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중화 전장의 멸망 (14/17)

제3장. 중화 전장의 멸망

‘저놈이 은목전왕?’

진야동은 뒷짐을 지고 산보하듯 걸어 나오는 하인을 보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놈이 사용한 허공섭물은 너무 경악스러워 슬그머니 내력을 쏘아 보내 하인의 내공을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놈의 몸에는 단 한 줌의 공력도 없었다. 그것이 진야동을 혼란스럽게 했다.

‘설마 무극경?’

하지만 진야동은 머리를 흔들었다. 천상천의 반신이나 같은 무천도 최근에야 무극경(武極境)을 이루었다. 한데 저 어린 나이에 무극경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아닐 것이다!’

진야동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 내며 하인을 쏘아보았다.

“네가 은목전왕이라는 애송이인가?”

“진야동, 지계의 계주라는 자가 너무 경박하구나. 우린 천 년을 대립해온 하늘 위의 하늘들. 예의는 시궁창에 처박았는가?”

하인의 준엄한 말에 진야동은 이를 악물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애송이에게 한 방 먹은 것이다. 지금까지 정보에 의하면 저자는 예의도 도덕도 모르는 망종이라고 들었다. 한데, 지금 다가오는 저자의 몸에서는 감출 수 없는 대종사의 기품이 넘치고 있었다.

‘쓸모없는 놈들. 정보라는 것이 하나도 정확한 것이 없어!’

그러나 그 정도에 기가 꺾일 진야동이 아니었다. 그가 입을 쩍 벌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역시 은천의 주인답구나. 좋다. 나도 지계의 계주. 너를 인정해주지. 어떤가, 은목전왕? 이들은 너도 알다시피 지옥혈갑군이고, 네가 이들을 이길 확률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낮다.”

진야동의 자신만만한 말에 하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 저들이 도검불침에 무적이라는 지계의 지옥혈갑군이군!”

수긍하는 하인의 말에 진야동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생각 외로 놈을 회유하기 쉬울지도 몰랐다. 더구나 놈은 젊지 않은가! 뒤에 있는 저놈의 계집들을 미끼로 회유하면 일이 쉬워질 수도 있었다. 젊다는 것은 부귀영화와 여자, 돈과 권력을 사랑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니까!

‘흐흐, 저놈을 회유하여 천계와 싸움을 붙이면 일석이조다!’

“은목전왕, 난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어차피 세상은 강자가 차지하는 법. 너와 내가 손을 잡으면 세상에 누가 우릴 당하겠는가? 나와 손을 잡고 세상을 호령하고 싶지 않은가?”

하인은 진야동의 말에 머리를 끄덕였다.

“세상을 가진다? 그거 좋지. 그런데 그 세상에서 난 어떤 위치가 되지?”

‘흐흐흐, 역시 놈도 야심이 있었어!’

진야동은 이제 자신감을 가졌다. 놈도 세상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놈을 이용할 수 있을 터. 더불어 천계와의 싸움에서 저놈을 돌격대장으로 써먹을 수도 있었다.

“그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다. 나 다음이라는 것이지. 그 정도면 세상은 은목전왕 그대와 내가 나누어 갖는 것이다.”

그러자 하인이 머리를 갸웃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그럼 무천은 뭐지?”

“무, 무천?”

하인의 천연스런 말에 진야동은 흠칫 놀랐다. 저놈은 자신의 머리 위에 무천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진야동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은천의 후예. 천상천에 대한 정보가 없을 리 없었다.

“하하하! 무천은 세상의 일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 어떤가, 나와 손을 잡겠는가?”

진야동이 반들거리는 눈으로 하인을 쳐다보았다. 마치 아이에게 빨리 당과를 집으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씨익 웃은 하인이 문득 태도를 바꿨다.

“난 말이다, 여자든 물건이든 내 것은 누구와 나눠 가질 생각이 없어. 널 죽이면 세상이 내 것인데 왜 너와 손을 잡아야 하지?”

“뭐, 뭐라고?”

기가 막힌 진야동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네가 그랬잖아, 너와 내가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그런데 내가 너보다 더 세거든. 그래서 생각이 달라졌어. 널 죽이고 세상을 가지기로.”

말을 끝내며 히죽이 웃음을 지은 하인이 한 발 내짚었다.

쿠웅! 우르릉.

하인을 중심으로 물결처럼 퍼져 나가는 진각에 땅이 지진을 만난 것처럼 뒤흔들리고 생시들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참으로 무지막지한 진각이었다.

그런데도 하인의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 그건 하인이 진각의 방향을 조절했기 때문이었다.

“지옥혈갑군은 저놈을 죽여라! 어서!”

악에 받친 진야동이 생시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생시들이 일제히 달려 나왔다. 그들의 귀로 진야동이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애송이도 죽이고, 계집들도 모두 죽여라. 죽여서 피를 먹어라!”

“우아아!”

생시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자 천호단원들이 창을 잡으며 달려 나가려고 했지만 주수연이 막았다.

“기다려요. 하 랑이 원치 않아요.”

그제야 천호단원들이 멈칫하며 그 자리에 섰다. 그들의 눈에 달려오는 생시들을 향해 하인이 한 걸음 내짚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 한 걸음이 10여 장의 거리를 단축하고 생시들의 전면에 솟아나듯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하인의 담담한 말소리가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진야동, 넌 내가 북경에 온다고 했을 때 도망쳐야 했다. 더구나 넌 내 여자들을 모욕했다. 난 내 여자를 건드는 놈은 살려 두지 않아.”

하인의 입에서 씹어뱉는 듯한 말이 흘러나오고, 달려오는 생시들을 향해 두 손이 겨누어졌다.

그 순간 조용하던 대기가 흔들리더니 거대한 강풍이 휘몰아쳤다. 하인의 양손에서 나타는 하얀빛의 장풍. 그 장풍이 전면으로 쏘아져 나오면서 사방 50장이 은빛으로 뒤덮였다.

“크아악!”

“아악!”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다음이었다. 은빛의 바람이 생시들을 휘감자 머리부터 서서히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저, 저게 대체?”

진야동은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내리는 것도 모르고 부들거리며 몸을 떨었다. 지옥혈갑군은 도검불침에 수화불침이다. 한데,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그 강력한 생시들이 자신이 보는 앞에서 흙으로 빚은 인형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진야동의 눈에서 암흑의 검은 기운이 스멀거리며 흘러나왔다. 그것은 하인을 죽이고 싶은 지독한 살의였다. 하지만 그는 하인이 방금 사용한 수법이 생사흡출공(生死吸出功)으로 생시들의 생기를 흡수하여 부숴버리는 은천무상만수의 진공파분(眞空破分)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생시들은 강하다. 하지만 생시들의 생기를 흡수하자 몸뚱이가 푸석푸석해졌고, 대기의 기운이 충격을 가하자 가루로 흩어지고 만 것이다.

3천의 생시들이 눈앞에서 가루로 흩어진 것을 본 진야동이 자리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은목전왕, 이놈! 내 오늘 네놈을 찢어 죽이고 네 계집들을 나의 노리개로 만들 테다.”

촤아아.

그의 몸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검은 기운에 휘감기더니 새카만 암흑의 불꽃으로 뒤덮였다. 진야동의 성명절기인 지옥화령공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명왕염(冥王炎)!”

쩌엉.

하늘의 해가 떨어졌는가? 밝은 대낮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어둠보다 더 새카만 지옥의 명왕염이 수백 개의 창이 되어 하인을 향해 쏘아졌다.

“저걸 어떡해!”

“언니, 우리도 공격해요.”

금지연과 소주민이 발을 구르며 검을 잡았지만 주수연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녀가 머리도 돌리지 않은 채 그녀들에게 말하였다.

“지연, 주민! 주위를 봐. 우린 지금 강기막에 보호되고 있어. 가만있는 것이 그이를 돕는 거야.”

주수연의 말에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두 여인이 주변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들과 천호단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은빛의 엷은 막. 그 때문에 이 안은 말 그대로 철벽의 요새였다.

“세상에, 이건 강기막이야!”

두 여인은 둥그런 막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금적산이 입을 열었다.

“흐흐. 지연아, 너의 낭군은 세상에서 제일 강한 무인이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제야 금지연은 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흔히 무림인들이 호신강기를 펼친다고 하지만, 이 정도는 어림도 없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거의 2천 명에 달하는 무인들을 감싸는 강기의 막. 그건 하늘의 천장이 아니면 감히 흉내조차 낼 수도 없는 것이었다.

‘호, 내가 정말 잘 결심했어!’

그녀는 하인과 함께했던 뜨거운 일을 생각하자 얼굴이 붉어졌다. 비록 하인의 정신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그의 여자가 된 것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쳐다보던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캄캄한 하늘 위 그곳에서 밝은 태양이 비추듯 하인의 은빛이 사방을 밝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진야동, 이제 너를 시작으로 천계도, 무천도 세상에서 없애버린다. 잘 봐라. 이것이 세상을 밝히는 은천의 빛, 광명화(光明華)다.”

하인의 담담한 말과 함께 주위가 환해졌다. 하늘 가득 피어나는 은빛의 아름다운 꽃.

점점 커지는 거대한 꽃이 천지를 뒤덮자 밑에서 올려다보던 사람들이 입을 딱 벌렸다.

“아, 우담화다!”

“우담화!”

부처의 성스러움을 나타내는 희망의 꽃, 우담화가 진한 향기를 풍기며 어둠을 산산이 깨버리고 있었다.

“끄악… 안 돼!”

진야동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지옥화령공은 이미 파괴되고 은빛의 꽃이 몸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산산이 가루로 흩어지는 몸의 생기가 우담화에 빨려 들며 지워지고 있었다.

아예 세상에 없었던 듯 그렇게 진야동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늘에 떠서 거연히 서 있는 하인을 경외의 심정으로 바라보던 천호단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자신들의 주군인 하인은 가히 신장의 모습이었다.

“혈천천하!”

“혈천천하!”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대륙 전장을 뒤흔들고, 기막이 해제되자 여인들이 하인을 향해 달려왔다.

‘흐흐흐. 상인은 손해 보는 장사는 절대로 안 하지, 아암!’

머리칼을 휘날리며 하인의 품을 향해 달려가는 딸을 보며 금적산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 * *

부엉. 부엉.

어디선가 구슬프게 우는 부엉이 소리가 들린다.

“젠장! 저놈의 부엉이는 새끼를 잃었나? 청승맞은 소리가 불길하구만.”

거대한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중화 전장은 외성이 있고 내성이 있다. 외성에는 전장의 일을 하는 하인들과 무인들, 그리고 손님이 있는 객당이 있지만 내성에는 전장주 하후극영과 호위 무인들뿐이다. 한마디로 내성은 하후극영의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내성의 담장 위에서 경계를 하던 호장 무사가 뒷산을 쳐다보며 두덜거리는 소리에 옆에 있던 동료가 피식 웃었다.

“자네, 마누라에게 뭔 일을 당했나? 오늘은 신경이 너무 예민해.”

동료의 말에 이마를 찡그리며 돌아서던 무사가 눈을 부릅떴다. 뭔가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지나는 것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보게, 방금 뭐가 지나간 것 같은데?”

그 말에 동료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조용한 정적만이 덮여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자네 정말 이상하군. 내 눈엔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이누먼.”

동료의 핀잔에 무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가? 분명 뭐가 지나간 것 같았는데.”

호장 무사는 자신이 정말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요새 돈 때문에 마누라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그였다.

스스스스.

중화 전장의 장주 하후극영이 있는 집무실 지붕에 박쥐 같은 검은 그림자가 조용히 날아 내렸다. 방금 호장 무사가 느낀 것은 바로 이 검은 그림자가 날아가면서 일으킨 미세한 바람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장 무사의 실력으로는 그것이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쓴 사람은 지붕 위에 조용히 앉아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주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음향이 귀에 들려왔다. 벽에 붙어서 찌르륵거리는 벌레들의 움직임 소리, 먹이를 찾아 어디론가 분주하게 달려가는 쥐들의 움직임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역시 생각대로 세 명이다!’

검은 복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청력을 더욱 집중시켰다.

“주군, 이제 준비는 끝났습니다.”

얼굴이 여자처럼 해맑은 자가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 중화 전장주 하후극영을 보며 하는 말이다.

“그들은 모르고 있겠지?”

하후극영이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당연합니다. 내일 그들이 주군에게 와서 차를 마시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들이 절대로 눈치채면 안 된다. 이것은 천상천 천 년의 숙원이 달린 문제다. 알겠느냐?”

하후극영의 말에 두 사람이 머리를 숙였다.

“옛! 명심하고 있습니다, 무천 님.”

“그럼 가서 준비하라.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명!”

두 사람이 일어서더니 인사를 하고는 신형을 날렸다.

쉬익.

쌔앵.

그들이 창문으로 날아 나가자 감고 있던 하후극영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의 눈에서 야망의 빛줄기가 칼날처럼 뿜어졌다.

“크크크, 하하하! 이제 나는 무의 극을 넘어서게 된다. 기다려라, 은목전왕!”

하후극영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중화 전장의 장주이며 혈천신교의 문상인 하후극영이 무천이라니. 사람들이 알면 눈이 벌컥 뒤집힐 일이었다.

이내 더욱 놀랄 만한 일이 하후극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황천주 등만도, 빙혈묵섬도 설대총. 너희들은 천상마력이양대법(天上魔力移讓大法)으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너희들의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들어 세상의 주인이 될 테니까. 흐흐흐.”

하후극영의 수려하던 얼굴이 일그러지며 징그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맙소사! 천상마력이양대법이라니?’

검은 복면이 흠칫 몸을 떨었다. 언젠가 무황성의 비고에서 ‘천상마력이양대법’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는 복면이었다.

천상마력이양대법을 시전하면 다른 사람의 능력과 마력을 동시에 빼앗아올 수 있었다. 만약 생사경의 고수가 가진 내력과 능력을 가진다고 생각해봐라. 별 볼 일 없던 범부가 하루아침에 무의 최고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천상마력이양대법이었다.

하나, 그 대법을 시행하려면 2가지 기물이 있어야 했다.

하나는 북해빙궁에 있다는 만년빙정옥(萬年氷情玉). 다른 하나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만년화령정(萬年火靈精)이다. 극음의 영단과 극양의 영단이 바로 이 2가지였다.

그런데 천상마력이양대법을 시전하려는 것은 그 2가지가 모두 있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안 돼! 어떤 수를 쓰든 이것은 막아야 한다!’

복면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릴 때였다. 창문을 내다보고 있던 하후극영이 번개처럼 밖으로 쏘아져 나왔다.

쫘악.

그의 손에서 한 줄기 하얀빛이 쏟아져 나왔다. 밤하늘을 가르는 하얀빛. 그것은 길게 늘어진 검이나 마찬가지였다.

사각.

서걱.

흰빛이 지나가는 모든 곳의 물질들이 절단되어 주저앉았다. 무시무시한 유형 수강! 하후극영의 절대 신공인 천극전륜신공(天極轉輪神功)이었다.

쿠쿠쿵!

화원 밖에 있던 아름드리나무들과 바위들이 일격에 잘라져 주저앉으며 뽀얀 먼지를 일으켰다.

“내가 잘못 들었는가?”

주위를 둘러보는 하후극영의 얼굴에 짙은 의심이 어렸다. 방금 선명하지는 않지만 뭔가 움직이는 소리를 분명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무리 내력을 확장해도 기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장주님?”

그때 발소리가 들리더니 위사들이 달려왔다. 밤중에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는 그만큼 컸던 것이다.

“아니다. 하도 갑갑해서 무공을 사용해봤다. 돌아가거라.”

“옛, 장주님.”

위사들이 돌아가자 하후극영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시진 후, 지붕 위에서 하나의 인영이 스르르 일어섰다.

“후~ 목이 날아갈 뻔했다!”

복면은 질린 표정을 한 채로 몸을 날렸다. 무음무영의 경공. 조용히 날아간 복면인이 내려선 곳은 중화 전장의 책사인 동중산의 거처였다.

방 안에 들어선 복면인이 얼굴을 감았던 두건을 벗었다. 그러자 나타나는 얼굴, 그것은 바로 책사 동중산이었다.

동중산, 천계의 비밀 무사로 흑영 5호가 바로 그였다.

“절대로 그 대법이 시행되면 안 된다!”

서탁에 앉은 동중산의 얼굴에 고심이 어렸다. 지금 그에게 하후극영이 무천이라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이미 이곳에 침투할 때 그가 무천이라는 가정하에 파견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후극영이 천상마력이양대법을 시전하면 무극경의 최고수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동중산의 눈이 반짝 빛을 뿌렸다.

‘그래, 그들을 일으켜야지. 이게 바로 꿩 먹고 알 먹기다! 흐흐흐.’

동중산의 작은 눈에 웃음이 넘실거렸다.

* * *

중화 전장의 거대한 부지를 둘러싼 담장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유민촌이 나타난다. 원래 이들은 중원 각지를 떠돌던 유민들.

70년 전, 중화 전장의 하후극영은 불쌍한 유민들을 이곳에 모아다가 정착시켰다. 그때부터 이곳은 유민들의 마을이 되었고, 천진의 사람들은 하후극영을 칭송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돈을 쓰는 것은 쉽지 않다. 한데 하후극영은 그렇게 한 것이다.

옹기종기 붙어 선 움막집을 따라가면 산 밑에 다른 움막보다는 큰 집이 나온다. 이곳은 유민촌의 촌장 집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오늘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그분께서 천호 일 단과 이 단을 데리고 북경을 평정했습니다. 이미 그분은 자신이 혈천신교의 존주라는 것을 밝혔단 말입니다.”

방에는 10여 명의 남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했다.

주먹을 쥐고 열변을 토한 사람은 이곳 유민촌의 부촌장인 구양용길이었다.

“장로님, 이젠 존주님에게 가야 합니다. 주군께서 혈전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불타는 듯한 구양용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호응했다.

“옳소!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형님?”

사람들의 외침에 촌장은 그저 눈만 감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어찌 혈천신교를 논하고 있으며, 존주, 즉 하인을 주군으로 인정하고 있단 말인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촌장은 머리가 아팠다.

‘문상, 당신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거요? 대체 무엇을…….’

촌장, 예전 혈천신교의 제3장로였던 잔혹마도(殘酷魔刀) 호현민기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랬다. 이들은 예전 혈천신교의 사람들로, 홍의겁 이후 문상에게로 온 부하들이었다.

이곳에서 때를 기다리며 칼을 간 지 어언 70년. 그동안 옛 전우들은 나이가 들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남은 사람들은 이들 10여 명이 전부였다.

현재 이곳 유민촌에는 1만의 무사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간 동료들의 후예들로 바로 이들, 10여 명이 키운 새로운 혈천신교의 무사들이었다.

귀갑멸천대(鬼鉀滅天隊).

70년 전의 홍의겁을 절대로 잊지 않고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 그것이 지금 1만 혈천신교 무사대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이들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하북팽가의 결전이 있은 후였다.

바로 은목전왕이 혈천신교의 존주라는 소문!

그때 너무 기뻐 하후극영에게 달려갔던 잔혹마도 호현민기는 호된 질책만을 받았다.

은목전왕이 존주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그가 만일 적이라면, 이것이 음모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후극영의 말에 호현민기는 할 말이 없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1만의 무사들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가! 그래서 호현민기는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북경에서 소식이 들어왔다. 바로 하북팽가의 차거현 혈전 이후 북경에 파견한 부하들에게서였다.

<은목전왕은 혈천신교의 존주로 확인되었음. 그를 따르는 무인들은 검은 옷에 붉은 호랑이가 그려진 옷을 입음. 바로 혈천신교 무상의 직속 무사대인 천호 일 단과 이 단으로 확인됐음.>

그 소식을 들은 후, 호현민기는 즉시 떠나려고 했지만 하후극영의 명으로 발목이 잡혀 있었다.

<아직은 아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때가 되면 출전할 것이다.

-문상>

이것이 하후극영의 명이었다.

“으음!”

호현민기가 신음을 흘릴 때였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속에서 유일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아니, 장로님, 내일 문상을 만나요. 우리가 왜 기다려야 하는지, 만약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그는 다른 속심이 있는 것입니다.”

말을 한 여자는 한 자루 장검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는 이였다. 바로 제3장로 호현민기가 120세에 본 딸 호현자령이었다. 현 혈천신교 귀갑멸천대의 대주로, 그녀는 1만 귀갑멸천대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만약 문상이 다른 속심이 있다면?”

호현민기의 말에 방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말 하후극영이 다른 속심을 가지고 있다면 혈전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키가 6척이 넘는 호현자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여장부로 손꼽히는 불같은 무인이었다.

“그럼 문상의 목을 쳐야죠. 혈천의 율법은 지엄합니다, 장로님.”

그녀의 단호한 말에 다른 사람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자신들의 후예인 그녀의 행동이 거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 자네들의 생각도 같은가?”

“허허. 형님, 역시 우리가 자령이를 잘 키웠습니다.”

“흐흐흐. 아암, 자령인 우리 열 명의 공동 전인이 아닌가?”

모두 자랑스럽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들은 예전 혈천신교 시절에 호현민기의 직속 수하들이었던 사람들이다. 지금은 호현민기를 형님으로 삼고 있고, 귀갑멸천대의 원로들이었다.

호현자령은 이들의 무공을 모두 전수받아 한몸에 그들의 절기를 지니고 있었다.

“자네들의 생각이 그렇다면 좋네. 내일 아침에 자네들은 나와 함께 문상을 만나보세.”

“알겠습니다, 형님.”

“그게 좋겠습니다.”

원로들이 저마다 대답할 때였다.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네, 호현민기.”

순간 원로들의 몸에서 지독한 살기고 뿜어지고, 방 안이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누구냐!”

“나와라!”

원로들은 기가 막혔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초절정인 호현자령을 제하고는 모두 심공의 경지였다. 한데 그런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고 방 안에 침입한 자가 있었다? 정말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그때 호현자령의 손이 어깨로 올라가고, 그녀의 등에서 번쩍 빛이 일어났다.

촤왕.

쐐애액.

그녀의 등에서 뽑힌 한 자루 도가 천장을 난자했다.

까앙!

“허, 정말 대단하군! 도를 거두게, 자령 소저. 난 적이 아닐세.”

그녀의 도가 허공을 난자한 순간 천장의 대들보에서 일어서며 말하는 사람은 중화 전장의 책사 동중산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한 자루 섭선으로 그녀의 도를 막고 있었다.

“책사 동중산?”

“그렇소, 혈천신교의 삼 장로.”

빙긋이 웃는 그를 본 호현민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동중산, 그대가 무공을 가지고 있다니 놀랍구려!”

호현민기는 실제로 놀라고 있었다. 딸 자령의 도는 섭선으로 간단하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초절정의 경지이기에. 하나, 동중산은 가볍게 막았다. 더구나 자신이 쏘아 보낸 진기에도 그의 내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동중산의 실력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저자가 적이라면 이 자리에서 죽여 없애야 했다. 1만 혈천신교도들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알았는지 동중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그대들의 적이 아니오. 다만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내 신분을 말할 수는 없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문상 하후극영의 배신을 알려 주려는 것이오.”

“뭣이? 문상의 배신?”

너무도 뜻밖의 말에 놀라 호현민기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고, 나머지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다. 문상의 배신이라니? 그것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게 사실인가요?”

호현자령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동중산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녀를 본 동중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허, 이 계집은 정말 대단하군!’

동중산이 보기에 호현자령은 모든 것이 큼직큼직한 미인이었다. 키도 6척 반(195cm), 눈도 크고 가슴과 둔부도 다른 여자의 거의 2배나 크다. 한마디로 엄청난 거인이면서도 미인이었다.

이곳이 다른 곳이고 보는 사람들이 없다면 저런 여자를 한번 품어보고 싶었지만 동중산은 영리한 자였다. 지금은 이들을 이용하여 하후극영의 음모를 막아야 했다.

중원의 가장 강한 고수는 무황이 돼야 하고, 그래야 자신의 앞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소. 하후극영은 천상천의 무천이오.”

“뭐라고 했소? 그가 무천이라고?”

한 걸음 다가선 호현민기가 눈을 부릅떴고, 다른 사람들은 그만 멍해졌다. 혈천신교의 문상이 불구대천의 원수인 무천이라니! 갑자기 하늘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원래의 하후극영을 죽이고 변장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무천인 것만은 확실하오. 그는 지금…….”

동중산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좌중에 긴장감이 맴돌고 각자가 뿜어대는 살기로 차갑게 냉각되었다.

‘이젠 됐다. 무천, 너는 이들과 함께 죽어라. 천계의 천하를 위해. 흐흐흐.’

무표정하게 모든 것을 말했지만 동중산의 내심은 죽을 지경으로 기뻐서 똥집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눈이 슬쩍 호현자령의 육체를 훑고 지나갔다.

‘쩝! 저 풍만한 육신을 맘껏 가지고 놀면 좋으련만. 으, 아깝다!’

하나 지금은 그럴 새가 없었다. 아쉽지만 대계를 위해 포기할 수밖에 없는 동중산은 입맛을 다셨다.

* * *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우릴 불렀나?”

대문을 들어선 사황천주 등만도의 물음에 대청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하후극영이 웃음을 지었다.

“어제 좋은 것이 들어왔네. 자네, 신유주(神乳酒)라고 들어보았나?”

“신유주라면 진시황이 도사들을 시켜 만들게 했다는 불로장생주가 아닌가?”

등만도의 뒤를 따라 들어온 빙혈묵섬도 설대총이 묻자 하후극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역시 빙궁의 신이로군. 맞네. 바로 그 신유주 한 병이 나에게 생겼네.”

“어허! 그럼 우리가 장생불로의 술을 맛보게 되었단 말이지?”

등만도가 놀랍다는 듯 벌써부터 입맛을 다셨다.

대청에 차려 놓은 식탁에 앉은 하후극영이 손바닥을 마주쳐 짝 소리를 내자 안에서 대답 소리가 들렸다.

“곧 들여갑니다, 장주님.”

그리고 감색 옥병을 든 하녀가 미끄러지듯 걸어 나왔다.

“이게 신유주란 말이지?”

등만도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신유주를 보며 군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백몽환(白夢患)이란 병을 앓고 있었다.

백몽환은 밤에는 정상이지만 낮에는 잠만 자는 병이다.

왜 그런 병이 생겼는지 몰라도 등만도는 백몽환 때문에 늘 이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저 신유주를 먹으면 씻은 듯이 나을 수도 있었기에 그의 눈은 신유주에 박혀 떨어질 줄 몰랐다.

전설에 의하면 신유주는 한 잔만 먹어도 만병이 없어지고 2백 살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등만도의 마음은 급했다.

“어서 마셔야지, 뭘 하고 있나?”

“거참, 급하긴 급하네. 얘야, 어서 두 분 대협에게 신유주를 따라드려라.”

“예, 장주님.”

쪼르륵.

하녀가 옥잔에 신유주를 따르자 등만도는 침을 꿀꺽 삼키고 덥석 잔을 잡았다. 그리고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하후극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여기 독을 넣은 건 아니겠지?”

“허! 이거 내가 몹쓸 놈이 되었구먼. 자, 나도 한 잔 먹지. 그럼 되겠는가?”

하후극영이 하녀가 따른 술을 마시려고 할 때였다. 등만도가 머리를 흔들며 그의 술잔을 빼앗고 자신의 술잔을 하후극영 앞에 밀어놓았다.

그것을 본 하후극영의 눈꺼풀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자, 이것을 마시게. 자네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이건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의 예의지. 어서, 단숨에 마시게나.”

말하는 등만도의 얼굴이나 하후극영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어려 있지만 몸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뿜어지고 있었다.

파싹. 팟팟팟.

그들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으로 식탁 위의 그릇들이 가루로 흘러내리고 식탁과 의자마저 부서져 내렸다.

“어떻게 알았지, 등만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하후극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고 살기 짙은 말이 흘러나왔다.

“그보다 자네가 천상천의 무천이라는데, 사실인가?”

뒤에서 보고 있던 설대총의 말에 하후극영이 빙긋이 웃었다.

“모르면 좋았을 것을. 그럼 너희들은 편히 죽을 수 있었을 것인데, 어쩔 수 없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하후극영이 손짓하자 사방에서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옷에 그려진 표식, 제왕무적대(帝王無敵隊)!

“제왕무적대?”

등만도와 설대총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난 믿지 않았는데, 사실이로군!”

“그럼 이젠 싸우는 일만 남았는가?”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하후극영이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난 자네들을 이용해서 무극경에 오르려고 했지. 어떤 방법을 써도 그놈의 생사경을 도저히 넘을 수 없었거든. 그래서 말인데, 그냥 당해주지는 않겠지?”

하후극영의 능글거리는 말에 설대총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가 빙풍이 쏟아지는 눈으로 하후극영을 노려보았다.

“우리 빙궁과 맺은 약조도 모두 거짓이겠군.”

“당연하지. 자네들은 천상마력이양대법의 희생물일 뿐이네. 미안하지만 어쩌겠나, 무림은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정의 아닌가?”

“천상마력이양대법을 시전하려면 만년화령정과 우리 북해빙궁의 만년빙정옥이 있어야 하는데…….”

설대총이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갸웃거렸다. 만년빙정옥은 28년 전 아들이 가지고 갔고, 그것은 진야동의 손에 들어갔었다.

그런 설대총을 본 하후극영이 소매 속에서 투명한 알을 꺼내들었다.

“만년빙정옥은 여기 있지. 진야동은 내 수하. 자네 아들에게 빼앗아서 가져온 것일세.”

“더러운 놈! 그래도 일파의 지존이라는 자가 그런 비열한 짓을 하다니. 오늘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설대총이 아니다.”

촤앙!

분노한 설대총이 빙천도(氷天刀)를 꺼내들자 방 안에 얼음 굴에 떨어진 듯 차가운 기운이 몰아쳤다.

하지만 하후극영은 여전히 능글거렸다.

“미안하이. 내가 이런 짓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은목전왕, 그자가 무극경이라고 하더군. 그의 필생의 적인 내가 약해서야 되겠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 짓이니 이해하게.”

“닥쳐라, 하후극영! 이 등만도가 네놈의 눈엔 우습게 보였단 말이지? 네놈을 죽여 억울하게 죽어간 사황천 무인들의 한을 갚을 테다. 나서라!”

촤앙.

이번에는 사황천주 등만도가 뱀처럼 구불구불한 기형검을 뽑아들었다. 등만도의 애검인 사혈검(蛇血劍)이다.

“아니, 아닐세. 괜히 내가 힘을 쓸 필요는 없지. 자네들은 얘들이 상대할 거네. 저들을 죽여라!”

하후극영이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명을 내리자 제왕무적대가 앞으로 나섰다.

“무천의 명이시다. 저들을 죽여라.”

“명.”

하얀 갑주를 걸친 자와 붉은 갑주를 걸친 자가 앞으로 나서며 명을 내리자 제왕무적대가 두 사람을 빙 둘러싸고 나머지는 뒤로 늘어섰다. 약 5백 명의 무인들. 등만도는 바싹 긴장했다.

-이보게, 얼음 친구! 이것들 모두 초절정의 고수들이야.

-그렇군. 하지만 우린 일파의 지존 아닌가? 쫄아서 도망칠 수는 없지. 안 그런가?

설대총의 전음에 등만도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크크크, 당연하지. 저놈의 목을 비틀지 못하면 난 더 이상 사황천주가 아니야.

-나도 마찬가질세. 저놈이 내 아들을 죽였거든.

두 사람이 전음을 마치고 무기를 수평으로 들자 하후극영이 중얼거렸다.

“발악해봐야 쓸데없는 짓. 그저 시간이 조금 걸릴 뿐, 너희들은 어차피 내 먹이다.”

“아니지요. 무천, 싸움은 해봐야 안답니다.”

“누구냐?”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깜짝 놀란 하후극영이 머리를 홱 돌렸다. 내성으로 들어오는 담장 위에 동중산이 서 있었다. 아니, 그만이 아니라 잔혹마도 호현민기와 그의 전우들 10여 명, 그리고 거대한 한 자루 장검을 연상시키는 귀갑철마대의 대주인 호현자령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네놈이!”

“하하! 이제 무엇을 속이겠소? 천상천의 무천 님, 오늘 당신은 도망칠 길이 없습니다.”

동중산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하후극영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은밀하게 전음을 보냈다.

-무천 님, 당신이 천계를 버리려고 한 것은 크나큰 잘못이었습니다. 천계의 계주이신 무황은 당신을 척살하기로 결심하셨지요.

동중산의 전음을 들은 하후극영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크하하! 결국 기른 개에게 발뒤축을 물렸군. 하나 그깟 발뒤축은 시간이 지나면 나을 터. 네놈들을 모두 죽이면 그만이다. 적면신룡!”

“옛, 무천 님.”

제왕무적대를 지휘하던 붉은 갑주가 앞으로 나서며 머리를 숙였다.

“백면신룡.”

“옛! 백면신룡, 명을 받습니다.”

이번에는 하얀 갑주를 입은 자가 앞으로 나섰다.

이 2명은 모두 하후극영의 충실한 부하들이었다.

“저것들을 죽여라.”

“명!”

스르릉.

백면신룡과 적면신룡이 검을 뽑아들고 몸을 날리자 1백여 명의 제왕무적대가 따라서 몸을 날렸다.

그것을 본 동중산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소매 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하늘로 쳐들었다.

순간 피융! 푸른빛을 뿜으며 하늘로 솟구치는 신호용 폭죽.

“저놈이!”

의아해하는 하후극영의 의심을 풀어줄 함성 소리가 천지를 진감시켰다.

두두두두!

그것은 1만 마리의 말들이 달리는 소리였다.

뒤흔들리는 대지, 구름처럼 일어나는 먼지기둥.

“배신자를 죽여라!”

중화 전장을 울리는 귀갑멸천대의 광포한 고함 소리. 열린 정문으로 검은 가죽옷을 입은 귀갑멸천대가 폭풍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마치 검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귀갑멸천대의 모습은 무시무시했다. 그것을 보는 하후극영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

“할 수 없군. 내가 나서는 수밖에.”

하후극영이 한 발 앞으로 내짚으며 설대총과 등만도를 쏘아보았다. 사실 이곳의 가장 강한 고수는 이 두 사람. 이들만 제거하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촹촹촹촹.

하나 하후극영이 그들과 싸울 새도 없이 잔혹마도 호현민기와 그의 10명의 부하들, 그리고 호현자령이 도를 뽑아들었다.

“하후극영, 네가 감히 우릴 속였단 말이지? 이놈!”

쐐애액.

마지막 말은 허공에서 들리고 호현민기와 함께 붉은 강기가 하후극영에게 쏘아졌다. 도와 몸이 일체가 되어 공격하는 신도일체(身刀一體)! 심공이 아니라면 감히 사용할 수도 없는 무공.

하나, 상대는 하후극영이었다.

빛처럼 쏘아지는 호현민기를 본 하후극영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걸리고, 놈의 손에서 한 줄기 빛이 번쩍하였다.

쩌엉!

하후극영의 손에서 뿜어진 하얀 빛줄기. 천극전륜신공의 전륜탄강(轉輪彈쾝)!

콰앙!

“큭.”

우당탕!

허공을 격하고 날아오던 호현민기가 돌덩이처럼 패대기쳐지며 그의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아빠!”

호현자령이 호현민기의 등에 손을 얹고 진기를 밀어 넣었다. 그제야 호현민기가 숨을 몰아쉬더니 가까스로 손을 들어 하후극영을 가리켰다.

“자령아, 저놈은 존주의 원수. 우리의 원수다. 저놈을 죽여라.”

“예, 아빠.”

그녀가 호현민기를 원로들에게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후극영, 우리가 모두 죽어도 네놈만은 반드시 죽인다.”

그녀가 이를 갈며 나서는 것을 본 하후극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호현자령 같은 무인은 장난감에 불과했다.

“크크크, 네년을 언제든지 먹으려고 했었다. 조금 기다려라. 네 애비 앞에서 열락에 겨워 몸부림치게 만들어주마.”

“죽어, 개자식아!”

분노한 그녀가 쏘아지려는 순간, 어떤 무형의 힘이 그녀를 칭칭 휘감았다.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력한 힘. 그녀로서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꼼짝도 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그때 한마디 말이 들려왔다.

“아가씨는 부하들을 데리고 저놈들을 맡아주게. 하후극영은 우리가 맡지.”

그것은 빙혈묵섬도 설대총의 말이었다.

현재 이곳에서 그나마 하후극영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설대총이었다. 사황천주 등만도도 설대총보다 한 수 아래.

호현자령은 커다란 덩치로 인해 영리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다. 그녀는 예상외로 영리한 여자였다. 그렇기에 지금 설대총이 자신을 막은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분하지만 자신의 실력으로는 하후극영에게 어림도 없었다. 심공에 오른 아버지가 단 한 수에 튕겨 나지 않았던가!

그녀가 도를 추켜들었다.

“귀갑멸천대여, 저 제왕무적대는 우리의 원수다. 저놈들을 쳐라!”

그녀가 몸을 날리자 귀갑멸천대가 광풍처럼 밀려 나갔다.

“와아아!”

“쳐라!”

“죽여라!”

말들이 달리는 소리, 도와 창이 부딪치는 격렬한 음향. 5백 명의 제왕무적대와 1만의 귀갑멸천대가 충돌을 일으켰다.

자욱하게 일어나는 피바람. 사방으로 날려 가는 끊어진 팔다리. 마당이 순식간에 살육장으로 변하였다.

“자, 이젠 우리도 붙어봐야지?”

설대총의 말에 하후극영은 히죽이 웃었다. 설대총은 생사경의 초입. 그 혼자로서는 자신에게 10초 안팎이면 죽는다.

하지만 등만도가 옆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10명의 귀갑멸천대 원로들 또한 분노로 눈을 번들거리며 다가온다.

하나 설대총과 등만도만 죽이면 나머지는 안중에도 없는 하후극영이었다.

“좋아, 너희들은 내가 직접 죽여주지.”

하후극영이 두 다리를 벌리고 두 손을 들어올렸다.

우르릉!

그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우웃!”

“이럴 수가!”

사람들은 기겁하였다. 마치 태풍이 몰아치는 대양의 한가운데에 놓인 것처럼 몸의 중심을 잡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설대총과 등만도는 조금 나았다. 역시 생사경의 무인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클클클. 나 하후극영이 괜히 천상천의 주인이 아니다. 어디 받아봐라. 전륜천살풍(轉輪天殺風)!”

휘오오오.

쿠쿠쿠쿠.

사방에서 몰려드는 무시무시한 대기의 기운. 사람들의 옷이 찢겨 날아가고 주위에 있던 바위들과 나무들이 깨지고 부서지더니 가루로 흩어졌다.

정말 가공할 무공에 사람들은 경악하였다.

“우웃! 피하라!”

“오십 장 밖으로 물러서라!”

경악한 호현자령이 몸을 날리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하나 벌써 무자비한 살풍에 휩쓸린 귀갑멸천대 1백여 명의 온몸이 갈가리 찢어졌다.

“크악!”

“아악!”

누가 몸을 잡아당긴 것처럼 찢기는 몸뚱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피분수. 그리고는 뼈와 살점이 분쇄되어 바람에 휩쓸려 버렸다.

“이놈! 멈춰라!”

분노한 설대총이 도를 들어 직선으로 찔러 들어갔다. 그의 도에서 은백색 빛이 번쩍하더니 전륜천살풍을 맞받아 차가운 폭풍이 짓쳐 들었다.

콰콰콰콰!

휘이잉.

대기가 비틀리며 아우성을 쳤고, 공기 속의 습기들이 단단한 얼음 알갱이가 되어 노호했다.

퍼엉! 펑펑펑!

대기가 터지며 수천수만 개의 얼음 알갱이들이 암기처럼 쏘아지자 하후극영은 급히 두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를 향해 쏘아지던 얼음의 암기들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콰- 콰쾅!

벽력탄이 터지는 것 같은 광폭한 폭음. 그것은 전륜천살풍과 설대총의 빙혈천섬풍이 대충돌을 일으킨 것이었다.

사방을 휩쓰는 거대한 기파. 땅이 움푹 파이고 거치적거리는 물체는 바위든 나무든 사람이든 가차 없이 부서졌다.

“이놈! 어디 이것도 받아봐라!”

번쩍.

설대총의 도가 수직으로 쳐들리고 하얀빛이 연이어 뿜어져 나왔다.

빙도천락(氷刀千落).

1천 개의 도가 하늘에서 쏟아지니 피할 곳은 없다!

쐐애액.

하늘이 온통 얼음의 칼날 천지였다.

그러나 하후극영은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굳건하게 버티고 선 그의 손이 한 바퀴 원을 그리자 투명한 원이 솟아나듯 나타났다.

전륜흡탄수공(轉輪吸彈手功)!

하늘을 덮고 새카맣게 쏘아지던 칼날들이 투명한 원 안으로 빨려 든다.

사람들은 눈을 부릅뜨고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어찌 강기의 칼날들이 빨려 들어간단 말인가? 그들은 지금 전대미문의 괴사를 보고 있었다. 하나 그 이치는 간단했다. 강기도 인간이 만들어낸 기의 집결체. 전륜흡탄수공은 강기를 빨아들여 다시 되돌려 주는 무공이었다.

“클클클. 설대총, 다시 간다.”

하후극영은 아주 신난다는 듯 손가락을 털었다. 그러자 엄청난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하후극영의 손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무수한 얼음의 칼날이 설대총을 향해 쏘아졌다.

쐐애액!

설대총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전면이 온통 하얀 실선으로 그어졌고, 수만 개의 칼날이 밀어닥쳤다.

“놈! 어림도 없다!”

내력을 모조리 끌어올린 설대총이 도를 휘두르자 대지가 몸부림을 쳤다.

쿠아아아!

그것은 빙해광폭멸(氷海狂爆滅)!

북해의 광풍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는가? 투명한 용 같은 빙풍이 쏘아져 오는 칼날을 막아섰다.

콰- 콰쾅! 쾅쾅!

대폭발.

사방으로 강기의 파편들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파괴의 태풍이었다.

“끄악!”

“커억!”

5백 명의 제왕무적대가 미증유의 힘으로 밀려드는 강기의 파편에 몸통이 잘리고 머리통이 터져 땅 위를 뒹굴었다. 설대총이 날아오는 칼날을 그들 쪽으로 비틀었기 때문이다.

“우아!”

“역시 빙혈묵섬도다!”

귀갑멸천대가 환성을 질렀다. 5백 명 중 2백여 명이나 되는 제왕무적대가 난도질당한 고깃점이 되어 쓰러졌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흥! 한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이제 그만 끝내자, 설대총.”

하후극영의 눈이 파란 살기를 띠었다. 지금까지는 설대총과 등만도의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 조심했지만 한계가 왔다.

그러나 놈은 생사경의 초입, 웬만한 공격으로는 죽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지. 일단 죽이고 본다.’

하후극영의 몸을 중심으로 대기의 기운이 급속도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설대총도, 등만도도 느꼈다. 이제 최후의 격돌이 다가온 것이다.

설대총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부용아, 북해빙궁을 부탁한다! 빙혈천섬멸(氷血天閃滅)!’

그의 옷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옆에서 함께 싸우던 등만도의 옷도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으하하! 이 사황 등만도가 그냥 죽을 수는 없지. 받아라. 사황파골육편공(邪皇破骨肉片功)!”

일순 대기가 숨을 멈추고 고요해졌다. 그리고 일어나는 섬광.

콰콰쾅! 콰콰쾅!

투명한 얼음이 중화 전장을 뒤덮으며 대폭발을 일으켰다.

산산이 부서지는 장원. 집도, 가산도, 담장마저 가공할 강기의 기운에 터져 나갔다.

“피하라!”

“물러서라!”

경악한 귀갑멸천대원들이 몸을 날렸지만 늦었다. 폭발과 진공상태를 휩쓰는 대기에 휘말린 그들의 육신은 너무 약했다. 찢어지는 육편들. 하늘로 치솟는 뼈 부스러기들. 중화 전장의 모든 것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대한 먼지구름이 하늘땅을 뒤덮었고, 중화 전장이 있던 곳은 움푹한 구덩이만이 남았다.

“이제 어떡하죠?”

폭발하는 순간, 모든 내력을 끌어올려 3백 장이나 도망쳐 겨우 살아난 호현자령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호현민기의 눈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모든 심혈을 기울여 키웠던 귀갑멸천대가 겨우 2천 명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나머지는 대폭발의 여파에 휩쓸려 저세상으로 갔다. 물론 천상천의 무천을 죽이긴 했지만 그에게는 귀갑멸천대의 무인 한 명이 더 소중했다.

하지만 어쩌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는 없었다.

“형님, 그들은 무인답게 죽었습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그렇습니다, 형님. 그들은 혈천신교의 사람답게 갔어요.”

원로들의 말에 호현민기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그래, 존주님에게 가자. 북경으로.”

“알았어요.”

호현자령이 돌아설 때였다.

“쿨럭쿨럭. 으음!”

폐허가 된 장원에서 억눌린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파앗!

호현자령과 원로들이 눈에 살기를 띠고 번개같이 날아갔다.

“아니, 저건 빙혈묵섬도 님?”

갈가리 찢긴 옷, 피가 흐르는 몸. 한 팔이 잘렸지만 빙혈묵섬도 설대총은 아직 살아 있었다.

“어서 저분을 살려야 한다!”

호현민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사실 빙혈묵섬도 설대총이 없었다면 이곳의 사람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후극영은 그만큼 강한 자. 아니, 하늘 위의 하늘이었다.

설대총은 이들에게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설혈도에게 달려들어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하였고, 귀갑멸천대는 주위를 경계하였다.

한 시진 후.

귀갑멸천대가 빙혈묵섬도를 데리고 떠나자 검은 장포를 입은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나타났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타난 사람은 분명 하후극영이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하후극영은 등만도와 설대총의 동귀어진에 의해 폭발 속에서 갈가리 찢겨 죽지 않았던가!

“이제 하후극영은 죽었다. 영원히. 흐흐흐.”

만족하게 웃으며 돌아선 하후극영이 하반신은 찢겨지고 상체만 남아 죽은 시신을 바라보았다. 바로 죽은 하후극영이었다.

“잘 가라, 나의 분신이여. 너는 할 일을 하고 갔다.”

하후극영이 돌아섰다. 천상천의 주인인 무천, 하후극영은 언제나 자신과 똑같이 변장한 분신을 두고 있었다. 지금 죽은 사람이 바로 그 분신인 것이다.

“자, 이젠 내 세상을 열어야지. 나의 신천지여!”

파앗!

하후극영의 신형이 파란빛과 함께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무극경에 오르지 않은 자는 펼칠 수도 없는 기막힌 수법이었다.

* * *

고요한 별궁의 호숫가에 앉은 태자 주곡창은 편안한 마음으로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았다. 이제 황궁은 안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진야동의 무리를 몰살시킨 은목전왕이 입성했고, 지금은 곤녕궁에서 황제를 치료하고 있었다.

“잘됐어! 그 애가 그런 영웅을 부마로 맞았으니, 이 나라의 홍복이야!”

주곡창은 하늘을 우러러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위기는 갔고 황제가 일어나면 황실의 정통이 제대로 설 것이었다.

“태자 마마, 오룡차이옵니다.”

박 상궁이 언제 왔는지 차를 들고 서 있었다.

주곡창은 황실에 진상되는 작설차보다는 오룡차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었다.

“아! 박 상궁, 그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못했군!”

주곡창이 진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 위기에서 박 상궁이 한 일이 적지 않았다. 그녀가 천룡어검을 은목전왕에게 가져다주지 못했다면 수많은 군사들과 고관대작들이 그렇게 쉽게 마음을 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마,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아니, 그대는 큰일을 했다. 해서 내가 표창하고 싶은데, 그대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

그러자 박 상궁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정말 말해도 될까?’

박 상궁이 주곡창을 연모한 지는 오래됐다. 하지만 신분이 미천한 일개 상궁이 태자를 마음에 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궁녀가 무엇인가? 말이 좋아 궁녀이지, 사실은 태자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품을 수 있는 노리개나 다름이 없다.

“허, 뭔가 있긴 하군. 어서 말해라. 내 그대의 공을 인정해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그제야 입술만 깨물고 있던 박 상궁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태, 태자 마마, 전 태자 마마를 무엄하게도 사랑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그녀의 말에 주곡창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박 상궁이 나를 좋아했던가?

“난 이제 이 황궁을 떠나 서호로 가려고 한다. 박 상궁, 그건 내가 더 이상 황궁의 후계자가 아니란 뜻이네. 이런 나를 따르겠는가?”

박 상궁이 몸을 가늘게 떨며 대답했다.

“마마, 전 마마가 어디를 가든 따를 것이옵니다.”

그녀의 대답에 흐뭇해진 주곡창은 손을 내밀어 박 상궁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손안에 느껴지는 몽실몽실한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 가늘게 떨고 있는 박 상궁을 잡아당긴 주곡창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뭉클.

그녀의 둥실한 가슴이 태자의 가슴에 닿으며 탄력 있는 공처럼 느껴졌다.

“내 그대와 여생을 같이하겠다.”

“고, 고맙습니다.”

박 상궁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것은 항상 쳐다보며 다가가기 힘들었던 사랑을 쟁취한 여인의 기쁨이었다.

기쁨에 떨고 있던 박 상궁은 태자의 손이 머리를 젖히는 것을 느꼈다.

꼭 감고 있던 눈을 뜬 박 상궁의 시선이 태자의 눈과 부딪쳤다.

“어멋!”

열기로 번들거리는 태자의 눈. 그것은 청춘의 힘이 넘쳐나는 남자의 그 무엇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박 상궁은 여자의 예민한 감각으로 전율하고 있었다.

태자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

박 상궁은 눈을 감고 몸을 떨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자라고 해도 입맞춤이 처음인 그녀로서는 그가 다가오자 기대감과 설레는 마음으로 온몸이 폭발할 것 같았다.

이내 태자의 뜨겁고 축축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아아!”

박 상궁은 자신의 입술이 통째로 빨려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아니, 입술만이 아니라 온몸이 태자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태자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붙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쭈읍.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고, 박 상궁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할딱거렸다. 주곡창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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