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232)

열락

***

사중환이 주섬주섬 일어나자마자 호충은 자세를 잡고 말했다.

“이빨 꽉 깨물어라.”

“흡.”

퍼버버벅.

“커거걱.”

짧은 시간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멈춘 호충의 주먹이다. 앞에 서 있던 사중환은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넘어갔다.

털썩.

“내 원한은 이걸로 마무리하겠다. 너희는 앞으로 내 명을 기다려라. 또한 오늘 일은 어디에도 발설하지 말아야겠지?”

“······.”

급박한 전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녀석들은 매가 약인 법이다.

호충의 발바닥이 근처에 있던 녀석들에게 향했다.

퍽. 퍽.

“멍청한 새끼들아. 의원 불러오고 정리 시작해!”

“예, 옙!”

마한로가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갔고, 기절한 사중환과 칼에 맞은 조직원도 들려 나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송 영감에게도 대화(?)가 잘 풀렸으니 돌아가 있으라고 전했다.

“정말 괜찮으신 거죠?”

“괜찮아. 대화가 잘 끝났어.”

“방금 몇 명이 업혀 나가던데···.”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었나보지. 나는 여기서 식사 좀 하고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예. 도련님. 일찍 들어오십시오.”

“기다리지 말고 그냥 자.”

호충은 다시 금실로 들어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일이 잘 풀려 기분을 내고 싶었다. 금실엔 화용루의 루주가 남아서 호충의 시중을 들었다.

“네 이름이 뭐냐.”

“소첩. 화용루의 루주인 황화진이라 하옵니다.”

“나를 보았더냐.”

“전에 먼발치에서 뵈었나이다. 나이 많은 종복과 서책을 사러 나오셨었지요.”

지금은 그때와 너무 다른 분위기였지만, 얼굴은 그대로였다.

“용케 알아봤군.”

“매일 사람들을 만나는 터라···.”

얼굴을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기녀들의 특기가 아니겠는가.

“그도 그렇겠군.”

“공자님의 무공이 실로 고강하십니다. 오늘 소첩과 화용루의 기녀들이 구명지은(求命至恩)을 입었나이다.”

“구명지은까지는 아니지. 잔이나 채워라.”

화진은 눈웃음을 흘리며 다시 호충의 잔을 가득 채웠다.

투명한 백주가 차오른 잔을 보던 호충은 고민에 빠졌다.

‘영감이 노심초사 기다릴 것인데···.’

그저 기분을 낼 생각이었지 진짜로 술을 마실 생각은 아니었다.

‘목숨이 위협받는 중에 함부로 술을 입에 댈 수는 없지.’

“···혼자는 흥이 나지 않는구나.”

“공자께서 원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화진은 마한로가 따라두었던 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꿀꺽.

그 잔에 있던 하얀 가루는 이미 다 녹아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호충과 화진이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늦게 시작했으니 벌주를 마셔야지?”

‘내 대신 네가 마셔야 할 것이다.’

술은 마시고 싶지만, 마실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통해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호충은 술 주전자를 들어 화진의 잔을 다시 가득 채웠다.

“제가 벌을 받을 차례가 돌아왔나이다.”

흑패에 이어 자신이 벌을 받는다고 표현하는 화진은 후끈 달아오르는 자신의 볼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진은 호충이 따라준 술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벌주는 기본이 석 잔이야.”

호충은 술 주전자를 들며 미소 짓고 있었다.

“호호호.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목숨의 위협을 벗어났으니 벌주가 대수겠는가. 흑부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았으니 앞으로는 걱정이 없었다. 화진은 거절하지 않고 호충이 주는 술을 받아 마셨다.

몇 순배 돌지도 않았는데, 화진은 정신이 몽롱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자꾸만 몸이 달아올랐고, 눈앞의 어린 공자가 천상의 미남으로 느껴졌다.

‘구명지은을 입었으니 응당 보답을 해야···. 어휴. 어쩜 이리 잘 생겼을까.’

화진은 호충의 곁에 앉아 안주를 입에 넣어주며 자꾸만 엉덩이를 붙였다.

탄탄한 가슴과 허벅지에도 슬쩍슬쩍 손을 스치며 지나갔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손짓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호충은 자신에게 들이대는 화진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쪽 계통의 여성들을 많이 겪어본 호충에겐 오히려 익숙한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술도 반가운데, 이건 더 반갑군.”

약 기운이 크게 오른 화진은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하악. 공자님. 소첩을 좀···.”

“급하냐? 나도 급하다.”

약에 취한 기녀와 혈기 넘치는 남자가 만났으니, 이후의 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도련님은 대체 언제 돌아오시려고···.”

송 영감은 밤이슬을 맞으며 진가장에서 호충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호충은 뜨거운 열락에 빠져 돌아갈 생각도 않고 있었다.

***

이른 아침. 잠에서 깬 호충은 의복을 갖춰 입었다.

뜨거운 밤을 선사했던 화진은 여전히 이불 속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호충은 방문으로 향해 뗀 걸음을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등 너머로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여인의 신형이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다가가 그녀의 잠든 얼굴을 보다가 침상의 이불을 확 걷어버렸다.

“꺄읍.”

“깼으면 말을 하지.”

그녀의 달라진 숨소리를 듣고 깨어났음을 알았던 것이다.

“이, 이불을 도로 주시어요.”

“왜. 보기 좋은데.”

호충은 발가벗은 화진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 안아주었다.

아침 행사는 선택사항이지만, 새로운 세상에서 처음 안은 여자가 아니던가.

“하윽.”

“그냥은 못 가겠네.”

호충은 기껏 입었던 자신의 의복을 다시 풀어냈다.

“지, 지금은 낮이옵니다.”

“이런 일에 밤낮이 따로 있더냐?”

“하지만···.”

“이리 오거라. 이미 늦었느니라.”

“아아.”

.

.

.

호충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화용루를 나섰다.

화진은 입구에서 호충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대체 어쩌자고······.’

진가장의 어린 막내 도련님을 자신의 침상으로 끌어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둘째 진호중 공자님의 추파도 한사코 거절한 자신이 아니던가. 하물며 스물다섯인 자신이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막내 공자와 밤을 지새웠다는 말은 어디에도 하지 못할 말이었다.

“윽.”

기루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화진은 저릿한 하복부의 고통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청루의 기녀들은 루주의 걸음걸이를 한 눈에 알아봤음이다.

“어머나.”

“루주님이···.”

“이제야 서방을 만나셨네.”

본디 홍루는 나이가 많은 퇴물 기녀들이 주로 일을 하고 청루에는 젊고 파릇파릇한 기녀들이 주류를 이룬다. 청루의 기녀들은 높은 집 첩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었다.

“루주님과 밤을 보낸 사내는 누구였을까요?”

열여섯의 진호충은 얼핏 성인으로 보였기에 기녀들은 진가장의 막내공자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어제 흑패에서 왔었는데···. 혹시···.”

“흑부 마한로와 철필 사중환은 너희들이 모두 들어가고 나서 부하들 손에 끌려 나갔어. 아마 둘을 처리한 무림 고수가 아닐까?”

“어머, 어머. 그럼 루주님이 정실이 될 수도 있단 말씀?”

높은 집에선 신분 고하를 따져 정실은 어림도 없었지만, 그보다 자유분방한 문화를 가진 무림의 인물들에겐 가능할 일이었다.

기녀들의 소곤거리는 것을 모르는 화진은 자리에 앉는 것도 불편해 죽을 지경이다.

“윽. 진 공자가 젊기는 젊어···.”

***

호충의 걸음이 향한 곳은 진가장이 아니라 옥비연이 머무는 폐가였다.

“게 있느냐.”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폐가에서 나온 이들이 밖을 내다봤다.

“누구지?”

“대형이 중요한 손님이 올 수도 있다고 했잖아.”

“아. 그랬지.”

“어!”

마지막 놀라는 목소리는 말동의 것이었다. 말동은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왔다.

“공자님!”

“말똥이가 있었구나. 비연은 어디 있느냐.”

“대형은 잠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쓸데없이 부지런하긴.”

배수가 부지런해봐야 남들 주머니나 더 털 것이다.

“매일 저희를 먹여 살리느라 고생이시죠.”

“······.”

평소 옥비연이 동생들을 어찌 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눈앞에서 몇 번이나 말동을 모른다고 했음에도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옥비연을 믿으며 따르고 있었다.

“찾아서 데려오너라. 긴히 할 얘기가 있느니라.”

“예. 공자님.”

말동이 옥비연을 찾아 나서고 나서 폐가의 녀석들이 호충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이는 제각각이다. 말동이 가장 어린 것은 확실해보였고, 나머지는 십대 중후반의 나이로 보였다.

“인사 올립니다. 공자님.”

여기 이 녀석 하나만 이십대를 훌쩍 넘은 것 같았다.

“소생 장위라 하옵니다.”

“비연이 없으면 네가 대신 동생들을 맡겠구나.”

“그러하옵니다.”

“너희 수가 좀 늘었다?”

분명 전에는 말동까지 일곱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주변에 열은 있었다.

“다섯을 더 받았습니다. 세상에 흔해 빠진 것이 거지들이니까요. 덕분에 대형만 더 바빠졌습니다.”

비연은 호충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그렇다면 호충이 답할 차례였다.

마침 어제 모든 일이 정리되지 않았던가.

“그래. 우선 알겠다. 나머지는 비연이 오면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

“예. 공자님.”

장위는 몰려든 동생들의 등을 떠밀어 각자의 일을 하게 했다. 이들에게 일이라는 것은 뻔한 것이다.

“각자 맡은 구역으로 가서 외부에서 온 사람이 있는지 찾아봐. 얼굴 모른다고 아무 놈 주머니나 털지 말고 사수한테 확인 해.”

배수패가 남의 주머니를 터는 것 외에 무얼 하겠는가.

“······.”

호충은 배수패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 궁리 중이었다.

‘손이 빠르니 변검(變臉)을 배워도 될 것이나···.’

그렇다고 중원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지금 시대에 얼굴에 쓴 가면이 휙휙 바뀌는 변검 기술자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빠른 손···. 비수를 쥐어주면 나름 위협적이긴 하겠어.’

배수는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 자신을 지킬 수단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비수야 일을 하면서 배우면 될 일이다. 그리고 비수를 배웠다고 돈이 되진 않는다.

‘도대체 이 거지새끼들에게 뭘 시켜야 옳을까.’

옥비연의 배수패를 통해 뒷골목 지배력을 강화한다는 계획은 세우고 있었으나, 옥비연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직까지 위험부담만 존재하는 식충이들이었다.

타닥탁.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에 돌아보니 옥비연이다.

“공자님. 오셨습니까.”

“아침부터 바쁘다?”

“기이한 소문이 뒷골목에 퍼지고 있어 이를 알아보느라···.”

“소문? 무슨 소문이지?”

“어제 흑패가 자리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소문입니다.”

“큭. 뭐라고 소문이 난 거야?”

호충은 어젯밤 일이 벌써 소문으로 도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새끼들. 입 다물라니까···.’

이제 옥비연의 입에서 자신이 등장하리라 여겼다.

“번권 대협을 아십니까?”

“엥?”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가 누군데?”

자신의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무림의 별호가 등장했다. 호충이 아는 무림의 인사라고는 진가장의 가주와 무인들 몇 밖에 없었다. 외부의 무림 인사는 문외한이었다.

“번권(繁拳)의 번(繁)은 많다는 의미로 한 번에 많은 권을 날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번권 대협이 이곳 자장에 오셨던 모양입니다.”

“호오. 번권(繁拳)이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라면 권으로 유명하신 무림인사겠어.”

번권이 자신을 지칭하는 줄은 꿈에도 짐작할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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