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32)

월척

***

“직접 견식한 녀석의 말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권이 빨랐다고 합니다.”

“한번 뵙고 싶군. 직접 번권의 무공을 견식한 놈은 누구지?”

“흑패에 아는 이가 있어 녀석에게 들었습니다. 번권이 흑부와 철필을 잡고 흑패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흑패의 주인이 바뀐 게지요.”

“허.”

호충은 번권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번권(繁拳) 대협은 흑패로 가셔야 만나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자신이 바로 번권인데 만나긴 뭘 만나겠는가.

‘···내게 번권이라는 별호가 붙었단 말이군.’

“소문은 그만하면 됐다.”

“예. 공자님.”

사중환을 통해 기강을 잡으려 했던 일이 별호로 돌아왔다.

호충은 번권의 어감이 나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옥비연을 부른 이유를 생각해 냈다.

“나는 마음을 정했다. 옥비연 너와 네 식솔을 내가 맡아서 이끌고자 한다. 어떠냐. 아직도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느냐?”

“···저는 지시하신대로 식구를 늘렸습니다.”

“그 얘기는 장위에게 이미 들었지.”

“제 쓸모를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공자님.”

호충은 기꺼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

“네가 했던 말 덕분에 내 어깨가 무거웠다.”

옥비연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진가장의 공자에겐 장난 같은 일이 하층민인 옥비연에겐 건곤일척의 승부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도 준비를 좀 했지.”

“······.”

옥비연은 지난번에 받았던 은자를 떠올렸지만, 호충은 기대를 저버렸다.

“어제 흑부를 잡고 흑패를 접수했다.”

“네?!! 흑부는 번권이···.”

“번권이라는 별호가 붙었다는 것은 네게 처음 들었지만, 네가 들었던 번권이 나인 것은 분명하구나.”

“아아.”

“너는 나를 따라나서라. 흑패로 갈 것이다.”

“예! 공자님!”

옥비연은 이번 자신의 선택이 큰 기회로 돌아왔다고 여기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곧 불퉁한 얼굴을 했다. 작은 불만이 생겼기 때문이다.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요.”

흑패를 접수했다고 미리 말해줬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않았겠는가.

“내가 이익에 따른다고 부하까지 그래선 안 되니까. 너는 내가 흑패를 접수했다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나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

아무것도 손에 든 것이 없을 때 따르는 이의 충성심과 많은 것을 쥐고 있을 때 따르는 이의 충성심이 같지 않다는 의미였다.

“네가 아무것도 없는 나를 신뢰하니 나도 오롯이 너를 신뢰하겠다. 이것이 네가 오늘 내게서 얻은 것이다.”

“······.”

자신보다 한참 어린 진가장의 공자였지만, 그 속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후우. 공자님은 사람 마음을 어찌 이리 날뛰게 하신 답니까.”

“너는 앞으로 많은 일을 할 것이다. 벌써부터 들뜨지 마라.”

“옙!”

호충과 비연은 오래지 않아 흑패의 본거지에 도착했다.

시전 구석 음침한 골목에 있는 흑패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게 있느냐.”

삐걱.

커다란 문이 조금 열리며 나온 인물은 호충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후다닥 문을 크게 열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안내해.”

“예! 공자님.”

호충이 내부로 걸음을 옮기는 중에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녀석들이 알아보고 후다닥 일어나 허리를 접었다.

비연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흑패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공자님의 진정으로 흑패를 접수하셨구나.’

“이, 이곳이 흑패주가 사용하던 곳입니다.”

“흑부가 쓰던 곳이라는 말이지?”

“예.”

“흑부는 어찌했느냐.”

“의원이 다리를 치료했으나, 앞으로 앉은뱅이 신세를 벗어나긴 힘들다 하옵니다.”

“잘 고치면 걷기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충은 당당하게 걸음을 옮겨 흑부가 앉았던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사중환을 데려와라.”

호충의 말 한마디에 몇몇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어제와 다른 몰골의 사중환이 등장했다.

“흑패주를 뵈옵니다.”

“······.”

호충은 손속이 과했나 싶었다.

사중환은 얼굴 곳곳이 푸르뎅뎅하게 변해있었고, 눈두덩이 크게 부어 한쪽 눈만 겨우 뜨고 있었다. 이래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병신이 된 놈보다야 낫겠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그나마 입이 멀쩡해 말은 할 수 있었다.

“흑패의 인원은 전부 몇이냐.”

흑패를 맡음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저까지 총 이십오 인입니다.”

흑부와 흑부를 따라간 놈을 제외한 숫자였다.

“업장은 몇 개나 있지?”

“관에 신고하지 않은 도박장 두 곳과 홍루가 하나있습니다. 보호세를 받는 곳은 몇 곳이 더 있습니다.”

“수입은 대부분 도박장에서 챙기겠군.”

“그러하옵니다.”

“비연.”

“예! 공자님.”

“애들은 도박장에서 일을 배우게 해.”

“예. 그리하겠습니다.”

“사중환.”

“예.”

“도박장에 고용한 꾼들을 배수패 아이들에게 붙여라. 손이 빠른 녀석들이니 금방 배울 것이다.”

손이 빠른 배수들을 도박사로 키울 생각이었다.

사중환은 옥비연을 경계하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했다.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너희 둘이 앞으로 흑패에서 나의 왼팔과 오른팔이 될 것이다. 또한 화용루의 보호는 우리 흑패가 맡는다. 앞으로 더 늘려나갈 것이다. 진가장은 걱정하지 마라.”

“예! 공자님.”

“예. 패주님.”

호충은 둘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다른 것을 듣고 덧붙였다.

“너희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공자로 통일한다. 결코 진가장의 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라.”

““예. 공자님.””

이후 호충은 흑패가 지금까지 한 일들을 자세히 질문하며 사중환을 곤란하게 했다.

특히 흑패 수입의 규모와 지출한 내역이 문제였다.

“······그, 그 부분은 문서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럼 수입은 대체 어떻게 관리한 거야? 너희 월봉은 어찌 받았고?”

뒷골목은 돈으로 움직이는 법이다. 의리고 나발이고 돈이 최고였다. 월봉을 받았다면 흔적을 남겨야 했다.

“전엔 흑부께서 알아서 배분을···.”

“하! 흑패의 수입을 쌈짓돈으로 써먹고 있었군.”

관에 신고한 사업장도 아니었을 것이니 도박장의 수입은 모조리 흑부의 주머니로 들어갔을 것이다.

“흑부 이 새끼 잡아와.”

“옙!”

이미 다리가 병신이 된 흑부 마한로는 들것에 실려 호충의 앞으로 끌려왔다.

마한로 곁에는 어제 어깨에 칼을 맞아 붕대를 감고 있는 젊은 녀석도 함께였다.

“마한로.”

“예, 예. 공자님.”

“토해내야지?”

“······.”

마한로는 단숨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지금까지 흑패주로 있으며 모은 자금을 토해내라는 뜻이었다.

“전장에 넣었느냐?”

“······.”

눈을 굴리는 걸 보니 전장은 아니었다. 실물로 모처에 보관했다는 뜻이었다. 뒷골목의 녀석이 전장을 이용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입을 열지 않는 걸로 봐서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나가봐라. 단 둘이 대화하겠다.”

“예. 공자님.”

흑부와 함께 온 녀석은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곁에 서있었다.

“너도 나가 새끼야!”

“예, 예.”

어제 칼에 맞아 잔뜩 겁에 질려있던 녀석은 나가라는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튀어 나갔다.

남은 것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마한로였다.

모두가 나간 곳에 남은 마한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가오는 호충을 바라봤다.

“마한로.”

“예, 예. 공자님.”

“내가 목숨은 붙여준다고 했다. 그러나···.”

“······.”

“네가 한 몫 잡고 나가게 해준다는 말은 아니었어.”

호충은 마한로의 손목을 붙잡아 당기고 발로 밟았다.

“···고, 공자님.”

“어차피 네 목이 잘리면 쓰지도 못할 재물이다. 찾는 것이 어렵겠느냐?”

“!”

“꼭 찍어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지.”

호충의 품에서 번쩍이는 회칼이 뽑히고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마한로는 날카로운 칼이 자신의 손 가까이에 다가오는 것을 부르르 떨며 보고 있었다.

“끄윽.”

“지금부터 답이 늦을 때마다 네 손가락 마디가 하나씩 사라질 것이다.”

“자, 잠시만!”

“아직 첫 질문도 하지 않았다만?”

“흐, 흑패를 온전히 넘기지 않았나이까.”

“계속 말하는데···. 넌 머리가 정말 나쁘구나. 하지만 나는 자비로우니 다시 얘기하마. 흑패를 넘겨받을 때 네 몫을 떼어준다고 하진 않았느니라.”

“이익!”

“손가락에 마디가 많지만, 네 손은 두 개 뿐임을 잊지 마라. 게다가 넌 이미 다리가 병신이니 손은 제대로 남겨야겠지? 첫 질문이다. 너는 기억을 잘 떠올려야 할 거야.”

호충의 칼은 마한로의 새끼손가락 마지막 마디에 닿아 있었다.

“어디에 숨겼느냐?”

“멀리 뒷산에 굴이 있습니다! 사중환 녀석이 그 동혈의 위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흑패의 재물을 보관하고 있습지요.”

호충은 빠르게 나온 답에 오히려 의심이 더해졌다.

별것 아닌 것을 숨겼으니 이리 쉽게 입을 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질문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에 숨겼느냐?”

“바, 방금 말씀드렸사온데···. 아그극.”

손가락 마디에 회칼이 천천히 파고들고 있었기에 고통이 배가되고 있었다.

“그나마 네 입이 한 번 열렸으니 내가 봐주는 것이다. 내 손에 힘이 들어가기 전에 나머지를 불어야 할 것이다.”

“고, 공자님 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나이다.”

‘거짓을 말하지 않았겠지만, 또 다른 진실을 숨겼겠지.’

호충은 손가락 마디에서 회칼을 떼는 듯이 뒤로 가져갔다.

“진정이옵니다. 저는 그 외에 다른 재물은···.”

호충은 뒤로 가져갔던 회칼을 빠르게 움직여 그대로 내리찍어버렸다.

콰악!

“끄아아악!”

회칼은 마한로의 손등을 뚫고 바닥에 박혀 있었다.

호충은 그제야 밟고 있던 마한로의 손에서 발을 떼고 옆으로 나왔다.

“오냐오냐 해주니까 내가 만만해 보이지?”

“끄윽.”

호충은 손을 등으로 가져가 다른 회칼을 꺼내 들었다.

“손가락 마디는 안 아깝다 이거냐? 지금부터는 손가락 하나씩 날아간다. 알았어?”

마한로는 호충의 회칼이 손가락에 닿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츠, 측간에 숨겨 놨습니다! 으윽!”

“측간?”

마한로는 손등에 칼자루가 자란 다음에야 술술 불기 시작했다.

녀석의 말대로라면 이곳 흑패의 패주 전용 변소에 줄을 달아 재물을 숨겨두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곁에 있는 수하를 통해 가져오려고 했단다.

마침 멀지도 않으니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아오. 냄새. 이 새끼들은 청소도 안 하나.”

검은 구멍은 차마 다가가기도 힘들 지경으로 더러웠고 지독한 냄새로 가득했다. 이 시대의 화장실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누가 재물을 훔쳐가려 해도 이곳만큼은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도둑이나 건달이나 같은 부류였다. 마한로는 도둑이 어딜 뒤지지 않는지 생각하다가 이곳을 선택했다고 한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재물이 있는 걸 알아도 손을 넣고 싶지가 않네. 젠장.’

호충은 코를 막고 조심스럽게 구멍에 손을 넣었다.

“뭐라도 묻어봐라. 나머지 손등에도 칼을 박아 줄 테다.”

호충은 녀석이 말 한대로 줄을 찾을 수 있었다. 천천히 줄을 당기가 상당히 묵직한 주머니가 딸려 올라왔다.

“호오.”

주머니 안은 번쩍이는 금원보로 가득했다.

“월척이네.”

냄새는 좀 나지만, 그렇다고 금이 똥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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