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華山)
***
다음날 시전에 나가려던 호충은 송 영감이 뛰어와 붙잡는 바람에 걸음을 멈췄다.
“도련님! 도련님!”
“뭘 그리 급하게 와? 넘어지겠네.”
“첫째 도련님이 찾으십니다.”
“큰형님이? 내게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 무슨 일이람?”
호현뿐 아니라 진가장 직계 대부분이 호충을 벌레 취급하는 현실이다. 이렇다 할 기반이 있지도 않았고, 진가의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격이 유약하고 지극히 소심한 인물이라 사람들에게 가벼이 보인 것이 컸다.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불러오라는 말씀만 있으셨지요.”
“썩을.”
화용루의 예쁜이를 보러 가는 길이었는데 기분이 잡쳤다.
“가자.”
“예. 도련님.”
그래도 부르면 가야지 어쩌겠는가. 거절할 힘도 명분도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지낼 생각은 없었다. 호충은 예전의 나약하고 유약한 성정을 가진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내 세력을 거대하게 키워 진가장을 넘어서고 말 것이다.’
이제 첫발을 내딛었지만, 중원 전체에 조직을 구성하는 계획이 호충의 머리에 들어있었다.
***
호충은 호현의 거처에서 얼굴에 환한 웃음을 보이며 인사했다.
“막내 호충이 형님을 뵙습니다. 헌앙한 모습을 뵈오니 실로 감격이옵니다.”
“암습을 당했다 들었거늘 지금은 멀쩡하구나.”
“그 일은 벌써 한참 전의 일입니다. 이제는 털고 일어나야지요.”
“너도 무공을 배워야 그런 일을 다시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배워보려 합니다. 저도 무가로 이름 높은 진가장의 자손이니 제 몸을 지킬 정도는 배워야한다는 마음입니다.”
“옳은 마음가짐이다. 너도 진가장의 자손이니 당연히 배워야할 것이다.”
“······.”
호충은 지금까지 오간 대화로 왜 불렀는지를 알 수 없어 멀뚱히 쳐다봤다.
“너도 무공을 배우게 해주겠다.”
“······.”
‘혼자서도 잘 하고 있는데 왜 이제 와서 참견?’
“···저도 무공을 배우라고요?”
“그래.”
호충은 그저 무사나 한명 내려주겠지 싶었다.
“가르쳐주신다면 배워야지요.”
“네가 그리 답해주니 고맙구나. 그럼 네가 앞으로 무공을 배워야 할 곳에 관해 일러주마.”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배웁니까?”
“너는 화산으로 가게 될 것이다.”
“!”
화산이 어인 소리란 말인가.
“화, 화산파를 말씀하십니까.”
“그래. 너는 진가장의 넷째로 화산파에 들어가 삼대 제자들과 무공을 배울 것이다. 이는 진가장에 매우 중요한 일이니 너는 전력으로 화산의 무공을 익히고 화산파의 도인들과 친밀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차지한 자장의 뒷골목을 관리해야 하는데, 이 상황에 화산으로 가라면 어쩌란 말인가.
이러다가 죽도 밥도 안 되는 수가 있었다.
‘어떻게 접수한 뒷골목인데!’
“형님! 재고해주십시오. 저는 일게 서생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네가 맡아야 한다. 화산에 진강십이검(眞强十二劍)을 모르는 이가 가야 하거든.”
“······.”
호충은 진강십이검이 거론되었음에도 그 연유를 파악할 수 없었다. 어째서 화산에 진강십이검을 모르는 사람이 가야한다는 말인가.
“물론 저야 진강십이검을 배우지 않았지만···. 연유를 듣고 싶습니다.”
“······.”
진호현는 잠시 고민했다. 막내에게 내밀한 연원을 알려도 되는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입을 열었다. 녀석의 입이야 막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진가장엔 가주와 소가주만 익힐 수 있는 가전무공이 있다. 바로 진강이십사검(眞强二十四劍)이다. 진강십이검(眞强十二劍)의 원형이 되는 이 검공은 때때로 매화를 피워내지. 우리가 자리 잡은 자장(子張)에도 참 많은 매화가 피어있지 않느냐.”
어차피 화산파에서 할 일들을 생각하면 직계인 막내에게 숨기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숨겼다가 일을 망치는 것보다 알려서 변수를 줄인다는 선택이었다.
“!!!”
그제야 호충은 전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화산파(華山派)에서 실전된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진가장이 찾아냈구나! 그래서 자장(子張)에 그리 많은 매화나무를 심은 거야!’
화산의 무공을 진가장의 무공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허. 겨우 이런 정보만 듣고도 알아들었느냐?”
“예. 형님.”
“네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바로 알아듣는구나.”
호충이 깜짝 놀란 것을 보고 속마음을 짐작했음이다.
“너는 화산파의 객으로 방문하여 화산파와 진가장의 가교역할을 할 것이고, 우리는···.”
호현은 이후의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화산의 무공을 사들여 가전무공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부분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네가 맡은 일이 막중하다.”
“······.”
“이를 위해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지만, 너까지 알 것은 없다. 가주님의 무공은 극비를 요하는 일이나 너 또한 가주님의 아들이고 진가장의 식솔이라 얘기해준 것이다. 나와 가주님 외엔 진가장의 누구에게도 이 일을 발설할 수 없다.”
“허나 상승 무공은···.”
화산파(華山派)의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은 분명 검기를 발출할 정도의 상승무공일 것이다. 황궁에서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호현은 호충의 이런 걱정까지 짐작하고 있었다.
“당연히 외부에도 이를 발설치 말아야 할 것이야. 아니면 화산파가 아니라 황궁부터 진가장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 사안은 모용세가에서 해결할 것이다.”
“······.”
아직까지 황궁의 칼끝은 무림을 향하고 있었는데, 모용세가가 이를 무마할 힘이 있는 모양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그럼 네가 화산파로 가는 것으로 알고 화산파에 서찰을 보내겠다.”
“······.”
하지만 화산파에 가는 것은 또 다른 얘기였다. 호충의 머리가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이 내려졌다.
“제게 진가장에 도움이 될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리옵니다. 진가장의 막내 호충. 형님의 명을 따라 화산파로 가겠습니다.”
호충은 짧은 사이 헝클어진 계획을 다시 끼워 맞춘 다음이었다. 회심의 미소를 보이는 호충이 호현의 눈엔 어리석은 동생으로만 보였다.
“아버님께 네 결정을 전해주마. 참으로 좋아하실 것이다.”
“예! 형님.”
“화산파에 출발하는 날이 되기 전에 따로 소식을 전해주마. 제자로 들어가는 일이 아니지만, 객으로 들어가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하니 미리 기름칠을 해둬야지. 엉덩이 무거운 도사들을 움직여야 하니 몇 개월은 걸릴 게다. 어쩌면 해가 지날 수도 있겠구나.”
“현명하신 큰형님이 하시는 일이시니 저는 믿고 따를 뿐입니다.”
“하하하. 이제 너도 다 컸구나.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하겠어.”
‘한 사람 몫만 하겠느냐? 나는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것이다.’
호충은 깊이 허리를 숙이며 자신의 야심만만한 표정을 숨겼다.
***
그 뒤로 호충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산파에 가기 전까지 자장(子張)의 뒷골목을 완전히 장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화산으로 가며 다른 흑패를 접수할 수 있을 것이다.’
호충은 화산으로 가는 길에 존재할 각 지역의 흑패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자장에서 접수한 흑패는 시작일 뿐이었다.
우선 호충은 자신의 금원보를 보관하고 있는 옥비연을 찾아갔다.
옥비연은 호충을 만나자마자 앓는 소리부터 했다.
“공자님! 어째서 이제야 오신단 말입니까.”
“뭐? 왜? 잃어버리기라도 했어?”
옥비연은 둘밖에 없는 방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품을 열었다. 옥비연의 품엔 어제 건네줬던 금원보 주머니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이거 보관하다가 피가 마르는 줄 알았습니다.”
“에라이. 어디서 똥내가 나더라니. 주머니 바꾸고 냄새를 빼던가 했어야지!”
“이걸 두고 가긴 어딜 갑니까. 나갔다가 누가 훔쳐가기라도 하면 큰일이고요.”
“······.”
소매치기가 소매치기를 걱정하는 모양새라 호충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됐고! 이리 내놔라. 전장에 넣어둘 테니까.”
“차라리 그게 좋겠습니다. 공자님.”
맡겨둔 금원보를 가져간다는데도 옥비연의 얼굴은 화색이 돌았다. 어제 이 금원보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으이그. 내가 뭘 보고 이 녀석을 옆에 앉혔나 모르겠네.”
옥비연은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도 훔쳐서 도망갈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네.’
녀석을 신뢰해도 좋다는 증거였다.
***
호충은 그길로 전장에 갔다.
‘중부전장은 셋째 어미와 관련이 있으니 제외. 전 중원에 전장을 두고 있는 천금장이 최선이다.’
게다가 천금장은 비밀 유지가 확실하기로 유명했다. 중원 제일의 전장이니 앞으로 전장을 유지할 확률 또한 높았다.
“어서 오십시오.”
“전장에 내 것을 맡기려 합니다.”
“신분만 확실하다면 금방 처리되옵니다.”
“진가장의 넷째 진호충이오.”
“아! 진 공자님. 높으신 분께서 손님으로 오시다니 오늘 천금장 자장(子張)지부에 좋은 일이 많겠습니다. 저는 자장(子張)지부를 맡고 있는 왕종훤이라 하옵니다.”
“왕 지부장은 혜안이 있구려. 내실로 갑시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내실에 도착한 호충은 손에 들고 있던 냄새나는 주머니를 탁자에 올려놨다.
쩔렁.
왕 지부장은 코를 막고 싶은 것을 참으며 물었다.
“큼큼. 이것이 무엇이온지···.”
“지부장이 열어보시오.”
“예. 그럼···.”
지부장은 만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손가락 끝으로 주머니를 열었고 곧 그의 눈은 황금색으로 빛났다.
“!!”
“천금장 어느 지부에 가서도 맡긴 자금을 쓸 수 있다 들었소.”
“무, 물론입지요. 중원 끝이라면 이칠일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천금장이 전장 중에 가장 빠른 연락체계를 갖추고 있으니, 공자님이 걸음 하시는 어디든 천금장 지부가 있다면 얼마든지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칠일이라면 이 주를 말함이었다. 넓은 중원에 퍼진 지부라도 이 주 안에 정보가 전해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왕 지부장은 이러한 천금장의 연락체계가 우편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원 대부분의 서찰이 천금장을 통해 지역을 오가고 있다고 한다.
‘그거 쓸만하네.’
“금원보 하나만 금자와 은자로 바꾸고 나머지는 전부 예치하겠소.”
“실로 탁월한 결정이시옵니다. 제가 공자님의 권리를 증명할 철패를 만들어 내오겠습니다.”
철패는 천금장에서 사용하는 계좌와 같았다. 왕 지부장이 가져온 철패에 적힌 것은 간단했으나, 천금장에서 신분을 확인할 때 사용하는 양식에는 꼼꼼하게 진호충의 신상이 기록될 것이다.
“비밀 유지는 확실하겠지요? 진가장의 누구도 내가 가진 자금을 몰라야 합니다.”
“손님과의 신뢰를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천금장의 첫째 원칙입지요. 염려 마십시오. 누구도 모릅니다.”
“자주 사용해야겠군.”
“언제든 저를 찾아주십시오. 제가 맨발로 달려 나가겠나이다.”
“하하하.”
천금장의 철패와 금자와 은자가 가득한 주머니를 품에 넣은 호충은 사중환이 기다리고 있을 흑패의 본거지로 향했다.
낮부터 진호현을 만나느라 벌써 정오가 훌쩍 지나 있었다.
***
대우서회주요허주부(對雨書懷走邀許主簿)
***
낮인데도 어두운 골목을 지나 문 앞에 선 호충은 열린 문으로 성큼 들어갔다.
“누, 누구. 아! 번권 형님 오셨습니까.”
“······.”
번권도 맞고 형님도 맞지만, 평소에 외부에서 불려서는 안 될 일이다.
자신 번권이라는 것이 진가장에 알려지면 피곤한 일만 생길 것이다.
“앞으론 조용히 읍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겠다. 내 별호를 함부로 부르지 마라.”
“···옙.”
“철필 사중환은 어디 있느냐.”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고해라.”
“예!”
안으로 들어간 호충은 널브러진 물품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제 창고에서 빼 온 도자기와 족자, 패물 등이었다.
“아직 정리가 덜 됐나?”
“아. 공자님. 오셨습니까.”
“사람 지나다닐 길은 만들어놔야지.”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중환은 후다닥 물품을 옆으로 치워 길을 만들었다.
“도자기 깨질라. 조심해.”
“옙.”
호충은 도자기와 패물 사이를 조심조심 지나 자리로 가서 앉았고, 사중환을 제외한 나머지를 물렸다.
“어제 내가 애들 이름 적어오라고 했잖아. 그거 어딨어?”
“아!”
사중환은 품에서 백지 한 장을 꺼내 건네줬고, 호충은 이름만 덜렁 적힌 백지를 손가락에 쥐고 팔랑팔랑 흔들었다.
“요걸로 내가 누군 줄 알고 월봉을 줘?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 놈인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리고 삼류에라도 발을 걸쳤는지 그냥 힘만 센 놈인지도 알아야지. 그리고 우리 도박장의 도박사들은 월봉 안 주냐? 직종을 구분해야 할 거 아냐?”
도박장의 도박사만이 아니라 흑패의 조직원들이 저마다 맡은 일이 있다. 직접 운영하는 홍루의 보호와 관리를 맡은 놈들이 있었고, 도박장에서 소란을 피우는 놈들을 정리하는 인원도 필요했다. 거기다 보호세를 받는 상회에도 일손이 필요하니 저마다 각자의 직종이 있는 셈이다.
“그, 그렇겠습니다.”
“그리고 원래 받았던 월봉도 옆에 적어서······.”
“시일이 소요될 것 같사옵니다. 삼 일의 말미를 주시면···.”
“아니다. 차라리 내가 적어서 주는 편이 빠르겠다. 백지와 붓을 가져와라.”
호충의 손을 통해 종이에 그려지는 것은 검은 선으로 이루어진 표였다. 좌측 줄에는 각자의 성명이 적혔고 위쪽 줄에는 소속과 무공 수위, 특기, 문맹여부, 나이와 전에 받았던 월봉이 적혀 있었다. 간략하지만 핵심을 담을 수 있는 표였다.
호충이 이를 건네주자 사중환은 확실히 배운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오.”
“매달 초에 이렇게 작성해서 내게 올리고 수결을 받아. 그리고 월봉을 지급하면 된다. 문맹인 녀석들은 천자문이라도 가르쳐. 아무리 우리가 흑패라지만, 글은 읽을 줄 알아야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작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자문은···. 가르쳐보겠습니다.”
사중환은 자신이 기억하는 흑패의 모든 것을 백지에 주르륵 적어 내렸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월봉은 비어있었다.
“여기 월봉은 왜 비웠어?”
“···많이 주는 때도 있고, 적게 주는 때도 있어서 정해진 월봉이 없습니다.”
“썩을 마한로 새끼.”
잘못된 일은 전부 마한로 탓이다.
“흑부가 흑패를 방만하게 운영하긴 했습니다.”
호충은 이것부터 확실하게 정하고 가야 함을 깨달았다.
“보통 상회에서 막일하는 놈들이 받는 월봉이 얼마냐?”
“초짜는 워낙에 적어서 비교하기가 그렇고 보통 은자 다섯 냥이면 많이 받는 편입니다.”
“그럼 우리 일반 조직원은 은자 여섯 냥으로 한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그리고 네 밑으로 조장들 있지?”
“예.”
흑패는 사중환까지 이십오 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사중환을 제외한 이십사 명을 두 개의 조로 구성해 운영하고 있었다. 호충의 말대로 각 조에는 조장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었다.
“흑조 조장 남강청과 패조 조장 하건림이 있습니다.”
“조장은 은자 여덟 냥으로 한다. 일반 조직원과는 차별을 둬야지.”
“옙!”
“그리고 도박사들은 어디 있어?”
“도박사들은 그때그때 일에 따라서 정산합니다.”
“작업이 있을 때만 지급한다는 건가?”
“알아서 잘 챙기는 놈들이라 오히려 저희가 받아내야 합죠. 도박장을 운영하는 돈의 대부분이 여기서 나옵니다. 저희 애들도 번갈아 가면서 도박장에서 일하며 월봉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도박사는 상대의 돈을 따먹는 놈들이라 녀석들이 딴 돈의 대부분을 흑패가 빼앗는 형태였다. 그래도 다른 도박장에 가서 장난치다 손목을 잘리는 것보다야 좋은 일이었기에 상부상조하고 있었다. 또한 도박장에서 일하는 놈들의 월봉도 이들이 벌어들인 돈과 도박에 빠진 놈들이 빌린 이자를 받아내는 방식으로 벌어들여 지급하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 녀석들이 딴 돈에서 일 할만 남기고 흑패로 가져온다.”
“일전엔 오 푼이었으니 녀석들도 좋아하겠습니다.”
“앞으로 도박장에서 일하는 녀석들을 옥비연이 데려온 애들로 채워. 녀석들 월봉은 은자 두 냥부터 시작해. 도박장 운영은 옥비연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천천히 바꾸겠다.”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도박장과 홍루는···············.”
도박장과 홍루에서 나오는 수입과 지출을 정리한 호충은 마지막으로 사중환과 옥비연의 월봉을 검토하고 있었다.
“너는 금자 한 냥 반. 옥비연은 금자 한 냥이다.”
“헙!”
은자 열 냥이 금자 한 냥이었으니, 사중환에게 조장의 두 배를 책정한 것이다.
사중환은 전보다 많은 월봉이 아니라 옥비연보다 자신이 더 많이 받는 것이 기뻤다.
‘내가 진짜 이인자다!’
“네가 더 많은 일을 하니 더 많이 받아야지.”
“감사합니다. 공자님!”
옥비연은 돈이 오가는 도박장을 맡기기에 적합했다. 지금은 옥비연의 월봉이 낮으나 도박장을 운영하며 생기는 수익에 따라 추가로 상급을 지급할 생각이었다.
“우선 너는 이걸로 우리 조직원들 술이라도 사 먹여. 흑패의 주인이 바뀌었는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잖아.”
사중환은 호충이 내미는 금자를 넙죽 인사하며 받았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맞아. 돈 주는 사람이 최고인 거야. 앞으로 수입과 지출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흑패 조직원들 월봉은 단 하루라도 늦추지 말고 주도록. 흑패의 수입이 증가하면 추가로 상급을 지급할 것이니 이 부분도 기억하고 있어.”
“옙!”
대강의 일을 정리한 호충은 다시 널브러진 물품들에 시선을 던졌다.
“이것들은 어디 보관할 곳이 없나?”
“예. 그나마 이곳이 가장 넓어서 이리로 가져왔습니다.”
“같이 정리하자.”
뒤에서 손가락질만 해도 알아서 할 놈들이지만, 진정한 지도자는 앞서서 이끈다고 하지 않았던가. 호충은 부하로만 살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이 꼭대기에 오를 각오를 다지고 있었기에 소매를 걷고 나섰다.
호충의 뒤에 서 있던 사중환이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옙!”
도자기들과 예술품은 벽에 줄을 맞춰 세우고 패물은 종류별로 모아 나무 상자에 넣어두었다. 남은 것은 족자와 병풍을 비롯한 그림이었다. 진호충이 어찌 이것들의 가치를 알아보겠는가. 그저 본래의 기억으로 글을 읽을 줄 아는 것뿐이었다.
호충은 하얗게 눈이 내린 산 정상에서 외팔 검객이 산하를 바라보는 족자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 거기에 적힌 싯구를 읊었다.
春白頭雲峰起示(춘백두운봉기시) : 봄의 백두에 구름이 일어 보자니
溶溶滿北東太虛(용용만북동태허) : 아득히 흘러 북동 하늘에 가득하다.
震雷翻漠燕逆(진뇌번막연역) : 진동하는 우뢰는 장막의 제비를 뒤집고 역하여
驟雨洛山虎(취우낙산호) : 소나기에 산의 호랑이 솟아 떨어지게 한다.
座對賢人酒(좌대현인주) : 앉아서 현인의 술, 백주를 마주하면
門聽長者車(문청장자거) : 문에서는 귀인의 수레 오는 소리 들린다.
相邀愧小穴濘(상요괴소혈녕) : 맞아 모시자니 작은 굴이 부끄러우니
騎馬到堦除(기마도계제) : 말을 타신 채로 섬돌까지 닿아오세요.
“이야.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하는가 봅니다. 기녀들이 뻑하고 넘어오겠습니다.”
본래 두보(杜甫)의 시로 비를 대하고 마음을 적은 것이다. 중국에서 이백과 더불어 최고의 시인으로 여기는 유명한 시인이다.
“으이그. 이거 가짜야.”
문제는 이 시가 사실 두보의 시라고 볼 수 없는데 있다. 본래 진호충이 가진 기억에 따르면 여러 싯구가 첨가되고 바뀌어 있었다. 제대로 시를 모르는 이가 적당하게 바꾼 것 같았다. 진짜 두보의 대우서회주요허주부(對雨書懷走邀許主簿)는 이러했다.
東嶽雲峰起(동악운봉기) : 동악에 구름이 봉우리에 일어
溶溶滿太虛(용용만태허) : 아득히 흘러 하늘에 가득하다.
震雷翻漠燕(진뇌번막연) : 진동하는 우뢰는 장막의 제비를 뒤집고
驟雨洛河魚(취우낙하어) : 소나기에 강물의 물고기 솟아 떨어지게 한다.
座對賢人酒(좌대현인주) : 앉아서 현인의 술, 백주를 마주하면
門聽長者車(문청장자거) : 문에서는 귀인의 수레 오는 소리 들린다.
相邀愧泥濘(상요괴니녕) : 맞아 모시자니 진흙탕이 부끄러우니
騎馬到堦除(기마도계제) : 말을 타신 채로 섬돌까지 닿아오세요.
본래의 시는 이처럼 폭우 속의 감상을 표현하고 있었지만, 그림은 눈 내린 산 정상이었다. 그림과 본래의 시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여러모로 이상한 족자였다.
“에효. 그래봤자 몇 푼 안 내주고 받은 물건이라 다행입니다. 도박장에 오는 놈들이 진품을 들고오는 경우는 많지 않지요.”
“그래도 그림은 멋있네. 내가 가져가서 걸어둬야겠다.”
“그럼 나머지는 감정을 받아보겠습니다.”
“특히 조각품들은 확실하게 받아내. 딱 봐도 가치가 있는 것들이니까.”
“옙! 공자님.”
호충은 정확하게 자구를 맞춘 본래의 시에서 바뀌고 첨가한 글들이 뭔지 알아볼 수 있었다.
초반에 바뀐 글자는 춘백두(春白頭)와 시(示) 그리고 북동(北東)과 역(逆)이 있었다.
자신의 머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를 해석했다.
[봄의 하얀 산 정상에서 북동의 역을 봐라.]
호충은 말없이 눈만 번쩍 떴다.
“!!”
북동의 역이라면 남서쪽이었다. 호충은 이 구절이 그냥 아무렇게나 끼워 넣은 구절이 아님을 알아챘다. 호충은 뒤에 바뀐 구절을 얼른 더 찾았다.
하어(河魚)가 산호(山虎)로 바뀌어 있었다.
‘강물의 물고기가 아니라 산의 호랑이.’
여기만 봐서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뒤에 하나가 더 있었다.
니(泥)가 소혈(小穴)로 바뀌었다. 진흙탕이 작은 구멍으로 바뀐 것이다.
[산중 호랑이의 작은 구멍.]
‘호굴이다!’
모든 것을 연결하면 하나의 문장을 만들 수 있었다.
[봄의 하얀 산 정상에서 북동의 역인 남서에 산중 호혈이 보인다.]
분명 그 동굴에 무언가를 숨겨두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보물? 아니면 무공비급? 분명 뭔가를 숨겨두었어!’
호충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지만 곧 시무룩해졌다.
‘···썩을.’
기준이 되는 산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팔이 검객에 어디에 서서 호혈을 보고 있는지가 오리무중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아냐고!’
백두(白頭)라는 산이 문제였다. 봄에 눈으로 덮인 봉우리를 가진 산이 한둘이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