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의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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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처로 돌아온 호충은 눈에 핏발이 선 송 영감을 마주했다.
송 영감은 언질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호충을 걱정하느라 잠도 못자고 기다린 것이다.
송 영감은 버럭 화를 내려다가 급히 말을 바꿨다.
“어젠 대체···. 도련님!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바닥에 구른 것처럼 호충의 옷이 더렵혀져 있었고, 얼굴은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 돌아오는 길에 호성 형님을 만나는 바람에···.”
송 영감은 셋째 호성을 만났다는 말에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또 맞으셨단 말입니까.”
“큭큭. 그래도 내가 더 많이 때렸어.”
“우리 어린 도련님이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제가 곁에 있어야 했습니다. 다 제 탓입니다.”
평소에도 호성과 마주하면 험한 꼴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송 영감이 옆에 있건 없건 마찬가지였다. 종복에 불과한 송 영감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저 맞는 호충을 감싸서 자신이 대신 맞는 것이 다였다. 그렇게 맞은 날이면 송 영감과 자신은 방에서 끙끙 앓아야 했다.
‘참 지랄 맞은 기억이네.’
호충은 예전 송 영감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일들을 떠올리며 더 크게 말했다.
“정말이라니까. 나 거의 안 맞고 때리기만 많이 때렸다고.”
“어서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어보세요. 제가 고약을 발라 드리겠습니다.”
“나 참.”
호충은 송 영감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어 몸을 보였다.
호충의 몸은 그간 단련으로 단단하게 성장한 근육들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몸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멀쩡했다.
“······몸이 깨끗합니다.”
“정말이라니까. 호성이 그 새끼는 지금 죽을 맛일 걸? 내가 알차게 때려줬거든.”
“후환이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셋째 마님이 아시면···.”
“얼굴은 안 때렸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나한테 맞았으니 어디 가서 말도 못할 거야.”
매번 자신이 괴롭히던 호충에게 맞았으니 이르지도 못할 터였다.
“나 배고파. 밥이나 가져다 줘.”
“끼니도 거르셨단 말입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얼른 가져오겠습니다.”
송 영감을 내보낸 호충은 새 옷을 꺼내 입고 더렵혀진 옷에서 서책과 회칼을 꺼냈다.
더러워진 옷에서 꺼낸 회칼을 등과 품에 다시 넣은 다음 서책을 펼쳤다.
[고대중원무림비서]
분명 거짓으로 가득할 서책이지만, 소설이 아닌 이상 일부는 진실을 기반으로 할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하다못해 떠도는 소문이라도 조금은 들어 있겠지.’
분명 기억 속에 존재하는 무림은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녀석이 모르던 무림의 이면엔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어디보자.’
-본인은 열 살이 되는 해에 하늘의 이치를 깨달았고, 깊은 산중에 은거하며 신비로운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선경에 오르신 스승께서 내게 남기신 신비로운 무공일지니···.
서책은 서두부터 호충의 혀를 가만 두지 않았다.
“쯧쯧쯧. 신뢰도가 확 떨어지네.”
그래도 정보를 얻을 곳이 한정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서책만한 정보지는 없었다. 호충은 짜게 식은 눈으로 계속 서책을 읽어 내려갔다.
-오백 년 전. 무도한 황제에 의해 상승 무공을 모조리 빼앗긴 무림방파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어떤 이들은 기억을 되살려 상승 무공을 다시 필사하여 전하려 했지만, 황제의 명을 경시한 대가는 가혹했다. 황제는 치밀하게 무림방파를 감시했고, 작은 흔적이라도 찾게 되면 무림 방파를 지상에서 지워버렸다. 그렇게 중원에서 사라진 무림 방파와 기재가 얼마나 많았던가.
기록이 아닌 체득으로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군대는 상승무공을 연마하는 무림 인사들을 귀신같이 찾아내 멸하고 현재의 약한 무림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어찌하여 그것이 가능했겠는가. 바로 황궁이 전 중원의 모든 상승 무공을 빼앗아 소유했기 때문이다.
“아!”
사라진 상승 무공이 황궁에 모여 있고, 또 황제의 무사와 군사들이 익힌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황제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군웅할거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거기다 새로운 황제의 대(對) 무림 방책도 다르지 않았기에 무림은 또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이미 전 황제의 치하에서 이백 년이나 흐른 다음이었기에 상승 무공이라곤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궁의 무사들 또한 상승 무공을 익히는 것이 제한되었기에 극히 일부의 황궁 무사들만이 고수의 반열에 올라있는 상태였다. 고작 이들로는 들불처럼 일어나는 무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럼 황궁의 무공은 어떻게 된 거야?”
황궁 무공의 얘기는 다음에 이어졌다.
-나라를 새로이 건국한 황제는 시간이 흐르고서야 전에 황궁에서 보유했던 상승 무공에 욕심을 냈다. 하지만 무공 서적이 보관된 황실의 서고는 예전에 불타올랐고, 무공을 익힌 황궁의 일부 무사들은 대부분이 황제와 함께 죽은 다음이었다. 살아남은 황궁의 무사가 하나라도 있다한들 역적으로 낙인찍힌 이가 어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겠는가. 그렇게 황궁은 상승 무공의 실마리를 모조리 잃어버렸다. 상승 무공이 없는 황궁은 더욱 가혹하게 무림을 핍박했다. 황제의 즉위를 위해 애쓴 무림인들까지 모조리 역모의 죄를 물어 목을 자를 정도였으니 그 가혹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이후 세월이 흐르며 다시 예전과 비슷한 관무불가침이 통용되고 있으나, 이는 고작 삼백 년이 되었을 뿐이로다. 하지만 그조차도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인 것이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황궁은 여전히 무림에 손을 뻗고 있으니······.
“···썩을 진짜 없는 거야?”
이마저도 삼백 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상승 무공을 익혔던 이들이 후대에 전수하지 못했다면 상승 무공을 찾기란 요원한 일일 것이다.
-지금도 황궁은 무림을 감시하고 있다. 혹여 상승 무공이 나타날라 치면 하루아침에 황제의 군사들이 들이닥쳐 무림 방파를 지우곤 했다. 그러나 세상엔 나와 같이 은거한 기인인사들이 넘쳐난다. 본인은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반 신선으로······.
그 뒤로 이어진 쓸데없는 자화자찬은 휙휙 넘겨버리고 중요한 내용을 찾기 시작했다.
-···만약 오백 년 전, 황제가 나타나기 전에 나와 같은 은거기인이 자신의 유지를 남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하여 나 또한 나의 유진을 이을 기재를 찾고자 이 서책을 남긴다. 연자여. 나의 지고한 깨달음을 이어 그대의 무공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노라. 다만, 무공을 익히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으로 금원보 열 개를 가져올 것이며···.
탁.
마지막까지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정말 쓰레기 같은 서책이네.”
누가 금원보를 열 개나 들고 가서 확실치도 않은 무공을 배울 것인가.
하늘에 닿은 무공이 있다면 금원보에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늘에 닿은 무공이 있다면 어디든 가서 그 돈을 구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다른 서책을 들고 올 걸.”
호충은 내일을 기약했다. 내일부터는 호굴이 있는 집에 서책을 보러 갈 생각이다. 관직에 나갈 생각도 없었기에 어차피 이 집구석에 있어봤자 할 일도 별로 없었다.
“목인장도 추가로 주문해야겠네.”
거기서 무공도 연마할 생각이었다.
***
호충이 송 영감이 가져온 식사를 하는 동안 송 영감은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첫째 도련님이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그 사람이야 언제든 나갔다가 돌아오곤 하잖아.”
“그 사람이라뇨. 도련님의 첫째 형님입니다.”
“아. 그래. 형님. 형님이라 치자.”
진호현은 가장 나이가 많은 만큼 아버지를 도우며 진가장의 일에 손을 대고 있었다. 지역의 상회를 돌며 운영에 차질이 있는지 확인하고 택배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표국에 가서 대표두와 면담하곤 했다. 나름 아버지를 이은 이인자로 세를 굳혀가는 셈이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하는 것은 둘째 진호중이 철이 나오는 철광산 관리에 더해 소금 밀매와 사금 거래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업 또한 상당히 알짜인 사업이었다.
둘의 나이 차이도 고작 한 살에 불과하기에 지금은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하긴 곤란했다.
“혹시라도 밖에선 말씀을 조심하셔야겠습니다. 그러다가 또 경을 치십니다요.”
“알았으니까 소식이나 전해.”
호충은 소박한 찬에도 시장이 반찬이라는 듯이 맛있게 밥을 먹으며 송 영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 현 공자님이 협의맹에 다녀오신 모양입니다.”
호충은 볼을 빵빵하게 만들어 대답하지 못했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 세가 연합인 협의맹도 나름 힘이 거대해지지 않았겠습니까. 기존 정무맹과 비교해도 그리 밀리지 않지요.”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한 무림이지만, 여전히 맹이라는 단체가 존재했다.
그마저도 세가가 연합 한 협의맹과 무림 방파가 연합한 정무맹으로 나뉘어 있으니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비슷한 것이다.
‘사람이 셋만 모여도 편을 갈라 싸우는데, 무림이야 오죽하겠어?’
호충에겐 무림이 갈라져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두 맹이 만나 회합을 갖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마도 가주님과 첫째인 현 공자님이 가시겠지요.”
호충은 터럭만큼도 관심 없는 일이었다.
자장의 뒷골목을 확실하게 차지하는 일이 급선무였고, 이후 전 중원에 자신의 세력을 심어볼 생각이었다. 무림과 몸을 부대끼며 살기는 하겠으나, 자신의 전문 분야는 어두운 뒷골목이지 양지가 아니었다.
밥을 꿀꺽 삼킨 호충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둘째 형님은 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거야?”
자신을 죽이려고 흑패에 사주한 둘째 진호중은 아직도 진가장에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외가인 서문세가에 가셨으니, 한참은 더 걸리겠지요.”
“빨리 왔으면 좋겠네.”
오늘 호성에게 작은 복수를 성공한 것처럼 녀석에게도 복수를 해야 했다. 그나마 호성은 괴롭힘이 전부였기에 적당한 화풀이로 갚아줬지만, 호중은 칼침을 선물하지 않았겠는가. 일의 경중에서 차이가 나는 만큼 복수도 달라야 했다.
‘그 사이 무공을 더 끌어올리자. 호성이 녀석에게 통했으니 효과는 증명되었어.’
호충은 다시 식사에 열을 올렸다. 얼른 끼니를 때우고 외부에서 머물 준비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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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영감이 말했던 것처럼 협의맹에서 돌아온 진호현은 가주에게 먼저 인사를 올렸다.
“가주님. 소자 협의맹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나이다.”
“수고하였다. 맹의 안건은 예측했던 그대로 이더냐.”
“그러하옵니다. 협의맹은 이번 회합을 통해 우위를 차지할 생각이옵니다.”
“가능한 일이지.”
정무맹 연합을 구성하는 무림 방파들은 오랜 역사로 이름 높았지만, 세가들도 만만치 않았다. 자식을 통해 끝없이 이어지는 세가는 부의 대물림도 어렵지 않았기에 금력이라는 무기를 날카롭게 갈고 닦을 수 있었다. 게다가 오백 년 전부터 이어온 상승 무공 절전은 무력까지도 전통의 방파와 비등하게 만들어줬다.
외부에서 봤을 때 세가 연합의 협의맹은 무림 방파 연합인 정무맹을 한참이나 뛰어 넘고 있었다.
“허나. 그들이 숨겨둔 저력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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