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32)

진호란

***

“우리끼리 예의 차릴 것이 무어냐. 동생이 고생해서 먼 길을 다녀왔으니 형이 와서라도 얼굴을 봐야지.”

말 몇 마디로 동생을 예의 없는 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지금 내게 시비를 거는가.’

호중의 눈이 잠시 살기를 머금고 빛났다. 하지만 잠시 뿐이다. 호중은 곧 민망한 얼굴로 수긍했다.

“···막내와 잠시 대화하고 바로 형님께 가려던 차였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그러냐? 그럼 괜히 부산하게 할 필요 없지. 나도 같이 너희와 담소를 나누겠다.”

“······.”

첫째를 쫓아낼 방법은 없었고, 막내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당사자 앞에서 물을 수도 없었다.

“둘째 형님. 아까 하려던 말씀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별거 아니다. 요즘 무공을 익힌다고 들었기에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으려 했다.”

“아. 감사합니다. 형님. 제가 총관에게 받는 활동비가 적어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었습니다.”

호충은 이 와중에 자신의 이득을 노리고 있었다.

‘큭큭. 호현이 도착하니 네가 꼬리를 마는 구나. 어서 돈이나 내놓아라!’

“···부총관에게 일러둘 터이니 너는 걱정하지 말거라. 진가장 가주의 아들이 빈궁하다면 세상이 비웃을 것이다.”

호현도 거들었다.

“둘째의 말이 옳다. 내가 총관에게 일러 네게 배정된 활동 자금을 크게 올려주마.”

자신은 부총관을 거론했는데, 호현은 그 위의 총관을 입에 올렸다.

“······.”

괜히 자신이 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호충은 그 사이에서 이득만 올렸다.

“아. 두 분 형님께 감사드리옵니다. 덕분에 서책을 사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너희가 경계할 놈이 아니니라.’

호충은 일부러 서책이라고 말한 것이다.

“서책?”

“무공을 가르쳐줄 지도무사가 아니라?”

“아이고. 보고 싶은 성현의 책이 있어서 그만···.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나왔나 봅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문사에 뜻을 거두지 않는 호충에게 일말의 경계심도 들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 가는 것을 어찌 막겠느냐.”

“그렇지요. 넷째는 아무래도 학사가 어울리는 모양입니다.”

호충이 그들에게 바라는 바였다.

“그래도 무공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그래야 밖에 나가서 무뢰배들을 상대할 수 있느니라.”

“예. 형님들. 감사합니다.”

“그럼 넷째는 볼 일은 끝났느냐?”

“···그러하옵니다.”

“그럼 들어가 보아라. 나는 오랜만에 둘째와 더 있고 싶구나.”

“예. 형님들. 막내는 들어가서 무공에 매진하겠습니다.”

“······.”

둘째 호중은 밖으로 나가는 호충을 붙잡지 못했다.

‘어차피 오늘만 기회가 아니지.’

“먼 길을 다녀왔어도 술은 한 잔 할 수 있겠지? 아직 막내는 우리와 어울리기가 어려우니, 오랜만에 나와 대작이나 하자꾸나.”

“형님의 청을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거하게 술상을 봐오라 하겠습니다.”

또한 넷째에게서 듣지 않아도 첫째에게 직접 들으면 될 일이 아닌가.

“마치 기다렸다는 투로구나. 하하하. 술이 고프기도 했겠지.”

“제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무척 궁금했지요. 형님께서 저와 함께 집안의 대소사에 관여하시니 많은 것을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

“······.”

둘의 수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서로 날카로운 눈빛을 주고받지만, 입으로 나오는 말은 우애가 좋은 형제의 그것이었다.

술상이 차려지고 둘째가 먼저 선공했다.

“가주님을 대신하여 협의맹에 다녀오셨다 들었습니다.”

“그랬지.”

이후의 대답을 고민하기 위해 짧은 답으로 끝낸 것이다.

‘정무맹과 협의맹의 안건을 모르지 않을 터. 녀석이 무엇을 묻고자 함일까.’

“형님. 협의맹에 걸음 한 여협들 중에 마음에 드는 처자는 있으셨습니까.”

“!”

호현은 잔에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엉뚱한 질문이다.

“형님의 혼기도 다 차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우리 진가장이 무가(武家)라지만 형님도 혼처를 찾으셔야지요.”

“너도 같은 사정이지 않느냐.”

“그렇지요. 어머니께서도 걱정이 많으십니다. 저와 형님의 차이라고 해봐야 열두 달도 되지 않으니까요.”

한 해에서 두 달이 모자라는 차이였고 해가 달라 형과 아우였다. 호중은 자신이 호현과 비등한 수준임을 나이로 주장하고 있었다. 이 말을 꺼내기 위해 혼처를 입에 올린 것이다.

“···우리가 혼처를 따로 찾을 처지더냐? 가주께서 알아서 좋은 혼처를 알아봐 주실 것이다.”

하물며 모용가는 앞으로 황태자의 외가가 되니 함부로 혼처를 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도 그렇습니다.”

이제 호현의 차례였다.

“되도록이면 앞으로 술은 나와 먹는 편이 좋겠더구나.”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기루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자장(子張)거리에 퍼지고 있다 들었다. 이는 진가장과 가주님의 이름에 누가되는 일일 것이야.”

“······.”

이번엔 호중이 한 대 맞았다.

“영웅은 삼처사첩(三妻四妾)이 흉이 아니라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주님의 자식 신분이다. 영웅은 아직 멀었지.”

“······조심하겠습니다. 형님.”

호중은 붉어진 얼굴로 사과했고, 호현은 내친김에 넷째에게 맡긴 일도 말했다.

“넷째는 내가 따로 맡긴 일이 있다.”

“!”

호중이 당연히 이 일을 궁금해 할 것이기에 선수 친 것이다.

“너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협의맹과 정무맹은 곧 첫 회합을 갖고 앞으로도 회합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자면 정무맹을 구성하는 무림방파와 안면을 트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지요.”

“게다가 진가장이 있는 섬서 땅에는 정무맹의 구성원인 화산과 종남이 함께하고 있다. 무공을 대부분 잃어 유명무실한 도가의 무림 방파지만, 그래도 그들의 전통은 고대로부터 이어왔지.”

“···그렇다면 화산이겠군요.”

“그렇다. 종남은 세가 너무 작아졌으니까. 이웃한 무림의 세력이니 더욱 친하게 지내야지.”

“화산에 넷째를 보낸다 한들···.”

아무것도 모르는 호충이 화산에 가봤자 무슨 성과를 낼까 싶은 것이다.

“어차피 명목상 보내긴 해야 할 터, 가장 보잘 것 없는 녀석을 보내는 편이 낫질 않으냐. 셋째는 쉽지 않으니 남은 것은 넷째 밖에 없었지. 그래도 가주님의 아들이니 화산에서 핍박받지는 않을 것이다.”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군요.”

녀석을 구슬려 겨우 이런 소식을 들었다면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차라리 첫째에게 직접 듣는 편이 나았다.

“······.”

호현은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진강이십사검(眞强二十四劍)을 자신이 익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그 무공이 화산파에서 연유했다는 사실도 설명할 수 없었다. 괜히 가주의 자리에서 멀어졌다는 경각심만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녀석은 자신을 써줘서 고맙다더구나. 녀석이 내심 자신이 쓸모없다고 자책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푸흐. 녀석은 진가장에서 그저 숨만 쉬고 살았지요.”

호현은 호중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래도 녀석이 아버지의 자식임을 잊지 마라. 우리 진가장에서나 천덕꾸러기 신세일 뿐이다. 혹시 아느냐. 녀석이 훗날 출세해 나라의 관을 쓸지.”

“그 전에 돈이라도 쥐어주겠습니다.”

“나 또한 그리할 생각이다. 녀석도 이제 제법 머리가 컸다. 홀대 받으면 두고두고 기억하겠지.”

둘의 시선에 호충은 여전히 어리석고 멍청한 동생일 뿐이었다.

호충이 바라던 대로였다.

***

두 사람이 대작하는 동안 호충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있던 송 영감을 끌고 처소로 갔다.

“영감은 여기서 집이나 잘 지켜.”

“또 나가십니까?”

“조만간에 총관이 전보다 많은 활동 자금을 쓰도록 허락할 거야. 잘 챙겨놔.”

“오. 그렇게만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도련님.”

“큭큭.”

‘제 녀석들이 나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호충은 녀석들의 머리에 자신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두고 보아라. 진가장의 무공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니.’

지금은 기초 수준의 무공을 익히고 있으나 이것도 무림에 나가면 피바람이 불 신공이었다.

숨겨진 전 황궁의 비고엔 더 많은 신공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니들은 국물도 없을 줄 알아!’

비고의 영약과 무공은 오직 자신을 위해 사용할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살지 않을 거라는 호충의 다짐은 지금도 유효했다.

***

호충이 여느 때와 같이 진가장을 나서는데, 표독스러운 얼굴이 하나 보였다. 째진 눈에 날카로운 눈매는 지독한 성정을 가졌음을 짐작하게 했다.

“네놈은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느냐?”

“······.”

호충은 표독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을 어찌 대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란 누이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녀는 평소 피를 갖고 자신을 놀라게 하던 호란이었다.

“감히 내 오라비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펑펑 놀기만 해?”

“아. 그건 지도 대련이었지요. 호성 형님께서 저를 가르쳐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날 많은 무사들이 지켜봤는데, 호성 형님이 다쳤다는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하! 오라비가 어머니께는 숨겼어도 내게 숨길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 성한 곳이 없더구나.”

“······.”

호란은 호성의 몸이 아픈 것을 확인하고 분풀이를 위해 자신을 찾아온 모양이다.

‘몇 대 맞아줘야 하나?’

하지만 곧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당한 것이 있는데 또?’

호충은 생글생글 웃으며 호란을 마주했다.

’그럴 수야 없지. 네 년에겐 한 대도 맞지 않을 테다.’

“그럼 호성 형님께 다시 지도 대련을 부탁드리지요. 나중에 제대로 저를 가르쳐주신다 하셨으니 거절치 않으실 겁니다.”

“···네 녀석이 요새 무공을 좀 익혔다고 형님을 깔보는 구나. 오라비를 다시 부를 것도 없다. 내가 너를 교육할 것이다.”

호란은 어디서 들고 왔는지 목검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그럼 저도 사양하지 않지요.”

스윽. 챙.

호충은 품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회칼을 꺼내 들었다. 호란은 대경해서 한 걸음 물러섰다.

“야! 날카로운 칼을 꺼내면 어쩌자고!”

“목검이 더 길잖습니까.”

“그, 그리고 너 원래 그런 거 못 보잖아.”

호충은 목검만 봐도 벌벌 떨기 일쑤였다. 날카로운 것은 쳐다보지도 못하는 녀석이고 붉은 피는 녀석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지난 사고로 인해 나아졌습니다. 계속 그리 살 수는 없지요.”

“젠장. 괜히···.”

괜히 둘째 오라비와 내기를 했다 생각하는 호란이다.

“칼에는 눈이 없으니 어여쁜 누이 얼굴이 생채기가 생길 수도 있음입니다. 이를 감안하고 들어오시지요.”

“뭐? 감히 내 얼굴에 상처를 내려고?”

“그럼 저보고 맞기만 하라는 말씀입니까?”

“휘두르기만 해봐. 내가 가만 안 있을 테니까.”

“큭큭. 제가 여기서 더 잃을 거라도 있답니까? 도대체 무엇으로 날 겁박하려 합니까.”

“···그, 그건.”

호충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거라곤 없었다. 지금도 진가장에서 가장 홀대받는 호충이었다.

“···조용히 계시다가 가주님이 혼처를 정해주시면 시집이나 가시오. 괜히 나서서 큰일 당하지 마시고.”

“으윽.”

저벅.

호란의 면전까지 다가간 호충은 살기어린 눈으로 호란을 노려보며 말했다.

“경고합니다. 나를 핍박하면 앞뒤 안보고 끝장을 볼 생각입니다. 난 잃을 게 없는 놈입니다. 내가 누이를 상하게 해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나, 난 진가장의 하나 뿐인···.”

“셋째 어머님이 그간 저를 챙겨주신 마음을 봐서라도 오늘은 참습니다.”

아직 자신의 무공은 완성되지 않았고 기반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무작정 일을 벌일 수 없어 참는 것뿐이다. 셋째 어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두 번은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으으···.”

호충의 살기에 눌린 호란은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서기만 할 뿐이다.

“대답!!!”

호충이 버럭 지르는 호통에 호란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어, 어.”

호충은 꺼낸 회칼을 다시 칼집에 꼽아 품에 넣으며 호란을 지나쳤다.

“다음에 오시려거든 진검을 챙겨오세요. 기꺼이 상대해드리겠습니다.”

“······.”

호란은 목검을 든 손을 벌벌 떨며 다시는 호충을 찾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쁜 새끼.’

그렇다고 앙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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