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하인천하
장청은 황하의 지류인 장하(長河)의 옆에 위치한 현이다.
콰앙!
“뭐라고 했느냐? 제갈만산, 소림이 어쨌다고?”
한 노인이 천둥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백발에 백염, 하얀 옷을 입은 정의의 표상. 바로 무황성주 헌원상제였다.
그의 앞에 제갈만산이 창백해진 얼굴로 보고를 하고 있었다.
“소림과 무당이 무황성을 치는 데 동참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에 따라 점창파와 공동파, 곤륜파도 합세했고, 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이런 개 같은 놈들이……!”
헌원상제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구파일방의 기득권을 지켜 준 것이 누군가? 바로 무황성이고, 자신 무황이었다. 그런데 형세가 불리하니 모든 문파가 안면을 몰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노로 푸들거리는 헌원상제를 바라보는 제갈만산은 착잡하였다. 지금까지 무림에서 무황의 일성은 곧 법이었다. 하나 이제 형세는 변하였다. 바로 은목전왕 때문이었다.
놈은 무림은 무림인의 것이라고 선포했고, 그 때문에 무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지금까지 무황성은 무림의 모든 것을 통제했기에 그로 인해 무인들은 많은 자유를 빼앗겼던 것이 사실이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광룡당의 숙청과 은정련에 대한 공격이었다. 광룡당 숙청 당시 도망친 자들이 무림에 소문을 퍼뜨렸고, 은정련은 암천대를 몰살시키고 이곳을 향해 파죽지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무림의 세가들이 재빠르게 은정련 쪽으로, 정확히 보면 은목전왕 쪽으로 돌아섰다. 이제 무황성을 따르는 문파는 몇 되지 않았다. 실상 무림 전체가 적으로 돌변한 것이다.
‘내가 과연 무황을 선택한 것이 잘한 것인가?’
제갈만산은 정말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자신이 갈 길은 없었다. 죽든 살든 무황이 이기는 길만이 살 수 있는 마지막 수였다.
그가 마음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성주님,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입니다. 은목전왕만 죽이면 다른 문파들은 다시 우리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분노로 어쩔 바를 몰라 하던 헌원상제가 우뚝 멈춰 섰다.
“좋아. 제갈만산, 놈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당연합니다, 성주님. 성주님이 아니라면 놈을 죽일 사람은 이 무림에 없습니다.”
재빨리 아첨을 한 제갈만산은 무황에게 방안을 제시했다.
“은목전왕을 처리한 다음 우리를 배반했던 문파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지금 남아 있는 각 문파의 무인들을 우리 말에 절대 복종하는 무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말인가?”
무황이 머리를 흔들며 물었다.
무림의 소식이 전해지자 무황성에 있는 각 문파의 제자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비록 무황성에 소속되어 있지만 실제로 몸담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문파이기 때문이었다.
“성주님, 우리에겐 천강활단(天쾝活丹)이 있지 않습니까?”
제갈만산의 말에 헌원상제는 눈을 부릅떴다.
천강활단!
그것을 먹으면 모두 강시, 아니 활시가 된다. 1천 년 전 천의무신이 주었던 약은 단 하루만 금강불괴의 몸으로 변하는 것이었지만 약제당에서 만든 천강활단은 달랐다. 암천대에 주었던 1백 구의 천강활시들이 바로 실험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제 천강활단을 먹으면 평생 활시가 되어 살아야 한다. 결국 이성을 잃은 강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헌원상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2만 명의 무인이 아니라 중원의 모든 사람들을 강시로 만들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더구나 각 문파의 제자들은 벌써부터 자신에게 등을 돌리려 하고 있지 않은가!
“좋아. 제갈만산, 무인들을 활시로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은목전왕, 그놈에 대한 정보는 있는가?”
“예. 놈은 내일쯤엔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제갈만산은 하인이 황궁에서 떠났다는 전서구를 이미 받았다. 그것은 뜻밖에도 무천이 보낸 전서구였다. 그때 그는 몹시 놀랐었다. 무천은 이미 중화 전장에서 죽은 것으로 알았는데 버젓이 살아 있는 데다 황궁에 있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갈만산은 무천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고하지 않았다. 만약 무황이 실패하면 자신이 몸을 의탁할 유일한 사람이 바로 무천이기 때문이었다.
“좋아. 이번 기회에 은목전왕, 그 애송이와 내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들은 모조리 없애버린다. 가서 준비하라.”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여 보인 제갈만산이 약제당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천하 객점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 * *
황하에 수백 척의 전선들이 떴다. 큰 돛을 단 전선과 작은 돛을 단 소형 전선들. 펄럭이는 깃발들에 적힌 붉은 글씨가 사람들의 눈을 찔러왔다.
‘은정련 수룡당.’
그런데 은정련 수룡당이라니? 은정련에는 수룡당이 없다. 하면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황하의 옆에 있는 번고현의 객점 꼭대기에서 강을 살피고 있던 무인들이 다가오는 전선들을 보고는 급히 자리를 떴다.
“부련주님, 황하에 수백 척의 전선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깃발에 은정련 수룡당이라는 글이 써져 있습니다.”
유령각의 정보원인 대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그들은 수룡당이 맞아요.”
“예? 수룡당이라고요?”
대원이 놀란 눈을 치켜떴지만 위소옥은 귀걸개를 보고 있었다.
“귀걸개 님, 출발해요.”
“흐흐. 알겠소, 부련주님.”
귀걸개가 밖으로 나가자 위소옥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유히 흐르는 푸른 물. 황하의 물결 위에 전선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중 가장 큰 배를 그녀는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저 배에 악소봉과 악소희라는 여인들이 있을 것이었다. 이미 하인의 전서구를 통해 황하십육채가 이곳으로 출동했다는 것을 알고 기다린 그녀였다.
‘하, 대체 몇 명의 여자들을 얻었단 말인가?’
위소옥은 속으로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전서구를 보면 하인은 벌써 여러 명의 아내를 만든 것 같았다. 이제야 뛰어난 남자일수록 여자가 많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그녀였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오직 하인만을 의지하고 사는 그녀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형님, 나가야죠?”
옆에 있던 진소화가 다가오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위소옥의 마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같은 여자이니 왜 그 마음을 모르겠는가!
“나가봐요.”
황하는 장관이었다. 위풍당당한 수백 척의 전선들이 기슭에 닻을 내리고 있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짙은 수염을 기른 남자와 호위 무사들. 그들의 가운데 인형처럼 깜찍한 2명의 여인이 위소옥의 눈을 찔러왔다.
“저 여인들인가?”
그녀가 무심히 하는 말을 들은 진소화가 얼핏 쳐다보았다. 말이 약간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반대로 뒤에 있는 당수해와 양설란, 허신영과 제완완, 선우미령은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나는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하인의 여자로서 같은 여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은정련 수룡당의 당주 악우궁이 부련주님을 뵙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악우궁이 포권을 하자 위소옥이 미소를 지었다.
“수룡당주님, 어서 오세요.”
“동생 악소봉, 형님을 뵙습니다.”
“동생 악소희, 형님을 뵙습니다.”
두 여자가 인사를 하자 위소옥은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반가워요, 동생들.”
그제야 부르나는 미소를 지었다. 위소옥이 그녀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마을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수천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기둥. 그것은 구파일방의 사람들과 각 중소 문파 사람들의 연합체였다.
“저건?”
“……!”
사람들의 눈은 오른쪽에서 달려오는 말들과 깃발을 보고 있었다. 누런 황룡이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 그것은 분명 황실의 표식이었다. 이 땅에서 황실이 아니라면 저런 깃발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주수연 공주 같아요.”
“그런 것 같군요.”
하지만 위소옥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말을 달려오는 7명의 여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인이 마르칸과 채국연만을 데리고 가자 스스로 떠난 여인들이 드디어 황하에 도착한 것이다.
* * *
천하 객점의 뒷마당에 5백 명의 무인들이 정렬하여 있었다. 하나같이 매서운 눈빛의 남자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이 조금 이상하였다. 약간 흐릿한 눈. 자세히 보면 눈에서 풍기는 기운은 광기였다.
“앉아.”
그들을 흐뭇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약제당주 천면만환(千面萬換) 동추림이 명을 내리자 5백의 무인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앉았다.
“일어섯.”
척척척척.
마치 혼이 없는 기계처럼 움직이는 무인들.
그들을 보고 있던 제갈만산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이럴 수가! 약제당주, 고생 많았소.”
“이건 아무것도 아니오. 오늘 밤만 지나면 이만의 무자비한 살인 무기가 생겨날 것이오. 크하하!”
동추림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연구하고 또 연구하던 천강마령활단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지금 천하 객점 안에서는 2만 개의 천강활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것만 완성되면 무황성 2만의 무인들은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새로운 무사들로 대체될 것이었다.
이 얼마나 벅찬 일인가? 저들은 아버지나 아내,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해도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행동할 살인 무기들이었다.
“잘했소. 그렇게 되면 강북에 도착한 놈들을 모조리 말살시킬 수 있소이다.”
“흐흐, 세상이 눈앞에 있는 것이지!”
제갈만산과 동추림이 의미 있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서 쏟아지는 야망. 그것은 이제 세상은 자신들의 것이라는 자신감이었다.
살락원은 장청에 있는 주점들 중에 최고의 주점이다. 요즘 이곳은 무황성의 무인들이 오는 바람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사람은 전쟁이 벌어지면 돈을 마구 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무인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살락원은 무인들로 흥청거렸다.
“황하의 건너편에 구파일방의 정예들이 쫙 깔렸다면서?”
무황성 천인대의 표식을 한 무인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심스러운 말로 동료에게 물었다.
“그래, 우리도 그런 얘기를 들었네. 소림과 무당을 비롯한 구파의 무인들이 그곳에 도착했다고 해.”
“젠장! 이거 도망쳐야 하는 거 아냐?”
서로 쳐다보는 이들은 소수 문파를 주축으로 한 무황성 광명당의 무인들이었다.
“쉿, 말조심하게. 사방에 제갈 군사의 정보원들이 깔렸어. 그런 말이 들어가면 언제 목이 스윽, 될지 모르네.”
그러자 말을 뚝 그친 그들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어렸다. 이미 수십 명의 동료들이 원인 모를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제갈만산의 척살대가 한 짓이라는 것을…….
-무황성의 종말이 다가오는군요.
살락원의 2층에 앉아 있던 죽립인들. 그들은 하인과 가여청, 마르칸과 채국연이었다.
오늘 새벽에 이곳에 도착한 하인은 일단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살락원에 들어온 상태였다.
이제 가여청은 승복을 벗고 간편한 경장에 무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 강 건너편에 위 매가 왔으니까.
하인의 전음에 가여청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으로 보아도 지금 무황성은 희망이 없었다. 일단 중원의 무인들이 무황성 타도를 외치며 강 건너편에 와 있었고, 여기 내부도 그리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무황성 의협당은 구파일방의 파견 제자들로 이루어진 당이다. 그들은 지금 혼란스러워할 것이 분명했다. 누가 자파와 싸우려 하겠는가?
그런데도 무황이 꿈쩍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하인은 이상했다.
-주공, 그냥 쳐들어가는 겁니까?
마르칸의 물음에 하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일단 천하 객점으로 가보자. 아무래도 이상해.
하인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유령각 정보원의 서신을 받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천하 객점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어제 그곳으로 간 5백 명의 무인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더구나 의원이란 의원은 총동원되어 그곳에서 무엇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들은 하인은 한 가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바로 천강활단이었다.
궁지에 몰린 헌원상제가 아직도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천강활단이라고 믿고 있는 하인이었다. 이미 은정련에 나타났던 천강활시들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그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주공.
그때 무인들이 속삭이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의협당은 휴식 명령이 떨어졌다는군.”
“아니, 왜? 당장 전쟁이 터질 판인데.”
“아마 무황이 선심을 쓰는 거겠지. 자파와 싸워야 하는 의협당이 아닌가?”
의협당은 구파일방에 적을 두고 있는 무인들. 전쟁이 터지면 자연스럽게 자파와 싸워야 할 운명이었다.
“그렇군!”
무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하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전음을 보냈다.
-의협당이 있는 거상련(車商聯)으로 가자.
-예.
마르칸과 채국연, 가여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상련은 이곳 황하를 중심으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연합체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황성 의협당의 본부로 활용되고 있었다.
‘뭔가 일이 터지고 있어. 하지만 무황, 내가 온 이상 너의 꿈은 부서진다.’
하인이 옆에 있는 가여청의 몸을 덥석 안더니 하늘로 솟구쳤다.
‘어멋!’
가여청은 깜짝 놀랐지만 곧 하인의 가슴에 얼굴을 붙였다. 이곳에서 가장 무공이 약한 그녀였다.
구름 속으로 날아오른 하인이 자취를 감추자 채국연도, 마르칸도 허공으로 솟구쳐서는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무인들이 보면 경악할 은신술이었지만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 *
의협당주 종리경헌은 무당파의 일 대 제자다. 하지만 무황성 의협당을 맡은 지 벌써 20년이 넘어 이제는 자신이 무당의 무인이라는 생각보다는 무황성의 무사라는 자부심이 더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복잡했다. 은목전왕을 척살한다는 전쟁이 이제는 자파와 싸움을 벌이는 것이라 생각하자 그만 낙심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무당은 자신을 키워준 본산이었기 때문이다.
“당주님, 천명 대사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어서 모셔라.”
종리경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명 대사는 소림의 무인이고 구주팔기의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왔으니 같은 구파일방의 사람으로서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허허, 이거 비호검이라는 당주의 안색이 말이 아니군. 무당파 때문에 그러는가?”
방에 들어선 천명 대사의 말에 종리경헌은 머리를 끄덕였다.
“예, 장로님. 전 무황성의 당주로서 지금까지 긍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파와 싸워야 한다니 마음이 복잡합니다.”
비호검 종리경헌의 말에 천명 대사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멍청한 놈의 새끼.’
이제야 자신을 이곳에 보낸 무황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바로 이런 자들 때문에 무황은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끝이지. 너희들은 나 천명의 야망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될 것이다!’
속으로 중얼거린 천명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자네 마음은 내가 알지. 그래서 이곳에 올 때 무황을 만났네. 그분도 마음 아파하시더군. 해서 자네들에게 오늘 휴식을 준 것이야. 내일이면 싸움이 벌어질 터. 오늘은 마음껏 마시고 즐기게. 그리고 이건 무황이 보내준 천황단(天黃丹)이야. 삼천 알이니 자네의 협의당 전체에게 모자람이 없을 걸세.”
천명이 가져온 함을 열자 누런 알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종리경헌의 입이 딱 벌어졌다. 천황단이 어떤 것인가? 저것은 무황성에서 가장 중요한 단약이었다.
천황단은 전설의 천년화령초(千年火靈草)와 구천옥지액(九泉玉芝液), 구엽선초(九葉仙草)를 섞어 만든 천고의 보약이었다. 한번 먹으면 내공이 30년 이상 늘고 피부가 강철처럼 단단해지는 영약, 그것이 바로 천황단이었다.
“아니, 이걸…….”
“그래, 무황께서는 자네들에게 결정권을 맡겼네. 일단 구파일방이 왜 이번 싸움에 나섰는지 모르지만 곧 사신을 파견할 걸세. 그동안 자네들은 공력을 높이며 쉬고 있게. 그러나 정말 구파일방과 싸운다면 무황은 자네들이 뒤로 빠지길 바라네.”
천명의 간교한 말에 종리경헌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원래 무공만을 알며 교활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바로 종리경헌이었다.
“어서 부하들에게 먹이게. 그래야 무황도 기뻐할 것이 아닌가?”
“장로님, 무황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암, 전하지. 어서 사람들에게 먹이게.”
‘병신 새끼. 어서 먹어라. 그럼 네놈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으흐흐.’
천명은 속으로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대원들을 모이게 하라. 천황단을 나눠줘야겠다.”
“알겠습니다, 당주님.”
옆에서 듣고 있던 부하가 급하게 달려 나갔다. 그도 무황의 배려에 감사한지 눈 밑이 붉어져 있었다.
댕댕댕댕.
곧 울려 퍼지는 종소리. 그것을 듣는 천명은 웃음이 터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이제 곧 3천의 무자비한 살인 병기가 탄생할 것이고, 구파일방은 지들이 키운 무인들의 칼에 맞아 죽어갈 것이었다.
‘흐흐흐. 무황, 역시 당신은 세상을 정복할 재목이었소!’
천명은 만족한 시선으로 마당에 모이는 의협당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들어라, 의협당의 형제들아. 무황께서 우리에게 천황단을 보내주셨다. 이것을 먹으면 피부가 강철처럼 단단해지고 삼십 년의 내공이 늘어난다. 하지만 무황은 우리가 자파와 싸울 것을 염려해 뒤로 물러서라고 하셨다. 때문에 난 오늘 결심했다. 분명 구파일방은 은목전왕의 꼬임에 넘어간 것 같다. 해서 이 약을 먹은 후 난 황하를 건너가겠다. 가서 구파일방의 사람들을 만나보겠다. 너희들의 생각은 어떤가?”
웅성웅성.
의협당의 무인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황이 그 귀한 천황단을 보내주다니? 이건 생각 외였다. 하지만 내공이 높아진다는 것에 반대할 무인은 없었다.
“일단 이 천황단을 먹고 운기조식하라. 그동안 나는 황하를 건너갔다 오겠다. 그대들은 내 생각을 따르겠는가?”
“따르겠소.”
“찬성이오.”
무인들이 외치자 종리경헌은 부하에게 눈짓하였다.
“자, 순서대로 받으시오. 딱 한 알만이오.”
사람들이 천황단을 한 알씩 받아 입에 넣으려는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여인의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천황단이 아니라 사람을 강시로 만드는 천강활단이에요.”
그 말에 약을 입에 넣으려던 무인들이 기겁했다. 강시가 되는 약이라니?
“누구냐? 감히 누가 무황의 선의를 모함하는 것이냐!”
이제 곧 강시가 될 3천의 무인들을 보며 실실 웃고 있던 천명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어떤 놈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단 말인가?’
원래 의협당은 강시가 되면 자신의 부하가 될 운명이었다. 3천 구파일방의 무인들이 강시가 되고 부하가 되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천명이었다. 한데 그 일을 방해하는 자라니!
당장 쳐 죽일 기세로 사방을 둘러보던 천명은 흠칫 놀랐다.
허공이 일렁이더니 한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죽립을 벗은 채국연이었다.
“너, 너는 채국연?”
깜짝 놀란 천명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현빙마녀 채국연. 나이는 자신보다 많이 어리지만 구주팔기의 한 명이고 천명보다 무공이 강한 여자였다.
“현빙마녀다!”
“구주팔기 채국연이다!”
무인들이 채국연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천강활단을 꼭 쥐고…….
그때 종리경헌이 나섰다.
“채국연 님, 오랜만입니다.”
“그렇군요, 당주.”
그녀는 무황성 젊은 무인들의 우상. 지금은 하인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협당 무인들은 적의를 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 말은 무슨 소립니까?”
종리경헌의 말에 채국연이 내공을 실어 외쳤다.
“여러분, 이 약은 내공을 높여 주는 천황단이 아니라 당신들을 강시로 만들 천강활단입니다!”
“뭐라고?”
“어떻게!”
무인들이 아연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황이 자신들을 강시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 아닌가?
“닥쳐라, 이년! 속지 말라. 저 계집은 무황성을 배신하고 은목전왕에게 몸을 준 창녀다. 그런 년을 믿는가? 저년은 무인들과 무황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것이다.”
다급해진 천명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3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아니, 쏘아져 내렸다.
“엇!”
깜짝 놀란 천명이 번개처럼 보법을 밟았지만 하인의 손을 피할 수는 없었다.
“컥!”
어느새 하인의 손이 천명의 목을 쥐고 있었다.
“……!”
“……!”
무인들은 갑자기 벌어지는 일에 목구멍으로 침만 삼키고 있었다.
천명은 구주팔기의 한 명이다. 하지만 그런 천명 대사를 은목전왕은 간단하게 제압했다.
‘역시 은목전왕이다!’
‘과연!’
이미 은목전왕은 적아를 떠나서 중원 무인들의 우상이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위진시킨 무인. 황궁의 수만 무사를 제압한 경천동지할 무공. 젊은 무인들의 우상이 될 만한 사건들이었다.
“천황단인지, 강시로 만드는 천강활단인지는 먹어보면 알겠지. 그렇지, 천명?”
싱글거리는 하인의 말에 천명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하인이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것이다.
“네,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천명, 넌 너무 약해. 해서 네 무공을 삼십 년쯤 높여 주고 이 말랑말랑한 피부도 강하게 해주려고. 어때, 좋은 생각이지?”
하인의 말에 천명은 눈알만 뱅글뱅글 굴렸다.
그때 하인이 멍하니 서 있는 종리경헌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주, 약을 한 알 주겠나?”
자연스런 반말이었지만 종리경헌은 그 말이 응당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일대 종사가 뿜어내는 기세에 종리경헌이 눌렸기 때문이다. 하인은 무극경에 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무형의 기를 뿜고 있는 것이었다.
“예? 아, 예.”
종리경헌이 약을 주자 천명의 얼굴이 새카매졌다. 저것을 먹으면 야망은 둘째 치고 강시가 된다.
천명이 발작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안 돼. 난 싫다.”
“흐흐. 이거 왜 이러시나, 천명? 이걸 먹으면 내공이 삼십 년이나 늘어나. 그건 네 입으로 말한 것 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너에게서 그걸 보고 싶어 해. 자, 어서 먹어.”
하인이 약을 입에 넣으려고 하자 천명은 기겁했다. 어떻게든 강시가 될 수는 없었다.
“모두 말하겠습니다. 은목전왕, 용서해주시오.”
“뭐 말인가? 알아야 용서를 해주지.”
하인이 천연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천명은 몸서리를 쳤다. 웃고 있지만 하인의 투명한 눈은 웃지 않았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 같은 하인의 투명한 눈.
은천섭심마안(銀天攝心魔眼)에 노출된 천명은 머릿속이 헝클어지며 의지력이 마비됐다.
그가 허겁지겁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건 천강활단이 맞습니다.”
“왜 이 사람들에게 먹이려고 했지?”
“그건 저들이 구파일방의 무인들이고 정예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무인들이 치를 떨었다.
“맙소사! 어떻게 무황이?”
“죽일 놈들!”
하인이 슬쩍 전음을 보냈다.
-무황의 정체를 넌 알고 있지? 천명, 이 사람들 앞에서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넌 강시가 될 것이다.
‘허걱!’
하인의 전음에 천명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이미 은천섭심마안에 심신을 장악당한 그로서는 버틸 방법이 없었다.
“무황은 천상천의 천계 계주요. 그는 무황성 이만의 무인들을 모두 강시로 만들어 세상을 정복하려고 했소. 지금 천강활단이 약제당에 있소.”
그제야 하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약을 천명의 입에 넣고 목을 탁 쳤다.
“안… 윽!”
몸부림을 치던 천명의 식도로 내려간 천강활단이 위 속에 들어가 스르르 녹았다.
“크르르르.”
잠시 후, 사람들은 천명의 상태를 보고 경악했다. 천명의 눈은 흐릿해졌고 마치 말 잘 듣는 짐승 같았다.
“자, 똑똑히 보라. 이것이 무황이 당신들에게 바라던 것이다.”
말을 끝낸 하인이 천명에게 명하였다.
“앉아.”
“크르르.”
“일어서.”
“크르르르.”
천명은 말 잘 듣는 애완견처럼 명을 따라 움직였다.
“저 나무에 머리를 박아라.”
“크르르.”
하인이 마당에 있는 아름드리 버드나무를 가리키자 천명의 신형이 비호처럼 날아갔다.
쩍. 콰직.
천명의 머리가 나무에 부딪히며 박살이 났다. 쏟아지는 허연 뇌수와 핏물이 사방으로 튕겼지만 주변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게 조용해졌다. 자신들도 저렇게 될 뻔했다는 것에 무인들이 분노한 것이었다.
“보았는가? 이것이 무황의 정체다. 지금 천하 객점에 있는 약제당에서는 이런 약을 이만 개나 만들었다. 바로 무인들을 말 잘 듣는 개처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죽여라! 무황을 찢어 죽이자!”
“가자! 약제당을 공격하자!”
무인들이 분노하여 검과 도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분노의 함성을 질렀다.
그때 종리경헌이 하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은목전왕 님, 우리를 이끌어주시오. 오직 당신만이 우리를 이끌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자 무인들이 무기를 땅에 내려놓고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은목전왕 님, 우리를 이끌어주시오.”
“우리를 버리지 마시오.”
무인들이 하나같이 외치자 가여청이 하인을 쳐다보았다.
“저기, 어쩔 수 없네요.”
그녀의 말에 하인이 손을 들었다. 조용해지는 마당. 그 위로 하인의 음성이 울렸다.
“난 무황을 죽이고 무황성을 해체할 것이다. 무림은 어떤 단체나 조직에 의해 움직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무황성이 해체되면 은정련도 해체할 것이다. 그래도 나를 따르겠는가?”
“예, 은목전왕.”
무인들의 함성이 들썩하자 하인은 첫 명령을 내렸다.
“마르칸.”
“옛, 주공.”
“네가 채국연과 함께 이들을 맡아라. 약제당의 약들을 모두 회수하여 불태워라. 그리고 무황의 졸개들은 모두 죽여라.”
“명.”
“난 무황을 만나겠다. 가라.”
“명.”
예를 취하고 돌아선 마르칸이 무인들에게 외쳤다.
“내가 주공의 부하인 마르칸이다. 모두 나를 따르라.”
“우아아!”
무인들이 쏟아져 나가자 하인은 가여청을 끌어당겼다.
휘리릭.
“그런데 가가 혼자서 괜찮겠어요?”
“당연하지. 은목전왕이 못할 것은 세상에 없으니까.”
“피이!”
하늘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 * *
동추림은 함 속에 들어 있는 누런 알약들을 보고는 만족하게 웃었다. 이로써 2만 개의 천강활단이 완성되었다.
“크크크. 이제 무림은, 아니 세상은 우리 것이다!”
그는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았다.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이렇게 쉬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빨리 저 약이 완성됐다면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었다.
말 잘 듣는 사람들만 있는 곳. 앉으라면 앉고 죽으라면 서슴없이 죽는 자들만 있는 곳. 이제 그런 세상이 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만족하게 웃을 때였다. 밖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쳐라! 동추림을 잡아라!”
“천면만환을 죽여라!”
와지끈, 우당탕.
“뭐, 뭐냐?”
깜짝 놀라 천하 객점의 창문을 열어젖힌 그는 질겁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무인들. 그들의 숫자는 1만이 넘었다. 의협당의 무인들이 천하 객점으로 오면서 무황의 흉계를 무인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지금 창검을 들고 천하 객점으로 몰려드는 무인들은 의협당의 무인들과 광명당의 무인들이 태반이었다.
“죽여라!”
“동추림을 끌어내라!”
“으악!”
“아악!”
아래에서 부하들의 비명이 들리자 동추림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뭐하느냐? 빨리 강시들을 출동시켜라!”
“명.”
뒤에 있던 부하들이 구르듯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안 돼! 모든 무인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무황은 끝장이다.”
동추림은 영리한 자였다. 지금 몰려드는 무인들은 모두 무황성의 무인들. 저들이 알약의 정체를 알았다면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럴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 아무도 모르는 심산 속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 것이야.”
그리되면 자신은 세상의 왕이 될 수도 있었다. 천강활단을 만드는 비법은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약이 든 함을 짊어진 그는 뒷문을 열고 내달렸다.
“헉!”
어깨에 둘러멘 절구통 같은 철퇴. 거구의 남자가 천하 객점의 뒷문을 막고 물었다.
“네가 천면만환 동추림이냐?”
동추림은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나, 난 아니요.”
그때 죽립을 쓰고 있던 여인이 말했다.
“봐요, 제 말이 맞지요?”
“음, 채 매의 말이 맞네. 쥐새끼 같은 놈. 도망치겠단 말이지?”
방금 채국연은 정문을 공격하는 무인들을 돌아 이곳으로 가자고 했다. 동추림이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한데, 정말로 놈은 도망치고 있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그러자 여인이 죽립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나타나는 아름다운 얼굴. 그것은 구주팔기의 한 명인 채국연이었다.
“네, 네년은 현빙마녀?”
“동추림, 네가 도망칠 곳은 없다.”
채국연의 싸늘한 말에 동추림은 정신을 수습했다. 채국연이 구주팔기라고는 하지만 실제 자신의 무공이 더 높았다. 평소 천계의 무인들은 무공 수위를 숨기고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크크크. 네년은 나를 잘못 막았다. 이제 내 무공의 진짜 실력을 보여 주지.”
“그래? 그럼 보여 줘. 너희 쥐새끼 같은 놈들이 쓰는 그 잘난 천계의 무공을 말이다.”
“네년이 어떻게 천계의 무공을?”
동추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저년이 어떻게 천계에 대해 아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벌써 뒤에서 들리는 함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마도 5백 명의 강시들이 거의 진압되고 있는 것 같았다. 빨리 이 두 연놈을 처리하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동추림이 두 손을 펼쳐 들었다.
“아깝긴 하지만 네년의 가랑이를 시원하게 찢어주마, 채국연.”
그의 두 손 사이로 강렬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그것도 아주 사이한 기운이…….
“네놈이 채 매를 욕했단 말이지? 대가리를 박살 내주마!”
거구의 남자 마르칸이 철퇴를 추켜들며 한 걸음 내짚자 동추림은 피식 웃었다. 저 무식한 새끼는 자신의 백골마장이 얼마나 무서운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곰 같은 새끼. 뒈져라! 백골벽력(白骨霹靂)!”
우르르르, 콰아아아!
동추림의 두 손에서 휘돌던 거대한 기운이 회오리치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와 함께 주변의 대기가 몸부림쳤다. 바로 동추림의 성명절기인 백골벽력장이었다.
무지막지한 기세로 몰려가는 장강(掌쾝)! 동추림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그려졌다. 백골벽력장은 닿는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장법이었다.
“크크크, 멍청한 놈. 그러게 살려면 눈치라도 있어야… 엉?”
헤벌쭉거리던 동추림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대체 저게 뭐란 말인가?
퍼억!
마르칸의 철퇴가 휘둘러지더니 백골벽력장이 그대로 깨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위잉.
그리고 날아드는 시커먼 철퇴!
“이건 거짓말이야!”
콰직.
“꺽!”
“채 매를 모욕하는 놈은 내가 그냥 두지 않는다.”
대가리가 박살 난 동추림의 몸이 비틀거리더니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게 천강활단이군요!”
“없애버려야지.”
“네.”
두 사람이 누런 알약을 꺼내 불길 속에 집어 던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약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지만 마르칸과 채국연은 달랐다. 그들에게 하인의 명은 곧 천신의 명이나 같았다.
저벅.
부르르.
한 걸음 내짚을 때마다 5백 명의 무인들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선다. 반원형으로 빙 둘러선 무인들. 이들은 무황 헌원상제가 거느리고 있는 어둠의 무인으로 암영생사단(暗影生死團)이었다.
하나같이 초절정의 최상급으로, 소림도 2시진이면 쓸어버릴 수 있다는 무서운 살귀들.
하나, 지금 그런 암영생사단이 고작 한 명인 하인의 기운 앞에 뒷걸음치고 있었다.
‘은목전왕의 실체가 저 정도였단 말인가?’
헌원상제의 뒤에 서 있던 제갈만산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방금 하인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제갈만산은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내일쯤에야 이곳에 나타날 줄 알았던 은목전왕이, 그것도 단신으로 호랑이 굴에 나타난 것이다.
휘리링, 휘링.
하인의 몸에서부터 휘몰아치는 바람이 5백의 암영생사단의 발을 묶고 꼼짝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어야 해. 곧 강시를 데리고 천명이 올 것이다!’
제갈만산은 천명이 이미 죽었고 강시도 없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성주님,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제갈만산의 전음에 헌원상제는 코웃음을 쳤다. 놈이 강하다고 하지만 자신도 강하다. 이곳에 있는 5백 명의 암영생사단이 움츠러들고 있긴 하지만 자신도 암영생사단을 저렇게 만들 수 있었다. 무인이 생사경의 최상위급에 오르면 대기의 기운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갈만산, 나는 무황이다.
호기롭게 전음을 보낸 헌원상제가 한 걸음 내짚었다.
쿠웅!
우르르르.
그의 진각에 대지가 흔들리고 암영생사단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듣던 대로 간이 크구나. 단신으로 나를 찾아오다니. 이 무황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나?”
헌원상제의 말에 하인이 빙긋이 웃었다.
“너 같은 자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거든. 어때, 우리 맞장 한번 떠볼까? 대가리끼리 말이야.”
이죽거리는 하인의 말에 헌원상제는 미소를 지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이라면 체면상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자신의 부하들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위험을 감수한단 말인가?
“크크크, 나를 도발하다니. 하나, 넌 역시 애송이다. 일단 암영생사단과 붙어봐라. 그들만으로도 너를 죽이는 것은 충분하지.”
헌원상제가 암영생사단원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들의 얼굴에서 공포감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았다.
“암영생사단은 저놈을 죽여라.”
“명.”
촹촹촹촹.
드디어 몰아치는 기운의 속박에서 벗어난 암영생사단원들이 일제히 도검을 뽑아들었다.
하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헌원상제를 쳐다보았다.
“맞장을 안 뜨겠다? 그럼 할 수 없지, 뭐. 애들 죽이고 널 죽여줄게.”
하인의 오만한 태도에 암영생사단장의 눈이 붉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놈에게 공포를 느꼈던 것이 수치스러웠던 그였다. 암영생사단이 어떤 무인들이던가? 어떤 적에게도 패배를 몰랐던 무적이 바로 암영생사단이었다. 그런 자신들이 놈의 기세에 뒤로 물러섰었다. 그것이 참을 수 없는 단장이었다.
“은목전왕, 우리 암영생사단을 우습게 보지 마라.”
“그래? 그럼 덤벼. 그렇게 노려보다간 눈알 빠지겠다.”
“이잇!”
하인의 조롱에 분노한 암영생사단장이 명을 내렸다.
“쳐라! 놈을 죽여 암영생사단의 본때를 보여 줘라!”
“악!”
기합을 준 암영생사단원들이 새카맣게 날아들었다. 하늘을 뒤덮는 무인들의 그림자. 하인의 깊은 눈에 은빛이 확 퍼졌다.
“잘 들어라, 헌원상제. 천계 놈들은 그게 누구라도 살려 두지 않는다.”
하인의 몸에서 은빛이 확 피어오르고 두 손이 쳐들렸다. 그리고 하늘 가득 퍼지는 새빨간 핏빛. 혈천수라폭멸(血天修羅爆滅)이 나타났다.
우르릉, 콰콰콰콰!
“앗, 혈천신교의 무공이다!”
“호신강기를 둘러라!”
기겁한 암영생사단원들의 몸에서 일제히 호신강기가 뿜어져 나와 몸을 뒤덮었다. 하지만 혈천수라폭멸은 호신강기로 막을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더구나 하인의 10성 공력이 실린 혈천수라폭멸은 말 그대로 죽음의 사신이었다.
하인의 몸을 중심으로 허공에 나타난 핏빛 동심원이 달려드는 암영생사단원들을 덮쳤다.
짜자작. 콰르릉!
암영생사단원들이 목이 터지는 비명을 질렀다. 핏빛의 동심원은 강기로 이루어진 칼날. 닿는 모든 것은 그것이 칼이든 호신강기든 모조리 베어버렸다.
사각. 스윽.
“아악! 호신강기가 베어진다!”
“으으, 피하라!”
그러나 피할 수 있다면 하인의 무공이 아니다. 강기의 칼날이 베고 지나는 곳에 수십 개의 용이 나타났다.
콰콰콰콰!
하늘땅을 뒤덮는 용의 물결. 은천만상신공의 풍룡타(風龍打)가 암영생사단원들을 휩쓸었다.
“끄악!”
“아악!”
펑펑펑펑.
풍룡타가 휩쓸자 정원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되고 말았다. 폭죽처럼 터지는 암영생사단원들의 몸통들. 산산이 찢어진 그들의 뼈와 살이 파편이 되어 날아갔다.
“저, 저럴 수가!”
피바다가 된 정원을 보던 제갈만산이 비칠거리며 물러섰다. 살육의 중심에 있는 하인이 성난 용 같았다. 아니, 진짜 용이었다. 그의 몸에서 돋아난 수십 마리의 용이 주변의 생명체를 모조리 찢어발기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야. 도망쳐야 해!”
그가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하지만 헌원상제는 눈앞에 벌어진 참상에 치를 떨고 있었다. 한순간에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암영생사단이 몰살한 것이다.
이성을 잃은 헌원상제가 내력을 끌어올렸다.
“이 새끼! 죽어라!”
쏴아아아!
헌원상제의 절대 무적신공이 세상에 처음으로 초연했다. 하늘을 덮는 칠색의 빛 무리.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천상의 빛 같았다. 하지만 저것은 사람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천계 최고의 살인 무공이었다.
절대무적강(絶對無敵쾝)!
7가지 색깔의 강기 수천 개가 하늘을 덮고 쏟아져 내렸다. 하인의 몸에서 휘돌던 은빛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까아아아!
하늘땅을 뒤흔드는 봉황의 울음소리와 함께 은빛의 거대한 새가 나타났다.
콰콰쾅! 콰쾅!
장원이 발칵 뒤집혔다. 전각이 봉황의 날갯짓에 무너지고 인공 호수와 기암괴석들이 가루로 흩날렸다. 그리고 일순간에 찾아든 정적 속에 헌원상제가 나타났다. 그의 머리는 산발이었고, 눈은 허무했다.
“은천의 무공은 여전히 무섭구나! 역시 은천은… 우리가 넘을 수 없는 하늘이… 란 말인가? 꺼억!”
푸스스스.
그 말을 끝으로 헌원상제의 몸이 가루로 흩날렸다.
“은천은 너희들 따위가 넘볼 수 없는 하늘이다.”
하인이 몸을 돌렸다.
“가가, 괜찮아요?”
강기막 속에서 두 사람의 대결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던 가여청이 하인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하인의 무공을 보았고, 전율했다. 이것은 무공이 아니라 하늘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가여청의 등을 두드려 주던 하인의 눈이 저 멀리를 쏘아보았다.
-역시 은천의 무공이로군! 네 무공은 잘 보았다.
그것은 전음이 아니라 혜광심어(慧光心語)와 비슷한 무극연음(武極聯音)이었다.
-너는 무천?
-알아보는군. 어떤가, 너와 내가 세상을 놓고 겨루는 것이?
-좋아, 내가 가지.
-올 줄 알았다. 네가 은천의 후예라면 피하지 않을 것이다.
-기다려라. 곧 간다.
하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천, 그가 이곳에 있었다. 지금 보내는 무극연음을 보아 자신보다 결코 약하지 않은 자, 그가 무천이었다.
“여청, 내 말을 잘 들어.”
“예?”
갑자기 긴장 가득한 하인의 말에 가여청도 굳어졌다. 천하의 은목전왕이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오면 절대로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해. 알았지?
하인의 전음에 가여청은 어안이 벙벙했다. 왜, 무엇 때문에 하인이 이런 전음을 보낸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새가 없었다.
파앗!
은빛이 번쩍이더니 하인의 신형이 눈앞에서 꺼지듯 사라진 것이다. 그것은 너무 빨라서 시력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아니, 가가!”
그때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
황하를 건넌 구파일방, 은정련의 사람들.
그들의 맨 앞에는 위소옥과 하인의 여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천강활단에 대한 소식을 들은 무황성의 무인들은 검을 거꾸로 돌렸기에 무혈로 황하를 건넌 사람들이었다.
“상공은? 상공은 어디 있어요?”
“저기, 그분은 갔어요.”
가여청의 대답에 위소옥의 눈이 둥그레졌다.
“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위소옥이 잡아 흔들자 가여청의 눈이 저 멀리 보이는 태산의 산마루를 바라보았다.
“저곳으로!”
모두의 눈이 그곳으로 쏠렸다.
“주모님, 제가 주군에게 가겠습니다.”
마르칸이 앞으로 나서자 적발개와 차자동은 물론이고 하인의 여인들이 전부 앞으로 나섰다.
“우리도 가요. 제 생각엔 분명 무천일 거예요.”
그것은 주수연의 말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천상천의 하늘 무천, 그가 아니라면 하인은 가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때 가여청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가는 누구도 오면 안 된다고 했어요. 반드시 돌아온다고, 기다리라고.”
그러자 위소옥이 갈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공이 그랬다면 우린 기다려요. 그이는 온다면 꼭 오니까!”
“하지만 상대는 무천일세.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겠지!”
말을 한 사람은 화산제일검 양안당이었다.
그러나 위소옥은 고집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무천이 아니라 염라대왕이라도 그이는 이겨요. 그분은 은목전왕이니까!”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침묵했다. 그렇다! 그는 고금 무적의 은목전왕이다!
사람들이 저 멀리 태산의 산마루를 바라보았다.
번쩍. 파앗!
맑은 하늘의 한 공간이 일그러지고 한 명의 청년이 날아 내렸다. 바로 하인이었다.
“당신이 무천인가?”
하인의 50장 앞에 한 명의 청년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 풍기는 서기. 그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이 숨을 죽이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무천일세, 은목전왕!”
천천히 돌아서는 청년. 그의 얼굴을 본 하인의 눈이 커졌다.
“하아, 이거 기막힌 일이로군. 무혼 태자가 무천이라니?”
“놀랐는가? 난 무혼 태자도 되고, 중화 전장주도 되지. 필요에 따라서는 세상의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자네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은가!”
무혼 태자, 아니 무천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이다.
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제 천 년의 대결을 끝내야겠지?”
하인의 말에 무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참 아쉽다네. 생각해보게. 자네와 내가 손을 잡으면 세상은 우리 것이야. 그런데 꼭 싸워야 하겠나?”
무천의 안타깝다는 눈빛에 하인이 피식 웃었다.
“무천, 잊지 않았겠지? 내 아내 설려화를 이용한 것을. 난 원수와는 손을 잡지 않아. 그것이 은천의 룰이지.”
“그렇군. 그럼 끝장을 봐야겠지.”
“당연히.”
두 사람의 주위로 하늘과 땅이 진동하기 시작하였다.
<고금 무적인 두 사람의 대결은 삼 일 밤낮으로 이어졌다. 그 싸움으로 태산은 지진을 만난 것처럼 흔들리고 삼 일 동안 봉황과 청룡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멎은 후, 태산으로 올라간 무인들은 경악했다. 태산의 정상은 폐허가 됐고 삼십 장이나 낮아졌다. 그 위에 은목전왕은 눈을 뜬 채 정신을 잃고 있었고, 무천은 갈가리 찢겨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무혼 태자라는 것을 함구했다.
태산의 싸움이 있은 후, 중원 무림은 은목전왕에게 무림전신이라는 명호를 바쳤고, 동쪽의 신성한 산인 백두산을 무림의 성지로 인정했다. 은목전왕이 그곳에서 부인들과 은거했기 때문이다.
-화산제일검 양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