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梅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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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제대로 익혀서 써먹어야겠어.’
이런 중요한 무공서를 진가장으로 들고 갈 수는 없었다. 여기서만 익힐 수 있었고 아무도 모르게 숨겨야 했다. 결국 철궤는 다시 흙 속에 파묻혀야 할 운명이다.
“잘 숨어 있어라. 아무한테도 들키지 말고.”
동굴과 집 사이의 좁은 구석에 땅을 파고 철궤를 묻은 호충은 의복의 흙 부스러기를 털어내고 진가장으로 향했다.
“아차차! 금덩어리는 빼서 왕 지부장에게 맡겨야지!”
호충은 얼른 다시 철궤를 꺼내 황금을 빼냈고, 그길로 천금장으로 가서 예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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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을 본 천금장의 지부장은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오오! 이정도면 금원보 열 개는 되겠습니다.”
“확실하게 무게 달아서 챙겨주시오.”
“예. 공자님.”
근엄한 얼굴로 금덩이를 예치했지만, 속으론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푸히히. 금원보가 열 개라니! 제대로 횡재했구나.’
이후 호충의 일과는 매일이 비슷했다. 진가장에서 송 영감이 가져다주는 아침을 먹고 나서서 흑패에 들러 사중환에게 운영 상황을 보고 받고, 무공을 숨겨둔 집으로 가서 하루 종일 무공을 익힌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일과였다.
‘무공! 완전 재미있어!’
아직 깊이있는 무공을 연마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또한 흑패의 사중환은 하루하루 지나며 흑패의 운영에 자신감을 얻어갔고, 옥비연과 패거리는 흑패의 도박장에서 일에 적응하고 있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지만, 호충은 화산으로 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고 그 사이 둘째 진호중이 외가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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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진호중은 진가장에 돌아오자마자 가주전에 들어 가주를 알현했다.
“소자 외가에서 할아버지를 뵙고 돌아왔나이다.”
“가주님은 여전히 정정하시냐?”
둘째 아내 서문희의 아버지, 곧 진원우의 장인이 바로 서문세가의 가주였다.
“가주님은 정정하시고 세가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나이다.”
자신의 외가인 서문세가가 진가장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의미가 담긴 대답이었다. 하지만 모용가가 황실의 외척이 된다는 소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진원우는 둘째의 말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많이 발전해야지. 허허허.”
“허나 진가장에 비할 바는 아니옵니다. 우리 진가장이야말로 앞으로의 무림에 큰 족적을 남길 것이옵니다.”
그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허허허.”
“서문세가의 가주님은 곧 원로원으로 물러서시고 가주 위를 넘기신다 하옵니다.”
서문세가의 가주가 원로원으로 물러간다는 소식은 조금 충격이었다.
“···벌써 그리 되셨는가.”
하지만 서문세가의 가주가 정정하다 했는데도 진원우는 가주직을 이양한다는 결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공력이 심후해지셨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예전 상승 무공은 기본 무공에 비해 많은 공력을 쌓게 해주기에 젊은 나이에도 심후한 공력을 갖출 수 있었다. 허나 상승 무공이 남아있지 않은 작금의 무림이라도 기본 무공이 남아 있었고, 이는 곧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력을 쌓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서문 가주의 나이가 일 갑자를 넘어섰고 공력 또한 그에 맞춰 쌓았을 터이니 심오한 무리가 담긴 상승 무공이 없어도 고수라 불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서문세가를 비롯한 모든 세가와 무림의 방파들은 이러한 고수들을 원로원으로 보내 무림에 모습을 감추도록 하고 있었다. 이는 황궁이 무림에 간섭하지 않기로 하고 내건 조건이었다. 덕분에 무림에서 심후한 공력을 쌓은 고수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덕분에 나도 가주 위를 일찍 물려받지 않았던가.’
아버지가 물러난 진가장에 진원우가 가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모용가를 통해 황궁에 상승 무공을 허락 받으면 이 또한 해결될 것이다.’
진원우는 가주의 직위를 오랫동안 유지할 생각이었다.
“서문세가에서 가주님께 드리라는 선물이 있어 가져왔나이다.”
“선물?”
진호중이 가져온 선물은 그림 몇 점과 병풍, 패물 등이었는데 하나 같이 진귀한 것이었다.
“내가 보낸 선물이 부끄러워지는 구나. 그래. 먼 길 고생하였을 터이니 얼른 들어가 쉬어라.”
“예.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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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중은 가주전에서 나오는 길에 옆으로 다가온 인물에게 물었다. 그는 진가장의 부총관 염태중이였다.
“가기 전에 처리하라고 한 일은 어찌 되었느냐. 알아봤느냐?”
“···녀석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리 됐지?”
“우선 일을 실행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분명 일이 있었고, 녀석은 붉은 것을 봤습니다.”
붉은 것. 곧 피를 말함이었다.
“헌데?”
어찌 아직도 살아있냐는 물음이다.
“한참 자리를 보전했지만, 지금은 회복하고 멀쩡합니다.”
“호란이가 뭔가를 잘 못 알았던 모양이군. 분명···.”
녀석이 피만 봐도 기절하기 일쑤라 자신의 피를 보면 분명 죽을 지경일 것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녀석과 내기를 한다는 명분으로 일을 진행한 것이다. 혹여 일이 잘못되어도 그 원인을 호란에게 돌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진가장의 하나뿐인 딸 호란이라면 가주라고 해도 큰 벌을 내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도련님을 모시는 무사들에게 들어보니 이후 녀석은 무공에 전념하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셋째 호성과 있었던 작은 분쟁이 염태중의 귀에도 들어간 것이다.
“···괜히 경각심만 심어준 꼴이군.”
호중은 쳐낼 수 있는 가지부터 쳐내고 소가주가 되는데 심력을 집중할 생각이었는데, 급하게 움직여 일을 그르쳤다고 생각했다.
“그래봤자 공자님의 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녀석은 아무런 힘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일을 그르쳤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겠지.”
염태중은 둘째 호중이 상벌을 분명히 함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 일을 그르친 원흉의 소식도 전했다.
“···하오나, 흑부가 흑패에서 실각하고 철필이 패거리를 차지했다 하옵니다. 하여 자장에서 흑부를 찾아 볼 수 없었나이다.”
“허허. 내가 없는 사이에 뒷골목에 개벽이 있었군.”
“개벽까지야···.”
“우리에겐 더러운 뒷골목의 일이지만, 그들에겐 전부가 아니겠느냐.”
“그렇기도 하옵니다.”
“잘 됐다. 흑부 녀석이 아는 척하는 것도 귀찮았는데, 이번 기회에 손을 털 수 있겠어.”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이 더 있습니다.”
“무엇인가.”
“첫째 공자께서 협의맹에 다녀오시고 가주님과 밀담을 나누셨습니다. 이후에 첫째 공자께서 넷째를 부르셨지요.”
“···넷째를?”
‘그 쓸모없는 녀석을 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나이다.”
협의맹과 정무맹의 회합 안건이야 외할아버지인 서문가주를 통해서도 들었기에 궁금하지 않았지만, 가주와 첫째의 밀담에 이은 넷째의 부름이라면 짐작할 수 없었다.
“넷째를 찾아와라. 녀석에게 직접 들어야겠다.”
“녀석을 곧 공자님의 침소로 데려가겠습니다.”
***
아침에 집을 나서려다가 진호중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호충은 오늘 평소와 달리 집에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지금은 녀석에게 복수할 방법이 없다. 괜히 일을 만들어봐야 내겐 자충수 밖에 되지 않아.’
흑부를 통해 자신에게 흉수를 보낸 호중이지만, 마음가는대로 복수를 행할 수는 없었다. 셋째에게 가한 복수는 그야말로 천운이 닿아 좋게 일을 끝낼 수 있었지만, 둘째는 무슨 수를 써도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괜히 내 행적이 드러날 수도 있음이야.’
평소 조심스럽게 움직였기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지만, 흑패와 관련이 있었던 호중이 돌아왔으니 흑패에 가는 것도 삼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도련님. 둘째 공자님이 찾으십니다.”
“···이유는 또 못 들었지?”
“그렇지요······.”
자신을 무시하기 때문에 송 영감에게도 연유를 알려주지 않고 오라 가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셋째만 되었어도 연유는 알려주었을 것이다.
“첫째 형님은 나가셨어?”
“외부 일을 마치고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호충은 둘째 호중이 자신을 찾은 이유가 첫째 호현과의 일 때문이라고 확정지어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이네. 송 영감은 첫째 형님께 가서 내가 지금 둘째 형님께 불려 간다는 것을 일러줘.”
“연유도 모르는데···.”
“첫째 형님이 맡기신 일이 있는데, 호중 형님은 분명 그 일을 캐물으실 거야.”
“아.”
“이걸 가져가면 형님은 알아들으실 거야.”
호충은 얼른 백지에 [매화(梅花)]라고 적어 접어주었다.
“···예. 바로 가서 전달하겠습니다.”
호중은 품에 있는 회칼을 전부 빼서 숨겨두고 맨몸으로 나섰다. 괜히 무기가 있는 것을 호중에게 들켜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예전의 내가 아니지만, 오늘은 참겠다.’
양의(兩意)를 익히며 눈이 깊어진 호충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송 영감. 얼른 가서 일러바쳐.’
오늘 일의 열쇠는 첫째 호현이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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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가 둘째 형님을 뵙습니다. 무탈하게 외가에 다녀오신 모습을 뵈오니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내가 없는 사이 큰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몸은 괜찮으냐?”
“당시 목숨이 경각에 처했으나, 진가장의 의원들 솜씨가 뛰어나 기사회생 했습니다.”
“어찌 그런 무도한 자들이 있단 말이냐. 내가 너를 해한 흉수를 꼭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
호중이 원흉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들었다면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난 네 놈이 그랬다는 걸 알지.’
걱정스러운 표정 뒤에 음흉한 속을 숨긴 호중의 차가운 심성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동생 배에 칼침을 박아 놓고 저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은 냉혹한 심성을 갖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형님께서 저를 생각해주시는 말씀을 들으니 감격에 겨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옵니다. 흑흑.”
호충은 진짜로 눈물이 나오는 것처럼 소매로 눈가를 찍어 눌렀다.
‘아. 이 연기력. 배우를 했어도 됐을 건데.’
호충은 자신의 연기력을 자화자찬하며 계속해서 연기를 이어갔다.
“역시 제가 진가장에 믿을 사람은 호중 형님 밖에 없습니다. 흑흑.”
“당연하지 않느냐. 어미는 다를지 몰라도 우리는 한 형제다.”
“아아. 형님!”
“그렇다고 안길 것은 없고.”
호충이 팔을 벌리고 안으려고 하자 얼른 뒤로 물러서 자리를 권하는 호중이다.
“앉아라. 그간 못 다한 대화나 하자꾸나.”
호충은 둘째가 의뭉을 떠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첫째 호현이 오면 네가 끽 소리나 하겠느냐.’
온갖 잡소리를 늘어놓으며 호충의 환심을 사려던 호중이 막 본론으로 들어가려던 차였다.
“호충아. 그래서 말인데···.”
그때 밖에서 손님이 왔음을 알려왔다.
“공자님. 첫째 공자님이 오셨습니다.”
“···형님이 여길?”
잠시 단단하던 녀석의 가면에 실금이 갔지만, 곧 신색을 회복하고 밖에 일렀다.
“어서 형님을 뫼시어라.”
“예.”
문이 열리고 호현이 들어오자 호충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형님을 뵙습니다.”
“오. 네가 와 있었구나. 나는 둘째가 먼 길을 다녀와 인사차 왔다.”
“형님. 제가 먼저 형님께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우리끼리 예의 차릴 것이 무어냐. 동생이 고생해서 먼 길을 다녀왔으니 형이 와서라도 얼굴을 봐야지.”
말 몇 마디로 동생을 예의 없는 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지금 내게 시비를 거는가.’
호중의 눈이 잠시 살기를 머금고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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