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권(繁拳)
***
“애 새끼가 미쳤나···.”
마한로는 불쑥 화가 올라왔지만, 호충을 가만히 보다가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 어디서 나 본적 없냐? 왜 이렇게 면상이 익지?”
“큭큭. 흑패 새끼들은 공통적으로 머리가 나쁘네.”
아까 밖에 있던 놈들도 호충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하는 말이다.
“아. 그 새끼들은 아는 척할 시간도 없었지.”
녀석들이 멍하니 자신을 보는 사이 먼저 주먹을 날렸고, 다른 놈이 소리를 지르기 전에 얼른 녀석을 목을 쳐 쓰러트린 다음 기절시켰기 때문이다.
“그냥 너만 머리가 나쁜 것으로 하자. 똥 멍청이 새끼야.”
“하! 어린놈에 새끼가 예의를 똥구멍으로 처먹었나.”
뭔가 떠오르려던 기억이 녀석의 말로 깨끗이 지워져 버렸다.
마한로는 탁자에 놓였던 술 주전자를 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호충을 향해 날듯이 뛰어 올랐다.
“이야. 옛날 생각나네.”
호충은 날아오는 주전자를 우측으로 피하며 흑부의 움직임을 계속 쫓았다.
그리고 녀석이 바닥을 딛기 전에 다시 앞으로 뛰어들었다.
마한로의 손엔 어느새 시커먼 도끼가 한 자루 들려있었다. 마한로의 별호를 만든 바로 그 흑부(黑斧)였다.
후웅.
달려 나가던 호충의 허리가 뒤로 젖혀졌고, 호충은 이마 위를 스쳐지나가는 도끼날을 느끼며 아찔한 고양감을 느꼈다. 싸움에 임하면 종종 느끼는 감각이다. 세상은 느릿하게 흘러가고 자신은 그 안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이거지!”
도끼날은 호충의 이마를 지나고 선회하여 다시 몸통으로 향했다.
“이크.”
호충의 몸은 날렵하게 도끼를 피하며 계속 마한로의 주변을 돌았다.
“쥐새끼 같은!”
마한로의 도끼가 뒤로 크게 젖혀졌을 때 호충은 더욱 가까이 다가가 발을 들었다.
퍽.
하체에 공격을 허용한 마한로의 힘 빠진 도끼가 아래로 떨어질 때 호충은 녀석의 배에 등을 대고 있었다.
턱.
또한 도끼를 든 마한로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한판이다 새끼야.”
마한로의 다리가 들리며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유도의 엎어치기였다.
콰앙!
“커헉.”
녀석의 등짝은 바닥과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목부터 바닥에 매다 꽂을 수 있었지만, 일부러 등을 바닥에 닿게 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녀석이 숨을 멈추고 버둥거리는 사이 호충은 품에 있던 회칼을 꺼내 녀석의 발목을 잽싸게 긋고 지나갔다.
핏. 핏.
발목 힘줄이 잘린 녀석은 이제 호충의 상대가 아니었다. 호충만이 아니라 앞으로 누구의 상대도 되지 못할 터였다.
“휴우. 난 너무 효율적이야. 막 재미있어질 판이었는데 아쉽네.”
“커흑. 윽.”
이제야 숨을 몰아쉬는 녀석을 보는 호충의 눈은 차가웠다.
“아직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널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쿠둥.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바닥에 꼬꾸라졌다.
“내, 내 다리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제야 두 다리의 발목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발목 힘줄을 잘랐다. 넌 이제 다리병신이야.”
“너 이노옴!!!”
호충은 이제 기동력을 잃어 위협이 되지 않는 녀석보다 아직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루주에게 관심이 있었다.
“루주는 밖에 나가서 주변 정리 좀 해. 언제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있을 거야?”
“···예. 진 공자님.”
“오. 날 알아봤어? 네가 저 똥 멍청이보다 낫구나.”
“···감사합니다. 진 공자님.”
“!”
마한로는 루주가 진 공자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호충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너, 너는 진가장의···.”
“네가 담근 진가장의 사 공자가 바로 나다.”
“······.”
진가장의 사 공자 진호충은 성정이 유약하고 피를 극도로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 공자의 사주를 받아 일을 처리하는데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 보여준 모습은 지금까지의 소문이 거짓임을 알게 했다.
“그날 너를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다. 녀석이 일만 제대로 처리했어도···.”
“본래 죽일 생각이었던 모양이네?”
마한로는 오늘 자신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크흐. 어설픈 놈을 보냈다가 일을 그르쳤지.”
진가장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던가. 본인조차 그 위세에 눌려 흑패에 들어오고 얼마 안 된 녀석에게 칼을 쥐어 내보냈다. 녀석이 일을 치르고 나면 흉수를 찾지 못하도록 죽여서 입막음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한로는 녀석이 돌아와 진호충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을 듣고 도끼로 머리를 쪼개버렸다.
“내가 호중이 형님한테 그리 밉보였던가?”
“어, 어떻게···.”
흉수를 흑패로 특정하고 찾아온 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비밀리에 일을 사주한 진호중까지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
“자장(子張)에서 나를 해치려 하는 놈은 몇 없거든. 그 중에서 몇몇을 용의선상에서 제외하면 남은 것은 셋인데, 너와 관련 있는 놈은 단 하나야. 바로 둘째 호중이 형님이지.”
“······.”
드르륵.
외부를 정리하겠다며 나갔던 루주가 다급한 얼굴로 돌아왔다.
“지, 진 공자님. 밑에 흑패의 패거리가 몰려왔습니다.”
“마침 잘 됐네. 다 이리로 불러와.”
“···예. 진 공자님.”
호충은 눈에서 독기가 빠지기 시작한 마한로를 보며 말했다.
“네가 어찌하느냐에 따라 너와 네 동생들의 생사가 결정될 것이다.”
“!”
살아남을 길이 있다면 자신의 태도도 달라져야 했다.
동생들의 생사가 아니라 자신의 생사가 중요했다.
“내가 진가장의 중추는 아니지만, 직접 흉수를 잡았는데 가주인 아버지께서 가만히 계시겠느냐? 그리고 네가 믿는 진가장의 둘째 호중은 자리를 비웠다. 아마 네 놈과 네 수하들이 다 죽고 나서야 도착하겠지. 나? 내가 진씨 세가의 막내라는 것을 밝히면 너희 수하들이 감히 칼을 들이밀 수 있을까?”
“······.”
하나 같이 맞는 말이었다.
“또한 이대로 네가 밖으로 나간다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네게 원한이 쌓인 놈이 한둘이 아닐 텐데? 앉은뱅이가 도끼를 휘두른다고 누가 맞아주겠느냐.”
자신은 반병신이 되었음이 확실하다. 앞으로 죽지 않으려면 눈앞의 진가장 사 공자에게 밉보이지 말아야 했다. 원한이고 뭐고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 어찌 하올까요.”
“내가 시키는 대로하면 네 비루한 목숨을 이승에 남겨주마.”
.
.
.
흑패의 이인자인 사중환은 숫자를 믿고 기세등등하게 화용루로 들어왔고, 곧장 금실로 발을 들이밀었다.
“어떤 새끼가 감히 우리 애들을···.”
금실에는 젊은 청년이 막 마신 술잔을 내려놓고 있었고, 그 곁에는 자신들의 두목 마한로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젊은 남자는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마한로의 가슴을 발로 차 뒤로 넘어트렸다.
퍼억.
“······.”
마한로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다시 무릎으로 기어와 옆에 꿇어앉았다.
“이봐 루주. 술이 없잖아.”
마한로가 술 주전자를 던져버렸기에 남은 술이 없었다.
사중환 뒤에서 눈치를 보던 루주가 얼른 술 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제가 한잔 올리겠나이다.”
호충은 자연스럽게 잔을 내밀었고 작은 잔에 쪼르르 술이 채워졌다.
작은 술잔의 술을 호쾌하게 비운 호충은 다시 발을 들어 마한로의 가슴을 걷어찼다.
퍼억.
후다닥.
뒤로 튕겨나갔던 마한로는 전과 같이 얼른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꿇어앉았다.
“·········.”
사중환은 자신 곁으로 루주가 술 주전자를 들고 사뿐히 걸어가기 전부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흑패주인 마한로가 대가 꺾여 꿇어앉았기 때문이다.
‘패주가 저럴 분이 아닌데···.’
험악한 뒷골목에서도 마한로는 더러운 성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전형적인 뒷골목 건달패의 모범(?)이었다.
사중환은 흑패주 마한로가 저렇게 저자세를 취한 것으로 상황을 짐작했다. 눈앞의 상대가 비비지 못할 강자이거나 강력한 세력을 가졌음이다.
사중환과 흑패의 패거리가 어찌해야할지 모르고 있을 때 술잔을 내밀고 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거 새끼들 눈치 느리네. 똥 멍청이 밑에 다 똥 멍청이만 있었던 모양이야.”
마한로가 호충의 말을 거들며 소리쳤다.
“꿇어 새끼들아!!!”
뒷골목에서 느는 것은 눈치밖에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눈치를 챙기기 쉽지 않았다.
사중환은 후다닥 달려와 마한로의 뒤에 꿇었고, 다른 녀석들도 얼른 사중환을 뒤따랐다.
퍼억.
그 사이 다시 술잔을 비우고 내려놓은 젊은 남자는 다시 마한로를 걷어차고 있었다.
싸늘한 감각이 사중환의 뒷덜미를 간질였다.
‘흑패는 끝장났다.’
마한로가 꿇어앉은 뒤에 앉아서 더 잘 보였다. 마한로의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어기적거리며 무릎으로 기어가 꿇어앉는 패주의 두 다리는 제 기능을 할지 의문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두목에게 이어지는 폭력은 흑패 패거리를 가슴 졸이게 만들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단 한 명이 금실의 분위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마한로.”
“예! 진 공자님.”
“!”
사중환은 진 공자라는 말을 듣고서야 젊은 남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진가장의 막내!’
멀리서 본 기억이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엔 순해 보였던 어린 남아였는데, 지금은 살기등등한 모습이라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은 탓이다.
“네 잘못된 선택으로 네 조직원의 목이 모두 날아갈 판이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대신 값을 치르겠나이다.”
“너는 이미 네 다리로 값을 치렀지 않느냐.”
그제야 사중환을 제외한 다른 조직원들이 마한로의 다리에 시선을 줬다. 다리에서 흘러나온 흥건한 피로 녀석들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익!”
마한로를 깊이 따르던 녀석 하나가 꿇어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일어난 것보다 빨리 뒤로 넘어갔다.
슈욱. 퍽.
“아악!”
어느새 호충의 손에서 날아간 회칼이 녀석의 어깨에 꼽혀 있었다.
“저 녀석은 네가 아끼는 녀석인가?”
“······제가 가까이 두는 녀석입니다.”
“머리를 노리지 않아 다행이로군.”
“······.”
“네 수발을 들어줄 녀석도 필요하지 않겠느냐.”
“···자비하신 처분에 깊이 감읍하나이다.”
“거기 너. 이름이 뭐냐.”
사중환은 자신을 지목한 진가장의 공자에게 떨리는 입을 열었다.
“사, 사중환이라 하옵니다.”
“보아하니 네가 마한로 다음이렸다.”
“그, 그러하옵니다.”
“너는 무엇을 내 놓겠느냐.”
“!!”
마한로가 다리를 내줬다. 자신도 팔다리 중에 하나를 내놓으라는 말이었다.
“저, 저는···.”
그때 마한로가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소리쳤다.
쿵.
“앞으로 흑패는 공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일 것이옵니다. 받아주십시오.”
“바, 받아주십시오.”
사중환은 얼른 마한로의 뒷말을 따라하며 머리를 박았고, 다른 조직원은 분위기를 타고 머리를 박았다. 누가 팔다리를 내놓고 싶겠는가.
쿵. 쿵. 쿵.
“······.”
호충은 조용히 술잔을 내밀었고, 루주는 다시 술잔을 가득 채웠다.
쪼르르.
탁.
다시 술잔을 비우고 탁자에 내려놓은 호충이 입을 열었다.
“의원을 데려와라. 앞으로 자장 흑패는 마한로가 아니라 사중환이 맡는다.”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고 해도 이렇게 심심하게 흑패의 접수를 끝낼 수는 없었다.
‘두목은 두목다워야지.’
“사중환. 자리에서 일어나.”
사중환이 주섬주섬 일어나자마자 호충은 자세를 잡고 말했다.
“이빨 꽉 깨물어라.”
“흡.”
퍼버버벅.
“커거걱.”
호충의 주먹이 쉴 새 없이 사중환을 두들겼다. 호충의 가슴 앞에 나란히 자리했던 주먹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나아가고 다시 회수되고 있었다. 회수된 주먹이 다시 나아가는 모습은 마치 많은(繁) 주먹(拳)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몇몇이 조그맣게 말했다.
“버, 번권(繁拳).”
호충이 갖게 될 첫 별호의 탄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