
하인도 홍자연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녀를 만나서 지금까지. 하지만 그녀를 품지 않은 것은 아끼고 싶었기 때문이고, 또 아직 그럴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사랑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떠나겠단다. 절대로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안 돼. 홍 매는 지금 어디에 있어?”
“그냥 가려고요?”
“그래. 홍 매가 떠나지 못하도록 잡아야지.”
하인의 말에 주수연이 피식 웃고는 하인의 뺨을 잡아당겼다.
“아이참~ 서방님, 그렇게 하면 여자는 더 뿔이 돋는답니다.”
혀를 찬 주수연은 하인의 귀에 대고 한참 뭔가를 말했다.
“그렇군. 알았어, 수연. 그대는 정말 마음이 고운 여자야. 사랑해.”
쪼옥~
하인의 입술이 주수연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지고는 휭하니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야속하신 분. 나도 여자랍니다. 질투의 감정도, 당신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여자예요. 하지만,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요.’
머리를 들어 푸른 하늘을 쳐다보는 주수연의 호수 같은 눈에 가랑가랑 눈물이 고였다. 그것은 슬퍼서 우는 눈물이 아니라 하인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재삼 확인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며 하인이 들어서자 옷을 입고 짐을 꾸리던 홍자연이 새침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오라버니, 여긴 여자 방이에요. 문 두드리는 법도 잊었나요?”
그러자 하인이 히쭉 웃었다.
“어, 어디 가려고?”
“이제 나 같은 건 필요 없잖아요? 그동안 오라버니의 배려에 감사드려요. 언제든 제가 이 무림에서 살아남으면 그 은혜는 꼭 갚겠어요.”
그녀는 처연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에는 작은 보따리를 쥐고.
“하하. 홍 매, 갈 때 가더라도 한 가지는 하고 가.”
“뭐, 뭘요?”
일순 홍자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미 주수연과 약속했기에 하인이 말하는 하고 가라는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모른 척하려고 해도 처녀인 그녀로서는 얼굴이 화끈거릴 수밖에 없었다.
“밖은 위험해. 지계의 놈들이 홍 매를 잡으려고 하거든. 그런데 지금 홍 매의 무공은 너무 낮아.”
“됐어요. 내 몸은 내가 잘 알아요.”
홍자연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하인이 그녀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이것 놓… 읍!”
소리치려던 홍자연은 하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치는 바람에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온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바르르 떨렸다. 평생 처음으로 맞이하는 남자의 입술, 그것도 그렇게 애타게 갈망하던 하인의 입술이었다.
온몸의 신경이 입술로 모인 것 같고 머리가 하얗게 변해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녀의 몸이 스르르 하인의 품에 쓰러졌다.
‘아아, 오라버니!’
말할 기운도, 다리에 힘을 줄 기운도 없었다. 뇌리에서 하얀빛이 터지고 몸은 용암 속에 빠진 것처럼 열이 났다.
하인이 그녀를 번쩍 안아들더니 침대로 가져다 눕히고는 더욱 강하게 입술을 빨았다.
숨이 차서 할딱거리던 홍자연은 색다른 감각에 흠칫했다. 벌어진 자신의 입으로 뜨겁고 뭉클거리는 것이 한입 가득 밀려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을 아찔하게 하는 환희였다.
‘죽을 것 같아!’
홍자연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드디어 하인의 품에 안겼다는 희열로, 이제 하인이 자신의 것이라는 기쁨으로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때 하인의 큼직한 두 손이 거침없이 옷을 벗기고 자신의 몸을 만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각이었다.
이 순간, 홍자연은 하인의 손이 신의 손길 같다고 생각되었다. 그의 손이 누비는 몸의 모든 곳에서 짜릿하면서도 아득한 쾌감이 일어나고 자신도 모르게 몸이 들썩거려졌다.
“아아, 오라버니……. 난 몰라!”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잊고 거침없는 탄성을 뿜어냈다. 지금까지 참고 참았던 욕망이, 희열이 폭발한 것이다.
하인은 몸을 비틀며 들썩이는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이내 홍자연과 한몸이 되었다.
“아앗!”
홍자연의 입에서 깜짝 놀란, 기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하인은 단내가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버리고는 서서히 진퇴를 시작했다.
“읍… 읍… 읍!”
흔들리는 침상이 삐걱거리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홍자연의 몸은 파도에 떠밀리는 쪽배처럼 사정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후우~ 오라버… 아아!”
하인이 입술을 떼자 그제야 숨을 내쉬며 하인을 부르던 홍자연이 이번에는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그가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이 열에 달뜬 것처럼 달아오르고 두 다리가 쳐들려 하인의 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자신도 모르게 행하는 그녀의 몸짓이었다.
하인의 몸은 푸른 초원을 거칠게 질주하는 야생마가 되었고, 홍자연은 말발굽에 밟혀 몸을 비트는 대지가 되었다.
“아아아!”
홍자연이 한껏 몸을 들어올리며 새된 비명을 터뜨렸다. 드디어 말발굽의 거친 공격에 대지가 함몰한 것이다.
“으으윽.”
홍자연의 몸이 굳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나 억제할 수 없는 희열에 그만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하인은 파들파들 떠는 그녀의 몸을 안은 채 검은 머리를 쓸어주었다.
“홍 매, 넌 어디도 갈 수 없어. 난 죽을 때까지 너를 놔주지 않아. 알았어?”
하인의 부드러운 말에 홍자연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다. 아직도 희열의 기운이 몸을 휘돌고 있었고,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붙은 두 사람의 몸은 여운을 느끼며 꿈틀거렸다.
“약속했다, 홍 매?”
끄덕끄덕.
숨을 할딱이며 하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홍자연이 부끄러운 듯 하인의 가슴에 머리를 붙였다. 이제 무엇을 더 바라랴? 홍자연에게 하인은 목숨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연인이자 남편이었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였다.
“자, 그럼 이젠 홍 매의 무공을 손봐야지.”
자리에서 일어선 하인이 신안천수가 든 옥병을 가지고 왔다.
“그거 먹으면 정말 초고수가 될 수 있어요?”
홍자연이 정찬 눈매로 하인을 보며 물었다.
“당연하지. 이제 홍 매는 초고수가 되는 거야.”
“장안에 있는 위 형님은요?”
“응, 거기도 보내주었어. 하지만 음양천락환체대법을 전개하지 못해서 홍 매보다는 수준이 약할 거야.”
“그렇군요.”
대답을 하면서도 그녀는 마음이 놓이는 자신의 감정에 깜짝 놀랐다. 위소옥이나 자신 모두 하인의 여자였다. 그런데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죄스러웠다.
“그럼 오라버니, 훗날 위 형님에게도 그거… 해줘요.”
그녀가 말하는 것은 음양천락환체대법이었다.
하인이 머리를 끄덕였다.
“응, 내 여자이니 당연하지. 자, 입 벌려.”
“예.”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눈을 감은 홍자연이 입술을 방싯하게 벌리자 입에 신안천수를 머금은 하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각. 홍자연은 또다시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요화초마지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요화초마지체는 남자를 언제나 만족시켜 주는 신체. 그 때문에 정도에서는 요화초마지체를 가진 여인을 가리켜 요물이라고도 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으윽.”
또다시 방 안에 뜨겁고 강렬한 열기가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를 초극 고수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다.
침상이 삐걱거리는 소리, 열락에 달아오른 홍자연의 거침없는 신음 소리가 밖으로 울려 퍼졌다.
“음양천락환체대법?”
그곳으로부터 50장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팽거창과 팽도웅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대법 이름이었다. 그러나 저 대법이 신체를 강하게 만들고 단숨에 초극의 고수에 이르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아들아, 빨리 작전을 진행시켜야겠다.”
“알았어요, 아버지.”
대답을 하는 팽도웅의 눈이 열기를 품고 번들거렸다.
* * *
“후~ 이제 끝났군.”
하인은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씻고는 잠이 든 홍자연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모든 신체가 최상으로 바뀐 홍자연은 초극의 고수로 변모할 것이다.
물론 음양천락환체대법을 시전했다고 다 초극 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자질과 신체의 특성에 따라 발전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자연의 무공 재질을 볼 때 아무리 못해도 심공의 경지는 쉽게 오를 수 있었다. 그 이상의 성취는 그녀의 노력에 달렸지만…….
“홍 매, 수연과 그대가 이번 일을 꾸몄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상관없어. 나도 홍 매를 사랑했어. 그럼 잘 자. 내일 아침엔 북경으로 떠나야 하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하인은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혀를 찼다.
“젠장, 하루 종일 걸렸네.”
분명 아침에 일어났는데 음양천락환체대법을 끝내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저 멀리 불타는 듯한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인이 걸음을 옮겨 인공 호수를 돌아설 때였다. 두 사람이 나타나 허리를 굽혔다.
“주군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야?”
하인의 말에 팽도웅은 슬쩍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털썩.
“왜 그래, 영감? 무슨 죄를 지었어?”
하인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팽거창을 보며 눈을 뒤룩거리자 팽거창이 머리를 조아렸다.
“주군, 저희 팽가가 자질이 부족해 주군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리고는 머리를 땅바닥에 쿵쿵 찧었다.
옆에 있던 팽도웅도 함께 머리를 찧는 것을 본 하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말을 해야 알 것 아냐! 무슨 소리야?”
“그게… 지금 제 딸아이가 죽겠다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습니다, 주군.”
“죽어? 누가?”
“불효막심한 제 손녀 팽비연입니다, 주군. 늘그막에 손녀가 무공을 익히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살았는데 그 애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주군. 으흐흐.”
팽도웅이 말하는 것을 보며 머리를 찧던 팽거창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걔, 내가 살려 준 애 아냐?”
“맞습니다, 주군. 그런데 지금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왜, 왜 죽냐고?”
“비연이는 도저히 우주만상도를 익힐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흑지만독(黑芝滿毒)이 든 그릇을 들여놓고는 방문을 걸어 잠가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팽거창의 말에 하인은 기가 막혔다. 흑지만독은 검은 버섯으로 신초라고도 하지만 지독한 독을 함유한 버섯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흑지만독을 먹으면 죽지는 않아도 반신불수가 되고 무공을 사용하지 못한다.
“문을 부수면 될 것 아냐?”
“문을 부수면 흑지만독을 마신다고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팽거창이 하인의 눈치를 살피며 하는 말이었다.
‘주군, 제발 비연에게 가십시오.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그는 지금 하인이 비연의 방으로 가게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었다.
“걘 선강골인데 우주만상도를 익힐 수 없다고?”
하인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그 아이가 저렇게 소동을 부리는 것입니다. 원래 외동딸이 되어서 자존심이 강합죠, 예.”
“빌어먹을…….”
그래놓고 보면 이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다. 그녀의 임독양맥을 뚫어준 것은 자신이 아니던가? 그러나 우주만상도는 임독양맥을 뚫었다고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패도의 최고봉인 우주만상도, 그것을 익히려면 완전한 탈태환골을 해야 했다.
‘젠장! 신안천수를 먹여야 하는가?’
하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 북경으로 가려면 고수가 많아야 했다.
‘까짓것 이럴 때 선심 쓰자. 어차피 걔도 내 부하가 아닌가!’
드디어 결심을 내린 하인이 팽거창을 내려다보았다.
“영감, 일어서. 내가 비연에게 갈 테니까.”
“저, 정말입니까? 고맙습니다, 주군.”
팽거창과 팽도웅이 너무 좋아서 머리를 조아리는 동안 하인의 신형이 번개처럼 사라졌다.
“아버지, 그만하고 일어서세요. 주군은 벌써 갔습니다.”
“그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팽거창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하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흐흐흐. 어떠냐, 내 생각이?”
“예, 아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팽도웅이 기분 좋은 듯 헤벌쭉거리자 팽거창이 허리를 잡으며 툴툴댔다.
“아이고, 삭신이야. 이제 늙어서 그런지 조금만 허리를 굽혀도 아프구나.”
“헤헤. 아버지, 제가 있지 않습니까?”
팽도웅은 아버지의 허리를 두드리며 비연이 있는 방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비연은 음양천락환체대법인지 뭔지를 시술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팽가에서 도의 고수가 나오게 될 것이었다.
‘비연아, 이제 네게 맡긴다.’
팽거창은 저 멀리 가산 너머로 사라지는 하인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문을 여시오. 그러면 안 됩니다.”
“아씨, 어서 문을 여세요.”
“이 일을 어떡해!”
하인이 도착해서 본 비연의 별채는 한마디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유모와 하녀들이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천호단의 노장들인 이전 멸살대원들이 주먹을 떨고 있었다.
하북팽가주인 팽도웅에게는 아들이 없기에 오직 한 명, 팽비연이 가문을 이을 재목이었다. 한데 그런 그녀가 자살하겠다고 난리를 치니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노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독을 마시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채에 도착한 하인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난리를 치고 있는데도 천호단원들이 마당에서 소리만 지르고 있는 탓이었다.
천호단원들 중에는 1갑자의 공력을 지닌 고수들이 많다. 그들이 정작 맘을 먹으면 팽비연이 아무리 협박을 해도 제압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흠, 이건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잖아!’
하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얼핏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렇단 말이지?’
하인은 이제 왜 이런 소동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시침을 뚝 떼고 날아 내렸다.
“뭣들 하는 거야?”
“주군을 뵙습니다.”
하인이 내려서자 천호단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매우 불안정했다. 그럴 수밖에! 천호단원들은 평생 거짓말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고지식한 위인들이었다. 한데 자신들의 하늘 같은 주군인 하인을 속이자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하인이 모를 리 없었다. 하인의 몸에 잠들어 있는 극능체감술(極能體感術)은 그만큼 천고의 무공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군!’
하인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천호단원들의 마음을 읽은 것이었다.
“들어오면 죽어버릴 거야!”
방 안에서 팽비연의 악쓰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안 됩니다. 제발 문을 여세요.”
유모의 애절한 소리가 울리고 하녀들은 발을 굴렀다. 하지만 천호단원들은 말을 못하고 하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쟤가 애를 먹인단 말이지?”
“예. 그게… 우주만상도를 익힐 수가 없다고…….”
천호단의 부단주 고독검(孤獨劍) 척발병헌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는 감히 주군을 속이기가 정말 힘들었던 것이다.
‘주군, 용서하십시오. 아가씨가 주모님이 되시면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그와 천호단원들은 이미 팽거창에게 약속을 한 상태였다. 팽비연을 주군의 여자로 만들기로…….
다른 일이었다면 이들은 절대로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군은 젊었고, 팽비연이 주모가 되는 것은 이들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들이 옆에서 본 팽비연은 뛰어난 무골에 총명한 여자. 주군이 아니라면 그녀의 배필이 될 사람은 중원 천지에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그럼 그만두라고 해.”
“예? 그, 그런…….”
척발병헌이 입을 딱 벌렸다. 태상가주, 아니 천호단주인 팽거창의 말에 의하면 주군에게는 우주만상도를 익히게 할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것도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그녀를 안아야만 하는 방법이. 그런데 주군은 아주 간단하게 무시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저기 주군, 그러면 아가씨가 죽습니다.”
“살기 싫어서 죽으려는 애까지 살릴 필요 없어.”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선 하인이 천호단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머리를 숙이고 혹 눈이 마주칠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기감에 느껴졌다.
‘너희가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오늘 다 쓸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충성심이 이렇게 높으니 내 한턱 쏜다.’
결심을 한 하인이 입을 열었다. 물론 내공을 담아서였다.
“영감들도 무공이 더 강해지고 싶지?”
하인의 질문에 천호단원들이 일제히 머리를 들었다. 무인에게 무공이 높아지고 싶은 것은 물어볼 것도 없는 말이 아닌가!
“영감들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날 기다려 준 것에 대한 표창으로 오늘 영약을 주겠다. 이걸 먹으면 무공이 한두 단계씩 높아질 거야.”
하인이 신안천수가 든 옥병을 꺼내들었다. 이제 신안천수는 반병이 조금 못 됐다. 하지만 지금 있는 분량만 해도 1백 명은 초극의 고수로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한 사람에게 단 한 방울이면 충분하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20명의 천호단원들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신안천수다!”
“헉! 신안천수라니?”
“맙소사!”
하인의 선언에 노인들의 눈이 찢어질듯 부릅떠졌다. 세상에는 수많은 기이영약들이 있지만 단 하나, 신안천수만은 보고 죽으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천고의 영약이 주군의 손에 들려 있었다.
놀라는 천호단원들을 본 하인이 히죽 웃었다.
“이것은 영감들도 잘 알 거야. 한 방울이면 단숨에 초극의 고수가 될 신체를 만들어주고 더 이상 늙지도 않지. 말하자면 주안과(朱顔果) 같은 역할은 물론, 무공도 올려 주는 약이야. 이것을 먹으면 영감들은 탈태환골을 할 것이고, 밤에 여자도 안을 수 있어.”
“꿀꺽!”
“……!”
모두의 눈이 용암을 옮겨다놓은 것처럼 이글거렸다. 무공도 높아지고 젊어지기까지 한다니 말이다.
실상 천호단원들은 모두 80이 넘은 늙은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기구했다. 어렸을 때 고아로 천하를 떠돌다가 팽거창에게 구함을 받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무공을 익히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 바람에 장가도 못 간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러나 초절정의 고수로 올라선 다음 뒤를 돌아보니 이미 늙었고, 육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무공이 높고 사람을 죽이는 데는 도사들이었지만 잠자리에서 그것은 절대로 일어서지 않았다. 무공이 높다고 거시기까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작동할 수 있다니!
‘저것이 장가를 가게 할 수 있다고?’
고독검 척발병헌은 침을 질질 흘렸다.
사실 그는 집안의 삼대독자였다. 그런데 무공을 익히느라 시기를 놓친 탓에 나이 먹은 후에도 장가를 가보려고 무슨 짓이든 다 했다. 그러나 기루에 가서 아무리 시험해봐도 그의 거시기는 측 늘어져 잠만 잤다. 아니, 가문의 대를 이으려고 해도 그것이 서야 장가를 가든 자식을 보든 할 것이 아닌가? 그 상실감으로 인해 오직 무공에만 힘을 쏟았다.
그 때문에 명호도 고독검이라고 한 척발병헌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왜, 먹고 싶지 않아?”
하인의 물음에 천호단원들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내공까지 담아서.
“아닙니다! 먹겠습니다, 주군!”
어찌나 소리가 큰지 팽가의 기와마저 드르릉 울렸다.
“좋아, 모두 입을 벌려. 딱 한 방울씩이야. 더 먹어봐야 효과도 없어. 먹은 다음에는 각자 자신의 무공 구결대로 운기를 하면 돼. 알았어?”
“옛, 주군!”
천호단원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아이들처럼 하인을 쳐다보며 입을 벌렸다. 마치 제비 새끼가 어미가 물어온 먹이를 먹으려고 입을 벌린 것 같았다.
지금 그들의 머릿속엔 팽비연에 대한 생각이 감감 없어져 버린 상태였다.
한 바퀴 돌며 노인들의 입에 신안천수 한 방울씩을 떨어뜨려 준 하인이 명했다.
“자, 시작이다. 운기를 해.”
순간 마당이 조용해졌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노인들. 천호단원들이 일제히 운기를 시작한 것이다.
‘흐흐, 네가 이래도 방 안에 콕 박혀 있는지 어디 보자.’
하인은 슬쩍 방문을 보고는 뒷짐을 졌다.
그때였다.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적발개와 차자동이 나타났다. 그들의 얼굴에 줄줄 흐르는 땀방울들. 희번덕거리는 그들의 눈이 마당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천호단원들에게 꽂혔다.
‘정말이었어!’
‘이럴 수가!’
둘은 지금 미칠 것 같았다. 방금 팽비연의 하녀인 팽화정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왔다. 주군이 천호단의 노고수들에게 신안천수를 먹인다고…….
적발개나 차자동도 신안천수가 어떤 영약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둘은 하인이 어떻게 부하들을 강력한 무인으로 만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달려왔다. 어떻게든 한 방울이라도 얻어먹으려고…….
그런데 뒷짐을 지고 있는 하인과 마당에 앉아 운기를 하는 노인들을 보니 이미 약은 다 없어진 것 같았다.
털썩. 털썩.
적발개와 차자동이 마당에 주저앉았다.
“야, 너희들은 또 왜 그래?”
하인의 말에 적발개와 차자동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주군, 저희들도 주군의 부하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으흐흑!”
적발개가 커다란 덩치를 흔들며 눈물을 터뜨렸다. 자신도 강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무림을 울리는 아름다운 미녀와 연애를 꿈꾸고 싶었다. 한데 주군은 자신들에겐 한 방울도 주지 않고 저 영감들에게만 그 귀한 약을 주다니! 설움이 봇물 터지듯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주군, 저도 강해져서 예쁜 처자를 만나 장가를 들고 싶었습니다. 어어엉!”
적발개의 몸부림은 그야말로 처절하였다.
다행히 차자동은 소리까지는 치지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무공이 너무 약해 기습만 하던 그였기에 정말 주군이 야속했다. 누가 뭐래도 자신들은 주군의 최측근에 있는 직속 수하들이 아닌가?
“야, 코빨개하고 도리깨! 너희들은 내 직속이야. 그것도 몰랐냐?”
하인의 말에 적발개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런데 우리에겐 왜 약을 주지 않습니까? 저도 강한 무인이 되고 싶었… 응?”
하인에게 서러운 마음을 토하던 적발개의 눈이 둥그레졌다. 하인의 한 손에 옥병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딱 세 방울 남아 있어. 너희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했거든? 그런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하인의 말에 적발개와 차자동이 벌떡 일어섰다.
“어허허! 역시 주군께서는 저희들을 직속으로 생각했구먼요.”
“믿었습니다, 주군.”
두 사람이 냅다 달려오더니 하인의 양쪽 다리를 하나씩 잡고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방금 생각이 바뀌었다.”
“예?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주군?”
“아니, 생각이 바, 바뀌다니요?”
하인의 말에 두 사람은 질겁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인은 그런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시침을 뗐다.
“너희들, 방금 날 주군으로 생각하지 않았지?”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 적발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주군의 쫄따구입니다. 암요!”
너무도 급한 나머지 적발개의 입에서 비마채 시절의 상말이 튀어나왔다.
“검은 도리깨 차자동, 천지신명 앞에 맹세합니다. 전 지금도 주군의 충복이고 죽어서 저승에 가서도 주군의 충복입니다.”
차자동은 역시 적발개보다 한 수 위였다. 저승에 가서도 충복이 되겠다니!
“됐어, 인마. 어서 입이나 벌려.”
“옙!”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고는 입을 쫙 벌렸다.
똑~ 또옥.
드디어 옥병에서 신안천수가 한 방울씩 적발개와 차자동의 혓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함께 풍기는 형언할 수 없는 향기에 두 사람은 꿀꺽 그것을 삼켜 버렸다.
‘으흐흐. 이제 나 적발개, 무적의 고수가 된다. 기다려라, 무림의 미녀들이여!
‘팽정화, 이제부터 그대는 내가 지켜 주마.’
차자동은 이미 팽정화와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한 상태였다.
속으로 기뻐서 벙글거리던 그들은 일순 화들짝 놀랐다.
“잡생각 버리고 그만 운기에 집중해. 아니면 약효가 떨어진다.”
‘헉! 그렇게는 절대 안 되지!’
‘아뿔싸! 자칫하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뻔했다!’
적발개와 차자동이 운기에 들어가자 하인은 그제야 옥병을 들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이제 한 방울 남았네. 이걸 누구에게 주지? 아 참! 수라쌍마에게 반씩 갈라주면 되겠다. 그럼 나에게 심복이 둘이나 생기잖아.”
하인이 방문을 슬쩍 스쳐보며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당장 수라쌍마가 머물고 있는 접객당으로 가려는 태세였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쨍쨍한 고음이 울렸다.
“잠깐만요!”
‘흐흐흐, 이래도 네가 안 나오고 배겨?’
사실 하인이 지금까지 한 것은 모두 팽비연을 불러내기 위한 연극이었다. 실상 옥병에는 아직 80명분의 신안천수가 남아 있었다.
이곳에 온 순간 하인은 이 모든 것이 팽거창의 음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모른 척하고 팽비연을 안을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이제 겨우 15살.
하인은 절대 여자를 거절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그녀를 냉큼 먹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남의 음모로 안는 것은 더욱 싫었다. 자신은 앞으로 천하에 군림할 몸이 아니던가? 남의 손에 놀아나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그래서 천호단에게 신안천수를 먹였고, 적발개와 차자동에게도 주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그들에게도 주려고 했던 것이었으니까.
그러자 하인의 생각대로 팽비연이 달려 나왔다.
“왜, 나에게 볼일이 있어?”
하인의 천연스런 말에 팽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말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살극을 연기한 그녀였지만 창피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비록 어리지만 총명한 여인. 지금 하인이 자신을 놀린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방울밖에 없는 신안천수가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날아갈 판이었으니까.
그녀가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 입을 열었다.
“잘못했어요. 절 용서해주세요.”
“뭘? 너 나에게 죄진 것 있어?”
하인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휘휘 저었다.
“오빠, 제가 욕심이 지나쳐서 그런 것이니 용서해주세요.”
“오빠? 꼬마야, 난 자살하려는 너 같은 애는 동생으로 두고 싶지 않아. 그러니 너 하던 것 마저 해라. 난 간다.”
하인이 걸음을 옮기려 하자 팽비연이 화살처럼 날아와 하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뭐든지 할게요. 종이 되라면 될 것이고, 팽가를 떠나 부하가 되라고 하면 되겠어요. 그러니 그 약을 저에게 주세요.”
그녀가 간절한 눈으로 하인을 쳐다보았지만 하인의 눈은 냉랭했다.
“부하가 되겠다고? 너같이 저밖에 모르는 애는 부하로 두고 싶지 않아. 그러니 비켜.”
차가운 하인의 말에 팽비연은 아득해졌다. 진짜로 하인이 화가 나 있는 것이었다.
핑. 핑.
그때 두 사람이 쏜살같이 날아와 하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팽거창과 팽도웅이었다.
“주군, 제 욕심으로 주군에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모든 벌을 받겠으니 비연이가 우주만상도를 익히게 해주십시오.”
“아닙니다, 주군. 죄는 저 애의 아비인 제가 지었습니다.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팽거창과 팽도웅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본 하인의 입에서 차가운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팽거창, 팽도웅, 내가 너희들의 주군이 맞는가?”
갑자기 쏟아지는 하인의 위엄 있는 목소리. 언제나 가볍게 흔들거리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몸에서는 대종사의 서릿발 같은 위엄이 줄기줄기 쏟아지고 있었다.
“예, 주군. 맞습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주군인 나를 기망하였다. 혈천의 율법을 아는가?”
하인의 준엄한 말에 두 사람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주군을 기망하는 자… 능지처참입니다, 주군.”
“그렇다. 하나, 지난 수십 년 동안 나를 기다린 너희들의 공을 생각해서 스스로 자결할 기회를 주겠다. 죽어라.”
하인의 말에 두 사람의 몸이 굳어졌다. 주군이 이토록 노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주군이 분노하면 신하 된 자로서 목을 내놓을 수밖에.
두 사람은 천천히 자신들의 도를 뽑아들었다.
“주군, 대업을 이루소서.”
“주군, 불민한 신하 팽도웅, 목숨으로 죄를 씻겠습니다.”
둘이 목을 베려는 순간, 팽비연이 두 사람에게 날아와 육탄으로 부딪쳤다.
“안 돼요! 할아버지, 아버지.”
두 사람의 도를 손으로 잡은 팽비연의 양손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하인의 눈에 이채가 번뜩 지나갔다.
‘흠, 역시 선강골이군!’
하인에게 생기를 흡입 받고 임독양맥이 뚫린 팽비연은 이미 초절정의 최상위급에 진입해 있었다. 이제 신안천수를 먹고 탈태환골을 하면 쉽게 심공, 아니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죄를 지은 것은 모두 내 탓이에요. 그러니 내가 죽겠어요.”
촤앙!
팽비연이 거도를 뽑아들더니 번개 같은 속도로 자신의 목을 베었다.
“안 돼!”
“비연아!”
너무도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기겁한 팽거창과 팽도웅이 막을 생각도 못하고 비명을 지를 때, 하인의 손가락이 까딱했다.
짱.
“윽!”
하인의 손에서 날아간 한 줄기 지풍이 그녀의 도를 옆으로 밀어냈다.
“좋아, 꼬마를 봐서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지. 그러나 너!”
하인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자 팽비연은 긴장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넌 오늘부터 내 하녀다. 내 침구도 정리하고 아침엔 세안 물을, 저녁엔 발 씻을 물도 가져다놔야 해. 한마디로 몸종이야. 할 수 있어?”
천연스런 하인의 말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몸종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그렇게 만들 줄은 몰랐다.
그녀의 눈에서 오기가 솟구쳤다.
“알았어요. 하북팽가의 팽비연, 오늘부터 당신의 하녀가 되겠어요.”
“아니, 다시 말해 몸종이다.”
하인의 말에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찰랑거렸다.
“모, 몸종이 되겠어요.”
“좋아, 그럼 입을 벌려.”
“뭐라고요?”
“난 약한 몸종은 두지 않아. 그러니 입 벌려.”
그제야 하인의 말뜻을 안 팽비연이 얼굴을 붉히고 입을 방싯하게 벌렸다. 그녀의 벌어진 입으로 한 방울의 신안천수가 떨어져 내렸다.
“저기 앉아서 운기를 해.”
하인의 말에 적발개와 차자동의 옆에 앉은 팽비연이 눈을 감고 운기를 시작했다.
그때 하인의 손이 쳐들리고 대기의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몰려들던 기가 하인의 몸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열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23가닥으로 갈라져 쏘아졌다.
퍽퍽퍽퍽퍽.
“헉! 저건 추궁과혈!”
“허걱!”
팽거창과 팽도웅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눈을 비볐다. 허공을 격하는 추궁과혈도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인은 단번에 스물세 사람들의 혈도를 가격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상상도 못한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주군은 이미 신인이로구나!’
그것은 팽도웅의 생각이었고,
‘비연아, 넌 이제 주군의 여자다. 잘해야 한다.’
속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팽거창이었다.
그는 하인이 팽비연을 하녀라 명할 때부터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하인의 속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흐윽. 흐윽. 흐윽.”
넓은 마당에서 사람들이 운기를 하는 숨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초극의 고수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대들도 입을 벌려.”
“예? 주, 주군.”
팽거창과 팽도웅이 놀람과 기쁨으로 눈을 부릅떴다. 가만 보니 주군께서 자신들에게도 신안천수를 주려는 것 같았다.
“쟤들보다 약하면 안 되잖아. 그래도 명색이 가준데. 그러니 입 벌려.”
하인의 퉁명스런 말에 두 사람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무림에서 영약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무가지보, 그중에서도 신안천수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도 하인은 그것을 아낌없이 주려 하고 있었다.
‘주군! 이 팽거창,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주군의 대업에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두 사람은 입을 벌리고 마음속으로 맹세를 다졌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 신안천수를 떨어뜨린 하인은 아까워서 몸을 떨고 있었다.
‘아휴! 누군 주고 누군 안 줄 수도 없고. 아이고, 내 보물.’
하나 오늘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밤 하인은 주수연에게 음양천락환체대법을 하고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 * *
관장현에서 북경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조양구를 지나야 한다. 이 구간에 있는 마을들은 대략 25개나 되고, 살고 있는 양민들만 해도 3만 명이나 된다.
관장현에서 55리 떨어진 동소 마을은 작은 저잣거리가 있는, 인구 2천 명이 사는 곳이다.
한데 언제나 평화롭던 이 마을에 소란이 일어났다.
그 시작은 마을에 들어온 삿갓 쓴 무인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여기서부터 시작인가?”
대춧빛으로 얼굴이 뻘건 남자의 말에 머리 뒷부분에만 털이 듬성듬성 있는 남자가 쇠가 갈리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클클클, 이제 맘껏 피를 볼 시간이로군!”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3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흐흐흐, 난 맘껏 욕정을 풀어야지.”
“호호호, 오늘 동남들은 모두 내 것이다.”
“언니, 함께 먹어야죠. 깔깔깔.”
마치 요괴와 요물들이 광란을 하는 것 같았다.
이들이 바로 지계의 10대 고수 중 나머지 7명이었다.
대춧빛 얼굴의 남자가 지계 서열 첫 번째인 적면광살(赤面狂殺) 해심천.
해심천은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면 마치 신들린 듯 모조리 찢어 죽이는 탓에 그때는 누구도 그의 옆으로 가지 않았다. 죽이는 재미에 자기편도 갈가리 찢어 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호도 적면광살이었다.
그러나 실력은 지계 10대 고수 중 최고였다.
“이번 일은 중요하다. 하니, 일단 일이 먼저다. 야율차가 죽었다는 것을 명심하고 이 일에 최선을 다하라. 은목전왕, 그자를 죽이지 못하면 우리의 운명도 끝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그의 말에 2명의 화사한 여자가 입을 삐쭉거렸고 나머지 4명의 남자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도 이번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흐흐. 걱정 마라, 일 좌(座). 일이 우선이라는 것은 우리도 안다.”
쇳소리 나는 목청으로 말하는 자는 서열 두 번째, 그러니까 이 좌인 대두귀(大頭鬼) 유만백.
화사한 얼굴에 지독한 색기를 퍼뜨리는 여자는 삼 좌인 절대요화(絶代妖花) 음무희.
몸을 꽉 조이는 검은색 옷을 입은 한 마리 뱀 같은 여인이 육 좌인 섭혼우물(攝魂尤物) 탕마요.
나머지 3명은 칠 좌인 지옥시마(地獄屍魔) 파육명, 팔 좌 음양색혼(陰陽色混) 후이천, 구 좌 거령흑살(巨靈黑殺) 파라비였다.
거령흑살은 비록 서열 구 좌이긴 하지만 힘이 천하장사인 흑인으로, 머나먼 이역 땅에서 팔려 온 자였다.
지계의 10대 고수는 서열이 있긴 하나 수평 관계, 다만 무공이 높은 자에게 우선권을 줄 뿐이었다.
“당연하죠. 일단 저놈들을 초혼강시로 만든 다음 재미도 봐야겠죠. 오호호!”
마치 여자처럼 몸을 배배 꼬며 고음으로 깔깔거리는 자는 음양색혼 후이천이었다.
후이천은 음양인으로,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는 자였다. 하지만 인간들에 대한 증오가 가장 높은 탓에 그에게 걸리면 남자든 여자든 가장 비참하게 죽는다.
‘수라쌍마도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죽었을 것이다.’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해심천은 저 멀리 북경으로 뻗어간 관도를 바라보았다.
이 관도 변에 있는 25개의 마을 사람들은 곧 초혼강시로 변할 것이다. 그것이 이번 일의 핵심이었다. 지금 각 마을에는 지마대(地魔隊)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초혼제령환(招魂制靈丸)을 먹이고 있을 터였다. 그리되면 25개 마을의 양민들은 초혼강시가 될 것이고, 그들은 은목전왕을 막아 나설 것이었다.
‘흐흐흐, 이게 바로 일석삼조라는 것이지!’
회심의 미소를 지은 해심천이 동료들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