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인(浪人) 파월랑
***
“요즘 화용루 근처에 진가장의 무사들이 자주 지나다녀요. 조심하셔야 해요.”
“그래 나도 들었다.”
“진가장에서 저와 공자님의 관계를 알면···.”
“알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너는 내 것이고 나 또한 네 것이니라.”
“아아. 공자님.”
“설마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 어차피 나는 내놓은 자식이다.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
자신이 기녀와 만난다고 해도 진가장에서 말릴 사람은 없었다.
‘말리면 어쩔 건데?’
말린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진가장에 미련이 없으니, 뛰쳐나오면 될 일이다.
“저는 공자님밖에 없사와요.”
“나 또한 그러하다.”
과거에도 호충은 술집 여인과 사랑에 빠졌었고, 그녀와 살림을 차렸다. 얼마 후에 죽음을 맞이했기에 결혼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직업의 귀천은 호충에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공자님.”
“화진.”
젊은 남녀의 뜨거운 밤은 그날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
둘째 호중은 손에든 종이를 쥐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왜 넷째가 내게 오기 전에 이 글자를 호현에게 보냈을까.’
호중이 들고 있는 종이엔 매화(梅花)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첫째의 여동 중에 하나를 매수했기에 송 영감이 호현에게 전한 종이를 입수한 것이다. 시일이 걸려 입수하긴 했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매화(梅花)는 자장(子張)에 지천으로 피어있지만, 화산을 의미하기도 하지.’
게다가 호현에게 막내 호충이 화산으로 간다는 말도 들었기에 매화(梅花)는 화산을 의미한다고 봐야 했다.
‘분명 화산과의 친분이 전부가 아니었을 거야. 뭔가 다른 목적이 더 있을지도···.’
문제는 자신이 불렀을 때 이 글을 호현에게 보냈다는 데 있었다. 이 글을 받은 호현은 막내에게 뭔가를 물어보기도 전에 자신의 거처를 방문했고 덕분에 막내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보내야 했다. 호현이 묻지도 않은 막내의 일을 떠벌린 것도 의심할 일이었다.
“풋. 식충이 같은 그 녀석이 중요한 일을?”
하지만 호충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의심을 부질없게 만들었다.
“녀석은 자신이 화산에 간다는 것을 말해도 되는지를 물으려 했음이야. 암호랍시고 이렇게 짧게 중요한 글을 썼겠지. 소심한 녀석.”
녀석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다 한들 설명해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만 같아도 녀석에게 비밀을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녀석은 겁이 많아 비밀을 지키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녀석의 나약한 심성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맞아 떨어졌다.
“괜히 아까운 심력만 낭비했어.”
꾸깃.
매화(梅花)가 적힌 종이는 호중의 손에 구겨져 버려졌다. 그 종이는 호중이 거처에서 나가고 한참이 지난 다음 누군가의 손에 다시 들렸다. 그녀는 호중의 여동 중 하나였다. 주위를 살핀 그녀는 구겨진 종이를 자신의 품에 넣었다. 그리고 그 종이는 손에 손을 거쳐 원래의 주인인 호현에게 다시 전해졌다.
호현도 호중의 시종 하나를 매수한 것이다.
***
호현은 총관이 전해준 구겨진 종이를 받고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간자가 있었군.’
호현은 밖에서 시립하고 있을 여동들을 떠올렸다. 호현은 눈앞에 허리를 숙이고 명령을 기다리는 총관에게 일렀다.
“총관은 호중에게 붙어먹고 있는 년을 찾아라. 이 종이는 내가 보고 버린 것인데 호중의 거처에서 다시 발견되었구나.”
“감히······. 찾아내 엄벌하고 다시는 자장(子張)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만들겠습니다.”
호현은 총관의 말을 들으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지금 찍어낼 필요가 없다. 간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활용하면 될 일.’
“아니다. 녀석은 내가 녀석의 간자가 있다는 걸 모르니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총관은 간자가 누군지만 알아내라. 그년에겐 절대로 네가 안다는 것을 드러내지 마라.”
“현명하십니다. 공자님.”
“녀석은 하늘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구나. 크흐흐.”
첫째 호현과 둘째 호중의 머리싸움은 물밑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호현은 둘째 호중을 발아래 두었다고 여기며 다음 사안으로 넘어갔다.
“그나저나 막내는 여전한가?”
“···예. 요즘도 무사들이 녀석이 화용루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보고합니다.”
둘째 호중의 기루출입을 막으려고 보냈던 무사들이 엉뚱한 녀석을 감시하고 있었다.
“둘째를 막았더니 이번엔 막내가 말썽이로군.”
“그래도 남들과 마주하지 않으려 뒷문으로만 드나든다고 합니다. 덕분에 자장에 소문이 돌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둘째보단 생각이 깊어서 다행이야.”
‘녀석. 이래서 화산에 가는 것을 미뤄 달라 했구나.’
호충이 화산에 가는 것을 미룬 것이 여인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어찌 하올까요.”
“마음 같아선 둘째도 놔두고 싶었지만, 나중에 가주께서 동생들을 챙기지 않았다 하실까 싶어 경고를 남겼을 뿐이다. 막내는 내가 막지 않아도 뭐라 하지 않으실 테니 상관없지.”
어차피 집안에서 힘도 없는 녀석이었다. 괜히 쟁쟁한 무림 방파 집안의 여식이라도 만난다면 그 것이 더 큰일이다. 차라리 기녀에게 빠져 기루에 들락거리는 지금이 호현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럼 화용루를 감시하는 무사들은 철수토록 하겠습니다.”
“그리하게.”
***
호현과 함께했던 총관은 본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가 보고할 서류를 다시 챙겨 가주전으로 갔다. 가주전에는 자신보다 부총관이 먼저 와 있었다.
둘은 잠시 눈을 마주쳤고 총관은 얼른 가주에게 인사를 올렸다.
“가주님. 총관 사마충이 인사 올립니다.”
“어서 오게. 여기 염태중 부총관이 먼저 보고하고 있었으니 잠시 기다리시게.”
“예. 가주님.”
부총관 염태중은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총관을 두고도 가감 없이 보고했다.
“둘째 공자는 외가에 다녀오신 뒤로 기루 출입을 멈췄고, 이는 호현 공자님의 경고 덕분입니다.”
“다행이로군.”
“또한 여전히 첫째 공자의 신변과 주변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번에 시종을 통해 첫째 공자가 받은 서찰을 입수하기도 하였으나, 막내 공자와 관련된 것을 아시고 무시하셨습니다.”
“둘째도 나름 능력이 있지만, 첫째에게 너무 경쟁심을 가졌어.”
부총관 염태중은 숨겨야할 말까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었고, 이를 듣고 있는 총관 사마충도 당연하다는 태도로 듣고 있었다.
“총관.”
“예. 가주님.”
“첫째도 둘째를 경쟁상대로 보고 있나?”
“예. 가주님. 첫째 공자도 둘째 공자의 시종을 통해 다시 자신의 서찰을 입수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시종 중에 간자가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이를 활용하여 거짓 정보를 흘릴 계획입니다.”
총관도 첫째 호현과 나눴던 비밀스러운 대화를 모두 가주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이는 첫째 호현과 둘째 호중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총관과 부총관이 가주를 주군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총관과 부총관은 첫째와 둘째를 모시는 척하며 오직 가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녀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 위험이 없지.’
가주 진원우는 전대 가주인 아버지처럼 일찍 원로원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오래도록 가주위에 머물며 진가장을 이끌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자식들도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게 감시하는 것이다.
‘제일 위험한 것은 첫째와 둘째야.’
“하여간 첫째는 머리가 좋아.”
“언제나 깊이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내는 분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일은 있는가?”
부총관 염태중은 입을 다물었고 총관 사마충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둘째 공자가 기루에 가는 것은 막았으나, 넷째 공자가 기루에 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공자는 막내 공자가 기루에 가는 것은 가주님도 용인하실 터이니 막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넷째가? 훗. 이제 저도 사내라 이건가?”
가주 진원우도 호충의 기루 출입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 자식들과 마찬가지이유였다.
‘어차피 화산으로 보낼 녀석이고 진가장에 위협이 될 것도 없는 녀석이지.’
부총관 염태중을 통해 둘째가 막내에게 흉수를 보냈다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모른 척 지나간 사람이다. 진원우는 호충에게 일말의 정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은 뭘 하든 내버려둬.”
“예. 가주님.”
지금 그 녀석은 세상에서 숨겨진 신공(神功)을 연마하고 있었다.
***
호충은 평소처럼 늦은 저녁 화용루로 향했는데, 입구를 지키는 흑패가 없었다.
‘뭐지?’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호충은 잠시 밖에서 고민하다가 뒷문이 아닌 정문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어요. 공자님.”
“밖에 지키던 무사는 왜 보이지 않습니까.”
“아까 다른 무사가 와서 급하게 와서 따라갔는데···. 무슨 일인지는 저도 모르지요.”
“고맙소.”
‘흑패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
호충은 조만간 황궁 비고(祕庫)로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기에 자신이 자리를 비운 때를 걱정하고 있었다.
‘흑패를 접수하고 너무 조용했지. 제 때 나오는 월봉으로 좋았던 것도 잠시고.’
사중환을 통해 자신의 무력을 보여주긴 했으나, 이후 이렇다 할 일이 없어서 무난하게 흑패를 운영하고 있었다. 조직원들을 결속시키려면 외부의 공격에 대항에 자신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적당한 문제면 좋겠군.’
화용루에서 생긴 문제가 아니니 홍루 혹은 도박장일 것이다.
호충의 발걸음은 근처에 있는 홍루로 먼저 향했다.
‘여기로군.’
다행히 도박장까지는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홍루 밖에 흑패의 조직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
흑패의 조직원 하나가 호충을 알아봤고, 그들은 조용히 길을 텄다.
호충은 그들에게 눈으로 인사하고 홍루 안으로 들어섰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누군지 알아! 엉?!”
안에서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고함이 있어 방향을 잡기도 어렵지 않았다.
호충은 근처로 가서 홍루의 기녀 하나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흑패의 조직원 하나가 낭패를 당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호충은 소리치는 거한을 어쩌지 못하고 주변에 포진한 조직원 하나를 잡아끌어 구석으로 갔다.
“무슨 일이냐.”
“아! 공자님. 저 자는 낭인(浪人) 고수인 파월랑이라 하온데, 홍루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다하여 저희가 왔습니다.”
“······.”
녀석을 보아하니 고작 이류급 무인에 불과했다.
‘잘 쳐줘야 일류?’
“철필 형님께서 곧 오기로 했는데···.”
“기녀들 데리고 나가고 구경꾼도 물려라.”
“예. 공자님.”
“그리고 녀석이 관(官)과 관련되진 않았느냐.”
관인(官人) 임을 묻는 것이 아니다. 낭인(浪人)이라 했으니 관(官)에서 수배중인 자가 아닌지를 묻는 것이다. 흑패 조직원은 호충의 물음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관(官)에 현상금이 붙긴 했을 것이옵니다. 다른 지역에서 양민을 죽이는 바람에 이곳으로 왔다고 들었습니다.”
“큭. 잘 됐구나.”
파월랑 녀석은 건달패 녀석들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정리하는 모습에 오히려 흐뭇한 얼굴이었다.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았느냐. 어서 기녀를 데려오고 술을 더 가져와!!!”
호충은 구경꾼과 기녀가 사라지고 흑패 몇 명 만 남았을 때 앞으로 나섰다.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를 부리느냐.”
“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홍루에 출입하다니, 세상 말세로구나.”
호충은 녀석의 말에 기분이 언짢지도 않았다. 어리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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