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보
***
주머니를 들고 자리로 돌아온 호충은 주머니에서 금원보 하나를 마한로 앞에 던졌다.
투둥.
“······.”
“이거 먹고 떨어져.”
“하, 하지만···.”
호충은 마한로 손등의 회칼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아니면 이 손목을 놓고 가던가. 그때는 이것도 없다?”
애초에 협상은 비슷한 상대끼리 가능하지 않은가. 이미 흑패를 먹은 호충과 두 다리를 잃고 손까지 칼에 꿰인 마한로는 비등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은 작은 호의도 감사해야 할 판이다.
“가, 감사합니다. 으윽!”
퓻.
“어흐윽!”
마한로의 손등에서 빠져나온 회칼의 피를 털어낸 호충은 피 묻은 회칼의 끄트머리를 잡고 마한로의 이마를 겨눴다. 호충의 눈은 마한로를 노려보고 있었고, 언제든 찌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금원보 하나면 후하게 쳐준 거야. 생각 같아선 모가지를 잘라서 후환을 없애고 싶은데 참고 있거든?”
“···으으.”
“자장에서 도망쳐서 조용히 살아라. 만약 나중에라도 호중이 형님이 이 일에 끼어들게 되면 나는 제일 먼저 네놈에게 살수를 보낼 생각이니까.”
“예, 예.”
마한로는 다시 의원에게 가야했고, 호충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밖으로 내보냈던 옥비연을 불러들였다.
“옥비연. 너만 들어와라.”
“예!”
“이거 맡아둬라.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네가 머무는 곳에서 확인하고.”
“예. 공자님.”
금원보가 가득한 주머니를 서슴없이 옥비연에게 맡겼다.
신뢰한다고 했으니 이젠 그 믿음을 보여줘야 했다.
옥비연을 밖으로 보낸 호충은 사중환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사중환 흑부에게 듣자하니 너는 흑패의 재물을 보관하는 뒷산의 굴을 알고 있다지?”
“예.”
“가자. 애들 서넛만 데리고 와. 수레도 하나 챙겨오고.”
***
사중환이 안내한 뒷산은 생각보다 멀었는데, 도착한 곳에서도 동혈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굴이라며?”
사중환이 산속에 위치한 어느 오두막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
“본래 작은 굴이 있었는데,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서 집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굴이 아니라 사냥꾼들이 사용할 작은 오두막집처럼 보였다. 다만 바깥문을 잠그고 있는 커다란 자물쇠로 뭔가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굴을 감추긴 해야지. 잘 했네.”
“안은 저도 들어가지 못 했습니다. 항상 흑부가 혼자서 들어갔습니다.”
“오호라.”
“열쇠 꾸러미는 여기 있습니다.”
호충은 사중환이 준 열쇠로 문밖의 자물쇠를 열어젖히고 열쇠 꾸러미를 돌려주며 말했다.
“같이 들어가.”
“네? 저도요?”
“어차피 오늘 이거 다 꺼내서 가져갈 생각인데 나 혼자서 들어가서 본다고 달라져?”
“아.”
사중환과 안으로 들어가니 컴컴한 집 안쪽에 다른 문이 보였다. 그 문에도 또 자물쇠가 보였다.
호충이 사중환을 돌아보자 얼른 아까의 그 열쇠를 꺼내보였다.
“여기 다음 열쇠가 또 있습니다.”
이번 문이 열리고 보이는 것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같이 보이는 컴컴한 동굴이었다.
“화섭자 있냐?”
“네.”
“앞장서라.”
“옙.”
사중환의 뒤를 따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의 마지막에 도착했다.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인 모양이다.
“우아.”
사중환이 안에 있는 물건들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 처음 보는 모양이다.
“이야. 골동품이 상당하네.”
호충의 눈엔 전부 골동품으로 보였다. 이대로 잘 보관해서 수백 년 뒤에 경매로 출품하면 족히 수백억은 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는 자신도 없을 것이 아닌가.
“썩을.”
생각보다 마한로가 모아둔 패물이 상당했다. 도자기와 조각상을 시작으로 그림이 그려진 족자가 많이 보였고 목걸이와 반지 같은 패물도 많았다. 구석엔 서책도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이 새끼는 전생에 다람쥐였어? 왜 이렇게 모아놨어?”
“···도박장을 운영하다보면 별에 별놈이 다 있지 않습니까.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놈들이 참 많았습니다.”
“아하!”
녀석들은 도박장 사업과 더불어 전당포까지 운영하는 셈이다. 그래서 잡스러운 패물들이 한가득인 것이다.
“보아하니 값나가는 것은 대부분 여기 모아둔 것 같습니다.”
“그나마 환금성이 있는 물건은 얼른 팔아치웠을 것이고···.”
그렇게 모인 금원보가 이미 호충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그랬겠지요.”
“다 챙겨서 내려가자.”
“이걸 다 챙기려면 수레가 몇 대 더 필요하겠습니다.”
“에효. 우선 가져온 수레에 가벼운 물건을 옮기고 한 놈을 먼저 내려 보내서 수레 가져오라고 해. 도자기를 깨지지 않게 옮기려면 바닥에 푹신한 거라도 깔아야 해. 그리고 괜히 밖에 보여서 좋을 거 없으니 수레 위를 덮을 천 쪼가리도 같이 챙겨.”
“예. 공자님.”
사중환이 밖으로 나간 사이 호충은 책자에 손을 가져가다가 얼른 손을 회수했다.
“X발. 내가 지금 무슨 짓이야?”
당연히 패물에 먼저 손이 갔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서책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이 새끼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었네.”
본래의 몸이 가진 기억이 자신을 서책으로 인도한 것이다.
“그래. 네 원이나 실컷 풀고 훨훨 날아서 저승으로 가라.”
어차피 패물은 가지고 내려가서 흑패의 자금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돈이 되지 않을 서책은 자신이 얼마든지 가져도 될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본래 머물던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첫 번째 서책의 제목은 [고대중원무림비서]였다.
“얼씨구.”
두 번째 서책의 제목은 [신선비록]이었다.
“절씨구.”
세 번째 서책의 제목은 [무림제일신공]이다.
“지랄이 풍년이네.”
하나 같이 가짜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제목의 서책뿐이었지만, 혹시 모른다는 기대감이 호충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소설에서도 많이 보지 않았겠는가. 허접한 쓰레기들 사이에 보석처럼 빛나는 진짜 무공서적이 숨어있을 수도 있었다.
‘숨겨진 신공을 얻어서 고수가 될 지도 몰라! 뻔한 이야기잖아!’
호충이 다른 책의 제목을 들추려고 서책에 손을 가져갈 때 사중환이 들어와 널브러진 책자들을 보며 말했다.
“···서책들은 별 볼일이 없으실 텐데요.”
“뭐야? 넌 아는 거라도 있어?”
“대부분 도박장에서 입수한 서책입니다. 도박장에 출입하는 놈들이 대단한 비급이라도 갖고 있겠습니까. 그런 비급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켰겠지요. 제목만 그럴싸한 서책들입니다. 동전 몇 문만 던져줘도 좋다고 넘긴 서책이죠. 녀석들도 속아서 산 서책일 겁니다.”
“······.”
일말의 기대감도 사라지게 만드는 사중환의 말이었다.
“서책은 어차피 가져가봐야 짐이니 여기 두겠습니다. 천천히 보시지요.”
호충은 가져다 버리라고 하고 싶었으나, 저도 모르게 서책에 욕심이 동했다. 이번에도 기억 속 녀석의 의지였다. 솔직히 의지라고 할 것도 없다. 그저 기억의 작은 잔재일 뿐이니까.
‘네 마음대로 해라 짜샤.’
호충은 녀석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차피 가치도 없다니 소일거리 삼아서 읽어보지 뭐.”
“저기···.”
“뭔데?”
“이 많은 재물을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찌하긴 뭘 어째? 다 팔아서 나중에 흑패의 운영자금으로 써야지.”
“저, 전부다 팔아버리신다고요?”
“아까워?”
“······.”
왜 아깝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흑부는 흑패에서 운영하는 사업장에 단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방금 호충이 말한 것처럼 나중에 흑패에서 필요할 때 쓴다고 해놓고 전부 본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당장 어제 흑패를 접수한 진가장의 공자가 흑패가 지금까지 고생해 모은 재산을 빼돌릴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내가 꿀꺽할까봐?”
“······.”
사중환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에효. 보고 배운 것이 도둑질이니 어련하겠냐마는···.”
“···죄송합니다.”
“서책을 제외한 나머지는 내가 손대지 않겠다. 사중환. 네가 천천히 팔아서 금으로 바꾸고 재물을 관리해.”
“!”
“그리고 애들 명부 뽑아 와라. 앞으론 정해진 월봉을 제때 줄 테니까.”
“아!”
“‘아’는 무슨 얼어 죽을 ‘아’야? 빨리 안 움직여?”
“옙. 공자님!”
사중환과 흑패의 부하들이 움직이는 동안 호충은 천천히 서책을 동굴과 붙어 있는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서책의 정리가 끝나자마자 사중환에게 나머지를 일임하고 등을 돌렸다.
“···가십니까.”
“내가 있어봐야 너희가 눈치나 볼 거 아냐.”
“눈치라뇨···.”
어찌 눈치가 보이지 않겠는가. 어제 호되게 맞은 곳이 아직도 시큰거린다. 다른 녀석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일하고 있었다.
“편히 일 하라고 피해주는 거니까 후다닥 정리 끝내고 쉬어라. 특히 너는 의원에게 가서 얼굴 보여주고 뭐라도 달라고 해서 발라봐. 어제 괜히 기강 잡겠다고 힘을 줘서는···.”
호충은 가장 먼저 손에 잡혔던 [고대중원무림비서]를 손에 들고 휘적휘적 산을 내려갔다.
“······.”
사중환은 그런 호충의 뒷모습을 보며 앞으로 흑패가 달라질 것이라 짐작했다.
‘공자님은 흑부와 그릇이 다르다.’
흑부는 자신의 수하들을 전혀 믿지 않았다. 사업장을 운영하며 생긴 재물의 일부만을 수하들에게 넘겨주면서도 생색이라는 생색은 다 냈던 사람이다. 사중환은 대충이라도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정확한 수입을 모르는 수하들은 그저 눈앞의 푼돈이 좋다고 흑패에 붙어 있었다.
또한 흑부가 자애로운 성격이 아니라 툭하면 손찌검을 했는데, 맞은 놈에게 의원에게 가보라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세심하게 명령하고 챙겨주는 호충의 마음이 사중환에게 닿고 있었다.
“사내라면 이런 주군도 모셔봐야지.”
무엇보다 재물을 들고 도망칠 수도 있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겠는가. 사중환은 자신이 배수패의 옥비연보다 더 신뢰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값진 보물을 맡겼기 때문이다.
***
그때 옥비연은 허름한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주머니를 열어보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무거워어어엇!!!!”
휘황찬란한 금원보가 옥비연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미, 미친···.”
옥비연은 후다닥 주머니를 닫고 괜히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냄새나는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품에 똥을 품은 것처럼 냄새가 올라왔지만, 지금은 냄새를 맡을 겨를이 없었다.
“젠장! 어쩌라는 거야!”
옥비연이 소리치자 밖에서 장위가 들어왔다.
“대형. 부르셨···.”
“나가! 아무도 방에 들어오지 마!”
“네?”
“아니다! 장위. 너는 나가서 애들과 밖을 지켜라.”
“여기 지킬게 뭐가 있다고···.”
“지키라면 지켜!”
품속의 금원보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비연은 호충을 만나 주머니를 돌려주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말똥이를 시켜서 진 공자님을 모셔와! 얼른!”
“···말똥이가 진가장 문턱이나 넘을 수 있겠습니까?”
“아···.”
말똥이 뿐이 아니라 거지꼴을 한 배수패의 녀석들은 진가장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방에 똥 냄새가···. 방귀 뀌셨습니까? 어휴. 지독하네. 차라리 똥을 싸시는 편이 좋지 않을지···.”
“그런 거 아니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