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32)

기연(奇緣) × 四 + 一

***

남은 것은 책자만 다섯 권이었다. 흙 속에 오래 있었지만, 밀봉이 확실했는지 젖어있지 않았고 보관 상태도 양호했다. 게다가 종이의 질도 상당히 좋아서 만져도 바스라지지 않았다.

“어휴. 그래도 조심해야지.”

호충은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책을 잡았다. 읽다가 책이 상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어디 우리 외팔이 검객께서 뭘 남기셨을지 볼까?”

가장 위에 있는 얇은 책자의 표지를 살짝 열자 그 안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누군가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이 글을 확인하는 그대는 아마도 가난한 문사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안배를 꿰뚫어 보고 이 철궤를 찾아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난 아니고요.”

문사였던 것은 이전의 진호충이지, 지금의 진호충은 아니었다.

[나는 황궁의 금의위였으나, 황궁에서 역도들에게 주군과 팔을 잃고 이곳 자장까지 도주하였다.]

“오옷!”

이전 황궁의 금의위라면 진짜 고수라는 말이었다. 그림에 답설무흔이 드러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호충은 중간에 의미 없는 신세한탄을 휙휙 넘겨버리고 가장 중요한 내용만을 찾아 읽었다.

[······나는 결국 역도들의 눈을 피해 산천을 떠돌아야 했다. 도주 중에 황실의 유산을 전할 신의(信義) 있는 자를 찾고자 하였으나, 이미 황궁이 무너졌으니 전한들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아까워서라도 남겨두기 마련이지. 이 책자가 바로 그 증거 아니겠어?”

이어진 글은 호충의 예상대로였다.

[허나 지고한 무공의 이치를 사장시키는 것은 역도들의 바람일터, 나는 황실에서 따로 보관하던 무공과 영약을 유림에 전하려고 마음먹었다. 허나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고, 유림에 접촉할 수도 없는 터라 어쩔 수 없이 족자에 나의 뜻을 남겼다.]

유림(儒林).

학사들이나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래서 두보의 시를 변형해 단서를 남긴 것이다. 두보를 알고 있는 유림의 인물이라면 머리가 조금만 돌아가도 시에서 오류를 잡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오류를 잡아낸 구절로 다시 단서를 조합하여 호혈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였다.

“누가 알아보기나 하겠소? 나 같이 이상한 놈이 어디 흔하면 모를까.”

[연자여. 그대는 내가 남겨둔 황금을 사용해 길을 떠나라. 뜻이 맞는 이들과 심산유곡에 숨어들어 상승의 무공을 익히고 무도한 역도들에게 유림을 힘을 보여라.]

“큭큭. 유림은 아니지만, 잘 써먹겠습니다.”

책자의 후반부에는 뒤에 남겨진 네 권의 책에 관한 설명과 황실의 유산인 무공이 남아 있는 비고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오옷! 비고가 끝이 아니었어!”

비고의 위치가 기록된 글 뒤에는 엄청난 정보가 또 있었기 때문이다.

[황실의 외부 비고는 언제든 상승 무공을 연성할 수 있도록 공청석유(空靑石流)가 고이는 신묘한 장소에 마련되어 있다. 연자는 그곳에서 공력을 쌓아 쉬이 무공을 연마할 수 있으리라.]

얇은 책자를 든 호충의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기연! 진정한 기연이로다!! 대박!’

호충이 무림에서 꿈꾸던 기연(奇緣)이 이렇게 찾아왔다.

“휴. 진정하자. 아직 아니야. 혼자 설레발치면 오던 복도 달아나는 법이야. 암.”

전 황실의 비고는 당장 갈 수 없었기에 우선은 남겨둔 무공을 연마해야 했다.

[무흔(無痕)]

[경신(輕身)]

[양의(兩意)]

[환체(換體)]

제목만으론 무슨 무공인지 파악하기 쉽지 않으나, 서책에 기록된 설명이 자세하니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무흔無痕)]은 효율적으로 공력을 쌓는 호흡법과 공력을 쌓은 흔적이 드러나지 않게 만들어주는 무공으로 무림에서 얻은 신공들을 황궁의 무사들이 연구하여 새로이 창안한 것이었다. 무흔에는 상대의 공력을 알아보는 신묘한 공능이 더해져 있었는데. 이 때문에 황실의 무사들이 무림의 인사들이 쌓은 공력을 알아볼 수 있었다 했다.

“좋구나!”

[경신(輕身)]은 황실의 외부 비고까지 가야할 문사를 위해 적은 공력으로 몸을 가벼이 해 이동할 수 있도록 첨가한 것이었다. 제목은 간단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무리의 높은 수준은 당장 알아보기 힘들었다.

“익히라면 익혀야지. 암.”

[양의(兩意)]는 무당의 [양의분심신공]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을 나눠 한 번에 여러 무공을 익힐 수 있도록 창안된 것이었다. 황실 비고의 무공이 상당할 것이니 많은 무공을 익히려면 필수적일 것이다. 양의(兩意)는 심상에 이는 잡념을 지우고 기억력을 끌어올리며 두뇌를 총명하게 해주는 공능까지 있다고 하니, 머리 쓰기를 힘들어하는 호충에겐 필수적인 무공이었다.

“크흐흐. 암. 이것도 필요하지. 무림에서 무쌍 한번 찍어보자.”

마지막 [환체(換體)]에는 실로 엄청난 무리가 담겨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무협소설에서 환골탈태(换骨脱胎)이라 불리는 새로운 몸을 연성하는 고차원적인 무리였다. 무협소설에는 걸핏하면 나오는 환골탈태지만, 이곳 무림의 역사에도 쉬이 찾을 수 없는 고차원적인 무공이었다. 애초에 환골탈태(换骨脱胎)는 무공이 아니라 지고한 경지를 깨달은 정신이 평범한 육신과의 괴리를 견디지 못해 몸이 알아서 정신과 같은 수준으로 변화하는 경지였다. 이렇게 서책으로 남길 무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무리를 연구해 서책을 남길 수준에 다다랐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 무공은 공청석유 없이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무공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직 나만을 위한 무공! 크흐. 오늘 취하는 구나.”

신비인이 남긴 모든 것이 호충을 취하게 했다.

서책의 마지막엔 글을 남긴 자의 마지막 당부가 적혀 있었다.

[혹여 그대가 황실의 주구라 하여도 영약과 비고가 갖는 가치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실로 그러했다. 황실의 사람이라 해도 이 비고와 영약이 있는 곳을 쉬이 밝히지 않을 것이다. 무공을 익혀도 감출 수 있고, 엄청난 무공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러한 보물을 함부로 다른 이와 공유하겠는가.

[그대가 누구든 간에 황실을 전복하고 새로운 나라의 시조가 될 수도 있음이다. 나는 폐하와 황궁에 대한 충성심으로 감히 도전할 수 없었으나, 그대는 높은 경지를 깨닫고 많은 수하들을 양성하여 광명의 길을 개척하길 바라노라.]

글을 남긴 사람은 자신의 주군인 황제를 해하고 새로이 나라를 건국한 황실이 미워서 이 글을 남겼으리라. 누구의 웅심이라도 자극할 만큼의 무공과 영약이었다. 이를 통해 전 황궁을 무너뜨린 현 황궁을 도모할 생각이었겠으나, 호충에겐 먼 나라 얘기였다.

“흐허허. 내가 미쳤다고 황제가 되겠어?”

호충이 황제로 사는 것이 뭐가 좋다고 멀쩡한 나라를 전복시킬까. 그런 짓은 귀찮기만 하고 자신에게도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음지의 절대자가 되고 싶을 뿐이다.

“거 미안하게 됐소. 그래도 당신이 남긴 전대의 유산은 기어코 후대로 전하리다. 혹시 아오? 내 후계가 현 황실을 전복하고 새로운 황제가 될지?”

서책을 덮은 호충은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무흔(無痕), 경신(輕身), 양의(兩意), 환체(換體).”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중요한 무공들이었다.

호충은 무공 서적을 늘어놓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익혀야 할 무공을 선택해야 했다. 한 번에 다 익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다. 너를 익혀야 현기가 가득한 이 무공들을 연마할 수 있겠지.”

호충이 선택한 무공은 바로 [양의(兩意)]였다. 양의가 있어야 무공서의 높은 무리(武理)를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또한 중요한 무공서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기억할 수 있을 테니 가장 먼저 익혀야 할 것이다.

“양의(兩意)를 익힌 다음 나머지 무공을 익힐 것이다.”

그 이후에 할 일은 공력을 쌓고 감추는 일이 될 것이다.

“무흔(無痕)으로 단단한 공력을 쌓고 누구도 모르게 감출 것이다.”

무공을 배워 공력을 쌓았다면, 더 많은 무공서가 있다는 황궁의 비밀 창고로 가야할 것이다.

“경신(輕身)을 배워 먼 거리를 쉬이 이동할 것이다.”

마지막은 아직도 남아있을지 알 수 없는 공청석유(空靑石流)였다. 전 황실이 무너지고 삼백년이나 흘렀으니 공청석유가 말랐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청석유(空靑石流)가 남았다면 환체를 통해 새로이 태어날 것이다. 허나 여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얻은 것만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걸림돌이 없을 것이니까.”

호충은 표지에 양의(兩意)라고 적힌 책자를 펼쳐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진가장의 진강십이검(眞强十二劍)을 책으로 익혀 무공 서적을 볼 줄 아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마저도 본 기억이 없었다면 양의(兩意)를 제대로 읽지도 못했을 것이다.

[양의(兩意)란 인간의 마음을 둘로 나눈다는 뜻이다. 허나 지금부터 배울 양의(兩意)는 의념을 둘로 나누는데 그치지 않고, 셋, 넷으로 나누는 방법과 그 이상으로 나눠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새로이 창안되었다.]

‘의념을 둘 이상으로 나눌 수 있다면 항시 공력을 돌려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 수 있을 거야.’

[허나 어느 하나라도 상승 무공을 깊이 연마한 무인이라면 양의(兩意)를 쉬이 배우지 못할 것이다. 양의(兩意)는 상승 무공을 배우기 전에 가장 먼저 익히고 머리에 새겨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무공이다.]

“휴우.”

호충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무흔(無痕)이나 경신(輕身)을 먼저 익혔더라면 나중에서야 양의(兩意)를 들춰보지 않았겠는가.

[또한 양의(兩意)는 기본적으로 무인이 아닌 문사를 위한 무공이다. 고대 성현들의 수많은 배움을 익히기 위하여 창안된 이 무공은 무사보다 문사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 문사인 그대는 양의(兩意)만으로 흡족하겠으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나머지 무공서를 익혀주길 바랄 뿐이노라.]

양의(兩意)라는 무공서도 결국 외팔이 검객이 필사해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서책에서 보았던 그의 필체가 그대로 남아있었고, 내용 또한 이어지고 있었다. 외팔 검객은 문사라면 당연히 양의(兩意)를 가장 먼저 익힐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문사가 아니라 무공서에 더 관심이 많으니 걱정은 붙들어 매시오.”

이후 양의(兩意)의 진의가 담긴 내용이 시작되었고, 호충은 자신의 기억을 총 동원하여 무리를 이해하려 노력하였다.

호충이 서책의 글자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드니 이미 시위가 어둑해진 다음이었다.

“······아오. 어지러워.”

책에 나온 그대로 양의(兩意)를 따라하다 보니 정신이 어지러웠다.

‘아직 일성(一成)도 이루지 못했거늘···.’

그런데도 양의(兩意)는 의념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호충의 머리에 화산으로 가서 해야 할 일들과 흑패를 확장시키는 일들이 동시에 주르륵 떠올랐다. 또한 앞으로의 계획이 착착 세워지고 있었다.

‘이거···. 제대로 익혀서 써먹어야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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