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32)

전사경(纏絲勁)

***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를 부리느냐.”

“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홍루에 출입하다니, 세상 말세로구나.”

“여기가 진가장이 있는 자장(子張)이라는 것을 아느냐.”

“큭큭. 진가장에서 홍루에서 일어난 일에 신경이나 쓸까? 진가장의 이름으로 나를 겁박하려 해도 소용없지. 너는 내가 어리숙해 보이더냐? 가서 자장의 흑패주나 데려와라.”

파월랑은 홍루가 진가장이 아닌 흑패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사전에 파악하고 마음 편히 행패를 부린 것이다.

“이번 기회에 여기 자리 잡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하하하.”

호충은 팔을 축 늘어트리고 파월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녀석이 호충을 불렀기 때문이다.

‘흑패의 기강을 잡아두기 위해서라도 날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이 천재일우의 기회로군.’

“왔다.”

“내가 너를 어쩌지 않을 것 같더냐? 거리 개념이 없는 걸 보니 너는 무림인도 아니구나. 큭큭.”

“···흑패주 오라며?”

“뭐?”

파월랑은 술잔에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옆으로 다가온 호충을 올려다봤다.

“내가 자장의 흑패주 번권이다.”

“풉. 푸하하하.”

탕탕.

파월랑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커다란 팔로 탁자를 두드리며 웃었다.

“어린놈이 미치기까지 했구나. 너희는 애새끼가 여기 들어올 때까지 뭘 했느냐! 내가 흑패를 접수하면 너희 썩어빠진 정신머리부터 뜯어고쳐야겠구나.”

“술은 마저 먹는 것이 좋겠다.”

“큭큭. 그야 당연하지.”

파월랑은 하얀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크흐. 이제 매일 예쁜 기녀와 좋은 술을 맛보겠구나.”

호충은 자신이 왜 술을 마시라 했는지도 묻지 않는 녀석에게 친절하게 설명했다.

“방금 네가 마신 술이 이승에서 마신 마지막 술이다. 네 제사를 지내줄 놈도 없을 터이니 저승에서도 술맛은 보기 힘들 것이다.”

“야! 아직도 애새끼 안 데려 가냐?!”

호충은 자신의 뒤를 향해 소리치는 파월랑과 오래 대화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녀석을 죽일 마음이었기에 자신이 흑패주라 밝히기도 했다.

“일어나.”

“···또 피를 보고 싶진 않았거늘.”

파월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호충은 한걸음 더 다가갔다.

‘나는 피가 보고 싶다.’

호충의 허리가 살짝 숙여졌고, 양쪽 다리가 넓게 벌려졌으며. 팔꿈치가 뒤로 당겨졌다.

자신을 경시하는 상대만큼 상대하기 쉬운 적은 없었다.

‘전사경(纏絲勁)’

뒤로 당겨진 호충의 주먹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나선형의 힘이 축적되어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 무흔(無痕)으로 쌓은 내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슈우욱.

“크하하.”

파월랑은 여전히 호충을 경시하며 하늘을 보고 웃고 있었지만, 곁눈질로 호충의 권을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낭인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경계심이다.

“애송이가 감히···.”

그리고 손바닥을 들어 호충의 주먹이 향하는 곳을 막았다.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퍼억. 우드득.

“윽!”

파월랑의 팔이 비틀어지며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사이 호충의 나머지 팔이 뻗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전사경(纏絲勁)이 가미된 주먹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파월랑은 이번 주먹을 막을 수 없었다. 나선형으로 뻗어나가는 호충의 주먹은 고스란히 녀석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퍼억.

“꺼헉.”

녀석의 앞섶이 회오리 모양으로 구겨져 있었고, 호충의 주먹에 담긴 내공은 파월랑의 가슴을 통과해 등까지 닿았다. 겉으론 크게 표가나지 않았지만, 내부 장기가 으스러진 상태였다. 숨겨진 호충의 내공이 이류를 넘어 일류를 내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이류 끝자락에 불과한 파월랑은 정식으로 대결해도 호충의 무위를 뛰어 넘을 수 없었는데, 방심까지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털썩.

“꺼억. 꺽.”

주먹 하나로 거한을 무릎 꿇린 호충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겨우 이따위 녀석에게 당한단 말이냐!!”

호기롭게 소리쳤지만, 오늘 상대가 이류에 불과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만약 진신 내력을 감춘 일류 고수였다면 호충이 크게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패주.”

“패, 패주?”

무릎을 꿇고 호충을 올려다보는 파월랑의 말이었다.

호충은 차가운 눈으로 파월랑을 내려다보며 품에서 회칼을 꺼냈다.

“내가 흑패주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내 부하들뿐이다.”

“자, 잠깐.”

“하지만 너는 내 부하가 아니지. 그러니 어찌 되겠느냐.”

슈각. 투둥.

“아악!”

깔끔하게 휘둘러진 호충의 회칼은 앞을 막은 녀석의 손목을 잘랐고, 이어서 다시 휘둘러졌다.

한쪽 손은 잘리고 한쪽 팔은 부러져 쓸 수 없는 녀석이다. 이제 녀석은 호충의 칼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스걱. 촤아악.

회칼이 향한 곳은 녀석의 목이었다. 반쯤 베어진 목을 본 호충은 한 번 더 칼을 휘둘러 목을 떼어냈다.

퉁. 퉁.

파월랑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고, 녀석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호충은 솟아올랐다가 떨어지는 핏방울을 그대로 맞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녀석의 수급을 들고 관(官)에 가서 현상금을 받아라. 죽여도 받을 수 있다지?”

“···으으. 예, 예.”

눈앞에서 사람 목이 잘리는 것을 봤으니 두려울 법도 했다. 게다가 사람을 죽여 놓고 태평하게 현상금을 받아오라 명령하지 않는가.

“새로운 의복을 가져와라. 녀석의 피로 더럽혀졌구나.”

녀석을 죽여 흑패의 기강을 잡았으니 이걸로 외유를 떠날 준비는 끝이었다.

“이, 이게······.”

마지막 순간에야 도착한 사중환은 피를 뒤집어 쓴 호충의 모습에 기겁했다.

“늦었구나. 철필.”

“···죄송합니다. 공자님.”

“홍루의 기녀들이 놀랄 수 있으니 녀석의 시체를 보이지 않게 해라. 네가 맡아서 정리해. 갈아입을 의복은 빨리 가져오고.”

“예, 예.”

흑패의 조직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움직였다. 자신들을 이끄는 호충은 상상 이상으로 잔인하고 높은 무공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잠식하고 있었다.

‘우리가 흑패가 아니었다면···.’

파월랑이 흑패주의 정체를 알았다는 이유로 목이 잘렸다. 자신들은 오직 흑패의 조직원이라 살아남은 것이다.

흑패의 기강을 다지려고 했던 일은 이후 흑패의 영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번 일로 주변 홍루들 대부분이 흑패의 보호를 받길 원하게 됐기 때문이다. 기녀에게 시체를 보이지 말라 했지만, 쉬이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주변의 기루는 무림인이 행패를 부렸음에도 오히려 무림인의 목을 자른 흑패의 저력에 굳은 믿음을 갖기 시작했다.

“철필 대협. 이것 좀 드셔보셔요.”

“어허. 뭘 이런 걸 다.”

“저를 구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은혜를 모르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허허. 고맙소.”

홍루의 기녀들은 외부에 흑패주로 알려진 사중환에게 음식을 싸다주기도 했고, 홍루의 주인들도 저마다 사중환을 찾아와 선물을 안겨주곤 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요. 철필 대협.”

“허허허. 그야 물론이오.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시오.”

재주는 호충이 부렸지만, 명예와 돈은 사중환이 챙기는 모양새다.

그래봤자 음식을 제외한 대부분 선물은 흑패의 정점에선 호충에게로 돌아왔다.

‘이걸 그대로 꿀꺽했다간 나도 목이 남아나질 않을 거야.’

사중환의 뇌리엔 무림인의 목을 자르고 피를 뒤집어 쓴 호충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쓰윽.

사중환은 시시때때로 자신의 뒷목을 쓰다듬게 됐다.

‘난 녀석처럼 목이 잘리고 싶지 않아.’

***

호충은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오며 진가장의 무사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이류는 여기 이렇게 많은데···.’

호충은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진가장에 소속된 무사들을 보고 있었다. 열을 맞춰 지나가는 그들을 보는 호충의 눈은 그들의 겉이 아닌 속을 보고 있음이다.

‘앞에선 저 녀석은 일류에 발을 걸쳤기에 무사들의 장이 된 것이고···.’

호충은 최근 삼성(三成)에 오른 무흔(無痕)을 통해 무사들의 내공을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인들이 쌓은 내공의 크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나머지는 이류중반 혹은 끝자락.’

황궁의 무림 핍박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무사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진가장의 무사들 중에 삼류무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고수라 할 만한 일류 무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죽은 파월랑은 특수한 경우라고 봐야 했다. 그 정도 무위를 갖췄으면 어딜 가서도 대우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더러운 성격 때문에 한 곳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이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

무사들 사이로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이삼이라는 무사는 확실히 일류 수준에 오른 검사였다.

다른 무사들이 그를 대하는 모습을 봐도 그가 무사들 중에 가장 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주의 호위가 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 모양이네.’

진 가주의 호위는 이삼을 제외하고 둘이 더 있다고 들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쉽게 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마주한 가주 진원우의 내공은 절정에 돌입해 있었다.

‘뭘 믿고 내공을 쌓았지?’

그간 무림의 일에 귀를 열고 산 덕분에 진 가주가 어째서 중년의 나이에 가주로 올라설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공력이 쌓여 일 갑자 이상이 되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밀약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 것이다. 진 가주는 계속 지금과 같이 내공을 쌓으면 얼마 안 있어 원로원에 들어가 무림의 일에 관여할 수 없게 된다. 진가장의 원로원을 포함해 모든 세가의 원로들과 문파의 원로들은 대부분 절정 이상의 무인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무림에 드러날 일이 없으니 외부에서 고수라고 할 만한 절정 무인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호현은 방법이 있다고 했던가···.’

상승 무공을 걱정하는 자신에게 첫째 호현이 했던 말이 고스란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사안은 모용세가에서 해결할 것이다.]

‘그 요망한 녀석이 방법이 있다 했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모용세가가 황궁과 끈을 만들어 두었을 수도 있지.’

또한 내공이 절정이라 해도 밖으로 드러내지만 않으면 황궁이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황궁엔 무흔(無痕)이 존재하지 않아.’

남의 내공 수위를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황궁의 군졸들이 아무리 무림을 감시해도 가만히 자리만 보전하는 무림인들의 내공 수위를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절정 이상의 내공을 쌓고 무학을 깊이 연마한 원로들은 알아 볼 수도 있을 거야.’

자신처럼 무흔(無痕)을 알지 못해도 자연적으로 상대의 내공을 인식하는 경지에 오른 무인이 없겠는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황궁에 나이 많은 무사가 있다면 내공이 발각될 가능성이 존재했다. 무흔(無痕)을 변형해야 할 필요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호충은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무사들을 일별하고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곧 떠날 시간이야.’

이제 비고로 가야할 때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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