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자의 야심
***
호충은 회칼을 주문하고 돌아온 날 또 꿈을 꾸었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마지막 의뢰에 대한 꿈이었다.
.
.
.
호충은 강 사장에게 온 문자를 확인했다.
[25c. 김수철.]
간단한 문자였지만, 대상자는 간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호충은 왜 의뢰자가 4억이라는 거액을 제시했는지 알 수 있었다.
“X발. 거물도 이런 거물이라니.”
문자의 내용은 폭력조직 25세기파의 두목인 김수철을 지목하고 있었다. 조폭두목이지만, 양지로 나와 번듯한 회사를 차렸고 지금은 회장이라는 직함도 갖고 있었다.
“썅. X빠지게 뛰어야겠네.”
그렇다고 의뢰를 무를 수는 없었다. 마지막 의뢰이기도 했지만, 거액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퇴직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의뢰금이다.
호충은 강 사장의 문자에 답문했다.
[두 장. 오늘 2시에 건물 아래서 기다린다.]
회신은 빨랐다.
[콜.]
선금을 현금으로 받은 호충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보조석에 안전벨트를 하고 있는 쇼핑백엔 빳빳한 현금이 2억이나 들어있었고, 호충의 차 뒤로는 선팅으로 도배한 검은색 차량이 따라붙어 있었다.
“오늘도 지랄 맞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의뢰를 맡긴 놈들은 히트맨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특히 조폭이 의뢰인이면 거의 필수적으로 거치는 코스였다.
“잘 따라와라. 병신들.”
교차로 신호등을 앞두고 차를 천천히 몰던 호충은 신호등이 노란불로 바뀌자마자 가속 페달을 밟았다.
부우웅.
호충의 차가 교차로를 지나가자 뒤따르던 검은색 차량이 급하게 뒤쫓았지만, 튀어나온 다른 차량으로 인해 발길이 붙잡혔다.
빠아앙. 빵빵.
다른 차량들이 막아준 덕분에 미행을 따돌렸지만, 호충은 안심하지 않았다. 이런 놈들이 겨우 미행하는 차 한 대로 끝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처에 차를 세운 호충은 보조석 쇼핑백을 들고 내렸다. 그리고 지하철로 향했다.
호충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서울 시내를 돌기 시작했다. 한참이 걸려 도착한 신도림역. 호충의 신형은 역사에 가득한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
“···신도림역에서 놓쳤습니다.”
“X새끼야. 대체 일을 왜 이따위로 하는 거야?”
짝짝짝.
보고하던 남자의 고개가 좌우로 휙휙 돌아갔지만,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이번 일 진행하는 동안에 다시 찾아. 그때도 실패하면 이렇게 안 끝난다. 알았어?”
“예. 형님.”
***
혼자서는 항문도 닦을 수 없을 것 같은 두꺼운 팔을 가진 남자가 공손히 차 문을 열고 허리를 접었다. 그리고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수고했다. 가봐라.”
“예. 회장님.”
그를 내려준 차량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남자는 몸을 돌려 아파트 입구로 향했다.
최근 지어진 신식의 아파트였지만, CCTV가 설치되지 않은 장소였다.
그 남자가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 급하게 지나가며 어깨를 툭 쳤다.
퍽.
“아! 죄송합니다.”
“X 같은 새끼가. 눈을 어디다 두고 다녀?”
“너 지금 나한테 욕했어?”
“너? 지금 반말했어? 너 몇 살이야?”
“노땅 새끼가 나이 먹었다고 자랑이네. 욕은 덤이냐? 약 없으면 서지도 않는 새끼가 입만 살아서는···.”
무슨 배짱인지 젊은 남자는 나이든 남자의 신경을 박박 긁고 있었다.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나이든 남자의 손이 젊은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젊은 남자의 시선에 녀석이 멱살을 잡은 손에서 한 손을 떼어 뒤로 가져가는 것이 느릿하게 보였다. 주먹으로 얼굴을 치겠다는 심산이었겠지만, 이미 준비되어 있는 사람에겐 위협도 아니었다.
이후의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젊은 남자의 품에서 뽑혀 나온 회칼은 번쩍하는 사이 나이든 남자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푸욱.
“커헉.”
젊은 남자는 확실하게 마무리할 생각이었는지 회칼을 비틀어 뽑아 몇 번 더 복부에 찔러댔다.
슉. 춥춥.
“꺼억.”
젊은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보고 얼른 다른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멀리서 사건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가 있었지만, 칼을 든 남자는 상관하지 않았다.
대로를 벗어나 골목과 골목을 누비며 달리던 젊은 남자는 쓰고 있던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점퍼를 벗어 피 묻은 회칼과 모자, 마스크를 감쌌다. 점퍼 속에는 셔츠와 정장 재킷이 있었기에 골목 구석에 미리 가져다둔 가방을 들고 걷기 시작하자 영락없는 직장인으로 보였다. 점퍼를 가방에 구겨 넣고, 다시 가방에서 뿔테안경을 꺼내 쓴 젊은 남자는 주머니에서 검은 가죽 장갑을 꺼내 피 묻은 손에 끼웠다. 골목에서 대로로 나와 사람들 사이를 파고드는 남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남자는 멀찌감치 주차해둔 차에 도착해서 여유롭게 문자를 남겼다.
[완료. 잔금은 모레.]
호충은 생각보다 쉽게 끝난 이번 의뢰가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이라 그런가. 시원하네.”
이번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25세기파의 수장인 김수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왔다. 김수철은 여느 조폭두목처럼 배우자 외에 애인을 두고 있었고, 오늘 녀석이 발걸음한 아파트도 애인에게 마련해준 아파트였다. 애인의 아파트로 가는 날은 부하를 빨리 돌려보낸다는 것을 확인하고 의뢰를 해결할 날짜를 정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깔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증거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고, 오늘 자신을 본 목격자도 걱정하지 않았다. 모자와 마스크로 중무장한 자신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장갑 속에 숨어 있던 피 묻은 손을 물티슈를 꺼내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방에 넣어 가져온 점퍼와 회칼, 모자와 마스크를 비닐에 넣었고, 핏물이 잔뜩 묻은 물티슈도 같이 넣었다.
호충의 차는 지방으로 향했다. 증거물은 깨끗하게 정리해야 했다. 괜히 불로 태우다가 소방차가 출동할 수도 있다. 모든 증거물은 산속 깊은 곳에 묻을 것이다.
***
인적이 드문 지방의 산으로 가서 증거물을 묻고 근방의 한 찜질방에서 밤을 보낸 호충은 아침에 강 사장이 보낸 문자를 받았다.
[.]
오로지 점 하나만 찍힌 문자.
“젠장.”
강 사장과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였다. 일이 잘못된 경우를 대비한 단 하나의 암호였는데, 마지막 의뢰에서 이 문자를 받을 줄은 몰랐다.
호충은 휴대전화를 끄고 도로를 달리는 길에 멈춰서 수풀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보조석 서랍에서 다른 휴대전화를 꺼냈다.
“여보세요? 화란아. 너 어디야.”
-···나야 집이지. 오빠는?
“지금 집으로 간다. 짐 챙겨. 거의 다 왔으니까 금방 간다.”
-으응.
호충은 급한 마음에 화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
통화를 마친 화란은 휴대전화를 옆에 있는 남자에게 빼앗겼다.
탁.
“뭐래?”
“지, 지금 집으로 온다고 했어요.”
“···녀석이 마련한 아지트는 어디야.”
“아지트요?”
“뒈지기 싫으면 제대로 불어라. 화란아.”
“지, 지방에 있겠죠. 항상 일이 끝나면 지방으로 갔어요.”
“썩을. 그래서 어디냐고!”
“몰라요! 내가 이 사람하고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요!”
“그런 년이 놈의 애까지 배냐?”
호충이 자주 드나들었던 이 집을 찾아낸 녀석들은 돈을 찾기 위해 집을 뒤지다가 화란의 산부인과 수첩을 발견했다.
“제발···. 그 사람 살려주세요. 태어날 우리 애 아빠라고요.”
“우리 조직 큰형님이 녀석 손에 죽었다. 우리 형님은 가족이 없었냐? 가망 없는 놈은 잊어. 애는 되도록 빨리 지우고.”
“···흐흑.”
“돈은 정말 이게 전부야?”
그리고 선금으로 줬던 2억도 발견했다. 분명 이 외에도 다른 돈이 더 있을 것 같아 찾고 있었지만, 목표했던 돈은 찾아낸 셈이다.
“다른 돈은 저도 몰라요. 안 알려줬어요. 그 사람은 내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있다고요.”
“썅. 꽁돈이라도 좀 챙기나 했더니.”
화란에게서 돌아선 남자는 조직원들을 다그쳤다.
“야. 잘 숨어 있어. 신발 감추고.”
“예!”
“너희 둘은 밖으로 가서 대기. 눈치가 비상한 놈이니까 계단에 숨어 있다가 녀석이 들어오면 밖에서 문을 막아.”
“예!”
***
호충은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신발을 감추고 모습을 숨겼어도 냄새는 남는 법이다. 특히 남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지독한 향수는 모를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화란 말고 다른 사람이 집에 들어와 있음을 확신한 호충은 손을 뒤로 뻗어 출입문 손잡이를 잡았다.
덜컥. 쿵.
하지만 문은 조금 밀리다가 도로 닫혀 버렸다.
그때 화란이 뒷걸음치며 멀어졌고, 다른 방에서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가 나타났다.
“크흐흐. 하여간 눈치는 X나게 빨라요.”
“화란아.”
호충은 남자를 무시하고 화란만 보고 있었다.
“미, 미안 오빠. 오빠 미안해.”
“그래도 말은 해줬어야지. 썅X아.”
그 사이 다른 놈들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썩을 년.”
부웅.
쇠파이프가 호충의 머리로 날아오고 있었다. 순간 호충의 시야에 모든 것이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살짝 몸을 비틀어 쇠파이프를 피하고 녀석의 겨드랑이 사이에 뾰족한 주먹을 찔러 넣었다.
“!”
녀석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모로 쓰러졌고, 이후 다른 녀석들의 발길질과 주먹질이 이어졌다. 좁아터진 현관에서 벌어지는 활극이다. 날아오는 주먹을 잡아 다른 녀석들의 공격을 막고 팔을 비틀어 무력화시켰다. 발길질을 피하며 녀석들의 다리에 뾰족한 주먹과 엄지를 연이어 날렸다. 그간 호충이 배워온 무술이 모조리 풀려나오고 있었다. 태권도, 합기도, 유도, 특공무술에 겉멋으로 배운 이소룡의 절권도까지 가미되어 있었다. 짬뽕으로 익힌 갖가지 무도를 실전으로 다져온 호충이다.
“끄악.”
“뒈져라!”
이어지던 녀석들의 공격은 뒤에서 나온 명령에 의해 멈춰졌다.
“병신들아! 전부 비켜!”
호충의 시야가 밝아지며 보인 것은 녀석의 손에 들린 스턴건이었다.
“썅. 회칼만 있었어도···.”
급하게 오느라 가져온 무기가 없는 것이 한이었다.
파지지직.
스턴건에 맞은 호충은 몸을 부르르 떨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그그그.”
퍼억.
그 뒤로 계속된 발길질과 몽둥이질은 호충이 완전히 기절하고 나서야 멈췄다.
“그만! 끌고 가. 가서 작은 형님 보여드리고 처리한다.”
“예!”
***
이후에 있었던 고문과 폭력은 굳게 다물어진 호충의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가 나간 곳에서 만난 25세기파 2인자의 말은 호충의 입을 열 수 있었다.
“진호충. 미안하게 됐다. 수철이 형님이 은퇴를 안 해서 말이지.”
“······너였어.”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됐다.
눈앞의 남자가 김수철을 죽여 달라고 의뢰한 놈이었다. 그리고 녀석이 김수철의 복수를 하겠다며 자신을 잡아들인 것이다.
“네 놈을 잡아서 명분까지 쌓았으니 내가 회장으로 올라서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김수철을 잡아 회장을 공석으로 만들었고, 김수철을 죽인 살인범을 직접 잡아 보복까지 끝냈다. 조직원 누구도 새로운 회장의 취임을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녀석은 반대가 아니라 환호를 받으며 회장에 올라설 것이다.
“큭큭. 멍청하게 당했어. 이래서 조폭들 의뢰는 짜증이라니까.”
“···네 여자는 살려주마.”
“왜? 저승길 동무로 삼아주지?”
“···뱃속에 애는 살려야 하지 않냐?”
“!!”
“몰랐나? 다행히 내가 좋은 소식을 전해준 모양이야.”
“···임신했었군.”
화란이 자신의 아이를 가졌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어쨌든 네 놈이 한을 품고 가지 말라고 하는 소리야. 그나마 이 세상에 네 핏줄은 남겨 뒀으니까. 네 여자도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지.”
“···고맙군.”
그에게 고맙다고 말한 것은 아기를 살려줬기 때문이 아니다. 아직 얼굴도 못 본 자식에게 부성애가 생기진 않았으니까. 돈 때문에 배신한줄 알았던 자신의 연인이 협박으로 그리 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걸로 감사할 이유는 충분했다.
‘화란아. 넌 또 얘기를 안 했구나. X년.’
“앞으로 네가 입 열 시간은 없을 거야.”
녀석은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내 투명한 액체를 가득 빨아들였다.
아마도 마약일 것이다.
“안 아프게 주사 한 방 놔줄게.”
녀석은 자신이 입이 다른 조직원들에게 열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단단히 묶인 호충은 팔에 대충 찔러 넣는 주사기 바늘을 피할 수 없었다.
“너 앞으로 잘 살겠다.”
“푸흐. 그런다고 네가 살길은 없어.”
호충의 흐려지는 눈이 녀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방에서 말이야. 똥꼬충 많이 만나라.”
“나 대신 갈 놈 많다.”
그 뒤의 꿈은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뜬 것은 망망대해의 드럼통 속이었으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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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깬 호충의 눈엔 작은 눈물방울이 달려 있었다.
‘내 자식 얼굴도 못 보고 죽다니···.’
얼굴도 못 본 자신의 아이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화란아.. 화란아. 너라도 거기서 잘 살아다오.’
잠시 감정을 추스른 호충은 꿈을 꾼 이유가 둘째 호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첫째나 넘어설 것이지 왜 나를 죽이려고 하냐고!’
첫째 형인 호현과 대척점에 서 있는 둘째 호중은 25세기파의 이인자처럼 언제나 소가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호충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녀석을 다시 만나 당시의 꿈을 꾸었다고 짐작했다.
‘이번에도 죽어줄 성 싶으냐? 절대로 안 죽는다! 난 살아남고 말 것이다!’
호충은 삶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다.
***
흑패주 흑부
***
호충은 송영감에게 목인장을 부탁했다. 목인장은 굵은 목재에 가지처럼 나무가 꼽혀있는 형태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거처에 목인장이 설치되었고, 호충은 웃통을 벗고 땀을 뻘뻘 흘리며 목인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따닥. 딱. 딱.
영춘권에 기반을 둔 절권도는 본래 호충이 겉멋으로 익히려 했던 무술이었다. 하지만 익히면 익힐수록 그 매력에 빠져들었고, 나중엔 혼자서 꾸준히 연습할 정도로 절권도에 매진했었다.
호충이 익힌 것은 절권도만이 아니다. 뒷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잡스러운 것을 많이 익혔다. 태권도와 합기도, 유도, 특공무술이 가미된 호충의 체술은 이곳 중원에서 찾아보기 힘든 괴이한 무공으로 변신하는 중이다. 무공의 고하는 무공의 수준이 아니라 익히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무림인들이 아니라 뒷골목 왈패들을 상대할 정도로는 충분했다.
‘어차피 지금은 공력을 쌓기도 쉽지 않아. 되도 않는 가전 무공을 익히느니 알고 있는 것을 먼저 단련해서 써먹어야 해.’
그렇다고 가전 무공을 등한시하진 않았다. 무림에서도 먹어주는 가전 무공이라는데, 익히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언제 힘을 발휘할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가전 무공도 가끔 수련하고 있었다. 진가장의 진강십이검(眞强十二劍)은 진가장 특유의 호흡법과 12식으로 이루어진 검식이었는데, 당연히 검을 들어야 제 위력을 낼 수 있었다. 목검조차 없는 호충은 검을 쥔 것처럼 손을 말아 쥐고 춤을 추듯 따라했다. 당연히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엔 전과 같이 살지 않을 것이다. 밑에서 박박 기면서 살아봐야 벌레처럼 죽어갈 뿐이야.’
따닥. 따닥. 딱. 딱. 딱.
‘나의 인생을 살겠다. 모두의 위에 올라서겠다!’
새로운 인생을 사는 호충의 다짐은 여전했다.
타박타박.
호충은 가전 무공을 익히며 조금 좋아진 청력으로 누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른 훈련을 멈추고 벗어둔 옷을 걸쳤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매번 그렇듯이 송 영감이다.
“도련님.”
“벌써 식사 시간인가?”
해를 보니 한창 중천이었다.
“식사 때도 되었습니다만, 기다렸던 물건이 다 되어 가져왔습니다.”
“아!”
달포 전 대장간에 주문했던 회칼이 드디어 호충의 손에 들어왔다.
“나름 기술이 좋은 장인이었습니다.”
방에 들어온 송 영감은 품에서 무명천에 쌓인 네 자루의 칼을 꺼냈다.
“오오. 고생 많이 했겠는데?”
손잡이를 가죽으로 덧대고 칼을 넣을 칼집까지 가죽으로 제대로 만들었다.
부드럽게 가죽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회칼은 누구의 몸이라도 헤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을 더 받았으니 돈 값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은자 하나로는 부족하겠어. 나중에 은자 하나 더 가져다 줘.”
“예. 도련님. 그리하겠습니다. 추가로 주문도 더 넣어두겠습니다.”
자신이 모시는 공자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무기였다. 은자가 아깝지 않았다.
“무기가 왔으니 갈 때가 됐어.”
“···어딜 가시려고요.”
“시전의 흑패.”
흑패를 만나는 시기를 계속 미뤄두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회칼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피를 보겠네.’
짧은 시간 단련한 몸이라 조금 걱정 됐지만, 나머지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채우면 될 일이었다.
부족한 몸 상태보다는 만류하는 송 영감을 설득하는 것이 더 고역이었다.
“흑패는 전의 배수패 녀석들과 다릅니다. 게다가 녀석들이 바로 흉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차라리 진가장의 무사들에게 맡기십시오.”
송 영감에게 옥비연에게 들었던 내용을 일부 알려줬던 호충이다. 진가장의 둘째가 아니라 흑패가 연루되었다는 것까지만 알렸다. 덕분에 송 영감은 호충을 해친 상대를 시전의 흑패로 알고 있었다.
“어차피 진가장은 녀석들을 잡지 않아.”
“도련님이 가시면 뾰족한 수라도 있답니까.”
“생겼잖아. 뾰족한 수.”
호충은 자신의 손에 들린 회칼의 뾰족한 날을 들어 보였다.
“그 작은 칼로 뭘 어쩌시려고요.”
도련님이 피의 공포를 이겨내고 날카로운 칼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좋았으나, 지금은 너무 무모했다.
“나 무공도 열심히 익혔거든?”
“고작 달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같은 시간이라도 사람마다 성취는 다른 법이야.”
“······.”
문사로 살아온 이 몸이 나름의 체력을 기르고 있었기에 짧은 단련이라도 예전의 움직임을 회복한 호충이다. 게다가 지금 이 몸은 젊디젊은 열여섯 살.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했다. 아직 몸에 어색함이 남아있긴 하지만 실전에서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나 무인들이 아닌 뒷골목 건달패라면 악과 깡으로 승부하는 법이다. 무공의 고하는 크게 의미를 둘 필요가 없었다.
‘요즘은 공격에 내공도 조금 실리는 것 같고···.’
녀석이 지금까지 익힌 가전 무공으로 인해 몸에 미미한 공력이 존재했는데,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하며 조금씩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밖으로 표가 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힘이 조금 더 강해진 기분이었고, 쉽게 지치지 않는 수준이었다. 호충이 원하는 만큼 무공 수위를 끌어올리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송 영감은 밖에서 망이나 봐. 혹시 일이 틀어지거든 그때 진가장으로 달려가고.”
“아아. 도련님.”
호충의 고집을 말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송 영감은 괜한 걱정 하지마. 녀석들과는 되도록 대화로 풀어갈 생각이니까.”
“···무슨 일이 생기시거든 안에서 기별을 해주십시오. 바로 진가장의 무사들을 데려오겠습니다.”
“당연하지.”
호충은 회칼 하나를 엉덩이 뒤에 보이지 않도록 꼽고 하나는 품에 넣었다.
‘이거면 나도 일당백.’
손바닥에 착 달라붙는 회칼을 잡은 것만으로 자신감이 뿜어져 나온다.
‘마침 몸도 후끈하게 잘 풀렸고···.’
이제 뒷골목을 접수하는 일만 남았다. 위로 올라가는 첫 걸음이었다.
“오늘이 시작이야.”
“···제발 다치지만 마십시오.”
“대화만 한다니까 그러네. 영감은 밖에서 잠깐만 기다리면 될 거야.”
물론 몸의 대화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
흑패라고 불린 녀석들은 진가장의 눈을 피해 섬서의 자장(子張)을 주름잡는 건달패였다. 즉 조직폭력배를 부르는 통칭이 바로 흑패였다.
관에 신고 되지 않은 도박장과 몸을 파는 기녀가 일하는 홍루를 운영하는 녀석들인데 아직은 그 세가 작았다. 진가장이 자장(子張)에 있는 대부분의 상회를 관리하고 있었고, 일부는 직접 진가장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진가장의 힘이 큰 곳에서 뒷골목 건달패가 목에 힘을 주고 다닐 수는 없었다. 상점들 입장에선 누구의 보호를 받던 보호비를 내야 했으니 나가는 돈이 비슷했지만, 이름값이 높은 진가장을 더 쳐주고 있었다.
요즘 흑패는 조금씩 세를 불리며 커나가고 있었다.
흑부라는 별호로 불리는 마한로는 흑패의 우두머리였고, 흑부는 아리따운 기녀를 앞에 두고 험상궂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봐. 벌써 얘기 끝났다니까 자꾸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야?”
“···저희는 진가장의 보호를 받고 있어요. 자꾸 이렇게 나오시면 저희도 진가장에 연락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 이깟 청루를 진가장이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차라리 이쪽이 낫다니까 그러네. 내가 확실하게 보호하고 손님도 많이 끌어올게.”
“드릴말씀은 끝입니다. 더는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해요.”
청루의 주인인 여성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녀의 굳은 표정에 실금을 만들었다.
“진가장 둘째 공자님이 여길 자주 오셔서 믿는 모양인데, 나도 둘째 공자님이 허락하신 일이거든?”
“이 공자님이···.”
청루의 여주인이 믿고 있었던 사람도 진가장의 이 공자였던 모양이다.
“큭큭. 이제야 계산이 서? 진 공자님이 여길 내가 먹으라고 허락하셨단 말이지.”
“그, 그러실 리가 없어요.”
“그거야 진 공자님이 돌아오시면 알 일이지.”
“진 공자님께 확답을 듣기 전엔···.”
“그때는 늦어. 지금은 내가 여길 청루로 계속 운영할 생각이지만, 진 공자님이 돌아오셔서 확답을 주시면 홍루로 바꿀 생각이거든.”
“!”
청루와 홍루는 같은 기루라도 큰 차이가 있었다.
청루는 술과 음식, 기예를 중심으로 하지만, 홍루는 오직 여성과의 잠자리를 목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청루의 기녀들은 자신이 몸을 파는 것이 아니라 기예를 선보이기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웃음은 팔지언정 몸은 팔지 않습니다!”
“큭큭. 하라면 해야지 어쩔 건데?”
“우리 기루는 절대로 홍루가 되지 않을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루주가 죽어나가도 그리 될까?”
“!!”
“무뢰배들이 들이닥쳐서 아리따운 그대를 윤간하고 목을 매달아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세상엔 별에 별 놈이 다 있잖아. 우리가 보호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생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화용루(花龍樓)의 루주인 화진은 자신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흑패 두목 마한로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에 떠는 것뿐이었다.
‘진 공자님. 제발 돌아오셔서 아니라고 해주세요.’
“술이나 한잔 따라봐라. 오늘은 편히 담소나 나누다 가지. 루주의 얼굴 때문에 특별히 봐주는 거야.”
루주는 떨리는 손으로 잔에 술을 따랐고, 마한로는 자신의 잔을 내려놓고 술 주전자를 들어 빈 잔에 가득 부었다.
“같이 먹지.”
“······.”
“아니면 무뢰배들이 오늘 그대의 방에 찾아갈 지도 모를 일···.”
“······.”
루주는 마한로가 내미는 술잔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루주가 받은 술잔에는 하얀 가루가 깔려 있었다. 마한로가 몰래 준비한 미약(媚藥)이었다.
‘길게 끌 것도 없는 일이지. 네년이 이걸 먹으면 내게 달려들게 될 것이다. 오늘 화용루와 루주를 한꺼번에 접수한다.’
흑부 마한로는 미약이 담긴 잔이 루주의 입에 닿는 것을 보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그리 쉽게 흘러가겠는가.
그때 루주와 흑패 두목이 담소를 나누는 금실의 문이 열렸다.
드르륵.
루주의 빨간 입술이 잔에서 떨어져 나오며 급히 문을 돌아봤고, 흑부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거의 다 됐는데···. 젠장.’
“아. X발. 이 새끼 찾느라 몸 다 식었네.”
욕설과 함께 등장한 젊은 남자를 본 마한로는 루주에게 물었다.
“······루주는 금실에 아무나 들이나? 기루 운영이 영 개판인데?”
호충이 마한로의 말에 대꾸했다.
“너 나 모르냐? 내 얼굴 몰라?”
“그럼 넌 나 아냐?”
“초면이긴 하지.”
“그런데 왜 반말이냐? 겁대가리를 상실했냐?”
“상대가 반말을 하면 어째서 반말을 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X새끼야?”
“······.”
호충은 내실에 마한로 하나만 남아있는 것을 보고 긴장을 풀며 말 했다.
“마침 애들도 다 떼어 놨네. 몸이 좀 식어도 괜찮겠어.”
“···밖에서 대기하던 놈들은 어디로 갔지?”
흑패의 건달 둘이 밖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제 할일을 잘 했다면 불청객이 들어올 일도 없어야 했다.
“아. 잠깐 잠들었더라. 피곤했나 봐.”
녀석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해 있었다. 어딜 맞았는지 입구 구석에 구겨져있는 녀석들이다.
“뭐? 이것들이 어디서 잠을···.”
호충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넌 입으로 싸우는 편인가?”
밑도 끝도 없는 도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