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대우서회주요허주부(對雨書懷走邀許主簿)
東嶽雲峰起(동악운봉기)
: 구름이 동악 봉우리에 일어
溶溶滿太虛(용용만태허)
: 아득히 흘러 하늘에 가득하다.
震雷翻漠燕(진뇌번막연)
: 진동하는 우뢰는 장막의 제비를 뒤집고
驟雨洛河魚(취우낙하어)
: 소나기에 강물의 물고기 솟아 떨어지게 한다.
座對賢人酒(좌대현인주)
: 앉아서 현인의 술, 백주를 마주하면
門聽長者車(문청장자거)
: 문에서는 귀인의 수레 오는 소리 들린다.
相邀愧泥濘(상요괴니녕)
: 맞아 모시자니 진흙탕이 부끄러우니
騎馬到堦除(기마도계제)
: 말을 타신 채로 섬돌까지 닿아오세요.
***
찰랑이는 파도와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 푸른 바다는 심연의 어둠을 감춘 채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다 왔다. 멈춰.”
반짝이는 파도를 가로지르던 통통배는 점차 속도를 줄여갔다. 주변엔 온통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의 한복판이다.
배의 갑판 위에는 고깃배에 어울리지 않는 드럼통이 하나 놓여 있었다.
“끄으으으.”
작은 신음은 그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신음을 흘린 남자는 목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드럼통에 들어가 있었고, 그 안은 딱딱하게 굳은 시멘트로 채워져 있었다.
“크레인 뭐하냐! 빨리 들어!”
작업자들은 매번 있는 일인 것처럼 능숙하게 일을 시작했다.
그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설치된 작은 크레인은 드럼통 하나를 줄에 매달아 끌어올렸다.
“시간 끌지 말고 끝내.”
풍덩.
시멘트로 가득한 드럼통은 순식간에 어두운 바다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꾸륵.”
‘새끼. 담배 한 대는 태우게 해주지.’
호충은 깊은 심연의 바다 밑으로 빨려 들어가며 주마등을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조폭의 히트맨 진호충으로 살아온 삶이다.
어린 시절의 가스 폭발 사고로 부모를 잃고 천애고아가 되었다. 자신이 학교에 간 사이 벌어진 일이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재만 남은 집을 마주했고 이후엔 고아원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한 순간에 송두리째 삶이 달라진 것이다.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고아원 형들을 따라다니며 나쁜 짓을 배웠고, 이후 삶의 방향도 뒷골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변엔 언제나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함께였다. 그들 밑에서 배운 것은 나쁜 짓을 해야 돈을 번다는 것과 윗선에 함부로 하면 얻어터진다는 것이었다.
호충은 뒷골목에서 주먹께나 쓰는 축에 속했고, 돈을 버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래서 히트맨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돈을 받아 사람을 팼고, 상처 입혔으며 심하면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의뢰자와 돈을 벌기 위해 한 일이다.
‘X발. 이렇게 죽을 것을 왜 그렇게 아등바등 남을 위해 살았을까.’
죽는 순간에야 깨달음이 찾아왔다.
항상 누군가의 밑에서 남을 위해 살아왔기에 이런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어야 했고 주도적으로 삶을 개척하며 살아야 했다.
‘그래야 마지막까지 생에 후회가 없었을 텐데···.’
작은 깨달음이었으나, 검은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지금은 부질없는 후회였다.
뽀글뽀글.
뱉은 숨이 방울지며 바다 위로 올라갔다. 숨은 아까부터 막혀왔고, 곧 바닷물을 들이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질끈 눈을 감고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기다렸다.
그 순간 저 멀리 우주에서 거대한 혜성이 지구 위를 지나가며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파문은 태양에서 지구를 향하는 태양풍에 영향을 주었고, 달의 기운도 여기에 호응하였다. 그리고 소용돌이치던 기운은 바다 깊은 곳을 향했다. 본래라면 아무도 없었을 곳이지만, 기운이 향하는 곳엔 시멘트가 가득한 드럼통에 들어가 죽음을 기다리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 순간 우연과 우연이 겹친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
과거의 편린
***
“푸후. 허어헙.”
입으로 짜디짠 바닷물이 들어오리라 생각하며 숨을 들이켰다.
“!!”
하지만 상쾌한 공기가 폐로 가득 들어왔다.
끔뻑끔뻑.
깊은 바다에서 눈을 감았는데, 어찌 흙바닥이 보인단 말인가. 호충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인가 싶었다.
‘여기가 어디지? 저승인가?’
[도련님!!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옆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우선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은 죽은 상태가 아니었다.
‘내가 살아있다니! 대체 어떻게!’
자신이 어째서 바다가 아닌 지상에 있을 수 있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그리고 시멘트에 잠겨 있던 자신의 몸을 더듬다가 복부에서 질척한 무언가와 딱딱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보니 손바닥에 흥건한 피가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배에 꽂혀 달랑거리는 칼이 보였다.
“끄읍.”
그제야 고통이 몰아쳤다.
살면서 남의 배에 회칼을 먹여준 기억은 많았지만, 자신의 배에 칼이 꽂히는 경험은 흔치 않았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야 이 새끼야. 사람이 칼침을 맞았으면 빨리 병원으로 가야···.”
호충은 말을 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우선 상대가 사용하는 말이 한국어가 아니라는 점이었고,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이상한 옷을 입은 중늙은이라는 점이다. 난생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호충이 의아함을 느끼고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아찔한 어지러움과 함께 수마(睡魔)가 몰아닥쳤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았나···.’
“꺼윽.”
호충은 기절했고, 주변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의원을 불러와야···. 아니다. 우선 지혈부터 하겠······. 도련님! 정신 차리십시오!]
***
진가장은 시전에 나갔다가 칼을 맞고 돌아온 막내 공자로 인해서 난리가 났다.
쾅!
“대체 어떤 놈이야!”
가주전 상석에 앉은 진가장의 가주 진원우는 막내아들이 당한 일을 듣고 크게 노했다. 또한 아들을 해한 흉수를 찾으라고 성화였다.
“누가 감히 우리 진가장의 막내아들 호충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진가장의 막내 이름은 진호충이었고, 이는 새로운 몸으로 깨어난 진호충과 같은 이름이었다.
“가주님. 사람이 많은 시전에서 일어난 일이라 아직 흉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찾아라. 당장 찾아서 내 앞에 끌고 와! 자장에서 벌어진 일을 어찌 진가장이 모를 수 있겠는가!”
““예! 가주님!””
하지만 많은 사람들 사이로 도망친 흉수를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작정하고 벌인 일이라면 도망쳐도 백리는 도망쳤을 일이다.
애초에 진가장의 막내아들은 후계자 경쟁에도 끼지 못하는 문사(文士)였다. 또한 진가장의 다른 자식들과 달리 친모가 없는 막내는 진가장 내에서 큰 발언권도 없었다. 나이도 어리고 진가장에 친족의 기반이 없는 진호충에게 호의를 보일 사람은 없었다.
“정말로 찾을 필요는 없겠지?”
“그야 당연하지. 가주님도 말씀만 저리 하신 거야.”
“무가인 진가장의 아들이면서 칼을 맞다니···.”
“막내 공자는 방에 틀어박혀 서책만 들여다봤잖아.”
“그래도 진가장의 이름이 있는데, 호신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도 그렇기는 하지.”
가주가 크게 화를 낸 것도 진가장의 이름에 조금이라도 누가될까 싶었기 때문이지 아들을 해한 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가주조차 아들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했다면 병문안을 왔어야 했는데, 단 한 번도 보러오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총관.”
“예. 가주님.”
“자장을 시끄럽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문이 나 봐야 진가장의 이름이 더렵혀질 뿐이다.”
“···이해했습니다. 밖으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봉합하겠습니다.”
진 가주의 그런 태도를 진가장 사람들이 어찌 짐작하지 못하겠는가. 진가장의 누구도 피습사건을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한동안 진가장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피습사건은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
기절하여 쓰러진 호충은 꿈을 꾸었다. 꿈이라기보다 과거의 편린(片鱗)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
.
.
낡은 소파의 상석에 앉은 더벅머리 남자는 뭐가 불만스러운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담배를 물고 옆에 앉은 사내에게 물었다.
“호충아. 왜 이번이 마지막이야?”
“나도 벌 만큼 벌었고 정착해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사나?”
호충이라고 불린 사내가 회칼 하나를 꺼내 날을 살피며 답하고 있었다.
“여자 생겼냐?”
“······.”
대답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굳은 호충의 얼굴로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허. 그동안 여자를 많이 만났어도 이런 적은 처음이잖아.”
“강 사장은 괜히 헛소리 마시고 이번 의뢰나 주지?”
강 사장이라고 불린 남자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다. 태우던 담배를 계속 뻐끔거리다가 필터까지 타들어 가고 나서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에효. 아쉽다.”
“왜?”
자신이 여자를 만난다는데, 왜 강 사장이 아쉬워한단 말인가.
호충은 조금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다.
“···강 사장. 남자 취향이냐? 그래도 난 아니지 X발.”
“뭐 이 새끼야?! 뭔 헛소리야? 너 가면 너 같은 놈을 또 어디서 구하나 싶어서 그러지!”
강 사장이라 불린 더벅머리 남자는 다른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또 입에 물었다.
“구하긴 뭘 구해? 내가 강 사장 밑에서 일해?”
“그래도 새꺄. 내가 너한테 지금까지 연결해준 건수가 몇 건인데···.”
“흰소리 말고 의뢰나 내놔. 금액은 예전에 말해줬던 그 금액 맞지?”
“선금 한 장에 의뢰 끝나면 나머지 세 장.”
“선금은 두 장으로 해.”
“야!”
“내가 그 새끼들을 뭘 믿고 한 장만 받고 일 해? 아니면 안 한다고 해.”
“그러다 잘 하면 나가리 될 수도 있다?”
“대신 잔금 확실하게 받으면 한 장은 강 사장 준다. 마지막 의뢰잖아.”
“X발. 그럼 내가 안 할 수가 없잖아. 새꺄.”
“그러라고 주는 거야.”
4억짜리 의뢰에서 1억이나 떼어 준다는 말에 강 사장은 의욕에 넘쳤다.
“확실해지면 문자 보내. 난 간다.”
“내일까지 문자 안 가면 나가린줄 알아.”
“그래.”
호충은 강 사장이 이번 일을 성사시킬 거라 확신했다. 1억이 걸린 일이니 허투로 하지 않을 것이다.
***
호충은 강 사장의 사무실이 있던 허름한 건물에서 나와 차에 올랐다.
술집이 밀집한 이 지역은 차가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았다.
“뭔 놈의 인간들이 이렇게 많아.”
늦은 저녁임에도 이 지역은 음식점 간판과 안마방, 술집, 모텔 등이 밝히는 빛으로 가득했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저마다 무리를 지어 술집으로 들어갔고, 연인들은 찰싹 붙어서 모텔로 향하고 있었다.
“하나도 안 부럽거든? 나도 애인 있거든?”
호충은 겨우 그 지역을 빠져나와 자신의 연인과 함께 사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벌써 귤이 나올 철이네.”
근처 슈퍼에 진열된 귤을 보니 자신을 기다릴 연인이 생각났다.
오피스텔에 들어가는 호충의 손에 귤 한 봉지가 들려있었다.
“오빠. 왔어?”
문을 열자마자 도도도 뛰어온 연인에게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이거나 먹어라.”
“우앗! 나 새콤한 귤이 먹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작은 선물에 반응해주니 크게 기뻤지만, 호충은 무심한 듯이 말했다.
“뭔가 통했나 보지.”
“오빠. 내일은 쉬는 거야?”
“아직 몰라. 가봐야 알지.”
“힝. 쉬고 나랑 같이 놀면 좋을 텐데···.”
“그보다 계속 여기 살긴 그렇고···. 동탄에 조금 더 큰 아파트 있으니까 그리로 가자.”
“아파트?”
“우리도 이제 정착해야 하지 않냐?”
“······.”
“화란아. 내가 너 일 그만두게 해 놓고 굶기겠냐?”
술집에서 만난 여자였지만, 호충은 개의치 않았다. 이 여자와는 마음이 맞고 잘 살 수 있겠다 싶었다. 화란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오빠. 나 감동.”
“······.”
호충은 나중에 알려줄 생각이었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화란을 보니 절로 입이 열렸다.
“동탄에 XX아파트. 107동 1702호. 출입문 비밀번호는 우리 만난 날. 너한테 처음 얘기하는 거야. 거긴 아무도 몰라.”
“오빠는 로맨틱 가이야.”
“오빠가 현금 많은 건 알지? 아파트에 쌓아놨으니까 혹시 나 잘못되면 네가 다 가져라.”
“···오빠. 그런 말 하지 마.”
“이번이 마지막이야.”
“정말?”
“나도 새로운 일을 찾아봐야지. 언제까지 해결사로 살 수는 없잖아.”
연인 화란에겐 자신이 해결사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조직폭력배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더 위험한 일을 하는 호충이다.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청부살인을 업으로 삼고 있었다. 의뢰인이 지정한 사람을 거액이 돈을 받은 다음 처리하는 식이었다. 의뢰의 대부분은 조폭이 연루되는 일이 많았다. 녀석들은 돈으로 위험부담을 덜 수 있었고, 호충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좋아! 정말 좋아.”
“좋기는···.”
기뻐하는 화란을 보니 자신의 선택에 한 점의 후회도 남지 않았다.
“우리도 남들처럼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오빠······.”
지나가는 말처럼 뱉어냈지만, 청혼은 청혼이었다.
솔직히 지금 결혼해도 한참은 늦은 나이였다.
“직장 못 구하면 원룸 건물 사서 임대할 생각이야.”
서른아홉의 나이까지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적도 없었고, 불법적인 일에서 손을 뗀 적도 없었다.
청부업자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얘기였고, 보이지 않는 노력이 숨어 있다는 말이었다. 호충은 자신의 몸을 언제나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여러 운동을 섭렵해 왔다.
그래도 불법적인 일인 만큼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지금 아파트에 쌓여있는 현금만으로 원룸 건물을 사고도 한참 남는다. 이러려고 그렇게 바득바득 돈을 벌지 않았겠는가.
“오빠가 이번 일 끝나면 나도 얘기할 게 있어.”
“뭔데?”
“일 끝나면 얘기할게. 괜히 오빠 마음 심란하게 할 것 같아서.”
“······. 마음대로 해.”
호충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보통 화란이 하는 부탁은 돈과 쇼핑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부탁이 있으면 대충 아파트에서 현금을 집어다가 던져주곤 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빽은 적당히 사라.”
“이번엔 가방 아니거든?!”
‘화란아···.’
호충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
.
.
호충은 작은 몸으로 작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오동통한 작은 손이 검은 먹에 붓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일필휘지로 한자를 써 내려간다.
“도련님. 새로운 서책은 마음에 드십니까?”
“응. 송 영감이 이번에 사다 준 책은 정말 마음에 들어. 고마워.”
‘이건 무슨 꿈이지? 꿈이 아닌가?’
꿈에서 깨어났다 생각했는데 또 다른 꿈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본래의 몸이 가진 기억이었다.
“도련님은 꼭 과거에 합격하실 겁니다.”
“과거는 쉽지 않아. 쟁쟁한 유림의 학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만 하시면 장원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장원은 무슨···. 그래도 송 영감이 날 높이 평가하는 건 고맙네.”
“허허허. 도련님은 꼭 학사가 되실 겁니다.”
“그래야지. 꼭···.”
아이의 삶은 단조로웠다. 대부분 집에만 틀어박혀 서책을 들여다보는 일상이었고, 밖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만나는 인물도 송 영감이라고 불린 인물의 전부였다. 아이는 밖으로 나갔다가 배다른 형제를 만나는 일은 두려워했는데, 만나면 항상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지랄 맞은 꿈이네.’
호충의 꿈은 작은 아이의 기억을 따라 계속 흘러갔다. 꿈의 마지막은 자신이 깨어난 그곳이었다.
퍽.
길을 걷던 중에 누군가 다가와 몸을 부딪쳤다. 그리고 녀석은 화들짝 놀라며 멀어졌다.
“끅.”
아래를 내려다보자 짧은 단검이 배에 꼽힌 것이 눈에 들어왔고, 그리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피를 보자마자 심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피, 피, 피!!!’
그걸로 끝이었다.
***
새로운 세상
***
“으윽.”
꿈에서 깨어난 호충은 자신의 몸이 처한 상황을 이해했다. 기절하고 잠들었던 동안 본래의 몸에 있던 기억을 온전히 흡수한 것이다.
‘이 몸의 주인은 진가장의 막내아들 진호충. 내 이름과 같아.’
녀석이 죽기 전에 떠올렸던 기억도 선명했다.
피! 피! 피!
녀석은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피를 보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아마도 자신의 배에서 쏟아지는 선혈을 보고 심각한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어진 기억은 자신의 기억이었다.
녀석은 피를 본 충격에 사라졌고 그 자리를 자신이 대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썅. 중원이라니···.’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살아났다는 것과 이 시대의 배경이 아주 오래전의 과거라는 데 있었다.
중원.
호충은 지금의 시대가 언제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했어야 알지.’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진호충이다. 한국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데 중국의 역사는 당연히 모른다. 그래도 기억 속에 관우 장군에 관한 기억이 있어 전국시대와 시황제의 진(秦)나라 시대가 지났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의 삼합회 조직원들을 본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하던 말과 유사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살아갈 배경인 중원이 진호충에게 커다란 절망감을 안겨줬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길이 없다.’
같은 시대의 과거나 미래라면 홀로 남겨진 애인을 찾아갈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 호충이 살아 숨 쉬는 중원은 같은 지구라고 해도 족히 수백 년의 괴리가 있을 것이다.
저승사자가 일을 잘못했건 영적인 세상의 누군가가 장난을 쳤건 간에 자신의 귀환은 불가능으로 확정이었다. 어떻게 시공을 초월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는 기억의 저편으로 치워버렸다.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이 시작 됐어.’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니 앞으로는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지금 자신의 기억을 더 세밀하게 더듬어봐야 했다.
‘하아. 그런데 이 새끼는 대체 지금까지 뭘 하고 산거야?’
본래의 진호충이 가졌던 기억들은 대부분이 활자였다. 남들 배에 회칼을 꽂으며 살았던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이었다. 책 속에 파묻혀 살았던 녀석은 성현들의 말씀만 가득 기억하고 있었다.
‘뭘 하고 살아서 배에 칼침을 맞느냐고!’
조폭의 히트맨으로 살던 자신이라면 시멘트에 채워져 바닷물에 빠져도 이해할 수 있지만, 진가장이라는 거대한 배경을 가진 이 어린 녀석이 뭘 잘못해서 배에 칼을 맞아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진가장에서 존재감도 없었던 녀석은 후계자 경쟁에서도 빠졌고, 두각을 드러낸 일도 없었다. 그저 학문을 통해 관직에 나가는 것이 녀석이 가진 꿈이었다. 그런 녀석이 시전에 나갔다가 칼에 맞은 것이다.
‘의심 가는 놈이···.’
녀석의 기억 속에 용의자가 있었다.
‘여럿이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끄흡.”
자신의 배에 칼침을 놓은 녀석들을 생각하다가 몸에 힘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복부의 자상에서 다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벌컥.
“도련님!”
밖에서 신음을 듣고 들어온 전의 그 중늙은이가 붕대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보며 화급하게 말했다.
“의, 의원을 모셔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도련님. 밑은 보지 마십시오.”
“됐어. 피륙의 상처에 불과해. 호들갑 떨지 마.”
놈의 날카로운 단검이 한 치만 더 들어갔어도 죽었을 것이지만, 내장이 상하지 않았기에 이 정도에 그친 것이다. 중원 땅에 병원은 있을 턱이 없으니 내장이 상했다면 의원들이 아무리 많아도 고칠 수 없었을 것이다.
“도, 도련님. 피를 봐도 괜찮으십니까?”
평소 호충이 피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피 묻은 붕대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고 있었다.
“······.”
호충은 기억 속에서 중늙은이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송 영감이 그렇게 걱정하니 내가 이겨내야지. 어쩌나.”
“아이구. 도련님. 정말 다행이십니다.”
송 영감은 진가장에서 유일하게 호충을 아끼고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이 몸의 친모가 데려온 사람이었는데, 어려서부터 함께한 사람이다.
호충은 자신도 모르게 송 영감이 친밀하게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의 기억이······.’
현대를 살던 자신의 기억과 중원에서 진가장의 막내로 살아가던 녀석의 기억이 뒤엉키고 있었다.
덕분에 이곳의 말을 하고 익숙하게 주변인을 인식할 수 있었지만, 상당히 불쾌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 어느새 자신의 삶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며칠만 쉬면 나아질 거야. 송 영감은 할 일이 많잖아. 어서 가봐.”
“그럼 밖에 여동을 대기시켜둘 터이니 언제든 부르십시오.”
“여동?”
기억 속에 여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작은 전각에 오직 송 영감과 자신만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충은 자신의 기억에 뭔가 오류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가주께서 특별히 신경 쓰셨습니다.”
본래 송 영감 외에 호충이 부릴 수 있는 시동은 없었다. 진가장 내에서 호충의 입지가 얼마나 낮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다른 형제들은 수십 명의 시동을 부리고 무사들까지 전각을 지키는 실정이었다.
“풋.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신 모양이네.”
아끼는 아들이 아니었지만, 칼을 맞고 돌아온 막내아들에게 뭐라도 해줬다는 티를 내고 싶은 모양이다.
“가주님도 도련님을 많이 아끼십···.”
“이제 내가 송 영감의 흰소리에 속아 넘어갈 나이는 아니잖아.”
올해 진호충의 나이는 열여섯. 지금까지는 송 영감의 말을 믿고 싶어 했지만, 서른아홉의 진호충은 다르다.
“······.”
“가주님과의 관계는 곧 나아질 거야.”
별로 나아질 것도 없지만, 송 영감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진호충의 기억이 이렇게 말하라고 했기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예. 그렇게 될 겁니다. 도련님.”
이런 희망이라도 있어야 도련님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송 영감이지만, 호충은 희망이 아니라 현실을 보고 있었음이다.
‘무림이라···.’
중원에 살던 어린 진호충의 기억에 남아있는 무림이라는 세상은 나이 든 진호충에게 기회의 세상이었다.
‘나도 이제 무공을 배울 수 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던 후회스러운 삶은 이제 없다. 남은 것은 후회를 남기지 않을 새로운 삶이었다.
우선 이곳엔 진가장의 가전 무공도 존재했고, 진가장 내에 무사들에게 내려지는 무공도 있었다. 거기다 이미 어린 진호충이 읽었던 무공이 머리에 남아있었다.
몸이 나아지면 제대로 무공을 배울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몸을 건강하게 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앞으로는 일로정진(一路精進)이야.”
“물론입니다. 도련님. 도련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X발. 내가 문자를 쓰다니.’
알지도 못했던 한자를 쓰는 것이 어색했지만, 앞으로는 이 부분도 적응해야 할 터였다.
‘앞으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지 않을 것이다. 오직 나를 위해 살 것이고, 내가 주인이 되어 살 것이다.’
진호충은 새로운 삶에 새로운 목표를 부여했다.
***
호충의 몸이 나아지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인사였다.
“불초소생이 가주님을 뵙습니다.”
“몸은.”
“가주님의 보살핌 덕분에 다 나았습니다.”
“다행이군.”
“······.”
보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묻고 답하는 가주는 손을 휘저어 호충을 일별했다.
그런 진 가주의 모습에도 호충은 웃는 낯을 지우지 않았다.
“소자 항상 가주님이 무강하시길 간절히 기원하옵니다.”
“······.”
진 가주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지만, 호충은 뒷걸음질로 가주의 집무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흠···.”
다시 종이에 눈을 가져가던 가주는 금방 종이를 덮고 허리를 세웠다.
“이삼.”
진 가주의 입에서 이삼이라는 말이 나오자 천장에서 검은 복색의 인형이 뛰어 내려 부복했다.
“예! 가주님.”
“흉수를 찾는 일은 어찌되었는가.”
“사람이 많은 시전에서 벌어진 일이라 흉수를 특정할 수 없었나이다.”
찾았으리라 여기고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총관을 통해서 시끄럽게 만들지 말라는 명까지 내리지 않았던가.
“막내가 원한을 산 일이 있었던가.”
“······.”
가주의 막내 진호충이 원한을 살만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누가 괴롭히는 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진가장 내부의 일. 진가장의 무사에 불과한 이삼이 입에 올릴 일은 아니었다.
“···없사옵니다.”
“겨우 이런 일로 진가장을 시끄럽게 할 수는 없겠지. 흉수는 잊고 앞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게.”
가주 또한 내부의 일을 다 알면서 물어봤을 뿐이다. 외부의 문제가 없다면 이번 일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예. 가주님.”
이걸로 막내공자 피습 사건은 일단락이었다.
***
호충이 문안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은 가주뿐이 아니었다.
“대부인 마님께 문안 인사를 올립니다. 강녕하셨습니까.”
“어쩌다가 그런 일을 당했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제가 부덕한 탓입니다.”
“네가 무공에 조금 더 힘을 썼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 아니냐.”
“······.”
‘안 배웠으니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는 거 아니오.’
진가장의 소가주가 확실하지 않은 지금은 후보를 줄이기 위해 서로 혈안이었다.
특히 진가장주의 첫째 아내와 둘째 아내, 셋째 아내는 서로 자신의 아들을 가주로 만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년들이었다.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만약 무공을 배워 조금이라도 강해졌다면, 진가장에 연줄이 없는 호충은 일찌감치 변사체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독이 든 음식을 먹었거나, 아니면 이번처럼 칼을 맞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되도 않는 공부를 한답시고 방에만 앉아 있으니 무뢰배의 칼날에 그리된 게야. 너는 진가장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다.”
“······.”
아비라는 자는 그나마 몸이 나았는지 물어보기라도 했지만, 대부인은 그런 질문도 없이 질타만 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시전에 나가지 말고 평소처럼 진가장 내에 머무르도록 하여라.”
무공이 모자라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무공을 배우도록 해야 할 터인데, 그런 얘기도 일절 없었다. 무엇보다 복부에 칼을 맞고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할 말인가.
“예. 대부인 마님.”
호충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인사를 올렸다. 그 후에 만난 가주의 다른 아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구밀복검(口蜜腹劍).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하수나 할 짓이다. 지금 호충의 아군은 오직 송 영감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에겐 작은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위험한 행동이었다. 중원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선 모든 것을 감추고 또 감춰야 했다. 살아남아야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주의 셋째 아내는 그런 호충의 태도에도 깔보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어찌 가주님 핏줄에 너 같은 것이 나왔을까. 근본을 모르는 여자의 아이를 들이신 것부터가 잘못이겠지.”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어도 핏줄이 의심된다는 말이었다. 어찌 핏줄을 앞에 두고 친모를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호충은 얼굴도 모르는 친모와 자신이 받은 모욕을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말했다.
“형님들이 너무 뛰어나셔서 제가 더 그리 보이시나 봅니다. 특히 작은 마님의 아드님이신 셋째 형님은 무위가 정말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호호호. 우리 호성이가 무공은 정말 빼어나지.”
아들의 칭찬을 달가워하지 않을 어미가 있던가. 하지만 사실 셋째 호성의 무공은 첫째와 둘째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호성 형님은 꼭 소가주 자리를 차지하실 겁니다. 저는 우마(牛馬)가 되어서라도 호성 형님을 밀어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지만, 사탕발린 말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