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32)

허(許) 하노라

***

‘곧 떠날 시간이야.’

이제 비고로 가야할 때가 됐다.

언제나 함께하는 양의(兩意)는 육성(六成)에 도달했고, 무흔(無痕)은 삼성(三成), 경신(輕身)도 삼성(三成)을 달성했다. 대부분의 무공이 초반에 익히기 쉽다고 해도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양의(兩意)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

과거 황궁의 무사들은 새롭게 창안한 무공을 쉬이 익힐 수 있도록 각 요결마다 주해를 세세하게 달아두었다. 호충은 그 덕분에 골머리 아프지 않고 무공을 익힐 수 있었고, 여기에 양의(兩意)가 더해져 가속도가 붙었다.

‘두 달이 지나면 봄이다. 그 전에 비고(祕庫)에 다녀와서 흑패를 단련시켜야 해.’

새해가 밝았으나 섬서의 겨울은 혹독하고 길었다. 아직 봄이 오려면 시간이 있었다.

‘여기서 비고(祕庫)까지 천리 길이라 가는 데만 한 세월이겠어.’

그나마 섬서와 붙어 있는 녕하인데도 이렇게 멀다. 황궁의 비고(祕庫)는 섬서 근방인 녕하에에 있었다. 괜히 외팔이 검객이 이쪽으로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비고로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비고에서 조금 떨어진 섬서를 도주 목적지로 잡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 덕분에 호충은 비고를 차지하게 되었다.

‘비고(祕庫)는 녕하와 감숙 사이에 있으니 감숙을 가로질러 녕하로 넘어가는 편이 빠르지. 게다가 경신(輕身)을 익히기도 했고···.’

호충이 계획을 정리하는 사이 벌써 자신의 거주지에 도착해 있었다.

송 영감은 언제나처럼 호충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추운데 왜 나와 있어? 뜨신 방에서 기다리면 내가 어련히 문안 인사를 올릴 터인데.”

“천한 종복에게 문안 인사라니요.”

“어서 들어가자. 손이 얼음장이네.”

호충은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꽁꽁 언 송 영감의 손을 잡아 방으로 이끌었다.

‘혼자 밖으로 나가는 것은 가주가 허락하지 않을 터. 송 영감과 밖으로 나가되 중간에 잠시 떨어져야겠군.’

비고(祕庫)를 숨기기도 해야 했고, 경신(輕身)으로 빠르게 가자면 발이 느린 송 영감이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호충은 송 영감을 위해서도 좋은 무공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주안술(朱顔術)이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나이가 먹어 골골거리는 송 영감에게 젊음을 되찾아주는 무공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 전에 공력이라도 좀 나눠줘야겠어.’

무흔(無痕)은 내공을 감추는 공능과 내공을 쌓는 공능이 있다 했다. 쌓은 내공을 감추자면 내공의 수발이 숨 쉬듯이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삼성(三成)에 오른 무흔(無痕)이라도 조금의 내공을 전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내공을 전해도 무흔(無痕)을 통해 내공을 쌓으면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영감. 이리 와봐. 내가 어깨 좀 주물러 줄게.”

“도련님. 주인이 종복의 몸을 주무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있을 예정임.”

“자, 잠깐. 도련님. 이러지 마십시오.”

호충은 만류하는 송 영감을 힘으로 제압해 바닥에 눕혔다.

그간의 단련으로 아귀힘이 세진 호충은 바닥에 엎드린 송 영감의 목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힘차게 안마를 시작했다.

“어이구구. 어구구.”

호충은 손아귀에 느껴지는 송 영감의 몸에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몸에 뼈 밖에 안 남았네. 밥은 제때 먹고 있는 거야?”

“있으면 먹고 없으면 마는 거지요. 종복이 끼니를 다 챙겨먹으면 그게 이상한 겁니다.”

“······앞으론 나 먹을 때 같이 먹어.”

항상 송 영감이 자신의 끼니를 챙겼지 송 영감의 끼니는 챙겨줄 생각도 못했다. 알아서 잘 먹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했다. 호충은 진가장에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다. 그런 호충의 종복인 송 영감이 누구의 배려를 받아봤겠는가.

호충은 자신의 정심한 내공이 송 영감의 몸에 스며들도록 더욱 정성껏 안마했다. 평소 화용루에서 화진의 몸을 주무르며 숙달한 안마를 여기서 써먹고 있었다.

‘오래오래 살아. 영감.’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진가장의 핏줄보다 송 영감이 더 중요했다.

‘내가 고수가 되어서 영감 호강 시켜줄게.’

한국에 살았던 때에도 자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사회에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송 영감과 자신의 인연은 아직 한 해도 채 되지 않았지만, 과거의 기억까지 더하면 평생이나 다름없는 인연이었다. 호충은 송 영감에게 부친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우아. 몸에 열이 후끈 올라옵니다요.”

송 영감이 호충의 안마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는 말이었다.

‘내공 안마의 효과가 좋은 모양이네.’

호충은 공들여 안마한 효과가 좋아 내심 만족스러웠다.

“오늘은 따뜻한 집에서 푹 쉬고 밥도 잘 챙겨먹자.”

“그럼 다시 밖에 안 나가십니까?”

매일 저녁 늦게 들어오기에 하는 말이다.

“화용루는 나중에 가지 뭐.”

“도련님. 기녀에게 마음을 주시는 것은···.”

송 영감도 호충을 지극히 아끼고 있기에 기녀들과 자주 만나 술을 마시는 호충이 걱정스러웠다. 이러다가 적당한 혼처는 고사하고 기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생기지 않았겠는가.

“홍루의 기녀도 아니고 청루의 기녀야. 그리고 사람이 하는 일에 귀천이 어디 있겠어?”

“허어. 벌써 마음이 기우셨군요.”

“흐흐. 남아대장부에게 삼처사첩(三妻四妾)은 흉이 아니라잖아. 내가 일편단심이라도 할까봐 걱정이야?”

자신밖에 없다는 화진의 말에 철석같이 자신도 그렇다고 대답한 놈의 말이었다.

“아이고 두(頭)야.”

“헤헤. 올해 내 나이가 겨우 열일곱이야. 아직 청춘이 팔팔한데 여기서 끝낼 순 없지.”

겉보기엔 이미 다 컸지만, 여전히 십대인 호충이다. 그런 녀석이 기루에 들락거리며 하는 말에 송 영감은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가자. 나랑 같이 뜨신 밥 먹고 푹 쉬자.”

“대체 서책은 언제 보십니까요. 요즘 통 자리에 붙어있질 않으십니다.”

“관직은 포기야. 가주님과 첫째 형님이 이제 나보고 무공을 배우라고 하셨어.”

“···어이쿠. 어찌 그런 결정을···.”

가주가 결정한 일이라면 진가장의 누구라도 법처럼 따라야 했다.

“영감은 걱정하지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꼭 가주님의 마음을 돌리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도련님이 관을 쓴 모습을 뵙고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눈을 안 감으면 되겠네. 나랑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에효.”

“얼른 가자. 늦으면 숙수가 밥을 안줄지도 몰라.”

“···가겠습니다. 예.”

걱정 많은 노인과 해맑은 청년이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

황궁 비고(祕庫)로 갈 준비를 마친 호충은 외유 허락을 위해 가주전에 기별했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가주전에 들 수 있었다.

“소자. 가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강녕하셨사옵니까.”

“네가 어인 일이냐.”

호충이 평소 이렇게 접견을 요청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소자 호충 올해로 열일곱이 되었습니다. 허나 이 나이까지 진가장에만 머물며 서책을 읽어 세상 경험이 일천합니다.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화산으로 가야할 터이니 그 전에 진가장 밖의 세상을 잠시라도 보고자 하옵니다.”

“허 하노라.”

“······.”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허락이다. 호충은 간단하게 답하고 다시 할일을 하는 가주에게 입을 열었다. 호충이 허락을 구할 것은 또 있었기 때문이다.

“하옵고···.”

“뭐든 허(許) 하노라.”

“···그럼 진가장의 무기고에서 제 몸을 보호할 몇 가지 무구만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총관에게 여비를 받기도 해야 하고···.”

“마음대로 하여라.”

가주는 여전히 호충에게 작은 관심도 없었다. 고개를 들지도 않고 손등을 휘젓는 진원우를 보며 호충은 불만을 속으로만 삼켜야 했다.

‘이럴 거였으면 어제 접견을 허락해도 됐잖아?’

호충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조용히 읍하며 가주전을 빠져나왔다.

‘썩을 놈. 애비라는 놈이 자식에겐 관심도 없어.’

혹시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나 심각하게 고민했던 자신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

호충을 향한 무관심은 가주를 보고난 다음 총관 사마충을 만나서도 계속되었다.

“외유를 나가신다고요? 가고 싶으면 가셔야죠.”

“가주께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무기고에서 무기를 반출하는 것과 여비를 받는 것까지 말입니다.”

“예. 그리하시지요.”

“······.”

어디로 가는지, 뭘 하러 가는지도 묻지 않는다.

“여비나 넉넉하게 책정해주십시오.”

“그리하지요. 첫째 공자님이 막내 공자님이 하는 일은 전폭적으로 지지하라 하셨거든요.”

“······.”

이제 호충도 진가장이 어찌 돌아가는지 대강 눈치 채고 있었다.

총관 사마충은 첫째 호현의 수족이었고, 부총관 염태중은 둘째 호중의 수족이었다. 셋째 호성의 경우 중부전장의 금력을 활용해 진가장의 무사들을 회유하는 중이었다.

‘호현이 저런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내게 좋은 말을 해서 환심을 사라 했겠지.’

앞으로 화산에서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길 바라며 지시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는 형님이 저를 챙겨주실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총관님.”

“다만 봄이 오기 전까지는 돌아오셔야 합니다.”

“예. 사마 총관님.”

‘네가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것이다.’

“여비는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무기고에 출입하려면 이 허가증이 필요하니 가져가세요.”

“예······.”

호충은 총관에게 받은 여비 주머니와 허가증을 들고 진가장의 무기고로 갔다.

“사 공자님. 여긴 무기고입니다만···.”

글월이나 읽는 문사가 올 곳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밖에 나갈 일이 있어 무기 몇 가지를 골라가겠다. 여기 사마충 총관님의 허가증이 있다.”

“확인했습니다. 그럼 무기고를 열어드리지요.”

끼이익.

진가장의 무기고는 갖가지 무기로 가득했다.

‘···괜히 황궁이 무림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지.’

사병과 금력을 가진 지방의 호족이 바로 무림 방파였다. 황궁에서 이들을 전부 내치지 못하고 불가침을 허락한 것도 이러한 사병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진가장만 해도 이러하니 다른 무림 방파들을 모두 더하면 황궁도 위험할 수 있었다. 지금의 황궁 또한 지방 호족들과 무림 방파가 결합해 전 황궁을 무너트리고 세우지 않았겠는가. 무기고의 무기들이 상승 무공을 익힌 무림들 손에 쥐어지면 더욱 위험했을 것이나, 지금까지 상승 무공을 익힌 무림인을 척살하였기에 무림과 황궁의 공존이 가능했을 것이다.

“오래 열어둘 수 없으니 얼른 챙겨서 나오십시오. 공자님.”

무사도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만약 첫째와 둘째가 왔다면 무사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촉하지 않아도 그리 할 것이다.”

호충은 안으로 들어가 진열된 검(劍)과 도(刀)를 보며 눈을 빛냈다.

‘대부분이 상등품이로군.’

도검류는 일반 무사들이 사용하는 것과 관리자급 무사들이 사용할 것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한 눈에 무기의 품질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자장(子張)에서 이름난 대장간으로부터 납품을 받은 것들이라 일반 무사들이 사용할 도검류도 훌륭한 품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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